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THE STAGE ➊ A DUO IN MOTION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 & 피아니스트 문지영 리사이틀 11.2·6
단단하고 침착하게 쌓아올린 활의 여제
스타 듀오의 서막을 예견하는 리사이틀, 그 후 베를린으로 직행한 이지윤 인터뷰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11.2)
고아한 드레스를 입은 두 음악가는 입·퇴장에서도 두 손을 꼭 맞잡고 짧은 대화를 나누며 첫 듀오 무대를 여유롭게 맞았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듀오 기념 무대에 오른 듯 자연스럽게 음악을 이끌고, 필요할 땐 기민하게 주도권을 주고받았다. 두 연주자의 합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지난 2년간 교향곡·협주곡을 비롯한 수차례 연주를 통해 브람스와 밀착해 온 이지윤(1992~), 지난해 금호아트홀에서 브람스 소나타 전곡을 탐구한 문지영(1995~). 둘의 인연은 작년 4월, 스페인 라코루냐의 카스트로 극장에서 연주한 리사이틀에서 시작됐다.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처음 순간부터 이미 준비된 결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이지윤은 “지영 씨는 소리의 질감과 섬세한 움직임을 귀하게 다룹니다. 프레이즈의 빌드업이나 음악의 큰 구조를 보다가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그가 종종 채워주곤 하죠. 성향의 차이가 오히려 빈 공간을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느낌이고, 그 대비 덕분에 함께 만드는 음악이 입체적으로 살아나죠”라고 설명했다.
짧지만 굵은 인연은 지난 11월 2일 서울, 6일 진주에서 열린 브람스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로 확장됐다. 합이 아직 여물지 않은 듀오 연주에서는 종종 각자의 악구를 드러내려는 솔로의 본능이 튀어나오곤 하지만, 이날 연주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브람스의 풍부한 선율을 살리되, 과도한 몰입과 격정을 경계한 절제된 해석이 일관되게 이어졌다. 화려한 피날레의 잔향 대신 잠잠하고 묵직한 여운을 한아름 관객에게 안겨주겠다는 일념 아래, 연주 프로그램 또한 브람스 소나타 2-3-1번 순으로 구성되어 알찼다.
특히 소나타 3번 연주 시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의 무대 장치 일부가 피아노 옆 지점에 낙하하는 돌발 상황이 있었다. 충격 진동이 울린 직후에도 이들의 템포와 흐름은 흔들림 없이 이어졌고, 이는 리사이틀의 밀도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앙코르는 브람스 스케르초와 슈베르트 D574. 이지윤은 이날의 앙코르가 앞으로의 행보를 향한 분명한 시그널이었다고 밝힌다.
“다음은 단연코 슈베르트. 그 조용하지만 깊게 스미는 슈베르트의 음악 언어를 지영 씨와 같이 탐구하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연주 앙코르로 슈베르트의 작품을 연주했었죠. 다음 연주의 티저라고나 할까요?”
연주가 끝난 후,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베를린으로 직행한 이지윤에게 깊은 이야기를 청했다.
이지윤이 그리는 음악의 결
며칠간 브람스에 푹 빠져 있다가 바삐 베를린으로 갔더군요.
네, 마음이 살짝 허전합니다. 그간 밀린 오페라 하우스 출근도장 찍기 바쁜 일상이에요. 한국의 가을은 참 따뜻하고 좋았는데 베를린은 벌써 쓸쓸한 겨울이 찾아왔어요.
리사이틀에서 감정의 절제와 몰입이 돋보였습니다. 무대 위에서 감정을 쏟는 것과 다스림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는 편인가요?
제게 연주란 차갑고 뜨거운 온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이에요. 너무 계산적이면 감동이 없고, 감정만 앞서면 음악의 형태가 흐트러지죠. 무대 위에서는 현의 떨림, 활의 촉감, 울림이 홀에 퍼지는 속도까지 오롯이 느끼며 감각이 극대화되는데, 순간 필요한 건 신체적, 정신적 컨트롤이 만나는 교차점을 정확히 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016년 닐센 콩쿠르 이후, 촉망받던 솔리스트로 활동하다 2017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끌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 입단했죠. 폭넓은 음악 세계를 구축하는 오케스트라의 활동은 솔리스트 연주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소리에 대한 감각이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극장에서는 성악가들의 호흡과 발성을 아주 가까이서 듣게 되는데, 덕분에 소리의 질감·선명도·방향을 더 세심하게 조절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죠. 오케스트라에서는 고전에서 현대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접하게 되고, 특히 바그너처럼 텍스처가 두껍고 음향 구조가 복잡한 작품은 제 소리가 어디서 스며들고 어디서 존재감을 가져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어요. 솔리스트로서 연주할 때도 악보를 공부하며 받는 자극과 해석의 폭이 이전보다 훨씬 풍부해졌으니까요.
