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1월 26일 9:00 오전

Editor’s Not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완성된 음악의 고양감

아지즈 쇼하키모프/국립심포니 (협연 엘리소 비르살라제)

2025년 12월 6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야속하게도 세월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다. 연주 스타일 때문에 언제나 강철 갑옷처럼 빳빳하게 느껴졌던 시그니처 검은 드레스도 오늘은 기우뚱한 몸의 방향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하다. 다행히, 시간의 무게는 무대를 향하는 걸음걸이 외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사실 한국 관객이 ‘매서운 카리스마의 러시아 여제’라는 소문으로 휩싸인 엘리소 비르살라제(1942~)를 처음 만난 때, 그는 이미 원숙에 이르고도 남은 70대의 피아니스트였다. 2017년 첫 내한 독주회를 시작으로, 세 차례(2018·2022·2024) 한국을 찾았다. 반짝거리는 피아니즘이 각광받는 시대에 비르살라제의 연주는 무대의 품격이다. 풍성하고 감각적인 ‘체험’ 대신, 이성과 구조의 완성이 주는 교훈적 경험. 지난 몇 년간 한국 관객에게 비르살라제가 선사한 선물이었다.

올해 비르살라제가 준비한 선물은 국내 관현악단과의 첫 협연. 여러 레퍼토리 중에서도 특별히 그 해석에 신뢰를 받고 있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두꺼운 화성이 만드는 미묘한 색채를 화려함 없이 지나치고, 낭만으로 가득 찬 독주 선율의 유혹에도 비르살라제는 흔들림 없이 걸어간다. 덕분에 슈만의 얼굴은 광기에 시달리며 방황하던 말년이 아닌, 클라라를 향한 사랑으로 생의 의지를 가진 청년이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피아노 교향곡’에 가까울 만큼 오케스트라와의 긴밀한 앙상블을 요구한다. 우즈베키스탄 출생의 지휘자 아지즈 쇼하키모프(1988~)는 요령을 부리지 않고 악단과 독주자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고, 비르살라제는 자신이 세운 구조 속에 악단을 초대하며 호흡을 맞춰냈다. 오케스트라를 몰아가는 저음부의 동력이나, 정점의 고음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얻는 쾌감은 협주곡의 본질을 아는 노장에게 필요하지 않다. 자신만의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하는 듯한 단정한 깊이에, 현악기군의 색도 한층 짙어진다.

문학을 사랑한 슈만은 작품에 자신만의 독일어 나타냄말을 사용하곤 했다. 비록 이 협주곡에 사용되진 않았지만, 슈만이 즐겨 사용한 ‘Schneller’(더 빠르게)는 그 악곡의 형태를 살펴보면 바퀴 하나가 빠져 위태롭게 내리막길을 굴러 가는 듯한 자전거가 떠오른다. 몰아치는 듯한 그 아슬아슬함은 슈만의 빠른 악장을 즐기는 묘미다. 비르살라제가 선사한 3악장은 좌중을 압도하는 불필요한 카리스마 대신, 이 슈만의 미학을 완성하며 막을 내렸다. 홀을 벗어난 인터미션. 공연장 밖엔 연주 전날 내린 하얀 눈이 소복했다. 비르살라제가 선사한 슈만의 정원에도, 차곡차곡 음악의 정직함이 쌓여 있듯이.

그 겨울의 내음은 2부에서 관객을 러시아의 비극으로 더 가깝게 안내했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 ‘1905년’에 담긴 민중의 외침과 희생, 혁명의 극적 순간이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졌다. 눈 내린 서울의 밤이, 서늘한 러시아의 공기에 휩싸인 날이었다.

허서현 기자 사진 국립심포니

 

 

“어떤 여자들은 아파트에 살고”

연극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

2025년 11월 26일~12월 14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미래가 담보된 시련은 견딜 만하다. 아니, 오히려 그럴싸한 성장 스토리로 기록될 테니 짐짓 거뜬한 척도 해볼 수 있다. 그러니 불안이 삶을 엄습하는 이유는, 그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은 노벨상을 타고, 어떤 여자들은 아파트에 사는” 이 세상에서 조금 가난한 미혼의 여성인 나는, 주체적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런 류의 선택이 대체 어떤 미래로 이어지는지 알 방도가 없다. 확신을 갖기엔 앞선 세대의 여성 중 지나친 소수가 선택한 길이고, 조금 늘어난 오늘날 주체적 여성들의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오진의 신작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는 이 고민을 지나치게 선동하거나 계몽하지 않는 선에서 유쾌하게 풀어낸다. 1막에선 배우 여섯 명이 각자의 이야기를 발화하는 형식으로 이어진다. 2개월간 직접 쓴 자기 서사다. 젊은 날 담배 연기가 자욱했던 극단에서의 생활, 돈을 번다는 것, 어린 날 운동장에서 떠올렸던 할머니…. 자기 서사 발화만이 이어지는 무대는 자칫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들 때가 있는데, 이오진과 여러 작품을 작업한 단편선이 음악을 맡아 서사의 소소함을 노련하게 빠져나갔다. ‘혼종의 음악극’이라는 공연 소개가 매력적으로 실현된다.

