REVIEW
CLASSICAL MUSIC
에드워드 가드너/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협연 손열음
가을 들녘에 부는 따스한 바람 같은
10월 14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멘델스존 ‘바다의 고요함과 즐거운 항해’에서 오르간처럼 일관된 현과 관이 귀에 먼저 들어왔다. 에드워드 가드너(1974~)가 지휘하는 런던필의 중음역대는 부드러웠다. 지속되는 바이올린의 고음이 귀에 들어왔고, 약간 과잉이다 싶을 정도로 저음이 흘러넘쳤다. 플루트의 굵고도 청아한 노래가 부각됐다. 빠르고 격렬해지는 악구에서도 총주는 산뜻했다. 밝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따스한 미풍이 부는 투명한 바다를 그려냈다. 트럼펫을 위시한 금관은 상쾌하고 유연하게 울렸다.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다.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육중한 트롬본으로 시작됐다. 첫 세 음을 가볍게 시작한 손열음(1986~)은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구분 짓기 시작했다. 힘을 강조하기보다 음 하나하나를 부각했다.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숨어있는 특유의 프레이징에서 여유가 감지됐다.
더블베이스의 중저음이 고급스럽게 다가왔다. 플루트의 노래가 돋보였다. 곡을 충분히 음미하는 런던필의 반주 위에 손열음의 피아노는 사색적이었다. 빠른 속도감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결이 쫀쫀했다. 빠른 악구에서는 속도를 높여 넉넉하게 처리했다. 1악장 피날레에도 속도를 높이지는 않았지만, 음의 정보량이 풍부했다. 안정감과 도발적인 휘발성이 양면에 걸친 연주였다. 2악장도 스타카토처럼 또박또박한 타건에 서정적인 감정처리가 돋보였고, 3악장 속주에서도 자연스럽게 질주한 손열음은 기교적인 패시지에서 긴장감을 높이며 열정적으로 마무리했다.
앙코르는 차이콥스키의 ‘감상적인 왈츠’였다. 바이올린 연주로 많이 들었던 곡이지만, 손열음의 피아노는 담담하면서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낙차가 컸다.
브람스 교향곡 2번은 휴식 같은 도입부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합주의 기운에도 여운이 느껴졌다. 런던필의 연주는 밝고 짙은 유화물감 같은 질감에 둥글고 따스한 마감으로 다가왔다. 여기서도 플루트를 위시한 목관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호른은 온기와 더불어 깊이를 더해주었다. 만들어내는 소리라기보다는 원래 가지고 있던 ‘천성’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밝고 명료한 소리가 모여 더 두껍고 따스한 음의 덩어리로 변했다. 2악장에서 첼로 선율이 두드러졌고, 호른과 다른 악기가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호른·트롬본·목관과 현·더블베이스가 나올 때마다 탁월한 음색을 뽐냈다. 장엄함과 격렬함, 그리고 느슨함의 사이를 오가는 유연성도 돋보였다. 3악장에서 오보에와 플루트가 내는 목가적인 선율의 음색이 빛났다. 밝고 경쾌한 총주에 이어 브람스 교향곡마다 존재하는 ‘에피파니(Epiphany,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의 순간들이 지나갔다. 4악장은 깊고 부드럽게 시작했다. 경쾌한 춤곡 같은 진행 속에서 클라리넷과 플루트가 출중히 노래했다. 바람 부는 가을 들녘이 연상됐다. 순수하고 무구한 사운드의 방해받지 않은 질주가 이어졌다.