악장은 지휘자와 단원 사이의 가교이자, 리더고 동료이기도 하죠. 그 경계 속에서 중요히 여기는 태도나 소통 방식은 무엇인가요?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제일 중요합니다. 리더가 조금만 흔들려도 단원들은 눈치가 빨라서 그 기류를 바로 느끼거든요.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딱딱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유연함이 있어야 소통이 잘 돼요. 지휘자와 단원 사이에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적당한 센스와 가벼운 농담 한마디가 분위기를 훨씬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요. 약간 고무줄같이 탱탱하지만 유연한, 그래서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는 리더십이 중요하죠.
항상 단단하고 안정된 에티튜드가 놀랍기도 합니다. 사심을 보태보자면, 멋지기도 하고요. 무엇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고 하나요?
가족, 친구 그리고 동료들이요. 스트레스 레벨이 비교적 높은 연주자의 일상에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안정된 정서를 유지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죠. 누구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느냐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2025/26 시즌 준비 중인 작품들이 궁금합니다. 내년 7월에는 아지즈 쇼하키모프/서울시향과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이지요.
아쉽게도 2026년 상반기에는 유럽에 머물게 될 것 같아요. 7월에 서울시향과 드보르자크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한국 무대에 다시 설 예정입니다. 이 협주곡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고,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연주해 온 레퍼토리라 더욱 애정이 갑니다. 서울시향과는 오랜만의 무대라 벌써 기대가 큽니다.
마지막으로, 베를린에서 즐겨 찾는 나만의 아지트를 공개한다면?
베를린 미테구에 위치한 로젠탈러플라츠 근처 카페와 공원에 가요. 그중에서도 레스토랑 ‘보르샤르트’에 가주 가는데요, 슈타츠오퍼 근처라 오페라 마치고 저녁을 먹거나 와인 한잔하기 딱 좋은 곳이에요.
글 유내리 기자 사진 마스트미디어
이지윤(1992~)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최초 동양인 여성 종신악장으로 재임 중이다. 칼 닐센 바이올린 콩쿠르 등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국내외 오케스트라 협연자로 유수의 무대에서 활약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거쳐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에서 콜야 블라허를 사사했으며, 동대학원에서 제자를 양성하고 있다.
INSIDE THE STAGE ➋ CONTEMPORARY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주최 제3회 작곡가 아틀리에 11.5
4명의 젊은 작곡가가 선보인, 소리의 결실
한국 창작음악의 길 위로, 젊은 작곡가의 ‘땀’과 오케스트라 ‘지원’이 더해진 순간
오케스트라 리딩은 작곡가들의 골방에서 피어난 상상 속의 음표가 연주자를 만나 생명력을 부여받는 첫 순간이다. 단순히 악보를 훑어 골자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단원 즉 실연자들의 의견이 더해져 창작곡이 관객 앞에 오를 수 있도록 수정, 확장되는 공동 창작 행위다. 그런만큼 작곡가에겐 소중한 배움과 성장의 시간이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KNSO)는 2014년부터 상주작곡가 제도를, 2021년부터 차세대 작곡가 육성을 위한 ‘작곡가 아틀리에’를 추진해 왔다. 2021년에 임영진·전민재·전예은·위정윤·정현식의 1기부터 격년제로 시행되어 올해 3회를 맞았다.
올해 작곡가 아틀리에 대망의 마지막은, 11월 5일 부천아트센터(콘서트홀)에서 열린 작품 발표회였다. 강경묵·신동선·김신·그레이스 앤 리는 올 1월부터 10개월 간의 창작 과정을 거쳐 김택수(샌디에이고 주립대 교수), 전예은(2022/23 국립심포니 상주작곡가), 앤드루 노먼(USC 교수) 등으로부터 지도받으며 자신의 작품이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영광을 안았다. 정나라가 지휘한 이번 공연에는 강경묵의 ‘Reson-ant Current for Orchestra(울림의 흐름)’, 김신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시 ‘재버워키’, 신동선의 ‘탈피’, 그레이스 앤 리 ‘Tiger’s Pipe’, 여기에 미국 작곡가 아누 부타니의 ‘After the Frezze(얼어붙은 시간 너머)’가 연주되며, 한미 작곡가 교류의 의미도 더했다.