히스테리(흥분)와 앵자이어티(불안) 사이만을 오갔다면 신세 한탄에 그쳤겠지만, 극은 2막에서 다소 그럴법한 가까운 미래를 상정한다. 시기는 2058년, ‘2025년에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를 같이 공연하며 느슨한 인연을 이어가게 된 6명의 여배우’가 함께사는 아파트다. 결혼이나 출산이 아니더라도 ‘생활동반자법’이나 ‘사회적 가족법’이 생겨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근미래. 2막의 갈등은 구성원 중 한 명의 죽음으로 발생한 유산을 두고 오고가는 다소 우스운 대화다. 견물생심, 죽은 이와는 내가 더 친밀했으니 유산도 더 많이 받을 사이였다고 주장해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최선을 다한 우리 연대의 미래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것도 같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지 않으면 지금 가진 것도 잃게 될 것이라는 일침 아래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며 극은 막을 내린다.

덤덤하게 그려본 2막의 미래. 그러나 이만큼이라도 가능한 미래를 이야기해보기 위해 오늘을 진솔히, 서로에겐 다정히 함께한 시간은 우리의 불안에 효능 있는 위로다.

허서현 기자 사진 호랑이 기운/이서염

 

 

일렁이는 진실과 믿음의 경계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

2025년 11월 29일~3월 2일 GS아트센터

 

전 세계를 사로잡은 베스트셀러이자 아카데미 수상작으로도 널리 알려진 ‘라이프 오브 파이’가 GS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으로 관객을 만났다. 소설과 영화로 강하게 각인된 이 이야기를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작품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무대 장치와 라이브 퍼포먼스를 결합한 ‘라이브 온 스테이지(Live on Stage)’라는 새로운 형식을 제시한다.(2025년 12월 4일 관람)

이야기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파이가 이민을 위해 가족, 그리고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로 향하던 중 배가 침몰하면서 시작된다. 거센 폭풍우 이후, 구명보트에 남은 존재는 파이와 벵갈 호랑이 ‘리처드 파커’뿐이다. 이들은 227일 동안 태평양을 표류하며, 생존을 위한 여정을 함께 이어간다.

이 거대한 서사를 거의 두 시간 동안 홀로 이끌어가는 인물은 단연 파이다. 파이 역의 박강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공포와 믿음, 이성과 환상을 오가며 극의 중심을 붙든다. 무대에는 배우와 함께 퍼펫을 조종하는 퍼펫티어들이 몸을 숨기지 않은 채 등장한다. 특히 세 명의 퍼펫티어가 머리와 몸통, 꼬리를 나누어 담당하며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리처드 파커’는 퍼펫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 존재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마다 객석에 묘한 긴장감이 감돈다. 느긋하게 팔을 흔드는 오랑우탄, 날카로운 움직임의 하이에나, 보트 주변을 유영하는 바다거북과 물고기들이 더해지며 무대는 점차 살아 움직이는 세계로 확장된다. 퍼펫과 생명체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 지점이야말로 작품이 도달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조명과 영상은 이러한 감각을 한층 강화한다. 장면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무대는 병실에서 망망대해로 순식간에 전환되고, 천장에서 쏟아지는 폭우, 바닥에 투사된 파도와 반짝이는 물결은 공간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1층 객석에서는 일부 장면의 시야가 제한되는 아쉬움이 남지만(2층 앞좌석 ‘파노라마 석’에서는 무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퍼펫과 배우, 무대 장치가 긴밀하게 맞물리며 만들어내는 무대의 밀도가 그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단순한 재난 생존기를 넘어, 진실과 믿음 사이의 경계를 묻는 작품이다. 파이는 진실을 요구하는 변호사 앞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느 쪽 이야기가 더 좋으세요?” 파이의 물음은 퍼펫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과 맞물리며, 작품이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홍예원 기자 사진 에스앤코

 


 

CLASSICAL MUSIC

 

하딩/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 협연 임윤찬

에스프레시보와 칸타빌레의 협연

2025년 12월 4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르디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 서곡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팀파니와 주고받는 여린 서주부를 지나 본격적으로 음량이 커지며, 깊고 어두운 사운드가 홀을 휘감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의 트레몰로는 오페라처럼 긴장이 가득했다. 팀파니와 타악기가 작렬하며 스펙터클한 사운드를 만들었다. 육중하면서 어둑어둑한 질주는 베르디 오페라 특유의 어쩔 수 없는 운명과 피 냄새를 소환했다. 대니얼 하딩(1975~)의 차분하고 신중한 지휘 자세와 대조적이어서 ‘정중동’이란 표현을 연상시켰다. 첼로 군의 칸타빌레가 맛깔스러웠고 중반 이후에는 “이건 우리 음악이야”라는 이탈리아 악단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여덟 대의 더블베이스가 긋는 저음은 일사불란했다. 아기자기한 관현악 속에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낼 때의 존재감이 뚜렷했고, 타악기의 능란함도 연주에 일조했다.

등장과 동시에 객석 온도를 급상승시켰던 임윤찬은 인사하자마자 연주 태세를 갖추며 객석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그는 한 음 한 음 명료한 터치로, 협연에 그치지 않고 고삐를 쥔 채 강약과 완급을 제어했다. 오케스트라의 재즈적인 접근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빠른 패시지에서도 임윤찬의 건반은 또랑또랑한 리듬을 분명히 새겼다. 머릿결을 휘날린 피날레도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연기가 퍼지듯 임윤찬이 만들어가던 2악장은 커다란 스마트폰 소리의 방해를 받았다.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는 동요하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했다. 물 위로 비상하는 새처럼, 건반 위로 플루트가 덧입혀질 때의 아름다움은 각별했다. 덧없는 지난날이 흘러가는 일력을 뜯어내듯 시간에 걸쳐있는 연주였다.

