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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서재형 & 극작가 한아름
뒤돌아보지 않는다 뒷걸음치지 않는다
뮤지컬 신작 ‘적토’가 온다. 말의 해에 ‘말(馬)’의 이야기로, 인간사에 남길 ‘말(言)’을 남기며

서재형
“뮤지컬 ‘적토’는 단순한 말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를 ‘말’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호적토를 이긴 토적토는 조조와 관우를 거쳐 결국 마굿간으로 돌아온다. 사람도 그렇지 않나? 상승하려 하고, 꿈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어느 시점이 되면, 결국 본인이 돌아올 자리, 일종의 ‘마굿간’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일생에는 누구에게나 올라감과 내려감이 있는데 무엇으로 올라갈 것인지, 내려가더라도 그간의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다”(서재형)
이 질문에서 3월의 신작, 뮤지컬 ‘적토_고삐와 안장의 역사’가 출발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2025년 선정 작품으로, 삼국시대 명마 ‘적토’의 시선을 빌려 인간의 욕망과 선택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망한다. 작품의 탄생은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 과정 지원(2022), 대본 공모(2023), 올해의신작 선정(2025)에 잇달아 이름을 올리며 개발 단계부터 기대를 모았다.
그간 뮤지컬 ‘영웅’의 안중근, ‘윤동주, 달을 쏘다’의 윤동주 등 실존 역사 인물들을 다룬 작품들을 잇달아 집필하며, 고전 원작의 색다른 ‘비틀기’를 선보여 온 극작가 한아름의 시선이 이번에는 고전 ‘삼국지’를 향했다. 개막을 한 달여 앞두고 거리가 꽁꽁 얼어붙은 밤, 서재형·한아름 부부를 만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마굿간’의 의미에 대하여 물었다.
이상을 향해 달리다가 돌아올 자리, 그 사이에서

한아름
‘적토_고삐와 안장의 역사’(이하 적토)는 올해 붉은 말의 해(병오년)라는 시간적 맥락, 그리고 극단명 ‘죽도록달린다’와 맞물려 읽힌다.
서재형 주변에서 물어보면 올해를 겨냥했다고 한다(웃음). 사실 의도적으로 맞춘 건 아니었고, 작년 작품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올해의신작’으로 선정이 되면서 2026년 무대에 본격적으로 오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올해가 병오년이며, 색깔까지 붉은 말이라 신기했다. 그야말로 60년 주기에 맞아떨어진 작품 아닌가? 때마침 홍보팀에서 카피 문구를 ‘우리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라고 제안을 해줬다. 우리 극단명과 맞아떨어진 셈이다. 그저 잘 되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간 ‘오이디푸스’ ‘리처드 3세’ ‘작은 아씨들’ 등 고전을 토대로 하되, 늘 색다른 방식의 원작 각색을 보여주었다.
한아름 고전을 읽다 보면 설명되지 않는 ‘구멍’이 늘 보였다. 그 지점이 각색의 출발점이었으며, 원작을 비튼다기보다는 그 빈칸을 ‘서사로 채운다’에 가깝다. 이번에는 ‘삼국지’를 읽다가 전쟁마의 수명이 눈에 들어왔다. 말은 인간보다 짧게 사는데, 여포·조조의 말을 거쳐, 다시 관우의 말이 되는 것은 이미 영웅서사의 허구다. ‘적토는 한 마리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의 질문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작품에서는 두 마리의 적토가 등장하는 것인가?
한아름 ‘적토(赤兔)’의 ‘토’는 토끼를 뜻하는 ‘토(兔)’로 쓰이기도 하고, 호랑이 ‘호(虎)’자로 쓰이기도 한다. 명마를 일컫는 단어에 어쩌다 ‘토끼(兔)’가 붙은 건지 궁금해서 자료를 찾다 보니 두 가지 표기가 공존하는 것을 알게 됐다. 작품에서는 ‘토적토’와 ‘호적토’가 등장한다. 토끼 적토로 놀림 받던 말이, 타고난 군마인 호랑이 적토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다시 쓰는 이야기다.
주인공 ‘적토’는 관찰자의 역할 뿐 아니라, 인생이란 통찰력을 배우는 존재다.
서재형 언뜻 전쟁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의 인생을 비춘다. 배우들에게도 그런 상상을 주문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은퇴하는 날, 옷을 벗는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가족은 어떤 눈빛으로 바라볼지, 그는 잘 살아낸 인생이었는지. 답을 제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다만 이 시선으로 작품을 바라봐주길 바란다. 연극처럼 깊이 사유하는 방식과 다를 수 있지만, 뮤지컬 안에서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말에게 배우는 ‘인생’의 통찰
군마에게 고삐와 안장이 얹히는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가치가 생긴다. 스스로 길을 택하지 못한 채, 타인의 결단에 따라 내달리는 운명. 적토의 생애 역시 그러했다. 첫 주군 여포의 패망 이후 조조의 수중을 거쳐, 다시 관우에게로 옮겨지며 적토는 영웅들의 손을 전전했다.
