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UNITED KINGDOM Film Score
막스 리히터 ‘천상과 지상’ 1.19
단 한 번의 호흡으로 새긴 애도의 선율
2월 25일 국내 개봉한 영화 ‘햄넷’의 음악이 리히터의 독특한 방식으로 음반에 기록되었다
지난 1월 19일, 런던 사우스워크 대성당에서는 영화 ‘햄넷’의 음악을 라이브 오케스트라 연주로 선보이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데카(Decca) 레이블이 주최한 이 행사는 성당이라는 공간을 영화 속 세계관으로 확장했다. 흙과 낙엽, 촛불로 꾸며진 내부에는 실제 촬영 소품들이 전시돼 영화의 배경인 16세기적 분위기를 짙게 풍겼고, 셰익스피어 조각상 역시 꽃으로 장식돼, 역사적 장소와 영화의 가상 세계가 묘하게 겹치는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기록되지 않은 상실, ‘햄릿’ 이전의 이야기

사우스워크 대성당 ©GETTY/DECCA_Sienna Lorraine Gray
막스 리히터(1966~)의 웅장한 음악을 담기에 사우스워크 대성당은 너무 작았다. 그러나 왜 이곳이어야만 했는지는 성당 안에 들어서는 순간 분명해졌다. 성당 한편에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조각상이 셰익스피어라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상 아래에는 ‘수년간 이 교구에 거주했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기리며(1564~1616)’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셰익스피어가 글로브 극장을 오가며 작품 집필에 몰두하던 실제 생활 반경이자, 그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장소다. 대성당 정원에는 창작의 열정에 불타던 30대 초반 셰익스피어의 동상이 서 있고, 남쪽 통로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그가 창조한 햄릿,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인물들이 장식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전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작가다. 그런 그의 생애에서 드물게 확인되는 사실 중 하나는 열한 살에 세상을 떠난 아들 ‘햄넷’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햄넷(Hamnet)’과 ‘햄릿(Hamlet)’이 구분 없이 사용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단 한 줄의 사망 기록에 상상력을 더한 매기 오파렐(1972~)의 원작 소설은 클로이 자오(1982~) 감독을 통해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영화 ‘햄넷’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그 깊은 상실감을 어떻게 ‘햄릿’이라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는지를 섬세하게 따라간다. 그리고 이야기와 영화가 지닌 슬픔의 깊이를 완성하는 데 있어 막스 리히터의 음악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단 한 번의 연주와 녹음이 갖는 의미

막스 리히터는 2026년 신년 서훈(New Year Honours)에서 음악 공로를 인정받아 CBE(대영제국훈장)를 받은 독일 태생의 영국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에든버러 대학교와 런던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이탈리아 근현대음악의 거장 루치아노 베리오(1925~2003)를 사사하며 독자적인 음악적 사고를 정립했다. 리히터는 오페라·발레·영화·드라마 등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협업을 통해 인간의 깊은 감정을 음악으로 번역해왔다. 특히 고전적인 관현악 구성에 현대적인 전자 음악을 결합하는 방식은 그를 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인식하게 했다.
연주에 앞서 마련된 대담에는 영화 ‘햄넷’에서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역을 맡았던 배우 에밀리 왓슨(1967~)이 진행자로 나섰다. 리히터와 함께 무대에 오른 왓슨은 음악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곧 이어질 라이브 연주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리히터는 ‘햄넷’의 음악이 엘리자베스 시대의 악기 편성과 문법에서 출발했지만, 단순한 시대적 재현을 넘어 인물의 내면에서 음악이 직접 솟아나도록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질의응답이 끝난 뒤, 연주에 앞서 휴대전화가 완전히 종료됐는지 확인해 달라는 안내가 이어졌다. 이번 공연은 일반적인 음반 제작 공정과 달리, 연주를 실시간으로 레코드판에 새기는 라이브 다이렉트 커팅(Live cut to vinyl)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정이나 편집 없이 단 한 번의 연주를 디스크에 그대로 각인하는 이 도전적인 시도는, 상실과 기억, 그리고 남겨진 흔적을 다루는 영화 ‘햄넷’이 던지는 삶의 본질적인 질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셰익스피어의 실제 삶이 깃든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라이브 커팅 방식을 택한 선택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상징이었다. 한 번 새기면 되돌릴 수 없는 음반의 속성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과 그로 인해 남겨진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떠올리게 했다. 대성당의 울림과 관객의 숨소리까지 담아낸 라이브 기록은 셰익스피어의 아픔을 지금 내 옆에서 숨 쉬는 누군가의 슬픔처럼 생생하게 전했다.
슬픔을 매만지는 예술의 생명력

에밀리 왓슨(좌), 막스 리히터(우) ©GETTY/DECCA_Stuart C.Wilson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자연광의 본질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Daylight)’였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런던에서 대규모 반전 시위가 일어난 직후 녹음된 이 음악에는 감정의 과잉을 거부하는 리히터 특유의 절제된 애도가 담겨 있다. 2004년에 발표된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햄넷’ 촬영 현장에서 재생되며 배우들이 영화의 분위기에 깊이 몰입하도록 도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클로이 자오 감독은 리히터의 음악에 맞춰 영화의 엔딩을 재구성했고, 대사가 아니라 침묵과 음악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연출을 택했다. 영화 ‘햄넷’이 가족의 상실과 사랑, 죽음을 말하면서 동시에 자연과 더 큰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인 만큼, 리히터는 이 음악에 “온 우주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전했다.
셰익스피어는 아픔을 희곡으로 승화시켰고, 매기 오파렐은 그 기록의 공백을 채워 소설을 썼으며, 클로이 자오는 이를 영상으로 빚어냈다. 그리고 막스 리히터는 그 흐름에 선율을 입혀 대성당의 공기와 함께 음반에 기록을 남겼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이어진 이 여정은, 인간의 삶은 유한할지라도 그 슬픔을 매만지는 예술의 생명력만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글 정재은(영국 통신원) 사진 유니버설 뮤직 그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