3악장에서는 억눌렸던 것들이 분출하는 듯했다. 생동감 넘치는 연주의 음색 속에서 임윤찬은 리듬에 악센트를 줘가면서 주관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창백한 투명함이 아닌 혈색이 도는 에스프레시보. 고개를 끄덕이며 속주로 깔끔하게 처리하는 악구들은 후련했다.

앙코르 첫 곡은 조제프 코스마(1905~1969) 작곡의 샹송 ‘고엽’을 임윤찬이 편곡한 버전이었다. 재즈 스탠더드의 대명사인 이 곡을 부담을 벗어던진 듯 자유롭게 연주하며 또 다른 즉흥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두 번째 앙코르는 코른골트(1897~1957)의 ‘가장 아름다운 밤’. 빛나는 고음을 반짝이며 낭만적인 해석을 이어간 임윤찬의 모습은 왠지 예브게니 키신을 연상시켰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에서는 활짝 피어난 밝은 사운드가 다가왔다. 저음역대를 탄탄하게 다진 듯, 단조로운 악구에서도 서로 다른 음역대의 악기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관악기가 외롭게 부각된 후 현악의 멜로디가 밝고 신선한 음색을 띠었다. 첼로를 비롯한 현악 군의 결이 고왔다. 악장의 바이올린 솔로도 밝게 빛났다.

2악장은 씩씩하고 웅혼한 발걸음이 돋보였고 3악장에서 클라리넷 선율이 오케스트라 사이에서 우수를 피어 올렸다. 늦가을과 초겨울에 어울리는 선율은 길게 이어졌다. 활기찬 분위기로 전환한 4악장은 이탈리아의 축제적 성격과 오페라의 장면을 함께 상기시켰지만, 곡의 구조적 한계와 장황함은 어쩔 수 없는 피로감을 불러일으켰다. 앙코르는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이들의 정체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간 작품이었다. 곡을 감돌았던 미묘한 빛은 여운으로 남았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빈체로

 

 

루발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협연 클라라 주미 강

예리한 손끝, 천금 같은 금관

2025년 12월 7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현재 지휘계에서 ‘핀란드가 대세’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하다. 위트 넘치는 음악학자 노먼 레브레히트가 한 편의 칼럼을 이 주제에 할애해 썼을 정도다. 이 도도한 조류 속에 빛나고 있는 이름, 지휘자 산투 마티아스 루발리(1985~)가 영국의 명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해 시벨리우스를 연주한다면, 기대치가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망은 없었다. 첫 곡 시벨리우스 교향시 ‘전설’의 도입부터 관악 파트는 마치 ‘우리가 필하모니아다!’라고 선언하듯 압도적인 사운드를 보여줬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에 대해서라면, 그에 속한 단원 한 명 한 명이 전체 음향 속, 맡은 바를 명확히 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대 오른편을 차지한 첼로 파트 역시 윤기 어린 음색을 흐트러짐 없이 객석으로 밀어냈다.

루발리의 지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지만, 그가 끌어낸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진폭은 컸다. 원리 원칙을 지키면서도 음악적 자유로움을 놓치지 않았다. 표정이 끊임없이 변하는 작품인 ‘전설’에서도 현악 파트는 거친 음 한번 없이 매끄러움을 유지했다. 특히 모두가 ‘p(피아노)’로 소리를 낮추는 순간, 감탄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단순히 작기만 한 소리가 아니라 한 음 한 음 표정이 있는 현 파트의 피아노 부분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클라라 주미 강의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한껏 무르익은 느낌이었다. 듣는 이의 체온까지 1도로 내려가게 하는 얼음장 같은 1악장 해석도 종종 만날 수 있지만, 주미 강의 시벨리우스는 그렇게 표독스럽지 않았다. 음량을 포함해 곡 전체의 스케일을 키운 느낌으로, 대작 점묘화의 한 점 한 점이 또렷이 보였다. 2악장은 더욱 노련하게 긴 붓터치를 그려나갔다. 3악장에 이르러서도 음량에서나 카리스마 면에서 오케스트라에 압도되지 않고 동등한 음악을 펼쳤다. 결국 경험에서 나오는 바이브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많지 않다. 앙코르로 바흐의 ‘사라방드’(파르티타 2번)를 선택해, 시벨리우스와 대조되는 공기처럼 가벼운 음색으로 끝인사를 남겼다.

휴식 이후 스트라빈스키 ‘불새 모음곡’(1945)이 연주되었다. 복잡하게 얽힌 반음계 속에서도 귀에 거슬림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흔히 지휘자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곡이라고 할 만한 이 작품에서 루발리는 핵심부에 내리는 정확한 신호로 감도 높은 연주를 선보였다.

‘스케르초-공주들의 춤’에서 펼쳐진 현란한 플루트와 목관에 이어, ‘팬터마임’의 호른 솔로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수준을 또렷이 각인시켰다. 하프와 피아노까지 한 몸처럼 포르테로 휘몰아치는 ‘카슈체이의 사악한 춤’에서는 말 그대로 ‘초(超)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단순한 기능의 문제를 떠나서 관객의 귀를 지휘자의 심장 가까이로 이끌리게 만드는, 그리고 그가 쏟아내는 음악의 언어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에 있었다.

앙코르는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레타 ‘모스크바 체료무쉬키’ 모음곡 중 ‘모스크바 일주’와 시벨리우스 ‘슬픈 왈츠’가 연주되었다.
지휘자가 왈츠 연주에 앞서 밝힌 대로, 연주 전날인 12월 6일은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런 만큼 이날 연주된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단순한 앙코르를 넘어, 이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더했다.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빈체로

 


 

OPERA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한국에 상륙한 ‘바그너 호’의 성과는?