문득, 어릴 때 읽었던 ‘삼국지’에서 그 유명한 관우와 적토의 오관문 돌파 대목이 떠오른 터였다. 조조 휘하에 머물던 관우가 조조에게 선물 받은 적토를 타고 다섯 개의 관문을 넘어 조조의 군사들에게서 벗어나는 그 질주의 장면 말이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질주와 움직임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극단 죽도록달린다답게, 말이 등장하는 이 작품에서도 ‘달림’과 ‘넘음’의 체감이 중요할 것 같다. 중점을 둔 연출 포인트는 무엇인가?
서재형 달리고, 격한 안무도 해내야 하고. 중국의 오관문을 지나려면 부산을 족히 세 번은 왕복해야 할 거리라고 미리 배우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대본에는 단지 ‘오관문을 뚫고 달린다’라고만 적혀 있지만, 본 무대에서는 그 문장을 실제 시간과 체력으로 환원하고 싶었다. 또한 마음이 맞는 주군과 함께 가는 길이니 얼마나 기쁠까? 상상하는 장면 속에서 긍정적이고 즐겁게 달려야 한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적토’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핵심은 무엇인가?
한아름 적토가 주군을 잃어버리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그 대목이 가장 뭉클했다. 인간의 삶으로 치면, 신념·상황·건강을 잃는 것과 같다. 인간은 누구나 자의든 타의든 방황하는 시간을 겪는다. 하지만 스스로 깨치고 일어나는 것 역시 본인이다. 그 장면이 ‘적토’를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무너질 때에도 스스로를 과연 어떻게 일으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적토와 관우의 관계는 무엇일까?
한아름 사실상 마지막 ‘주군’. 젊을 때는 내 생각이 옳고 인생을 다 안다고 자부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타협도 하게 되고, 방향을 바꿀 용기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원하지 않더라도 운명이 다른 길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은 결국 마굿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결국 고삐는 누가 쥐고 있을까?
여포는 최고의 무사였다. 자신이 모든 것을 돌파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 마치 패기와 열정이 그득한 우리의 젊은 날처럼. 최고의 군마 적토 역시 무엇을 향해 달리는지 모른 채 조조의 말이 되어 수많은 죽음을 태우고 다니며 그저 살아남는 존재로 남는다.
그러다 마지막 주군인 관우를 만나게 됨으로, ‘내가 주군을 모시는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선택하여 태운다’는 더 이상 수동적인 말이 아닌, 주인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스스로를 자각한다.
결국 관우는 처형되고, 적토는 굶어 죽는다. 흔히 이를 충성이라 해석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적토에게는 여한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미 충분히 달렸고, 자신의 몫을 다했기에 멈춘 것이라고. 우리 각자에게도 그런 ‘관우’가 있을 것이다. 아직 만나지 못했는지, 이미 지나쳤는지는 알 수 없다. 궁금했던 기자가 “주군을 만났는가요?”라고 묻자 한아름이 답한다.
“결국 이 작품이 그 질문의 답인 듯하다. 작가로서도 나는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고 느낀다. 중요한 것은 끝에 어떤 생각으로 내려오느냐다. 마지막 전투에서 무얼 붙잡고 있었는지, 우울로 멈출지, 아니면 한때 초원을 달리고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던 시간을 떠올릴 것인지. 언젠간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마지막 작품이 나의 ‘관우’가 될지도. 모든 것을 갈아 넣고 끝까지 달린 뒤, 그 자리에서 ‘나는 충분히 달렸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집요한 연출로 디테일을 완성하다
연출가 서재형이 생각하는 ‘협업’은 비슷한 수준의 창작자들이 모여 서로를 대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조직은 그렇게 이상적으로 구성되기 어렵다. 공연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에 하나가 어긋나면, 모래성처럼 물이 들이차 부서진다.
그래서 서 연출가는 총대를 멘다. 잔소리라 불릴지라도, 끝까지 관여하는 편을 택한다. 연출은 결국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수정과 지시가 오간다.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순간, 작업자들은 그가 흘려둔 말들 속에서 답을 찾는다.
“컬러는 보라색으로, V컷으로 바꾸죠. 14cm 말고 17cm로, 석고는 쓰지 말고.” “트럼펫 대신 기타 리드로 갑시다.” 서재형의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빠르다.
