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직접 찾은 지역의 예술 현장, 강릉·광주·경주·대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2월 15일 9:00 오전

ARTS ON FOOT

 

강릉·광주·경주·대구

기자들이 직접 찾은 지역의 예술 현장

 

올해 가을에도 공연의 무게추는 전국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릉의 하슬라국제예술제가 굳건한 터를 잡아가고 있었고,
광주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 10주년으로 도시 전체가 들썩였습니다.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대구는 오페라를 중심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주는 그 어디보다도 뜨거운 계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한국 공연예술의 변화를 확인하러 가보실까요?

 

01 강릉 | 하슬라국제예술제 _허서현

02 광주 |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개관 10주년 _홍예원

03 경주 | APEC과 함께한 문화 행사 _유내리

04 대구 | 대구 글로벌 오페라 마켓 _최성혁

 


 

1 강릉

 

하슬라국제예술제 10.18~26

2회차 맞은 신생 축제, 견고함 위에 화려함을 더하다

 

선우예권 피아노 독주회(강릉아트센터)

청량리역에서 고속열차로 1시간 30분. 교통의 발달로 강릉을 향하는 심리적 거리감이 한층 가볍다. 선선해진 날씨에 선뜻 여행을 나서는 기분으로 출발한 강릉. 올여름 지독한 가뭄을 겪고, 변덕스러운 장마를 겨우 지나고 있던 이곳에 지난해부터 터를 잡은 축제, 하슬라국제예술제가 열리고 있었다.

하슬라국제예술제는 올해 2회차를 맞은 ‘신생’ 지역 축제다. 강원도 출신의 피아니스트 조재혁이 강릉 거점 예술제의 예술감독으로 선봉에 서자, 영동권의 대표 공연장인 강릉아트센터가 널널한 터를 내주었다. 그렇게 강릉의 옛 이름, ‘하슬라’를 내걸고 다양한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축제가 시작된 것이다.

 

무대 위, 교차하는 아름다움

기자가 예술제를 찾은 것은 폐막을 하루 앞둔 10월 25일. 가을 저녁에 열리는 선우예권의 피아노 독주회였다. “눈으로 즐거움을 보고 마음으로 기쁨을 느낀다”는 사자성어 ‘상심열목’이 부제인 공연은 단순한 독주회가 아니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겹겹이 드리워진 반투명의 커튼 뒤로 조선화가 신윤복의 ‘미인도’가 긴 LED 화면에 자리하고 있다. 연출가 조영욱의 미디어 아트 전시작인 ‘미인도’를 공연장에 옮겨온 것으로, 살랑 부는 바람결에 여인의 저고리 고름이 언뜻 움직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우예권의 쇼팽 24개 전주곡 독주. 작품에서 이미지를 떠올린 듯한 역동적인 영상들이 커튼 위로 투사된다. 음향과 완벽히 결합한 영상은 아니었지만, 듣는 아름다움(쇼팽)과 보는 아름다움(미인도)이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감상의 만족도는 손쉽게 올라갔다.

이는 하슬라국제예술제의 지향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첫해부터 클래식 음악과 발레를 결합한 공연을 시도하더니, 올해는 미디어아트와 피아노 독주를 결합한 위의 공연을 비롯해 김광균의 시에 최우정이 곡을 붙인 음악극 ‘추일서정: 김광균’(10.21)을 초연으로 선보이며 그 도전을 확대했다. 배우 김미숙이 내레이션을 맡고, 성악가 사무엘 윤·이명주 등이 합세하며 라인업에도 힘을 줬다. 외에도 강릉에 있던 미디어아트 전시관 ‘아르떼뮤지엄 강릉’에서의 실내악 공연이 이어졌다.

 

예술의 시간을 믿고, 꾸준히!

‘추일서정: 김광균’

지방 축제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시간을 쌓아야 한다. 1년의 세월을 쌓고 돌아온 하슬라국제예술제는 지난해에 비해 한층 단단해진 라인업과 프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음악감독 김민)와 피아니스트 이경숙의 협연으로 굵직한 개막을 선보였고, 정민/강릉시향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1919년 버전)으로 축제의 마지막을 강렬히 장식했다.