2025년 12월 4~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1865년 초연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국립오페라단 제작으로 전막 초연됐다. 2012년 정명훈/서울시향의 콘서트오페라 버전으로 선보인 이래, 서울시향이 다시 한번 작품 초연에 참여하며 화제였다. 오페라 평론가 손수연(4일 관람), 음악 칼럼니스트 박제성(5일 관람)의 리뷰를 통해, 국립오페라단과 한국 오페라계가 새로운 작품을 수용하는 데에 필요한 모습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작품의 전통과 입체감을 놓친 프로덕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전막 초연한다는 소식은, 늦은 감이 있지만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국립오페라단에서 올린 바그너 프로덕션이 성공적이었던 만큼, 지난해 ‘파르지팔’ 초연 때의 감동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공연을 접하자마자, 이러한 기대는 정통으로 빗나가버렸다.

우주선을 배경으로 한 슈테판 메르키의 연출은 작품에 담긴 어떤 서사나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뒷배경으로 띄워진 우주 화면은 촌스러워 이질감을 자아냈고, 옆 배경의 유리 벽이나 천장의 원형 장식은 이미 유럽 무대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된 클리셰처럼 여겨졌다. 의상 디자인은 전체적으로 의뭉스러울 뿐 아니라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이졸데는 움직일 때마다 치마를 손으로 들고 다니는 촌극이 벌어졌다. 특히 1막에서 일렬로 장승처럼 서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니 연출가가 이 작품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한국 전막 초연인 만큼 현대적 연출보다는 전통적인 연출이 훨씬 자연스럽고 친화적이었을 것이다.

전적으로 잘못 캐스팅된 성악진 또한 문제가 컸다. 트리스탄 역의 브라이언 레지스터는 시종일관 영웅적 모습과 거리가 먼 나머지 고음과 힘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고, 지난 시절의 노련함만을 버팀목 삼았을 뿐이다. 이졸데 역의 엘리슈카 바이소바가 컨디션에서는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대사가 거의 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강한 음역대에서만 크게 지르는 모습은 배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상을 남겼다. 더군다나 음역대가 낮고 무거워, 카랑카랑한 브랑게네 역의 김효나와 배역이 바뀐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마르케 왕 역을 맡은 박종민이 가장 정상적인 캐스팅으로 꼽을 만했는데, 2막 마지막에서 동굴 같은 울림과 호소력 짙은 감정 표현으로 이 극을 간신히 구원해 냈다.

오케스트라는 도입부부터 문제가 많았다. “Langsam und schmachtend(느리고 그리워하듯)”이라는 지시어가 무색할 정도로 다이내믹의 진폭이 느껴지지 않았고, 트리스탄 화음 또한 강세와 느낌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음향이 너무 창백해 1막이 끝나고 피트 안을 살펴보니, 단원 수의 문제는 아니었고 아마 성악가들의 발성이 약한 탓에 오케스트라 음량 자체를 줄여버린 것 같았다. 오케스트라가 강조되어야 할 부분에서도 절대 음량을 올리지 않은 탓에, 현악기의 피치카토나 트레몰로, 인물과 상황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세부 모티브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2막 2중창 마지막 파트의 아찔함이나, 3막에서 배가 들어오는 장면의 광기, 마지막에 사랑의 죽음에서 여섯 파트로 나뉜 바이올린 파트의 입체감 또한 평범하게만 들려 아쉬움을 남겼는데, 지휘자 얍 판 츠베덴의 이러한 독선에도 불구하고 2막 후반부나 3막 처음에서 서울시향의 목관 파트는 강한 인상을 남겨 악단의 저력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취감과 흥분이 없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난생처음 겪어본 생소한 경험이었다.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바그너 전문 성악가들의 약진

첫 전막 오페라다 보니 6시간에 달하는 긴 공연 시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을 볼 수 있었다. 이날 오페라가 화제 됐던 이유는 작품이 우리 초연이라는 이유도 있었고, 츠베덴/서울시향이 함께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총체 예술을 지향하는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펼쳐질, 서울시향의 연주에 큰 기대가 모였다.

연출을 맡은 슈테판 메르키는 이 작품에서 무한한 우주,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작품의 배경을 우주로 옮겼다고 했다. 2015년 빈 슈타츠오퍼에서 데이비드 맥비카가 연출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았을 때의 배경 또한 우주였다. 먼 우주나 미래의 어딘가 정도로 설정된 공간에서도 바그너의 음악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이번 공연 무대 또한 신선하게 다가올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안전상의 이유로 계획했던 무대 디자인이 구현되지 못한 탓인지 인물들은 시종 답답하고 어두운 세계를 떠돌았다.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 과장된 의상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풍자극에 어울릴 것 같은 의상 때문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끓어오르는 정념과 비극을 향한 몸짓이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인물의 복잡한 내면은 조명과 미디어아트로 표현됐다. 두 주인공의 감정적 교감과 상호작용에 따라 조명의 색채가 변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감정을 보여주었다. 2막 사랑의 2중창 장면에서 선보인 푸른 밤과 금빛 조명의 조화는, 음악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었다. 반사경 효과를 나타내는 화려한 영상도 밋밋한 무대에 볼거리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별다른 개성이 느껴지지 않은 이날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휘한 것은 성악가들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졸데를 노래한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는 긴 공연 시간 내내 흔들림 없는 가창력, 풍부한 볼륨과 능숙한 강약 조절로 작품 전체를 끌고 갔다. 유려한 호흡을 바탕으로 한 여유로운 프레이징은 역시 바그너 전문 소프라노다운 면모였다. 날카로우면서도 우아하고, 강렬하면서도 유연한 그의 음색은 마치 사랑과 죽음, 낮과 밤처럼 작품을 관통하는 대비의 미학을 상징하는 듯했다. 3부 ‘사랑의 죽음’ 부분에서도 깊은 몰입으로 결코 닿을 수 없는 갈망을 넘어 최고의 환희로 향하는 감동적인 피날레를 노래했다.