앙코르는 그리그 ‘페르귄트’ 모음곡 중 ‘오제의 죽음’이었다. 가드너는 현악 군을 자랑하듯 피아니시모에서 풍성함의 차이를 펼쳐 보였다. 조용히 귀 기울이는 관객들의 에너지가 객석에서 무대로 고요하게 수렴되는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빈체로
켄 코완 오르간 독주회
치밀하고 성의 있는 구성
10월 14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거대한 규모, 압도하는 음량, 광활한 음역, 수많은 음색 등 오르간은 그 어떤 악기보다도 월등하고 포괄적이다. 관현악에 빗댄 ‘심포닉 오르간’이라는 전통은 19세기에 만들어져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롯데콘서트홀에 설치된 리거(Rieger) 오르간은 극대화된 음향의 세계를 매년 유감없이 들려주고 있다. 올해 두 번째 오르간 시리즈의 주인공은 캐나다 출신의 켄 코완(1974~)으로, 고전부터 최근까지의 다양한 스타일을 섭렵할 뿐만 아니라, 관현악곡을 직접 편곡하며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다.
첫 곡은 오르간 심포니의 시작점에 있는 비도르의 오르간 교향곡 5번 중 1악장이었다. 유명한 5악장 ‘토카타’가 아닌 1악장을 선택한 것은 굳어진 틀에 갇히기보다는 오르간의 소리에 오롯이 집중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읽혔다. 코완은 극적이면서도 과장되지 않게 관객의 감성적 호응을 조절했다. 다음 곡은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로, 코완이 직접 편곡했다. 화려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지만, 관현악의 호흡과 보잉을 표현하기 어려운 오르간의 특성 탓에 관현악의 평면적 투영에 가까웠다. 반면, 음의 밀도가 높아지며 긴박감을 창출한 마지막 부분은 편곡의 좋은 예로 보인다. 엘가의 오르간 소나타 G장조 중 3·4악장에서는 돋보이는 성부의 짜임새, 단순한 선율의 점진적인 발전 등 오르간 음악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1부 마지막 곡인 이아인 패링턴(1977~)의 ‘라이브 와이어’는 바로크와 재즈 밴드의 양식을 결합하여, 오히려 하몬드 오르간(대중음악에 주로 쓰인 오르간)을 확장한 듯한 반전 매력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화려한 발 건반과 음량을 조절하는 스웰 페달 연주로, 유서 깊은 악기로부터 신선한 즐거움을 들려주었다.
2부는 오르간 음악의 고전인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BWV548로 시작했다. 스톱을 정석적으로 조합해 만든 오르간 플레눔(프린치팔·옥타브·믹스쳐)은 바흐 음악의 경이를 자아냈다. 라셸 로랭(1961~2023)의 ‘대림절을 위한 교향시’는 그레고리오 성가에서 유래한 옛 선율과 자유로운 화성, 신비로운 음향적 구성으로 성탄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야기하듯 표현했으며, 군나르 이덴스탐(1961~)의 ‘대성당 음악’ 중 스케르초는 리드미컬하면서 감각적인 화성을 통해 극적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마지막 곡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중 전주곡의 워렌·르메어 편곡 버전으로, 앞서 언급한 편곡의 문제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손발을 광폭으로 움직이며 오르간만이 들려줄 수 있는 넓은 음역과 거대한 음량으로 압도했다.
앙코르는 두 곡으로, 조지 탈벤볼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마지막 변주 외에는 모두 발 건반으로만 연주하는 초월적 기교를 보여주었으며, 엘가의 ‘님로드’는 오르간다운 편곡이었다.
코완은 다양한 곡으로 폭넓은 이해력과 해석력, 그리고 범접하기 어려운 테크닉과 표현력을 보여주었으며, 오늘날 악기로서의 생동감과 뒷모습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까지 갖추어 음악회를 치밀하고 성의 있게 구성했다. 심지어 모든 곡을 암보로 연주하며 첫 내한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자화상’을 완성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롯데문화재단
DANCE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룸 위드 어 뷰’
무너진 곳에서 얻은 자유의 미학
11월 16·17일 국립극장 해오름

(라)오흐드(예술 콘셉트), 론(음악), (라)오흐드의 마린 브루티·조나단 드브루워·아르튀르 하렐(연출·안무), 마르세유 국립 발레
부서지다만 하얀 바위가 무대 좌측에 거대하게 자리했다. 바위 중간, 작은 방처럼 뚫린 직사각형의 공간에서 공연은 시작된다. 전자음악 프로듀서이자 공연의 DJ 론(1980~)이 등장하고, 마르세유 발레 무용수들은 클럽에 온 듯 몸을 흔든다. 작은 방을 벗어나는 몇몇 무용수들은 더 정적이고 얼핏 발레에 가까운 몸짓으로 짝지어 춤을 춘다.
