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 in peace
전 ‘객석’ 발행인 윤석화 1956~2025
나는 배우입니다
인생을 연극처럼 살면서 자신과 주변까지 멋지게 연출했던 배우 윤석화에 대한 추억

필자가 절정기의 윤석화 배우를 무대 위에서 만난 것은 2021년 10월 산울림소극장의 ‘자화상’이었다. 석화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던 것일까? 화가 조덕현이 헌정한 ‘윤석화 오마주’ 이미지가 투시된 샤막 뒤편에 환영처럼 나타난 윤석화가 “나는 배우입니다…”를 수어로 연기하는데 그 인상이 육필로 쓴 시처럼 처연하고 강렬했다. 연기 인생 50년을 앞둔 배우 윤석화가 돌이켜 본 자화상은 ‘돌꽃’이란 이름처럼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때로는 세파에 흔들리고 상처받은 갈대였고, 그럼에도 굳건히 무대를 지켜온 나무였다.
소극장을 채운 관객들은 윤석화의 ‘찐팬’들이었다. 응원이 함성부터 공감의 박수까지 연극 속의 한 요소로 작동했다. 윤석화의 특기는 관객과 대화 형식으로 진행하는 커튼콜이다. 이날도 관객들에게 감사한다는 대목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자리에는 50년 가까이 제 연기를 지켜본 정중헌 선생님이 계셔 떨렸다”고 말해 잠시 당황했지만 고마웠다. 공연 후 산울림카페에서 맥주 한 병 나눠 마시며 임수진 극장장, 이인애 무대미술가 등과 담소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윤석화 배우는 필자에게 ‘1일 극장의 하우스 매니저’를 제안했다.
매니저 역할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코로나 방역을 위해 안심콜을 부탁하고, 공연 시작 전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에티켓을 당부하는 일이었다. 인사말에서 필자는 형(석화는 필자를 형으로 불렀다) 아우로 46년 이어온 인연을 강조하며 “윤석화는 연륜이 더할수록 숨은 매력이 솟아나는 배우”라고 말했다.
석화는 공연 중 부상으로 발목을 다쳐 붕대를 감은 채 연기했다. 그 투혼을 보면서 석화는 ‘천생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결점까지도 개성으로 변화시킨 배우
윤석화는 1983년 자신이 아끼던 ‘신의 아그네스’를 실험극장에서 올려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그 절정에서 그는 단맛과 쓴맛을 함께 맛보아야 했다. 한쪽에서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지만 또 한쪽에서는 시기와 비난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화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가 허스키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자신의 결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석화다.
그런데도 그가 ‘무대의 스타’로 떠오른 것은 바로 자신의 그 결점을 장점으로 연출해 내는 탁월한 역량과 노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남의 결점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그 결점까지를 자신의 개성으로 살려내기는 어렵다.
이 점에서 윤석화는 남다른 매력과 멋을 풍긴다. 비싼 옷이 아니라도 포인트를 살려 세련된 외양을 살릴 줄 알고, 허스키한 목소리에 감정을 넣어 관객을 몰입시킬 줄 아는 배우다.(필자는 윤석화가 임영웅 연출로 산울림소극장에 올린 장 콕토의 ‘목소리’ 프로그램에 ‘자신의 결점까지도 장점으로 연출해내는 윤석화’라는 평문을 썼고, 이것이 이후 윤석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윤석화 배우가 남긴 주옥같은 작품들
윤석화의 본령은 연기지만 번역에서 연출, 안무, 때로는 제작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아왔다. 연기 또한 정통 리얼리즘에서 뮤지컬까지 폭이 넓다.
윤석화 배우는 한국 뮤지컬계의 초창기 뮤즈였다. 1980년에 태동해 1990년대에 한국에서도 선풍을 일으킨 뮤지컬의 고전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여주인공 아들레이드 역을 해낸 윤석화는 발랄한 춤과 노래로 무대를 휘저으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무렵 세 수녀 이야기로 장안에 선풍을 일으킨 뮤지컬 ‘넌센스’에서도 윤석화의 존재는 빛났다. 이처럼 한국 뮤지컬의 선구자 역할을 한 윤석화는 1995년 예술의전당에서 초연된 윤호진 연출의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배우 윤석화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아그네스 수녀이다. 미국의 극작가 존 필미어가 쓴 ‘신의 아그네스’는 1982년 봄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올려져 화제를 모았다. 당시 뉴욕에 거주했던 윤석화는 공연을 보자마자 빠져들어 4차례나 관람했다. 어렵게 희곡을 구해 귀국한 그는 직접 번역해 1983년 윤호진 연출로 실험소극장에서 공연, 대박을 터뜨렸다. 신과 인간, 기적과 사랑을 찾는 현대인들의 고뇌를 그린 이 작품은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았고, 윤석화는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정극에서 기억할만한 무대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를 그린 ‘덕혜옹주’(1995), 안중근 의사의 부자 이야기를 윤석화가 연출한 ‘나는 너다’(2010), 그리고 윤석화가 절망의 시기에 자신을 구원한 작품이라고 꼽은 ‘마스터클래스’(1998) 등을 들 수 있다.