트리스탄 역의 테너 스튜어트 스켈톤도 어두우며 호소력 넘치는 음색의 헬덴 테너로, 캐서린 포스터와 좋은 하모니를 이뤘다. 마르케 왕 역의 베이스 박종민은 최근 바그너 작품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품위 있고 중후한 음색과 빼어난 목소리 연기로 바그너 오페라에 적합한 성악가라는 것을 한 번 더 입증했다. 쿠르베날 역의 바리톤 레오나르도 이는 이번 작품에서 예기치 않게 만난 보석 같은 우리 성악가라 하겠다.

츠베덴/서울시향은 유명한 서곡에서부터 흠 없이 매끄러운 연주를 들려줬으나 그 밀도나 농도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점차 연주에 탄력이 붙고 집중력이 올라가며 손색없는 공연을 마쳤다. 다만 지나치게 정제되고 세련된 사운드로만 일관돼 이 작품이 추구하는 타오르는 듯한 갈망과 휘몰아치는 정념을 생생하게 그려내기는 무리가 있었다고 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많은 프로덕션이 그러하듯이, 이번 무대 또한 바그너 음악이 갖는 강렬한 힘에 의지해간 공연이었다. 그 음악의 힘이 나름대로는 표현된 것 같다. 우리 오페라의 토대가 한층 탄탄해진 느낌이다.

손수연(오페라 평론가) 사진 국립오페라단

 


 

CONTEMPORARY MUSIC

 

뮤직노마드 ‘환경을 생각하는 음악쇼, 환생쇼’

지역 창작 생태계와 동시대 예술의 실험

2025년 11월 25일 오후 7시 30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극장3

 

작곡가 정현수(전남대 교수)의 주도로 2009년 창설된 작곡 동인 ‘뮤직노마드’는 2023년부터 ‘자연에게 인간이 던지는 질문’을 뜻하는 ‘물음’, 2024년 ‘자연이 인간에게 돌려주는 울림’을 의미하는 ‘환음’이라는 제목 아래, 환경을 주제로 한 시리즈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는 인간과 자연, 예술과 기술이 연결되는 공생의 무대를 지향하며 ‘환경을 생각하는 음악쇼’를 선보였다.

이번 공연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한 ‘지역예술도약지원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11월 24일 나주문화예술회관에서의 오프닝 콘서트를 시작으로, 25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 28일 푸르지오아트홀(서울)까지 이어진 세 차례의 공연은 지역 기반 예술가들의 ‘현대음악 창작–제작–공연’이 선순환하는 모델을 제시했으며, 지역 예술의 전국 유통과 실질적인 교류를 수행했다.

“예술이 환경 속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속 가능한 물음과 울림을 던져온 ‘환경을 생각하는 음악쇼’의 줄임말인 ‘환생쇼’는 단순한 환경 캠페인에 머물지 않았다. 공연은 과잉이 남긴 폐허를 외면하는 2125년의 미래 사회가 배경이다. 100년 전인 오늘(2025년)의 지구 위기를 예감하며 작곡된 음악을 시간을 거슬러 듣는, 영상과 팟캐스터가 함께한 멀티미디어 음악극이었다. 또한, 현재의 작곡가들이 미래로 보내는 마지막 신호가 되어 지구의 기억을 다시 깨우며 인간과 지구가 다시 태어나는 ‘Re:Earth’의 싹을 각자의 음악 언어로 표출한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환생쇼’는 광주와 서울의 작곡가, 연주자, 영상감독이 공동으로 창작에 참여한 완전한 지역 협업형 공연으로, 지역 창작 생태계의 강화와 동시대 예술의 실험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며 협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공연의 시나리오는 정현수가 구성한 총 6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정현수를 비롯해 한경진, 임재경, 이은주, 강보란, 유복음이 각 장을 맡아 작곡했다. 연주는 박인욱의 지휘로 호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앙상블 루미나시아가 맡았다.

인간이 더이상 숨 쉴 수 없는 공간이 된 지구를 떠나 화성에 정착한 인류의 생존 조건인 ‘호흡’은 플루트·클라리넷·트럼펫·호른 등 취주악기를 통해 청각적으로 인식되었고, 목관악기를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숨결은 생존을 위해 맑은 공기의 흡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었다. 바이올린·비올라·첼로로 구성된 세 대의 현악기는 자연의 회복력을 흐름에 맡겨두었다. 또한, 이중섭의 그림 ‘길 떠나는 가족’을 기반으로 윤동주의 시 ‘흐르는 거리’에서 제목을 차용한 정현수의 ‘흐르는 거리’는 희망과 연대의 노래이자 안녕을 기원하는 평화의 사도였다.