‘세계 통합 음악’과 한국 창작음악을 아우르다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정신, 기량, 내용이라면 곡의 노선에 따라 판가름이 나면 안 된다. ‘노선’이란 무엇인가? 작품이 탄생한 시대의 일시적 표징이다. 특정 유형이 창성해 완결에 이르면 고전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걸 추종하는 부류가 유행을 만든다. 작곡가가 한 명의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기예를 뽐내긴 어렵지 않다. 그래서 고금의 명작은 재주 대신 정신을 높이 샀다. 기예의 재능을 다스려 높은 계단에 이를 수 있도록 벼리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멘토가 있는 것인데, 멘토들 스스로가, 더 나아가 한국 창작 음악계에서 잘 알려진 생존 작곡가라 할 수 있는 진은숙까지 경도된 노선을 따르는 형국이다. 음향과 효과에 치우치고, 음색과 기술에 치중하면서 만들어진 음향의 시각적 효과로는 음악 자체의 내용적 서사보다 장르의 부속품으로 격하된다. 서사의 부재가 역력하다. 그러다 보니 장기간의 미적 혜안이나 숙고를 요하고, 지구력을 견뎌낸 고집의 소산들이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저서 ‘신음악의 철학’에서 쇤베르크와 ‘제2 빈악파’에 진정한 음악적 진보의 지위를 부여하며 무조음악의 반란으로 파괴된 전통에 기뻐했으나, 1956년, 즉 ‘신음악의 철학’이 나온 지 고작 7년 만에 이렇게 한탄했다.
“대부분의 젊은 12음 기법 작곡가들은 그다지 수준이 높지 않다. 쇤베르크 악파의 진정한 업적에 대해 잘 모르는 채 이 악파의 이론이 없는 그럴싸한 12음 규칙만 가지고 음렬을 이리저리 조합해서 조성의 대체품을 만드는 데에 만족했다. 제대로 작곡한다고 할 수 없었다. 이는 신음악 내부에서 전통이 사라지는 대단히 역설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음악이 그렇다. 20세기 후반까지 지배했던 무조음악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하는 동안, 과거의 전통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정도로 약화하면서 새로운 재료들에만 목매달고 있다. 필자는 요즘 기조를 ‘세계 통합 음악’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거칠 것 없는 크로스오버와 완전한 자의성이 지배하는 지금, 모든 분야에 포스트모던이라는 치트 키로 찬양받는 융합과 다원주의로 인해 ‘무엇이든 다 된다’라는 원칙 없는 원칙에 따라 가능한 모든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섞고, 인용하고, 가장하고, 패러디하고, 콜라주해 기계로 만들어낸다.
정작 과거의 재료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는 마당에 확대된 자유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자의성은 현대 문화에 깊숙이 침투해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다. 어쨌든 처음 듣거나 자세히 보면 모든 게 흥미롭다. 처음 보는 사람은 ‘피치카토’도 신기해하는 마당에, 세 명의 타악기 연주자가 양팔을 쭉 펴고 돌려대는 플라스틱 튜브(Whirly tube)는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이날 발표된 다섯 작품 모두 일관되게 충격이나 깊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매끄러운 소비와 의도적 의완, 다가옴으로 청중과 연주자들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소통을 꾀했다. 현대에 알맞은 지극히 똑똑한 접근 방식이다.