예술제를 공동 주최하고 있는 강릉아트센터 심규만 관장 또한 “지난해에 비해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프로그램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며, “강릉아트센터를 찾는 평소 관객 추이를 볼 때, 앞으로 예술제가 꾸준히 알려진다면 더 많은 관객이 찾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축제의 위상을 높일 공연 외에 축제의 아기자기한 요소와 거점도 늘었다. 올해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것은 바로 어린이 공연 ‘어린이와 어른이:동물들이 말을 해요!’(10.19).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를 활용한 이 공연에 많은 어린이들이 찾았다. 강릉원주대학교 내에 있는 ‘하슬라홀’도 실내악의 새로운 거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자가 방문한 25일, 클래시칸 앙상블의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는데 현악 저음 악기의 울림이 인상 깊었다. 소규모의 앙상블이나 무반주 첼로 독주회에 안성맞춤인 공연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당성당에서 울려 퍼진 뷔에르 앙상블의 목관 5중주(10.23)도 장소와 음향이 어우러지는 축제의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강릉, 문화의 중심을 꿈꾸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강릉아트센터가 확장되고, 수준 높은 공연들이 연이어 열리는 동안 IOC 문화올림픽의 원칙에 따라 공연들이 무료였습니다. 그게 관객 개발에 주요 시작점이었죠. 강릉 시민들의 저녁에 ‘공연 관람’이라는 선택지가 생긴 겁니다. 지금까지도 공연만 열면 관객이 가득 차요.”(심규만)

인구 약 20만 명의 강릉시는 인근 원주시(약 36만)에 비하면 인구수는 작지만, 강릉아트센터라는 거점이 강릉을 영동권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강릉아트센터에서 공연이 열리면 속초와 원주, 동해에 거주하는 시민들까지 예상 관객 범위로 잡는다. 강원도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곳도 강릉시다. 시야를 넓혀 모든 가능성과 맞닿는다면 예술제에 잠재된 성장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볼 만하다.

예술감독 조재혁은 매 공연 시작 전, 직접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다. 올해의 주제에 맞게 “우리 연주자들에게 여러분은 ‘선물’같은 존재고, 그 감사함을 담아 우리의 음악을 ‘선물’로 돌려드린다”고 강조한 그는, ‘예술제를 내년에도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며, “하슬라국제예술제는 오랜 기간 지속할 수 있는 강릉의 예술제를 목표로 매년 나아갈 예정이다. 좋은 기획을 실현하고, 그 가치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음악가의 열정과 지역 공연장의 협업, 그리고 예술을 사랑하는 관객이 모여 강원 지역에 또 하나의 예술적 발아(發芽)가 시작됐다. 강릉이 품은 산과 호수, 그리고 바다까지 더 넓은 자연으로 예술의 싹이 적극적으로 퍼져나간다면 어떨까? 또 한 번의 푸른 성장을 꿈꾸며, 내년의 강릉을 기약해 본다. 세 번째 하슬라국제예술제는, ‘사랑과 우정’을 주제로 이어진다.

허서현 기자 사진 하슬라국제예술제

 


 

2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10주년 기념 공연 10.23~25

빛의 도시, 예술로 다시 깨어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10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노랗게 물든 남녘의 들판을 가로질러 광주로 향했다. 이곳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은 2015년 개관 이후 ‘아시아의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실험실’로서 수많은 도전과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그리고 올가을, 10주년을 맞은 ACC의 실험은 전통과 현대,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지는 한 편의 무대로 펼쳐졌다.

 

예술과 역사, 광주를 잇는 전당

먼저 ACC 복합전시1관에서 열리는 10주년 기념 국제 협력 전시 ‘봄의 선언’(9.5~2026.2.22)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ACC가 지난 1월부터 문화예술기관인 ‘홍콩 M+’, 독일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ZKM)와 협력해 준비해 온 프로젝트다. 기획의 출발점은 아시아의 민주와 평화 정신으로, 그 기반 위에서 동시대 사회가 직면한 기후 위기, 생태적 전환, 민주적 공존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예술의 언어로 탐구한다.