1인극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보인 윤석화는 임영웅 연출의 산울림소극장에서 ‘딸에게 보내는 편지’ ‘목소리’ ‘하나를 위한 이중주’ ‘먼 그대’ 등을 롱런 했다. 그때 느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확한 눈물 타이밍이며, 하나는 엄청난 티켓 파워였다.
돌이켜보면 윤석화 배우는 치열하게 생을 살아왔다. 어려운 고비마다 오뚜기처럼 일어섰고, 자신을 보듬기조차 벅찰 때에도 이웃을 보살피는 배려의 삶을 살아왔다. 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아 후원금을 모으려 애장품까지 경매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당대의 배우 박정자·손숙 등과 트리오를 이루어 연극의 활성화에 나섰고, 후배와 팬들을 알뜰히 챙기던 그는 1년을 13개월처럼 바삐 살아온 진정한 연극인이었다.
※ 사후 발간된 서적 ‘윤석화, 우리는’(윤석화의 지인 50여 명이 그와의 추억을 담은 회고록) 중 발췌
글 정중헌(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
History
윤석화와 ‘객석’, 그 오랜 인연을 돌아보다
본지에 담긴 윤석화의 흔적과 손길을 모아보며
윤석화는 ‘객석’의 발행인을 시작한 1999년보다도 한참 전부터, 이미 ‘객석’과 연을 이어오고 있었고,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난 2013년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객석’이 창간 이래 40년을 넘기고, 통권으로는 500권을 돌파한 지금, 긴 세월의 파노라마 속에 윤석화가 남긴 흔적은 마치 돌 틈에 피어난 꽃처럼 군데군데 선명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시점에서, 그가 ‘객석’에 남긴 모습들을 돌아보자
#1984/1985
평생 인연의 시작
‘객석’에 나타난 윤석화의 첫 번째 순간은 1984년 12월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그는 연극인이자 ‘객석’의 뉴욕주재상담역으로 브로드웨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연 더스틴 호프만을 취재하며 처음 이름을 올렸다. 그때는 아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객석’과 맺을 긴긴 인연의 미래를.
1985년 4월호, 그는 미국의 유서깊은 배우학교
‘리 스트라스버그’ 취재 건으로 다시 한 번 이름을 올렸다. 개방적인 교육 방침을 추구한다던 학교였으나, 취재 요청에는 거절만 돌아왔다고. “그렇지만 한국인의 은근과 끈기를 발휘하여 카메라를 둘러메고 평소 약간 알고 지내던 미사 제콥 교수를 대동하고 직접 부딪혀보기로 했다.”
#1992
인터뷰어에서 인터뷰이로
7년의 세월이 흐르고 1992년 4월호가 발간됐다. 윤석화는 오랜만에 ‘객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차이가 생겼다면, 이제는 취재 기자 신분이 아닌, 본인이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는 1인극 ‘딸에게 보내는 편지’의 주역으로 ‘객석’에 첫 인터뷰를 남겼다.
이후에도 그는 ‘아가씨와 건달들’의 아들레이드 역으로 1994년 2월호, 산울림소극장의 개관 10주년을 취재한 1995년 4월호에 얼굴을 드러냈으며, 이후 연극 ‘마스터클래스’의 마리아 칼라스 역을 통해 1998년에만 2월호, 4월호에 연이어 모습이 담겼다.