작곡가 육성에 앞장서는 교향악단과 공연장
이탈리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부소니는 “왜 독일 세금으로 하는 음악회에 독일 작곡가를 세우지 않느냐”라는 비난부터, “아무도 듣지 않는 일회성 작품에 예산만 낭비한다”라는 손가락질까지 감내하며 베를린에서 1902~1909년에 걸쳐 직접 기획한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12회 개최하며, 연주되는 일이 드문 신작을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발표된 작품의 주인공들은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헝가리의 버르토크 등이었다. 국립심포니 역시 음악의 근간인 연주자-작곡-지휘 세 분야의 미래 육성에도 앞장서며, 전문 오케스트라 연주자를 교육하는 ‘KNSO국제아카데미’, 작곡가 육성을 위한 ‘아틀리에’, 차세대 지휘자를 발굴하는 ‘KNSO국제지휘콩쿠르’ 등을 기획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될 게 아르코창작음악제의 창작곡 발표도 맡으며, 어찌 보면 눈앞에 보이는 이득도 없이 이어지는 강행군에서도 무소의 뿔처럼 걸어가는 묵묵함으로 ‘국립’이라는 타이틀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또한 누가 어디서, 어떻게 곡을 연주하냐에 따라 같은 작품의 평가가 천양지차다. 한국 클래식 음악의 메카로 부상하고 있는 부천아트센터에서의 공연은, 음악이라는 울림의 흐름이 최적의 지점을 찾는 장소다. 훌륭한 연주력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한국 최고의 클래식 음악 전문 홀에서 연주하는 초연 작품들이지만 한국 창작 음악계의 인사들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오늘날 작곡가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음악에 제일선으로 노출되지 못하고 외면당한,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부소니의 말을 인용하며 평을 마친다. “젊디젊은 청년들에게 외치노니, 더 쌓아 올리라! 그러나 더 이상은 잘난 척하는 실험이라든가 한 시즌 반짝하고 마는 성공의 영광에 만족하지 말라. 착실하고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작품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라. 앞을 바라보는 자만이 환한 눈빛으로 본다.”
글 성용원(작곡가) 사진 국립심포니
INSIDE THE STAGE ➌ LIVE ON STAGE
‘라이프 오브 파이’ 11.29~2026.3.2
퍼펫에 숨결을 불어넣는 마법
한국 초연을 앞두고, 퍼펫 디렉터 정명필에게 듣는 ‘리처드 파커’의 탄생 과정
푸른 조명이 바다처럼 번지는 무대 위에 거대한 호랑이의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까스로 들이켜는 숨, 어깨의 미세한 떨림, 꼬리의 균형이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를 넘어 관객의 호흡까지 바꿔놓는다.
전 세계를 사로잡은 베스트셀러이자, 아카데미 수상작 ‘라이프 오브 파이’가 오는 12월 GS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을 앞두고 있다. 이번 공연은 2021년 런던 웨스트엔드 초연 이후, 2022년 로런스 올리비에상 5개 부문을 휩쓴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연출을 그대로 옮기는 레플리카 방식으로 제작된다. 특유의 스펙터클과 퍼펫의 생명력이 한국 무대에서도 생생하게 되살아날 예정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져 잘 알려진 작품은 동물원 사장인 파이의 가족이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로 이민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파이와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만 구명보트에 남아 227일간 태평양에서 표류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작품에는 리처드 파커를 비롯해, 동물의 골격·근육·움직임을 기반으로 디자인된 정교한 퍼펫이 등장한다. 몸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퍼펫티어들은 각 캐릭터의 내면과 의도를 상상하며 숨결·근육의 떨림·긴장감을 온전히 무대 위에 구현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퍼펫이 생명처럼 느껴지기까지의 모든 움직임과 호흡을 설계하는 퍼펫 디렉터가 있다. 리처드 파커가 객석 앞으로 살아 움직이듯 다가오는 그 순간, 무대 뒤에서는 어떤 고민과 기술이 작동하고 있을까. 이번 공연의 국내 협력 무브먼트&퍼펫 디렉터를 맡은 정명필에게 직접 물었다.
무대가 구현하는 생명의 감각
먼저, 퍼펫 디렉터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배우의 신체 언어와 퍼펫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전체적인 움직임을 설계·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퍼펫티어의 리듬이 퍼펫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신체 리듬을 디자인하고, 배우와 퍼펫의 호흡이 하나로 맞물리도록 만드는 작업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세 명의 퍼펫티어가 함께 ‘리처드 파커’를 조종합니다. 세 사람의 움직임이 하나의 생명체로 느껴지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가요?
핵심은 ‘호흡의 리듬’과 ‘시선의 흐름’입니다. 머리·심장·다리를 맡은 퍼펫티어가 단순히 각자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호흡을 듣고 느끼며 “지금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지”를 예측해야 합니다. 한 명이 움직임을 시작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이어받죠. 그렇게 세 사람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도록 훈련합니다.
퍼펫이 ‘살아 있는 존재’처럼 보이기 위해 고민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퍼펫이 무대에서 살아있는 생명처럼 보이려면, 먼저 호흡이 설계돼야 해요. 그래서 연습도 항상 호흡의 리듬을 맞추는 것부터 시작하죠. 생각이나 무게 중심의 이동, 정지 후 남는 여운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숨결에서 시작돼요. 그리고 또 하나, 퍼펫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시선입니다. 관객은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 감정을 읽어내기 때문에, 머리를 맡은 퍼펫티어에게는 항상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왜 거기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시선의 의도가 호흡과 함께 몸 전체의 에너지로 흘러가야 퍼펫이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죠.