전시장 안에는 미디어아트·설치·영상·회화가 층층이 배치돼 있었다. 중앙에는 사라져 가는 마을 이야기를 담은 시각예술가그룹 ‘이끼바위루크크’의 설치 작품 ‘누가 마을을 잊었는가’가 자리했고, 한쪽 스크린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인 금남로 524m 구간을 영상으로 기록한 박경근의 ‘524m’가 재생되고 있었다. 작품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과 ‘지속’을 이야기하며, 단순히 국제 교류를 넘어 광주의 정신을 세계적 연대의 중심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전시의 주제를 드러냈다.

이는 ACC의 공간적 맥락과도 깊게 맞닿아 있다. 전시관을 나와 ACC 주변을 거닐다 보면, 이곳이 단순한 문화공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전일빌딩과 옛 전남도청 건물은 1980년 5월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로, 이곳에 ACC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과 기억, 현재와 역사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무대 위의 난장, 이야기 없는 이야기

저녁이 되자 ACC 예술극장 극장1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10월 23일부터 사흘간 열린 ‘시리렁 시리렁’(10.23~25)은 ACC 개관 10주년 기념 공연이자 ‘미디어 판소리극 다섯 마당’ 시리즈(‘드라곤 킹’(수궁가), ‘두 개의 눈’(심청가)) 중 세 번째 작품으로, 이번 공연을 위해 ‘범 내려온다’의 세 주역 양정웅(연출), 장영규(음악감독), 김보람(안무)이 다시 뭉쳤다.

공연이 시작되자, 짙은 베이스가 객석의 공기를 흔들었다. 전통 장단의 궤적 위로 전자음이 얹히고, 무용수들은 무대 전체를 질주한다. ‘흥보가’의 박 타는 대목에서 비롯된 이번 작품은 전통 판소리의 서사를 해체했다. 그러나 장면마다 드러나는 ‘흥보가’의 주제는 명확했다. 탐욕, 선의, 질투, 해학이 빛과 소리로 번쩍였다. 1집 ‘수궁가’(2020)에 이어 5년 만에 ‘흥보가’로 돌아온 이날치의 리듬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북과 베이스, 신시사이저, 그리고 소리꾼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판소리 고유의 운율을 현대적 질감으로 바꾸어냈다.

‘시리렁 시리렁’이라는 후렴이 반복될수록 무대는 여느 콘서트처럼 달궈지고, 객석도 하나의 장단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관객의 손뼉과 호흡이 공연의 일부가 되는 순간,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난장(亂場)의 리듬’이라는 부제가 실현됐다. 특히 이번 무대에서 주목할 점은 정밀한 음향 시스템과 조명, 아트디렉터 신호승의 무대디자인이었다. 빛은 장단에 맞춰 변하고, 무용수의 움직임은 영상의 흐름으로 이어지며 시각과 청각의 경계를 허물었다. 연출을 맡은 양정웅은 이번 무대를 “정해진 결말이 없는 열린 공연”이라고 설명했다. 관객이 각자의 리듬으로 해석하고 완성하는 무대, 그것이 바로 ‘시리렁 시리렁’이 제안하는 현대판 흥보가다.

 

ACC의 지난 10년, 앞으로의 10년

복합전시 3·4관에서는 연말까지 ‘2025 ACC 포커스-료지 이케다’(7.10~12.28)가 진행된다. 사운드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는 2015년 ACC 개관 당시 첫 융복합 창·제작 프로젝트의 하나로 각종 데이터를 흑백의 패턴과 정밀한 전자음으로 변환하는 거대한 설치 예술을 선보인 바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신작 4점을 포함해 총 7점의 작품을 공개한다. 거대한 흑백 패턴과 정밀한 전자음으로 구성된 공간 속에서, 관람객은 데이터가 시각과 음악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데이터가 곧 음악이 되고, 빛이 사운드로 번역되는 이케다의 세계는 ACC가 추구해 온 기술·예술 융합의 현재이자 미래를 상징한다.

10년 전, ACC는 ‘아시아 문화교류의 허브’를 표방하며 문을 열었다. 그 약속은 해마다 새로운 형태로 실험되어왔고, 10주년을 맞은 올해, 그 여정의 현재를 보여주었다. 이제 ACC는 또 다른 출발선 위에 서 있다. 예술이 기술을 만나고, 기억이 미래로 이어지는 ACC의 새로운 10년을 기대해 본다.