환경 이슈를 영상과 접합하고, 사운드로서 의미를 다시금 찾게 하는 일련의 과정은 작품의 음악적 감동을 도출했다. 지역 예술가와 단체가 지역 안에서 스스로 지속 가능한 창작 생태계를 구축하고,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통해 지역 문화의 경쟁력과 정체성을 이루어가고 있는 작곡 동인 ‘뮤직노마드’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며 응원한다.

성용원(작곡가) 사진 뮤직노마드

 

 

오페라 ‘침묵 속에서 시간을 듣다’

부유하는 사운드, 체류하는 관객, 방류하는 실험

한중문화관(2025.11.15·16), 문래예술공장(11.22·23), 뉴욕라마마 갤러리아(1.30·31)

 

‘침묵 속에서 시간을 듣다’는 ‘오페라’라는 장르명이 적혀 있지만, 익숙한 오페라의 풍경을 조용히 지우는 ‘수정형 이색장르’다. 무대는 없고, 좌석도 없다. 커튼이 오르지도, 박수로 시작을 알리지도 않는다. 따라갈 줄거리나 아리아도 없다.

허공에는 낮은 조도의 빛(조명)이 머물고, 바닥에는 오브제들이 널려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성악가의 분절된 노래와 현악 연주자의 줄거리 없는 떨림이 공간을 채운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그 속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걷고, 멈추고, 다시 방향을 바꾼다. 공연은 이미 진행 중이고, 관객은 그 흐름 속으로 늦게 합류한 동거인처럼 들어선다. 한 마디로 4시간의 체류형 공연이라 할 수 있겠다.

공간은 3개의 다른 영역으로 구성되어, 관객이 그 사이를 오간다. 빛과 오브제가 중심이 되는 시각의 공간, 무용수와 배우의 몸이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의 공간, 그리고 성악·현악·전자음향이 부유하는 소리의 공간이다. 공간은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되었을 뿐 ‘구분’되진 않는다. 그래서 어느 한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다른 공간의 소리가 겹쳐 들어오고, 무용수의 움직임이 소리를 바라보는 시야를 가로지르기도 한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자의 정체성 변이다. 관람자로 들어가지만,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법경을 외우는 주문 같은 음악과 서양 성악이 혼재되며 작은 의식이 시작되니 관객은 어느새 의식을 함께 하는 연행자가 된다. 또 다른 순간에는 무용수 한 명의 미세한 떨림이 출발점이 되어, 무용수의 몸을 넘어 관객의 몸을 움직이게 한다.

공연의 예술감독은 뮤직오디세이 대표 최부미다. 미국에서 재즈 작곡을 공부하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 중인 그녀는 특정 ‘장르 중심’의 음악보다 이종(異種)의 음악들을 섞는 ‘장르 변칙’의 음악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파포스 2.0’(2023)처럼 인공지능과 시극(詩劇)이, 오페라 ‘재즈클럽 밤의 여왕’(2022)처럼 재즈와 오페라가, ‘재래식:낭만에 대하여’(2020)처럼 재즈와 클래식이 최부미를 다리 삼아 만나고 몸을 서로 섞었다.

그렇다보니 이 오페라에 가용한 음악도 바로크-재즈-시나위가 독특한 이종혼합을 보여준다. 바로크적 사운드가 공간적인 구조로 만들고, 재즈의 즉흥성은 연주자들 사이의 반응을 키우며, 시나위의 에너지는 고조와 해소의 압력을 만들어낸다. 음악은 관객 앞에 놓인 대상이 아니라,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들려온다. 어떤 소리는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어떤 음향은 관객이 위치를 옮길 때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따라서 ‘듣기’는 더 이상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다. 관객은 소리를 따라 걷고, 소리 사이를 지나가며, 자신의 위치에 따라 다른 음악을 만난다. 음악은 이렇게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된다.

올해 1월 30일과 31일, 이 작품은 뉴욕라마마 갤러리아에 오른다. “인천과 서울의 공연에서 관객들이 작품에 반응하는 풍경도 서로 달랐다”라는 최부미 예술감독의 말처럼, 뉴욕의 ‘침묵’에서 그들은 또 다른 ‘시간’을 들을 것이다.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뮤직오디세이

 


 

TRADITIONAL

 

이희문프로젝트 ‘잡 2025-SIX SENSES’

‘흥’ 대신 현실을 증언하는 ‘풍자’로

2025년 12월 5~7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이희문(연출), 이태원(음악감독)/고진호(대금), 배승빈(피리), 홍예진(가야금), 김솔미(건반·철현금), 소명진(해금), 정준규(장구)

경기민요 소리꾼 이희문이 오랜만에 음악동인 고물의 음악감독 이태원과 함께 무대를 만들었다. 새 프로젝트 ‘잡 2025-SIX SENSES’는 12년 전 오더메이드 레퍼토리였던 ‘잡(雜)’의 두 번째 장이자, 향후 완성할 경기잡가 12곡 완주를 선언하는 무대다. 초연 당시 여섯 곡은 장영규가, 나머지 여섯 곡은 이태원이 맡았다. 이번 공연에서는 과거에 장영규가 맡았던 유산가·적벽가·제비가·선유가·평양가·월령가를 이태원이 새롭게 재구성했다. 이로써 과거의 6곡과 이번의 6곡을 통해 경기잡가 전곡이 하나의 ‘이태원 스타일’ 서사로 완결된 셈이다.