이번 공연에 오르는 리처드 파커 퍼펫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요?
호흡과 어깨의 떨림, 꼬리의 균형 변화까지 모두 실제 생명체처럼 느껴지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퍼펫티어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무게 중심과 관절의 저항감도 아주 정교하게 조정됐고요. 그래서 관객은 세 명의 연기자가 조종하는 인형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리처드 파커’라는 존재를 마주하게 됩니다.
관객은 무대 위 퍼펫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어느 순간 그것을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이런 순간을 만들기 위해 퍼펫티어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추구하는 건 그 인식을 넘어서는, ‘진짜 생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에요. 퍼펫티어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집중과 호흡의 일치입니다. 퍼펫과 내가 동시에 숨을 쉬고 있다는 감각이죠. 그래서 퍼펫티어는 자신을 조종자가 아니라 퍼펫과 감정을 나누는 동반자라고 생각하며 무대에 섭니다. 그 집중된 에너지가 퍼펫 안으로 스며들 때, 관객은 그 안에서 생명의 미세한 흔들림을 느낄 수 있어요.
배우와 퍼펫의 호흡은 어떻게 맞추나요?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의 일치감입니다. 퍼펫은 혼자 움직일 수 없고, 배우가 퍼펫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관객도 믿을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배우와 퍼펫티어가 동시에 숨 쉬는 연습부터 시작합니다. 그렇게 배우는 직접 조종하지 않아도 시선과 호흡만으로 퍼펫의 생명을 완성하는 ‘네 번째 퍼펫티어’가 됩니다. 배우가 리처드 파커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퍼펫 안에 생명이 깃들고, 퍼펫이 그 숨결에 반응하면서 교류가 일어나죠.
배우·퍼펫·관객 모두 한 호흡으로 숨 쉬다
작품의 원작 소설이나 영화에서 특히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었나요?
작은 구명보트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서로를 바라보던 장면이요. 소설에서 상상했던 긴장감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살아있어서 굉장히 인상적이었죠. 공연에서도 이 장면은 퍼펫티어들이 가장 많이 연습하는, 일종의 기준점 같은 장면이에요. 서로를 경계하면서도 의지해야 하는 그 미묘한 관계 감정을 무대 위에 온전히 담고 싶습니다.
무대만이 줄 수 있는 감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리처드 파커가 숨 쉬고, 파이가 그 숨결을 느끼는 찰나가 관객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난다는 점이에요. 소설은 파이의 내면을 언어로, 영화는 상상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죠. 하지만 공연은 배우·퍼펫·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현재형 경험’이에요. 관객이 바로 앞에서 보고 있다는 건, 말 그대로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과 같아요. 저는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디지털 시대에도 퍼펫이 여전히 존재감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퍼펫이 움직이는 순간엔 사람의 몸, 호흡, 온도가 직접 닿기 때문이에요. 디지털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생생함은 대체할 수 없습니다. 무대 위 퍼펫은 언제나 불완전한 생명체이고, 관객은 그 불완전함 속에서 더 큰 ‘살아있음’을 느끼죠. 퍼펫티어의 집중과 진심이 퍼펫에 생명을 불어넣고, 관객은 그 순간 살아있는 존재를 함께 만들고 있다는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관객이 퍼펫을 볼 때, 어떤 부분에 집중하면 좋을까요?
퍼펫은 혼자서는 절대 완성되지 않습니다. 퍼펫티어와 배우가 숨을 불어넣지만, 정말로 생명이 깨어나는 순간은 관객이 그 존재를 ‘믿어줄 때’예요. 관객의 시선이 퍼펫에 닿는 순간, 그때 비로소 퍼펫은 살아 움직입니다. 그게 바로 퍼펫의 마법이고요!
글 홍예원 기자 사진 에스앤코
PERFORMANCE INFORMATION
‘라이프 오브 파이’
11월 29일~2026년 3월 2일 GS아트센터
얀 마텔(원작), 로리타 챠크라바티(극작), 맥스 웹스터(연출), 핀 콜드웰(퍼펫 디자인, 무브먼트&퍼펫 디렉터), 박소영(국내 협력 연출), 정명필(국내 협력 무브먼트&퍼펫 디렉터)/박정민·박강현(파이), 서현철·황만익(아버지), 주아·송인성(엄마 외)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