홍예원 기자 사진 ACC

 


 

3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전시·공연 10.31~11.1

고도(古都)에서 세계로, 경주의 두 번째 황금기

 

이십여 년 전, 희미하게나마 불국사와 석굴암을 둘러보던 기억을 더듬으며 기자는 경주행 우등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국인 중 경주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초등학교 6년 단체활동의 마지막 종착지이자 세대와 세대를 잇는 공동의 추억이 응축된 도시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 약 4시간 반을 달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이하 APEC)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천년의 고도, 경주를 마주했다.

 

모든 분야에서 신라의 빛을 발하다

총 90억 달러(한화 13조 원)의 기업 투자 유치. 전 세계의 시선이 쏠렸던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남긴 눈에 띄는 성과다. 10월 27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이번 정상회의는 외교·경제·사회·국방 등 다방면에서 결실을 맺었으며, 문화 또한 외교의 강한 동력으로 부상했음을 증명한 자리였다. 역대 APEC 사상 처음으로 ‘문화창조산업’이 공식 의제로 채택됐고, 디지털·AI 장관회의가 함께 열렸다. 3박 4일 동안 이어진 APEC CEO 포럼에는 세계 경제인 1,700여 명이 참여했으며 방탄소년단 RM이 기조연설자로 나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경주는 APEC 기간 내내 축제의 장이었다. ‘케데헌: 데몬 헌터스’를 비롯해 푸드·뷰티를 막론한 K-문화의 전 세계적 인기가 더해지며,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약 3만 명의 외국인 관람객들이 찾아왔고, 도시 곳곳에는 21개국 정상과 외교 사절단을 위한 문화외교 프로그램이 연이어 펼쳐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황금 문화를 상징하는 경주 고분 출토 금관 6점을 104년만에 한자리에 모아, ‘신라금관, 권력과 위신’(10.28~12.14)이라는 부제로 특별전을 열었다.

보문관광단지 인근 솔거미술관에서는 ‘신라 한향: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11.7~12.7) 특별전이 진행됐고, 지난 10월 29일에는 야경 명소인 월정교 수상 무대에서 한복 패션쇼가 개최되어 축제의 열기를 더했다. 신라의 천문대인 첨성대는 천문학과 황금문화를 결합한 미디어파사드(10.20~11.1)로 새 옷을 입었다. 은하수와 혜성이 외벽을 수놓으며 밤하늘과 유적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대표 야경 명소인 대릉원 일대에서는 ‘대릉원 국가유산 미디어아트’(10.24~11.16)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LED·모션캡처·AI 기술 등 영상 기법을 접목한 이머시브 전시로, 고분 사이를 거니는 것만으로도 마치 신라 시대로 거슬러 간 듯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중 APEC 공식 초청작으로 무대에 오른 무용극 ‘단심’이 기자의 눈길을 끌었다. 국립정동극장 30주년 기념작으로 올해 5월 초연된 ‘단심’은 서울 무대에 이어, APEC 정상회의 공식 문화 프로그램으로 경주 무대에 섰다.

 

세기를 넘어 깨어난 심청의 내면

‘단심’의 무대 위 LED가 만들어내는 하얀 파도는 마구 일렁거렸다. 그 위에 누운 심청의 내면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살고 싶은 욕망으로 뒤섞여 복잡하기만 하다. 무용극 ‘단심’은 ‘심청전’을 바탕으로, 효의 상징으로만 소비돼 온 심청의 이미지를 뒤집는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한 본질적인 갈등은 두 명의 심청으로 갈라져 무대에 등장한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끝까지 아버지를 걱정하는 ‘하얀 심청’과 자신의 생을 포기할 수 없는 ‘검은 심청’.

상반된 두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의 삶을 지탱하고, 세상을 연결하는 상징적인 소품인 ‘지팡이’로 한국무용 특유의 맛깔남을 살렸다. 지팡이를 빼앗아 운명에 저항하는 ‘검은 심청’과 곁에 남아 아버지를 지키는 ‘하얀 심청’이 고조되며 관객에게 희생과 저항, 효와 자아의 대비를 한눈에 각인시켰다.

각 막의 정서를 ‘공간’으로 형상화한 무대 연출도 돋보였다. 1막은 심청의 내면을 비추는 깊은 심연의 공간으로, 2막은 인당수 밑 몽환의 바다로, 3막은 기와지붕과 단청 문양으로 꾸민 궁중 건축 요소로 한국적인 전통미를 더했다.