잡가는 민요와 달리 직업 소리꾼들의 고난도 기량을 전제로 한 장르다. 느린 호흡과 장대한 서사 덕분에 오늘날엔 ‘듣기 어려운 음악’으로 분류된다. 이희문은 이번에도 그 불편함을 감싸 안는다. 이번 무대는 이희문의 초기 시절, 이태원 작곡의 ‘태평가’에서 이미 예고된 현실 인식을 잡가 전반으로 확장한 결과다. 태평성대를 찬미하던 노래는 ‘태평을 부를 수 없는 시대’의 초상으로 변했다. 잡가는 그렇게 고발과 성찰 사이를 오갔다.

무대는 미니멀하고 단정하다. 연주자들은 단일 색상의 작업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중앙에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였다. 보면대를 앞에 두고 앉아 연주하는 모습은 노트북을 앞에 둔 사무실 회의를 떠올리게 한다. 각자 악기를 들여다보며 의견을 교환하지 않지만 묘하게 긴장된 집중이 흐르고, 오직 이희문만이 관객을 향했다. 그는 시선과 몸짓을 최소화한 채 오롯이 ‘소리’로 공연을 끌었다.

이태원과 고물이 만드는 사운드는 매끄러운 크로스오버와는 거리가 멀다. 반복되는 장구 리듬 위에서 선율 악기들은 파편적인 음형과 노이즈를 반복한다. 그 위에 바라·방울이 무속적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고물의 보컬 앙상블(연주자가 동시에 노래)은 전통 선율과 의도적인 어긋남을 만들어 ‘지금’을 환기하는 집단적 사운드를 구현한다. 잡가의 ‘과거’ 서사를 조각내고, 그 파편들로 ‘오늘’의 불안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그 위에서 이희문은 불협의 흐름을 견디며 소리의 중심을 지켜낸다. 그 복잡한 소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전통 장단과 선율을 흔들림 없이 붙드는 그의 호흡은 공연 전체의 버팀목이다. 잡가는 이제 기량의 과시가 아닌, 현실을 증언하는 노래극으로 확장되었다. 관객의 경험 차원에서도 공연은 오래 남는다. 몇몇의 박수가 힘을 얻지 못하고 사라지는 순간, 그 좌절된 박수는 무대의 정조를 완성한다. 불협과 긴장, 침묵과 망설임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단순한 청자가 아닌 ‘동시대 증인’의 위치로 이동한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동시에 불편함을 감내하는 관계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번 완주로 경기잡가는 부분적 인용이 아니라, 온전한 동시대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했다. 이태원은 각 곡의 특정 구절에 초점을 맞추어 무한 반복하듯 읊조리며, 무조성과 노이즈, 폴리 리듬으로 원곡을 비틀어 그 의미망을 증폭시켰다. 오늘의 경기잡가가 취해야 할 자리라는 듯이, 전통이 다시 ‘지금’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소영(음악평론가) 사진 이원아트팩토리/나승열

 

 

채수현 ‘십이잡가를 품은 춘향: 再’

‘실험’적으로,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것

2025년 12월 18일 한국문화의집 KOUS

 

채수현(제작·연출·노래),이재하(음악감독), 이민형·변상엽·이찬우(연주), 김민지·김사랑·이채은·김하미(코러스) 외

한 곡이 짧아도 8분, 길게는 17분까지 이어지는 ‘경기 12잡가’는 몇 소절로 흥을 돋우고 끝나는 노래가 아니다. 한 곡 안에 이야기(가사)의 결, 말의 리듬, 장단의 흐름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관객을 오래 붙잡아 두고, 듣는 이의 감각을 그 시간 안으로 천천히 끌어들인다. 그래서 잡가는 대개 앉아서 부르는 좌창으로 전승되어 왔다. 다양한 몸짓으로 분위기를 만들기보다 호흡과 말맛으로 시간을 짓는, 느린 흐름의 예술이다.

채수현은 2017·2022년의 12잡가 완창으로 ‘기본’을 체화한 뒤, 2024년 ‘십이잡가를 품은 춘향’를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2025년 버전을 만들었는데, ‘다시’라는 뜻의 한자어 ‘再’를 넣어 제목을 ‘십이잡가를 품은 춘향: 再’라 했다. 이 작품은 열두 잡가에 담긴 감정을 춘향이의 서사와 감정을 토대로 새롭게 배치했다. 유산가·제비가·소춘향가·선유가로 여는 1부 ‘달빛이 비칠 때’, 방물가·평양가·달거리·출인가로 이어지는 2부 ‘임을 따라 갈까 보다’, 집장가·형장가·적벽가·십장가로 가라앉는 3부 ‘불쌍하고 가련하다’, 그리고 어사출두가로 매듭짓는 4부 ‘춘향아 내 여기왔다’까지, 이 배열은 노래들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의지에 가까웠다.

보통 국악 공연에서 연출가가 전체 흐름과 장면을 짜고, 소리꾼은 그 틀 안에서 노래를 펼친다. 그런데 채수현은 무대의 소리꾼으로만 그치지 않고, 제작과 연출을 함께 맡았다. 그녀의 구성에 의해 12잡가의 선율과 장단, 호흡과 정서는 노래의 구성 요소이자, 무대를 꾸미는 요소가 되고, 춘향이의 서사와 감성을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그만큼 채수현은 12잡가의 구조와 이면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

