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에릭 루, 쇼팽으로 증명하고, 슈베르트로 확장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2월 2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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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에릭 루

쇼팽으로 증명하고, 슈베르트로 확장하다

 

작년 11월의 쇼팽 협주곡 2번(KBS교향악단)으로, 돌아오는 2월을 다시 채색한다

 

 

“원래 음악에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인데, 왜 형식이 필요합니까?”

너무나 자명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들리는 이 근원적 의문을 던졌던 클로드 드뷔시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음악을 만들어내는 음악인에게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야 할 것 같다. 하나둘 우리 곁에서 퇴장하는 음악인들의 모습이 아쉽고, 이른바 ‘데뷔 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도 경이롭지만, 애초에 시작도 끝도 없이 음악과 함께할 운명을 지닌 그들에게 ‘시작’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난해, 피아노계의 챔피언이 된 에릭 루(1997~)의 경우도 그 경력의 ‘시작’을 따지기가 수월치 않다. 쇼팽 콩쿠르를 우여곡절 끝에 정복한 사건은 참으로 소중하나, ‘데뷔’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기성 피아니스트다.

2015년 쇼팽 콩쿠르 4위, 2018년 21세의 나이로 리즈 콩쿠르 우승을 거머쥔 그는 탁월한 기량과 주력 레퍼토리를 통해 일찍이 애호가들에게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아직 20대임에도 스타일과 개성에 대한 분석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니, 에릭 루의 피아니즘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보다는 그가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보는 편이 더 의미 있어 보인다. 때마침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슈베르트 즉흥곡 음반(Warner Classics)이 출시되었다.

 

‘젊은 슈베르트 전문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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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는 에릭 루가 쇼팽 이상으로 자신의 시그니처로 삼아온 작곡가다. 리즈 콩쿠르는 물론, 그보다 앞서 연주했던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 루빈스타인 콩쿠르 등에서도 그의 주력 레퍼토리는 슈베르트였다. 서정성의 정곡을 파고들면서도 무대에서의 생동감과 아우라를 맘껏 발산하는 루의 슈베르트는, 10대의 연주자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완숙함을 품고 있었다. 에릭 루의 음원을 감상하는 건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불리기 전, ‘젊은 슈베르티언’의 면모를 탐구하는 흥미로운 작업이 될 듯하다.

2022년 공개된 슈베르트 음반(Warner Classics)에는 두 작품이 담겼다. 그중 소나타 20번 D959는 피아니스트들이 가장 넘고 싶어 하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 슈베르트 특유의 긴 호흡으로 노래해야 하는 무한 선율의 처리가 바로 그것인데, 루는 타고난 집중력과 적당히 물기 어린 음상으로 여운이 짧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구조적 약점을 아름답게 소화해 낸다.

아기자기한 변신도 흥미로운데, 1악장에서는 자유로운 프레이징으로 작곡가의 환상성을 마음껏 펼치지만, 2악장 안단티노에서는 정공법을 택해 과장을 지양한다. 발랄한 템포 속에서 명도를 낮춰 차분함을 은유한 3악장 스케르초를 지나, 4악장에서는 모든 요소를 포용하되 이 모든 것이 서른한 살 슈베르트의 세계였음을 내재된 에너지로 설명한다.

후반부에 실린 소나타 14번 D784에서는 한층 ‘올드스쿨’한 해석이 인상적이다. 슈베르트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장대함을 음향으로 구현한 1악장은 무겁고 비장미가 넘친다. 센티멘털의 감정을 스쳐 지나가는 상념으로 해석한 2악장 안단테를 지나,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는 화려함이나 유희성보다 작곡가의 눈물과 분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차세대 피아니스트의 다채로운 초상

여덟 곡이 모두 실린 즉흥곡 음반은, 지금까지 에릭 루가 꿈꿔온 음악 세계의 이상적인 축소판으로, 오랜 시간 즐겨 연주해 온 ‘4개의 즉흥곡’ D899 네 곡은 젊음이 쌓아 올린 연륜으로 고독을 풀어낸 명연이다. 감각적인 아름다움보다 뉘앙스로 나타난 그림에 주력하는 자세는 우아한 1번에서 가장 잘 나타나며, 섬세한 정서가 명랑한 활기보다 더 잘 느껴지는 2번도 인상적이다. 과장 없이 묵묵한 자세로 음표를 하나씩 헤아리듯 시상을 펼치는 3번이 지향하는 세계는 한없이 포근하며, 침착한 템포 속 뜨거운 열정을 품은 4번은 슈베르트가 이승에 남겨 놓은 미련처럼 느껴진다.

이어지는 즉흥곡 D935에서는 한층 사려 깊은 자세를 보인다. 자유롭게 배열한 프레이징을 통해 과감한 루바토도 선보이는 1번과 멜로디 라인에서 다양한 색채감을 선보이는 2번은 듣는 이에게 청량감을 선사한다. 변주곡인 3번에서 루의 진행 방식은 평생을 슈베르트와 함께 살아온 사람처럼 노련하고 관조적이다. 격조 높은 분위기와 함께 모노 톤이지만, 그 안에 세분화된 음영을 덧입히는 기술 역시 탁월하다. 화려한 4번에서는 충분히 비르투오시티를 펼칠 수 있음에도, 탄력 있는 리듬과 선율이 빚어내는 어두운 정서를 나타내는 데 주목한 자세 역시 현명하다.

화려함을 거부하고 작곡가들이 만들어 낸 침묵과 고독을 차분하게 그려내는 태도 때문에, 일각에서는 에릭 루를 두고 ‘젊은 라두 루푸’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나, 그런 비교를 하기엔 앞으로 펼쳐낼 새로운 색깔이 많은 연주자임이 분명하다.

지난해 11월 KBS교향악단(레너드 슬래트킨 지휘)과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에 이어 오는 2월, 다시 한번 쇼팽의 같은 협주곡으로 한국 청중과 만날 에릭 루의 무대(2.3/예술의전당 콘서트홀)는 카리스마 넘치는 폴란드의 거장 안토니 비트, 그리고 쇼팽 콩쿠르에서 조력자였던 바르샤바 필하모닉이 함께해 더욱 특별하다. 지금껏 그래 왔듯, 우리는 세계 무대를 이끌어 갈 차세대 피아노 리더의 성장을 이 순간 목도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주영(서울사이버대 피아노과 교수) 사진 마스트미디어

 

에릭 루(1997~) 2018년 리즈 콩쿠르 1위를 차지하고 다음 해에 워너 클래식과 독점 계약을 맺었다. 2019~2021년 BBC 뉴 제너레이션 아티스트로 선정됐으며, 2021년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를 수상했다. 아스코나스 홀트 소속이며, 2015년 쇼팽 콩쿠르 4위 입상에 이어 2025년 재도전해 우승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제19회 쇼팽 콩쿠르 위너스 갈라

2월 3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피아노 독주(케빈 첸·쿠와하라 시오리·윌리엄 양·피오트르 알렉세비츠·왕쯔통)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에릭 루, 안토니 비트/바르샤바 필하모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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