전통연희를 바탕으로, 막 사이마다 판소리의 아니리를 도입해 청각적 리듬을 더했고, 각 막마다 형형색색의 색채감을 담은 한복으로 선의 자태를 뽐내며 시각적 연출을 가미시켰다.

경주의 공연은 서울 공연보다 출연진이 대폭 늘어나면서 장면의 규모를 한층 시원하고 역동적으로 넓혔고, 3막에 나오는 왕과 심청의 전통 혼례 복식을 재제작하며, 장면의 색감과 다채로운 리듬감으로 한국 전통의 미를 끌어올렸다.

 

가장 전통적인 것이 곧 세계적인 것

‘단심’의 정혜진 안무가는 작품을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감각의 무용극”이라고 정의하며, 그 핵심을 ‘효’라는 정서에서 찾았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은 세계 어디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효’를 사회적 주요 가치로 끌어올린 나라가 또 있을까요? 그 점에서 ‘심청’은 한국적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 예술적 메시지예요.”(정혜진)

서울시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뉴욕 링컨센터에 올린 ‘일무’로 매진사례를 만들었던 그는 “한국무용의 미감은 세계 무대에서도 충분히 통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회상하며 아울러 ‘단심’이 지닌 ‘예술의 외교력’을 내세웠다.

“정치나 경제가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영역이라면, 예술은 경계를 부드럽게 녹여주는 감성의 언어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서로 다른 배라면, 예술은 그 사이를 흐르는 물 같아요. 외교의 커다란 장인 APEC 속에서 ‘단심’은 한국의 정체성과 예술의 깊이를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전통에서 출발한 ‘단심’은 한국의 정체성을 예술로 번역하여 세계로 뻗어나가는 활로를 텄다. 문화의 깊이를 바탕으로, 더욱 단단히 세워질 예술을 기대한다.

유내리 기자 사진 경주 APEC·국립정동극장

 


 

4 대구

 

대구국제오페라축제 9.26~11.8

대구 글로벌 오페라 마켓 10.27

국내 오페라의 허브를 넘어 전 세계를 연결하다

 

국내에서 ‘가장 오페라에 진심인 도시’라는 물음에 대구만큼 적합한 답이 또 있을까? 대구오페라하우스(관장 정갑균)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과 함께 전국에 단 두 곳 뿐인 오페라 전문 극장이자, ‘전국 유일 오페라 제작 극장’이기도 하다. 지난 5년간의 프로그램만 돌아봐도 한국에서 두 번째 바그너 ‘링 사이클’(2022)을 선보였으며, R.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등 평소에 접하기 쉽지 않은 작품들을 꾸준히 올려 왔다.

올해 22회를 맞이한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는 ‘대구 글로벌 오페라 마켓’을 처음 선보였다. 이 행사는 오페라 산업의 국제 협업·공동제작·해외 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류 플랫폼으로, 대구가 한국의 오페라 허브를 넘어 아시아 오페라 시장을 선도하는 글로벌 거점 도시로의 도약을 꾀하는 첫 걸음이었다.

 

세계 오페라 현장지기들이 대구로

10월 27일 행사는 세계 오페라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포럼으로 시작하여, 전 세계 각국의 오페라와 관련한 동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국제음악콩쿠르연맹과 클랑포룸 빈의 대표 피터 폴 카인라트는 유명 성악 콩쿠르의 추세를 제시하며, 국적·인종의 제한 없이 ‘공정성’을 가져야 하는 미션을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코모 소치알레 극장-아슬리코 예술감독 바르바라 밍게티는 오페라 ‘교육’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어린 학생들과 오페라 가수들이 협업하는 코모 극장의 ‘오페라 도마니’ 프로그램을 예시로 들었다. 이 외에도 지역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파르테치파티베 오페라’, 물류창고와 같은 독특한 장소에서 오페라를 홍보하는 ‘베르디 SPIP’ 등 대중들과의 친숙한 접근을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오페라 전문 인력들을 연결하는 플랫폼 ‘오페라 유로파’의 MD 오드리 융헬스는 무료 동영상 플랫폼 ‘오페라비전’, 빠른 검색과 연결을 돕는 ‘오페라북’,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 비즈니스에 초점을 둔 ‘커리어 매니지먼트 코스’를 통해 신진 예술가들을 지원할 목표를 내비쳤다. 에스토니아의 에스티 콘세르트 대표 케르투 오로는 에스토니아 사아레마 오페라 축제를 통해 지역 브랜드 가치가 함께 상승한 사례를 언급하였다. 포럼 후에 마련된 축하 공연에서는 테너 김동녘과 소프라노 이윤경이 레하르의 오페레타 아리아를 부르며 현장의 분위기를 띄웠다.