“작가의 시간이 존재하고, 연출가의 시간이 존재한다. 한아름 작가가 아이디어를 쏟아내어 내게 원고를 건네는 ‘중간고사’ 시즌이 지나면, 그걸 구현해 내는 나의 ‘기말고사’ 시즌이 시작된다. 아이디어를 듣고 정리하는 시기에는 이성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앞서지만 내 파트를 맡는 순간, 직관과 감각을 총동원해 끝없이 쏟아붓는다. 창작의 근원은 ‘끊임없는 집중’이며, 오히려 멈추는 순간 아이디어는 흩어진다. 이 감각은 시냅스처럼 연결되어 있다. 늘 켜져 있고,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래서 작업은 생각보다 고단하다”(서재형)
우리는 달렸고, 또 달려나간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20여 년 전, 출발부터 물러섬이 없었던 이들이었다. 2004년, 극장 위를 가로질러 질주하며, 땀의 미학으로 무대를 가득 채운 작품 ‘죽도록 달린다’를 시점으로 2,500년 전 그리스 비극 작품에 판소리를 더해 자식에게 칼을 밀어 넣는 희대의 악녀를 강렬히 내세웠고(‘메디아’, 2013), 영국 대문호의 문제작으로 평가받는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여 꼽추왕 리처드 3세의 광기 어린 폭주를 날 것 그대로 드러냈다(‘리처드 3세’, 2018). 그렇다고 이들의 작품세계가 매번 격렬하며, 도드라진 색깔만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두 전우는 낮고 그늘진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는 토너먼트(‘토너먼트’, 2010)를 함께 통과하며, 세상에서 가장 낮고 미천한 인물들을 비췄고(‘왕세자 실종사건’, 2005),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갈 때 호송한 금부도사 왕방연(‘아비 방연’, 2015)에 상상력을 부여해 아버지의 고뇌와 슬픔을 그려내었다.
2004년 데뷔 이후, 20년 이상 함께 작업을 해왔다.
한아름 서 연출가와 오랫동안 작업해 오며 연극과 뮤지컬은 물론, 창극·오페라·발레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당시 ‘융복합’이라는 용어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일반 극작가에 비해 나는 비교적 폭넓은 장르 경험을 갖게 된 셈이니까. 서재형 연출가는 대본 작업에서 작가의 상상력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말을 달리고, 우주에 나가도 되고. 구현의 문제는 연출의 몫이라고 뚝심 있게 이끌어 주니, 상상의 범위를 스스로 제한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 작업에서는 역할 분담과 그 판단의 주도권이 명확할 듯하다. 서로 간의 협업에서 절대 넘기지 않는 업무는 무엇인가?
한아름 정산 사수. 오롯이 나의 몫이다.(웃음) 사실 서 연출가가 관여하지 않는 곳은 없다. 나는 대본에 대해서 내려놓는 편이다. 연습실 가면, 두 줄 지워져 있고 채워져 있기도 하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지?” 하면서. 22년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 결국 서 연출가도 작가다.
커다란 성과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 나아가는 인상을 받는다. 예술 안에서 안주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가?
한아름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직업이 되었고, 인생이 되었다. 예술적 경로를 의식하던 때는 어릴 적 이야기고, 지금은 살아가는 방식에 가깝다. 다만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더 강하다. 밑바닥도 경험해봤고, 영광의 순간도 겪어봤으니 그 맛이 얼마나 달고 또 얼마나 쓴지 아는거다.
서재형 어떻게 해도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은 안 된다. 결국은 또 다음 작업을 하는 것뿐이다. 모든 스태프가 고생한 만큼, 열심히 연습해 무대 위에서 잘 풀어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쫑파티에서 우울하지 않을 정도라면, 그 정도로 되지 않을까.
글 유내리 기자 사진 PRM·극단 죽도록달린다
서재형(1971~) 서울예대 연극과를 졸업했다. 연극 ‘메피스토’, 뮤지컬 ‘주홍글씨’ ‘왕세자 실종사건’ 등의 연출을 맡았으며, 무용·오페라·창극 등을 연출해왔다. 올해의 예술상(2005)·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9) 등을 수상했다. 극단 죽도록달린다의 대표다.
한아름(1977~) 서울예대 극작과를 거쳐 파리 8대학에서 연극과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뮤지컬 ‘영웅’ ‘윤동주, 달을 쏘다’, 연극 ‘호야’ 등의 작품을 집필했으며, 올해의 예술상(2005)·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9)·한국뮤지컬대상 극본상(2010) 등을 수상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극단 죽도록달린다 ‘적토_고삐와 안장의 역사’ 3월 7~29일 SH아트홀
서재형(연출), 한아름(극본), 최희영(음악), 이선·서재형(안무), 정승호(무대) 외/ 신은총·조민호(토적토) 최수형·박민성(절영) 외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3월 공연
음악
문소문 ‘낭만을 빌려주는 노인’ 3.13~15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최진석 ‘Four Pieces for Orchestras’ 3.27~29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연극
극단 돌파구 ‘튤립’ 3.1~8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극단 적 ‘내가 살던 그 집엔’ 3.7~1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극단 Y ‘디사이딩 세트’ 3.13~22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극단 58번국도 ‘해녀 연심’ 3.14~22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뮤지컬
북극성 ‘초록’ 1.27~3.29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3관
주식회사 홍컴퍼니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 1.27~4.26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
주식회사 창작하는 공간 ‘ROGER’ 3.5~5.31 NOL 서경스퀘어 스콘 2관
주식회사 엔제이원 ‘조커’ 3.12~29 극장 온
무용
수 댄스컴퍼니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3.6~8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SAL ‘X’ 3.19~22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모므로살롱 ‘성인물’ 3.27~29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통예술
박용휘 ‘봄을 안고 온 아이’ 3.20~22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