성별에 구분 없이 짝을 이뤄 춤을 추던 무용수들의 몸짓은 이내 폭력적으로 변한다. 바위 위의 한 쌍은 분명 살인과 성폭행을 묘사한다. 점차 뚜렷해지는 가해자와 피해자. 그러나 이내 피해자가 가해자를 돌로 내리찍어 벌하여 승기를 들자, 바위 아래 나체의 피해자들도 함께 손을 들어 화답한다. 마침내 붕괴하는 거대한 바위. 체제 전복에 승리해 낸 듯한 이들은 마치 극의 2막을 맞이한 것처럼 거침없는 해방감을 표출한다. 그 저항 속 20여 명의 무용수들은 하나의 무리이자, 공동체다.
이들이 이뤄낸 ‘붕괴’의 정체는 무엇일까. 3명의 예술가가 함께 구성한 콜렉티브 ‘(라)오흐드’는 이 이야기가 “수천 개위 층위로 해석되길” 바랐다. 그러니 첫 균열은 이 작품을 만든 창작 집단 (라)오흐드에서부터 시작된다. 마린 브루티·조나단 드브루베르·아르튀르 하렐으로 구성된 (라)오흐드에서 무용을 전공한 이는 아르튀르 뿐. 학창 시절에 만난 이들은 ‘무리’를 뜻하는 여성형 명사 ‘la horde’에서 여성형을 규정하는 ‘la’를 괄호 안에 넣으며 단체명을 지었다. 무용과 시각 예술, 영상을 접목한 공연을 만들어 왔으며, 팝 가수 샘 스미스의 ‘Unholy’의 안무를 맡는 등 장르와 방식도 흔쾌히 넘나든다. (라)오흐드가 2019년부터 마르세유 발레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마르세유 발레는 창단(1972) 당시 전후의 실존주의 발레 작품으로 파격을 이끌었던 롤랑 프티의 실험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게 됐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전복은 전막 공연과 같았던 이 발레단의 음악을 책임진 전자 음악이다. 공연 내내 론은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음악을 믹싱한다. 비트를 바꾸는 그의 미세한 손짓에 따라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바뀌며 응축된 집단의 힘이 객석에 강하게 전달된다. 음향적 효과와 층위도 오케스트라의 그것 못지않았다. 그 모습은 가히 그를 ‘21세기 발레 음악의 지휘자’로 연상할 만했다. 복잡하게 얽힌 기계들을 지휘한 그의 실황은 확실히 무대를 장악했다.
무엇보다, ‘룸 위드 어 뷰’가 보여주는 안무는 직관적이다. 하나의 이야기 흐름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가 쉽다는 점에서, 관객은 고전 전막 발레 감상법을 그대로 적용하는 데에 이질감이 없을 정도. 작품에 대해 “움직임이 너무 추상적이지 않게, 서사 속에 닻을 내리게 하고 싶었다. 그 서사는 허구적인 이야기라기보다, 일련의 사고 과정을 거쳐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한 ‘성찰의 체계’에 가깝다”는 (라)오흐드의 언급대로, 예술적 권위 없이 작품과 관객은 수평적 관계를 맺는다. 이들의 붕괴가 선사한 것은 작품의 마지막이 주장한 혁명적 저항보단, 오히려 편안하고 즐거운 감상으로의 자유였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10월 16일 개막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는 11월 9일까지 이어진다. 연극 ‘세 번째 전쟁’(11.1·2), 무용 ‘카르카사’(11.1·2), 연극 ‘마일스톤: 삶의 이정표’(11.6·7), 무용 ‘900 며칠, 20세기의 기억’(11.7·8) 등이 공연될 예정.