다음으로 ‘대구국제오페라축제 특화 콘텐츠 개발을 위한 중장기 발전방안’을 주제로 오페라 평론가 손수연의 진행 하에 일문일답의 패널 토론이 진행되었다. 진행에 앞서 막간을 이용해 행사 참가자 중 흥미를 끄는 두 인물과의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내부의 눈으로 바라본 대구와 오페라

참여자들이 각각의 의견을 내는 가운데, 토론의 핵심이 되는 키워드는 ‘협력’에 있었다.

광주시립오페라단장 최철은 “대구와의 협력 덕에 제작과 인적 자원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며, 지역 주민들에게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영남오페라단장 이수경은 “민간 오페라단은 제작 환경에 어려움이 많은데, 극장과 민간단체가 상생하는 관계는 좋은 시너지를 부여한다”는 소감을 드러냈고, 대한민국오페라연합회 이사장 김수정은 “공공과 민간이 연합하여 오페라가 시민들의 삶과 함께 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대구의 브랜드 가치에 대한 의견도 이어졌다. 대구음악협회장 이상직은 “대구국제성악콩쿠르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대구의 브랜드가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고, 대구 사회문화연구원 연구실장 오동욱은 운영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등 ‘새로운 것’을 모색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한편, 국립극장장 박인건은 ‘관객 개발’을 언급하며 “일반 시민들이 오페라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서비스 개발 차원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글로벌’이라는 수식어의 성공적인 첫걸음

2부는 본격적인 ‘마켓’을 위한 레퍼토리 피칭으로 진행되었다. 해외 레퍼토리 피칭에서는 1부 포럼에서 등장했던 4인 외에도 이탈리아 페라라 시립극장 예술감독 마르첼로 코르비노, 이탈리아 질리오 푸치니 극장 관장 조르조 라자리니, 뉴오페라 싱가포르 CEO 겸 예술감독 정애리, 캐나다 런던 웨스턴 음대 학장 마이클 김이 참여하였다. 이후 국내 레퍼토리 피칭에는 대구오페라콰이어, 대구국제성악콩쿠르, 대구성악가협회, 부산콘서트홀, 광주시립오페라단,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순서를 이어나갔다. 피칭 이후 참가 기관과 인물들 간의 미팅이 이어지며 각종 언어로 떠들썩해진 현장은 그야말로 ‘글로벌’ 마켓이었다. 세계를 연결하는 오페라 허브로서의 성공적인 첫걸음을 뗀 대구가 ‘세계에서’ 가장 오페라에 진심인 도시로 도약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

 

 

INTERVIEW 1

 

코모 소치알레 극장-아슬리코 예술감독

바르바라 밍게티

이탈리아 코모 소치알레 극장은 현재 오페라 및 콘서트 협회 ‘아슬리코’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과 같이 오페라를 대중들에게 알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밍게티는 이번 행사에 대해 “한국에서 오페라에 이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앞으로는 ‘지역 사회’의 참여를 유도하는 프로젝트도 시작하였으면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Q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이 흥미롭다.

오페라의 대중성을 되살리고자 하는 목표였다.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탄생하여, 왕과 귀족뿐만이 아니라 평민 모두를 위한 공연이었다. 한동안 부유층을 위한 예술로 여겨졌던 오페라가 모든 관객층을 아우를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많은 젊은 팬층을 확보하였다.

Q 이러한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내부에서 그치지 않고, 각지의 극장과 협업하며 함께 아이디어를 내고 제작해나가는 것이다. 운영 프로그램 중 ‘베르디 SPIP’의 경우 파르마 극장과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은 새로운 예술적인 시도를 해나가는데 큰 동기를 부여한다.