오디오비주얼, 미디 사운드, 음향적 실험도 전통의 표면을 현대적으로 포장하는 장식이 아니라, 12잡가가 지닌 정적(靜的)인 시간을 다른 감각으로 번역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재하의 음악, 신효흔의 영상, 박주영의 디자인이 한데 모인 협업이 그 수행을 지지했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4장 ‘어사출두가’였다. 뒤에서 코러스를 맡던 4명의 소리꾼이 서서히 걸어 나와 채수현을 둘러싸고, 춘향이의 감금과 감옥의 답답함을 연상시키는 듯한 춤동작을 조용히 선보였다. 채수현은 그들 사이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좌창에서 입창(立唱)으로 노래를 부른다. “한양계신 낭군님 보고지고 어사또가 감격하여 춘향을 한아름에 덥썩 안으며 내사랑 춘향아 내 여기 왔다”. 마지막 가사로 몽룡 만난 춘향의 기쁨을 표출하되, 잔잔한 움직임과 목소리로, 나지막한 카타르시스로 표현했다. 흐름으로 봐서는 격하게 터져야 하는 대목이었다. 이 장면을 보며, 채수현이 이번 공연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이 12잡가에 담긴 ‘절제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전통음악이 여러 장르와 경계넘기를 밥 먹듯 하더라도, 12잡가가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전통의 담벼락과, 역으로 12잡가로 함부로 넘어와선 안 되는 소리의 경계를 말이다. 하여,이번 작품은 실험적인 소리와 만날 수 있는 12잡가의 가능성을 보여준 공연이자, 여러 실험 속에서도 12잡가가 지켜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느낌이었다. 춘향이가 일편단심을 지킨 것처럼, 채수현은 이렇게 12잡가를 지켜나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byone

 


 

THEATER

 

국립극단 ‘태풍’

기이한 태풍의 눈 속에서

2025년 12월 4~28일 명동예술극장

 

국립극단(단장 겸 예술감독 박정희)의 올해 마지막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태풍’이다. 왜 지금 ‘태풍’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접어두고 극장으로 향했다. 객석에 들어서니, 무대와 객석의 경계에 하얀 막이 내려져 있다. 공연 시작 전, 배우들이 미리 등장해 목을 풀거나 짧은 대사를 던지며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배우들의 옷은 현대 복장으로, 셰익스피어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원작의 두 남성 주인공 프로스페로와 알론조는 각각 여성 인물인 프로스페라(예수정 분)와 알론자(문예주 분)로 바뀌었다.

공연은 무시무시한 태풍 소리와 함께 시작한다. 무대 위에서, 객석에서, 배우들이 쏟아져 나오며 소리친다. “지옥은 비었다, 악마들이 다 이리로 왔다!” 이윽고 태풍이 걷히고, 무대를 가리고 있던 막이 올라간다. 마치 태풍의 눈과 같은 고요한 정적 속에 마법의 섬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무대의 3면은 여전히 하얀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위에는 마법의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에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마법이 풀리는 시간, 3면의 막도 내려오고 날것의 극장 무대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공연은 끝이 난다.

프로스페라의 모습도 기존에 보아오던 모습과 다르다. 그는 더 이상 분노와 복수의 화신이 아니다. 덤불숲에 앉아 텀블러에 담긴 차를 마시며, 멀리 난파하는 자들을 바라볼 뿐이다. 프로스페라는 딸 미란다(황선화 분)에게 12년 전의 반란에 대해 말한다. 어떻게 친동생 안토니오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이 섬에 이르게 되었는지, 어떻게 안토니오가 자신들의 밀라노 공국 자주권을 포기하고 나폴리 왕국에 굴종시켰는지 설명한다. 계엄의 밤 이후 상황들이 떠오르면서 일순 공연에 집중하게 된다.

알론자 왕이 지쳐 잠든 순간, 알론자의 동생 세바스찬과 프로스페라의 동생 안토니오는 또다시 칼을 든다. 이들은 틈만 나면 모반을 꾸민다. 술주정뱅이 집사 스테파노와 어릿광대 트린큘로조차 이제 왕이 없으니 내가 왕이 되겠다고 덤빈다.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바뀐 것은 없다. 프로스페라의 분노와 복수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프로스페라는 시종일관 평온한 모습이다. 위기감이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 프로스페라는 첫 장면에서부터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고 있다. 그렇게 오래도록 거듭 모반을 계획하고, 공(화)국을 뒤흔들어 왕국을 꿈꿨던 자들의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분노가 없을 수 있을까? 프로스페라의 마법의 시간과 관객의 시간이 따로 흐른다. 공연은 태풍의 눈 속 기이한 고요함을 보여준다.

공연은 거의 원작 그대로 진행되지만, 삭제된 장면이 하나 있다. 알론자 일행이 난파당해 헤매면서 배고픔에 음식이 잔뜩 차려진 환영을 보는 장면이다. 알론자는 아들을 잃은 슬픔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몸이 느끼는 허기에도 고통받는다. 그런데 프로스페라와 마찬가지로, 알론자에게도 고통은 삭제되었다. 더더욱 프로스페라의 용서와 화해는 갑작스러운 결말로 느껴진다. 기이하다. 몸과 마음의 고통이 지워진 표백된 세계, 이건 공포의 섬이 아니던가.

마지막 장면에서 미란다는 인간들의 무리를 보고 환호한다. “오, 아름다운 인류여, 멋진 신세계야!” 이 말은 나중에 올더스 헉슬리의 SF소설 ‘멋진 신세계’의 제목이 된다. 감정을 ‘소마’라는 알약 하나로 통제하고, 하루 치의 알약을 배급받으며 살아가는 사회. 헉슬리의 암울한 미래적 상상력이 이 작품의 마지막과 오버랩되는 것은 또 어찌된 일일까?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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