MUSICAL
뮤지컬 ‘타조 소년들’
뮤지컬도 ‘타조’가 될 수 있다
9월 4일~11월 23일 대학로 TOM(티오엠) 1관

키스 그레이(원작), 칼 밀러(극작), 성종완(각색·작사·연출), 김은영(작곡·음악감독)/ 홍승안·박두호·정지우(로스), 박정원·김서환·곽민수(블레이크), 신준석·신은호·류동휘(케니), 김준식·조민호·김경록(심)
소설이나 희곡을 각색한 뮤지컬은 원작에 비해 이야기가 단순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원작의 주제와 은유는 사라지고 납작해진 줄거리만 남는다는 말이다. 마냥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대로 수긍하기도 어렵다. 장르마다 이야기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이 쉽게 간과되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라도 희곡·뮤지컬·소설에서 각각 다를 수 있고,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다. 그게 바로 장르의 개성이자 매력일 테니까. 그렇다면 물어야 할 것은 ‘왜 이야기가 달라졌느냐’가 아니다. ‘뮤지컬답게 만들어졌느냐’가 관건이다.
‘타조 소년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데, 2016년 국립극단의 공연(연출 토니 그래함)으로 선보인 작품은 완성도 높은 청소년극으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죽은 친구의 장례식을 치러주기 위해 길을 떠나는 소년들의 이야기로 뮤지컬과 잘 어울리지 않는가. 추억이 있고, 여행이 있으며,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 무엇보다 노래가 필요한 순간이 많다.
그 순간을 위해 뮤지컬은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른 선택을 했다. 작품의 화자를 친구 블레이크가 아닌, 죽은 로스로 설정한 것이다. 이 설정이 가져오는 차이는 꽤 크다. 로스가 그토록 가보고 싶어 했던, 그와 이름이 같은 스코틀랜드의 ‘로스’ 마을을 찾아가는 소년들의 여정은 우정에 얽힌 죄책을 스스로 마주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그들의 우정 자체에 더 관심을 쏟는다. 마치 로스가 친구들과 함께 여행하는 것처럼 그들의 여정은 밝고 따뜻하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노래한다.
뮤지컬은 희곡과는 확연히 다른 온도로 소설의 이야기를 해석했다. 중요한 것은 뮤지컬이 이 이야기를 ‘뮤지컬답게’ 구현하고 있는지였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뮤지컬이어야 하는 이유를 가장 모호하게 만드는 지점이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음악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부터 분명하지 않다. 서사적 거리감을 의도한 것도 아니고, 우정과 죄책의 마음에 공감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이미 풍부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음악은 이를 담아내지 못한다.
쓰임새와 만듦새 곳곳에서 음악은 자주 안이함을 드러낸다. 희곡에서조차 록이 등장하는 순간은 말하지 않는 인물의 내면이 폭발할 때인데, 이 작품에서는 록이 그저 ‘소년들의 에너지’라는 피상적 이미지에 머무른다. 소설적 설명이든, 내면의 감정이든,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관객을 설득하기에는 음악의 호흡이 짧다.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이 음악의 가장 큰 문제다. 단순한 듯해도 더 따뜻해진 이야기를 전달하지 못한 책임의 큰 몫은 음악에 있다.
더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이 꽤 근사한 뮤지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넘버로 비어있는 이야기를 메우는 여타 창작 뮤지컬과 달리, ‘타조 소년들’의 이야기는 이미 꽉 차 있고, 음악의 타이밍이 남발되지 않는다. 드문 미덕이다. 이야기만큼이나 꽉 찬 에너지로 두 시간 내내 관객을 몰입시키는 네 명의 캐릭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뮤지컬 초심자를 극장으로 초대할 수 있을 만큼 대중성을 갖춘 작품이다.
