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표 성악가로 자리 잡은 로베르토 알라냐가 처음으로
연기한 오텔로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악천후로 인한 무대 위 돌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한 정명훈과 압도적인 목소리를 뽐낸
바리톤 고성현은 가장 큰 박수 세례의 주인공이었다
오랑주 페스티벌이 진행되는 안티크 극장에서는 로마 시대의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흠씬 느껴진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공연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오랑주 페스티벌 역시 1869년 이후 지속된 가장 오래된 프랑스 페스티벌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증명하고 있다. 이번 오랑주 페스티벌은 로베르토 알라냐가 처음으로 ‘오텔로’의 주인공을 맡아 화제를 모았다.
베르디의 마지막 걸작이라 불리는 ‘오텔로’는 바그너와 베르디가 오페라로 자신들의 예술적 역량을 증명해 보이던 시대, 바그너가 던진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라는 화두에 맞서 베르디가 그만의 방식으로 오페라의 새로운 경지를 선보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주인공 오텔로는 대립하는 내면적인 갈등을 드라마적으로 표현해내야 함은 물론, 관현악과 완벽하게 맞물린 고음과 직면하며 연기력과 성악적 역량 모두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 테너가 꿈꾸는 마지막 역할이라고도 불리는 오텔로에 처음으로 도전한 로베르토 알라냐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역할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랫동안 오텔로를 꿈꾸어왔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었지만 소중히 간직해온 꿈인 만큼 두려움 역시 무시할 수 없었죠. 테너로서 이토록 고음을 유지하며 전막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도 도전이고, 캐릭터의 다층적인 면 역시 그렇습니다. 어둡고 치명적이며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역할에 감정을 이입하는 데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내 경험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20대 중반부터 무대에 서기 시작한 이후부터 저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물론 스스로도 오텔로는 나를 위한 캐릭터라고 여겨왔습니다.”
‘절반의 성공’을 거둔 알라냐의 오텔로
파리 외곽의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알라냐는 스무 살이 넘도록 정식으로 성악 레슨을 받은 적 없었고, 피자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로 노래를 부르던 청년이었다. 타고난 목소리로 스물네 살에 콩쿠르 우승을 거쳐 깜짝 데뷔를 하고, 성공 가도를 달려왔다.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와 결혼하자 혹자들은 그가 오랫동안 훈련받은 기본기 탄탄한 아내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 1990년대 데뷔 직후에는 스리 테너의 다음 세대를 위한 테너라는 극찬을 받았으나, 타고난 소리의 전성기가 지난 이후 종종 컨디션에 따라 기복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왔고, 부족한 테크닉에 대한 지적 역시 피할 수 없었다.
모든 언론이 주목했던 로베르토 알라냐의 이번 도전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이방인으로서 베네치아의 총독이라는 자리에 올랐을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오텔로가 계략에 빠져 자신의 아내를 의심하고, 나중에는 아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일 만큼의 내면적 갈등을 전달하는 알라냐의 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섬세했고, 무어인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흔히 과장되게 하는 분장을 피해 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좋지 않은 컨디션 때문이었는지 알라냐의 성량은 야외 오페라극장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그 부족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오텔로가 지닌 베네치아 총독이라는 지위에 걸맞은 위엄과 카리스마를 갖춘 쩌렁쩌렁한 고음을 기대했으나, 이날의 오텔로는 그저 아내의 부정 앞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에 불과했다. 성량은 부족할지언정 혼신을 다한 연기를 선보이며 올해 탄생 450주년을 맞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적 요소는 충족시켰을지 몰라도, 인생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쏟아부어 오페라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예술로 승화시킨 베르디가 기대한 오텔로는 그곳에 없었다.
알라냐는 지난 20여 년간 오랑주 페스티벌에서 무수한 역할을 선보이며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성악가로 자리 잡았으나 이날의 공연은 아쉬움을 남겼다. 여기에 악천후로 공연이 하루 미뤄지면서 조명 사고가 잇따라 극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한 것도 문제였다.
돌발 상황에서도 빛난 한국의 음악가들
이날 가장 압도적인 목소리는 오텔로를 파멸로 몰아넣는 주범인 이아고 역의 바리톤 고성현이었다. 풍성한 성량을 자랑하는 그는 야외 오페라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퍼포먼스로 커튼콜에서 가장 큰 박수 세례를 받았다. 공연이 끝나고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고성현을 둘러싼 사람들이 쏟아낸 찬사처럼 그는 완벽한 이아고였다.
“오랑주를 다섯 번째 찾았는데, 올 때마다 안티크 극장이 가진 자연스러운 음향과 분위기에 압도당하곤 합니다. 이아고는 바리톤이 도전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역할입니다. 프로덕션의 규모와 수준을 생각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이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아고 캐릭터는 셰익스피어의 원작보다 베르디 오페라에서 더 두드러지죠. 한동안 이 여운에서 빠져나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리릭 테너로 로드리고 역을 맡은 젊은 성악가 쥘리앵 드랑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야기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명훈은 그저 경이로운 사람입니다. 맨손으로 리허설에 와서 오케스트라를 마치 몸의 일부라도 되는 듯 이끌었죠. 마치 베르디가 살아서 돌아온 것처럼 모든 파트를 다 꿰뚫고 있고,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성악가의 목소리가 하나 되는 순간에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알고 있더군요. ‘오텔로’가 지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사람 같아요. 인간적으로도 그는 남달랐어요. 리허설이 끝난 뒤 직접 찾아와 혹시 개선해야 할 점들이 있는지 물어보는 모습을 보면서 그와 같은 마에스트로가 크지 않은 역할을 맡은 사람까지도 이토록 배려한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조명 사고로 인해 연주 도중 오케스트라 파트의 조명이 꺼지고, 전체 오케스트라가 수 초 동안 암흑 속에서 연주를 지속해야 하는 가슴 철렁한 위기도 있었다. 생중계를 위해 출동한 프랑스 뮈지크 라디오는 물론, 프랑스2 채널의 카메라들까지 당황한 순간이었지만, 암보로 지휘하던 정명훈은 태연히 오케스트라를 이끌어나가며 말년의 베르디가 그토록 공들였던 걸작을 안티크 극장에 고스란히 가져다놓았다.
이날 악장을 맡은 아모리 코이토는 “조성이 바뀌는 순간에 사고가 발생해 당황스러웠지만, 흔들림 없이 침착했던 정명훈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파리에서는 오페라 레퍼토리를 연주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지라, 오랑주에서 성악가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그들의 노래에 맞춰 음악을 만들어가는 건 또 다른 경험이었어요. 수천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장소가 주는 마법적인 매력 역시 환상적이죠.”라고 말하며 이번 공연에 대한 소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