 

INTERVIEW 2

 

뉴오페라 싱가포르 CEO 겸 예술감독

정애리

뉴오페라 싱가포르는 2011년 창단 이래 브리튼 ‘한여름 밤의 꿈’ ‘나사의 회전’ 푸치니 ‘빌리’ 등을 다뤄왔으며, 컬트적이거나 도발적인 연출을 주로 선보이곤 한다. 정애리는 한국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대에서 수학하고,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던 중 뉴오페라 싱가포르를 창단했다. 그는 “다른 단체들을 배우고 협력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행사에 대한 소감과 함께 “한국 오페라단들도 좀 더 젊고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신선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Q 오페라단을 설립한 배경이 궁금하다.

싱가포르에 유망한 제자들과 젊은 가수들이 있었지만, 졸업 후에 나아갈 기회는 한정적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싱가포르의 주요 오페라단들은 내가 가지는 비전과는 방향이 달랐다.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싱가포르 국립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는 유일한 오페라단이 되었다.

Q ‘가장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오페라단이라고 소개했다.

대부분의 오페라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선보이고 있다. 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현대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것은 예술가의 사명이 아닐까? 그것이 오페라 박물관이 아닌 ‘현재의’ 오페라단을 운영하는 나의 신념이다. 실제로 젊은 관객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내고 있다.

Q 오페라 레퍼토리 선정과 관객 개발 프로그램 운영에서 고려하는 점은?

기본적으로 음악과 스토리 라인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을 선정하고, 관객들에게 해당 작품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안을 고민한다. 대부분의 관객이 오페라와 가깝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기에, 항상 관객보다 ‘살짝’ 앞선 시선에서 어떻게 그들의 흥미를 이끌어낼지에 대해 연구하고 제안한다.

 

 

REVIEW

 

대구 축제에서 선보인 창작오페라 ‘미인’

신윤복의 붓 끝에 더한 상상

 

작곡 진영민 지휘 백진현

연주 디오오케스트라, 대구오페라콰이어

연출 이혜영

출연 김지원(신씨·설우), 이호준(은양군), 이충만(별감), 서미선(한씨), 이승민(차남), 김예은(달문), 변경민(신씨 모친), 허은정(남순), 손재명(당숙)

 

오페라 ‘미인’은 지난해 대구오페라하우스 창작오페라 개발사업의 공모에 선정된 작품으로 지난 10월 28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신윤복의 ‘미인도’와 풍속화 화첩 ‘혜원전신첩’을 소재로 삼았으며, 과부가 된 신씨가 열녀문을 위한 자결의 강요를 피해 도주하던 중 은양군을 만나 설우라는 기생으로 거듭나는 내용이 펼쳐진다.

1막에는 빠른 전개가, 2막에는 격렬한 서사가 돋보였으며, ‘정변야화’ ‘이부탐춘’ 등 신윤복의 작품을 토대로 꾸며진 각 장면은 이 오페라만의 특색이었다. 음악은 중심 조성 없이 통절로 흘렀고, 2막에서는 불협화음이 눈에 띄게 충돌했다. 합창은 극의 곳곳에서 타자의 시선을 대변하거나 흐름을 정리하였다.

창작오페라임에도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대구 오페라의 위상을 새삼 실감케 했다. 신씨에게 자결을 강권하는 집안 남성들과 신씨 모친의 행태, 애꿎은 희생자들이 줄을 잇는 모습에 관객들은 분개했다. 극 중 상황을 조롱하는 달문의 촌철살인과, 원흉과도 같던 차남의 죽음에는 가벼운 통쾌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몰입도가 높은 작품이었지만, 빠른 전개 사이의 빈틈을 메울 세밀한 서사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또한, 마지막에 ‘미인도’ 그 자체가 되는 설우는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다소 짧게 끝을 맺는데, 확장의 여지가 충분한 피날레였다.
이번에는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올랐으나, 추후에 정식 무대로 제작 예정이다. 신윤복의 그림이라는 독창적 모티브와 빠른 전개가 돋보이는 작품인 만큼, 보완이 충분히 이루어진 정식 오페라로서의 기대가 크다.

최성혁 기자 사진 대구오페라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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