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대니얼 하딩, 음악의 항로를 설계하는 지휘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2월 1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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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한하는 연주자들 인터뷰

 

지휘자 대니얼 하딩

 

음악의 항로를 설계하는 지휘자

새 악단(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에, 최고의 협연자(임윤찬)를 태우고, 그가 온다!

 

 

대니얼 하딩(1975~) 브레멘 도이치 캄머필하모니, 파리 오케스트라 등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명예지휘자이다. 로마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맡고 있다.

40~50명, 많게는 100명을 훌쩍 넘는 연주자들이 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서양음악의 총화, 관현악단. 이 거대한 집단을 단 한 사람이 지휘봉 하나로 이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기적에 가깝다. 그런 탓에 지휘자에게 필요한 덕목은 뛰어난 음악성뿐만 아니라 카리스마 넘치는 통솔력, 그리고 인간적인 친화력으로까지 필수 조건이 된다. 그래서일까? 상상 속의 ‘지휘자’는 으레 나이 지긋한 거장, 누구도 토 달지 못하는 카리스마의 대명사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오늘의 무대들은 훨씬 역동적이다. 젊은 나이에 포디움에 올라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들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음악계의 판도를 재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30년이 넘는 경력 덕에 익숙한 이름이 된 대니얼 하딩(1975~)이 알고 보면 이제야 50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

 

래틀과 아바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

옥스퍼드 태생의 대니얼 하딩은 맨체스터의 체텀음악학교에서 트럼펫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며, 13세에 청소년 관현악 단원이 되었다.

금관 연주자의 특성상 몇 계단 높은 뒷자리에서 지휘자를 또렷하게 바라보게 되는데, 지휘자를 관찰하는 기회가 비교적 많았던 그 시간들은 어느새 쌓여간 하딩의 첫 ‘지휘 레슨’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17세, 그는 쇤베르크 ‘달에 홀린 삐에로’ 연주를 위해 직접 음악가들을 모아 무대를 꾸렸다. 사실 트럼펫으로는 실내악 연주에 참여하기가 어려워 지휘를 맡은 것이지만, 그 자리에서 순간 스스로의 남다른 재능을 깨달았을지도 모르겠다.
대담하게도 하딩은 연주의 녹음 테이프를 사이먼 래틀에게 보냈다. 당시 래틀은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을 영국 정상으로 올려놓으며 한창 주목받던 때였다. 테이프를 들은 후 래틀은 바로 하딩을 불러, 1993년부터 1년 동안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임명했다.

18세, 정규 관현악단에 소속된 직업 ‘지휘자’가 된 것이다! 이는 하딩에게 그러한 자격과 자질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듬해 1994년에는 버밍엄시립교향악단과 데뷔 무대를 가졌고, 왕립 필하모닉 협회로부터 ‘베스트 데뷔’상을 수상하며, 지휘계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버밍엄에서의 경험을 뒤로 하고, 하딩은 1995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진학해 음악학 공부를 시작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그는 ‘공식적으로’ 지휘를 배운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 1학년을 마친 이듬해,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하딩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어시스턴트로 호출했다. 하딩은 본격적으로 1996년 ‘베를린 페스티벌’에서 21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는 기회를 얻었고, 그해 BBC 프롬스의 포디움에도 오르며 프롬스에 출연한 최연소 지휘자로 기록되었다.

 

스무 살 나이에 유럽 무대를 점령한 지휘자

임윤찬 ©James Hole

이후 그 무엇도 그의 가파른 상승세를 막지 못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그의 이름은 유럽 음악계 곳곳에서 빠짐없이 등장했다. 1999년에는 브레멘 도이치 캄머필하모니의 음악감독을 맡았고, 2003년에는 아바도가 설립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2007년에는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의 수석지휘자로 자리를 옮겼고, 이 오케스트라를 2025년까지 무려 18년간 열아홉 시즌을 이끌며 스튜디오 녹음과 투어 모두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장대한 커리어의 중간이던 2016년, 그는 파리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했지만, 특이하게도 하딩은 처음 체결한 계약 기간인 2019년까지만 활동하고 연장하지 않았다(그 이유는 다시 언급하겠다).

오페라 역시 하딩이 일찍부터 도전한 주요 분야였다. 23세였던 1998년,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로 오페라 지휘 데뷔 무대를 올렸다. 이후 독일 바이에른, 영국의 코번트가든·에든버러 등에서도 오페라를 지휘하며 자주 초청받는 오페라 지휘자가 되었다.

특히 2002년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리튼 ‘나사의 회전’은 그라모폰상을 비롯해, 여러 음반상을 휩쓸며 그의 오페라 해석에 대한 신뢰를 굳혔다. 이어 2005년 초, 라 스칼라 극장 개막작 ‘이도메네오’를 맡으며 오페라 지휘자 ‘대니얼 하딩’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오케스트라(이하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에 부임한 뒤 첫 음악회로 푸치니 서거 100주년을 기념한 ‘토스카’ 콘서트 버전을 택했으며, 이 실황은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

이토록 젊은 시절부터 쉼 없이 활동을 이어온 그는, 50세가 되기 전 이미 ‘거장의 징표’를 얻었다.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2002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사 훈장을, 2021년 새해에는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으며 예술적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2024년 10월, 하딩은 로마의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로 다섯 시즌의 임기를 시작했다. 같은 해에는 광둥성·홍콩·마카오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그레이터 베이(Greater Bay) 지역 청소년 음악 문화’의 음악감독직도 맡으며 활동 영역을 아시아까지 넓혔다.

새로운 여정의 연장선에서 오는 12월,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딩이 서울 무대에 오른다. 이번 투어는 그가 수석지휘자로 취임한 뒤 선보이는 첫 내한으로, 오케스트라가 현재 구축해 가고 있는 사운드를 가장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다. 협연에는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를 연주할 것으로 더욱 기대를 모으며, 이탈리아 정통 교향악의 상징인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하딩이 만들어낼 음악적 방향성이 한국 관객에게 어떤 울림을 전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도전의 아이콘, 비행기 조정 면허까지 따다

하딩은 앞으로 무엇을 더 도전할 수 있을까? 사실 그에게는 음악가의 길을 걷기 전, 예닐곱 살부터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버밍엄시립교향악단 재직 시절, 수석 베이스 연주자의 경비행기를 탑승해 본 경험은 어린 시절의 단순한 동경을 실제 도전으로 바꿔놓았다. 그후 하딩은 시간이 날 때마다 비행 훈련을 이어갔고, 결국 에어버스 A320을 조종할 수 있는 라이선스를 취득했다! 그는 바로 에어프랑스에 지원하여 2020년부터 1년간 조종사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조종에 집중하기 위해 파리 오케스트라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고, 스웨덴 방송교향악단에는 안식년을 신청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푼 꿈은 이내 꺼지고 말았다. 팬데믹으로 비행 수가 줄면서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결국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가 연주를 이끌었다. 하지만 언젠가 에어프랑스 비행기에서 이런 멘트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는 여러분의 기장 대니엘 하딩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을 모시고 로마에 도착한 후,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예정입니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빈체로

 

 

PERFORMANCE INFORMATION

대니얼 하딩/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협연 임윤찬)

12월 4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르디 ‘시칠리아 섬의 저녁 기도’ 서곡, 라벨 피아노 협주곡 G장조,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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