그러니 부디 ‘음악의 힘’이라는 뮤지컬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주길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모래에 고개를 처박은 타조와 다르지 않다. 고개를 들면 비로소 달릴 수 있다. 이 작품이 거침없이 달려나가길 기대한다.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사진 (주)뉴프로덕션
ARTs MArket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 ‘빌의 44번째 생일’ 외
‘관계’를 잇는 예술의 현장
9월 24~28일 부산시민회관 외
올해로 3회째를 맞은 부산국제공연예술마켓(BPAM)은 국내외 예술단체의 해외 진출 기회를 넓히고, 공연예술 관계자 간 교류의 장을 마련하며, 시민이 함께 즐기는 축제형 예술마켓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올해는 ‘공연예술의 새로운 물결’이라는 슬로건 아래, 공식 초청작인 ‘BPAM 초이스’ 4편과 쇼케이스 22편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축제 기간 동안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민회관, 해운대문화회관 등 주요 공연장은 새로운 실험과 만남의 장으로 활기를 띠었다. 그중 9월 27일 상연된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관계’라는 주제를 탐색하며, 현대사회 속 인간의 고립과 연결의 의미를 성찰하게 했다.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선보인 ‘빌의 44번째 생일’(9.27·28)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인형극 아티스트 도로시 제임스와 앤디 맨저크의 협업작이다. 창작 인형과 공중 장치, 케이크로 꾸며진 무대 위에서 약 50분간 무언으로 진행되는 인형극은, ‘빌’이라는 중년 남성의 외로움과 상상을 따뜻하게 그린다. 고지식하고 어딘가 서툰 빌은 파티 모자와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금세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인형과 배우의 몸이 하나로 결합된 독특한 구조는 시각적 재미를 더하며, 그의 외로움과 상상의 세계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빌은 아무도 오지 않는 생일 파티를 준비하며 고군분투한다. 공연 내내 흐르는 재즈풍의 음악과 부드러운 조명 아래, 관객은 빌의 상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간다. 당근 스틱으로 만든 작은 친구, 얼굴이 그려진 풍선 등 평범한 소품들이 하나둘 생명을 얻어 파티의 손님으로 변모하는 장면은 기묘하면서도 유쾌하다.
해운대문화회관 고운홀에서는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청소년 극장의 ‘아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침묵 속에 식탁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극 이보르 마르티니치, 연출 알렉산다르 슈바비치/9.26·27)가 상연됐다. 크로아티아어로 진행되는 극은 환경과 경제가 모두 붕괴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정부가 각 가정에 “어떤 아이를 살릴 것인가”라는 질문지를 보내며 시작된다. 부모가 장남이 아닌, 집안의 문제아 막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가족 구성원 내에 억눌렸던 감정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오른다.
공연은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가사의 노래로 시작한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을 연기하는 네 배우가 경쾌한 리듬 속에서 죽음을 노래하는 이 장면은 작품 전체의 정서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막내아들은 무대에 등장하지 않지만,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언급된다. 무대에는 작은 주방과 식탁, 오래된 TV가 놓여 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조명이 일상의 공간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작품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에게 기대고 상처를 주는 과정을 통해 현실의 가족을 비춘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헌신하지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자녀에게 의지하고, 자녀는 독립을 추구하면서도 부모의 기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과 책임, 죄책감과 연민이 뒤엉킨 관계의 복잡성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형식을 취하면서도 인간 내면의 외로움과 관계의 연결성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전자가 타인과의 단절 속에서 관계를 복원하는 이야기라면, 후자는 가족이라는 가장 밀접한 관계의 균열을 다룬다. 부산공연예술제가 예술을 매개로 세계 곳곳의 창작자와 관객을 잇듯, 두 작품 또한 고립된 인간을 다시 ‘관계’의 장으로 끌어올렸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BP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