#1999
발행인의 자리에 오르다
1999년은 ‘‘객석’의 발행인’ 윤석화의 시작을 알리는 해이지만, 1999년 2월호에서는 그가 발행인이 신분이 되기 직전 진행한 마지막 인터뷰가 기록돼있다. 연극 인생 25주년을 맞이하여 지난날을 돌아보는 기념 취재였다. 윤석화를 일약 스타덤으로 올린 화제작이자, 윤석화에게는 운명과도 같았던 연극 ‘신의 아그네스’가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상징물처럼 다뤄지는 가운데, 기사의 말미에는 그가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25년 연극 인생을 정리할 수도 있다는 묘한 여지의 발언을 남겼다. 어쩌면, 올해 안에 그에게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예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발행인으로서 윤석화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99년 9월호이다. 그는 ‘아름다운 배경, 그리고 헌신’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15년 전 뉴욕 통신원으로서 궁핍했던 유학 시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객석’과의 첫 만남을 회고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지금까지의 ‘객석’이 빚어질 수 있었다는 감사를 표현하였다.
“그 감사를 기억하면서… 이제 다시 시작합니다. 부족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겠습니다.”
#2000
그러나 여전히 놓지 않은 연극배우의 삶
윤석화는 ‘객석’ 발행인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놓지 않았다. 바로 이듬해에 발간된 2000년 4월호에서는 그가 여전히 연극계의 거장으로로서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연극계의 ‘빅3’ 혹은 ‘세 요물’이라고 불리는 3인의 여성 연극배우 박정자·손숙과 함께 해당 호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하였다.
#2005
0.5센티미터의 머리카락
2005년 한 해에만 윤석화는 ‘객석’에 총 3번을 등장한다. 그중 2005년 2월호는 연극 ‘위트’의 주인공으로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눈에 띄는 것은 삭발한 머리다. ‘위트’의 주인공 비비안은 말기 암을 앓는 환자인데, 윤석화는 이 역을 위해 삭발이라는 결단까지 감행했다. 기사에 의하면 ‘덕혜옹주’(1995) 이후 두 번째 삭발이었다.
#2008
다시 돌아온 아그네스
2008년 12월호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커버스토리를 장식한다. 연극배우 인생으로 30년을 맞이하며 특별 기사로 등장했던 2006년 5월호 이후 그 이듬해부터 1년간은 연극판을 떠나 은둔의 시기를 거쳤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왔다. 25년 전이라는 세월 동안 윤석화의 페르소나로 자리잡은 ‘아그네스’ 재공연으로.
#2013
‘객석’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안녕’
발행인의 자리에 오른지도 어언 1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1999년 발행인이 되기 직전 인터뷰를 남겼던 것처럼, 2013년 4월호에도 그가 발행인을 내려놓기 전 남긴 흔적이 있다. 영국판 ‘보그’의 전 아트 에디터였던 패트릭 킨먼스와 함께 진행한 대담이 그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굳건하게 ‘객석’을 지켜 온 끝에, 그는 2013년 11월호 발간을 마지막으로 발행인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발행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함께 가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12월호 권두 메시지에 남아있다.
#2019
‘객석’에 남긴 그의 마지막 자취
발행인 자리를 내려놓은 이후에도 윤석화는 2015년 6월호, 2016년 3월호에 연이어 단독 인터뷰를 이어갔으며, 2016년 10월호에는 뮤지컬 배우 양준모와의 2인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 후, 2019년에 그는 마지막 자취를 남긴다.
2019년 6월호, 연출가 김태훈과 함께 진행한 2인 인터뷰는 오랜만에 얼굴을 비춘 윤석화의 모습. 드문드문 백발이 쇤 머리에서 세월의 흔적이 감지되지만, 그가 지닌 기품과 카리스마는 그대로였다. 그의 연극 배우 생활이 40년을 훌쩍 넘긴 시점에 행해진 이 인터뷰는 그가 2002년에 직접 세우고 운영을 이어 온 설치극장 정미소의 폐관 공연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그런 윤석화도 이제는 안 되는구나 하는 자괴감은 있다. 그러나 그 또한, 이것이 한계라면 인정해야 한다. 이제는 배우, 자연인이거나 엄마, 이렇게 살고 싶다.”
70세 생일을 한 달 가량 앞두고 2025년 12월 19일 세상을 떠난 그의 명복을 빈다. ‘객석’은 IMF란 어려운 시기에 책을 인수해 그가 쏟아부은 오랜 헌신과 노력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2019년 6월호 기사의 에필로그를 인용하며 그녀에 관한 추억을 마친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때가 왔다며, 자신은 ‘페이드아웃’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억은 영원할 수 있다. 그는 결코 관객의 기억에서 페이드아웃 되지 않을 것이다.”
글 최성혁 기자 사진 ‘객석’ 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