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탄생 450주년 기념 ‘로미오와 줄리엣’ 들여다보기 Part 1

희곡에 나타난 그들의 ‘그들의 영원한 사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9월 1일 12:00 오전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이 아닌 계속되는 사랑의 탄생을 보여주는 극이다. 항상 새롭게 태어나고

반복되는 도약이 사랑에 대한 충실성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다


▲ 프랭크 딕시 경 ‘로미오와 줄리엣’

PART 1

희곡에 나타난 그들의 ‘영원한 사랑’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의 이야기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사랑의 연극이다. 그러므로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연극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세상에는 결이 다른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다. 단테의 사랑, 베르테르의 사랑,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 이렇듯 다른 사랑들 중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어떤 차별성을 드러내는 사랑일까?

사랑하는 연인 앞에는 항상 장애가 놓인다. 신분의 차이, 오해, 욕심, 질투, 권력, 탐욕 등이 그들 앞에 놓인 장애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은 이 장애에 맞서 싸우고, 때로 파멸하고, 때로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에게 장애는 전적인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단지 누군가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 아니다. 세계 그 자체가 그들의 장애이며, 그렇기에 세계에 속한 그들 자신이 스스로의 장애물이다.

해설자가 베로나의 명망 있는 두 가문의 원한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소개하는 것처럼 이 연인의 이야기의 전제는 증오다. 이 작품 속에서 캐퓰릿과 몬태규 가(家) 베로나라는 세상의 전부다. 최근 박근형 연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잘 보여주었듯이 이 작품은 사랑의 이야기에 앞서 증오로 가득 찬 세상의 이야기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현대에도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이 극이 제시하는 인간 조건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조건과 불행히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캐퓰릿과 몬태규는 단지 예외적인 원한 관계에 휩싸인 두 가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 민족, 계급, 종교 등의 이름으로 반목하는 세상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이 보편적인 증오에도 불구하고 시작되는 두 사람의 사랑은 하나의 ‘사건’이다.

사랑 없는 세계를 거부하는 연인들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이 탄생하는 것이며, 랭보가 말했듯이 ‘삶을 바꾸기 위해서’ ‘사랑을 재발명’하는 순간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증오의 세상에 균열을 내면서 일순간에 도약한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 예찬’에서 사랑의 경험을 “플라톤이 이데아라고 부르게 될 무엇을 향한 도약”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이 도약은 세상이 잃어버린 진실을 경험하는 기적적인 사건이다. 바디우에게 사랑은 그 자체로 ‘사람이 등장하는 연극’ 다. 그 연극 중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장면인 발코니 장면을 상기해보자.

오 로미오.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아버지를 부인하고 그대 이름 거부해요

그렇게 못한다면 애인이란 맹세만 하세요

그럼 난 더 이상 캐퓰릿이 아니에요. (…)

그대의 이름만이 나의 적 일뿐이에요.

몬태규가 아니라도 그대는 그대이죠.

몬태규가 뭔데요? 손도 발도 아니고

팔이나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에요. (…)

그대와 상관없는 그 이름 대신에

나를 다 가지세요. (…)

아무 맹세 마세요.

하겠다면 품위 있는 자신에게 맹세하세요.

이 몸이 우상으로 숭배하는 신이니까.

일반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두 연인의 대화에서는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지적하듯이 달콤한 말로 상대의 환심을 사는 일종의 ‘마리보다주’가 있다. 이때 ‘언어는 살갗’이며 연인은 이 ‘언어로 서로를 문지른다’. 발코니 장면에서 관객들은 사랑하는 이의 말이 감각적으로 상대의 몸을 감싸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한다. 이 장면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단지 감각적인 유희를 넘어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세계를 다시 구축한다는 것이다. 몬태규, 캐퓰릿이라는 이름은 세계를 표상한다. 그런데 이들은 그 표상 자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증오의 세계, 사랑 없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두 연인은 사랑에 적대적인 이 세계를 이겨내지 못한다. 그들은 죽는다. 물론 죽어서도 그들은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죽음에서 특별한 것은 그들이 함께 죽지 못하고 따로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몬태규와 캐퓰릿이라는 두 세계를 대변하도록 설정된 것은 두 사람의 차이의 표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들은 죽음마저 따로 겪는다. 바디우는 진리를 구축하는 경험으로서의 사랑의 과정을 “둘이 등장하는 무대”라고 표현한다. 이때 사랑은 타자를 동일자 안에 품는, 혹은 타자를 내 안에서 경험하는 레비나스적인 사랑, 즉 희생적인 사랑과는 다른 인식을 보여준다. 바디우는 둘의 관점에서 형성되는 하나의 삶을 가정하는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이 보여주는 영웅주의가 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을 거부하는 모든 것에 영웅적으로 맞서 사랑을 소진시켰기 때문에 세계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다. 그들은 급진적이고 낭만적인 영웅이다. 반면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극적’이다. 두 길항하는 힘이 부딪히고 그 속에서 일순간 사랑이라는 관념이 무대 위로 그 몸을 지닌 채 도약한다. 줄리엣, 로미오라는 한낱 배역의 이름이 아니라 손과 발, 팔과 얼굴을 가진 몸을 지닌 사랑하는 이로서 등장하는 것이다. 발코니에서 그들은 서로를 부르며, 세상이 그들에게 준 이름을 벗고, 그들 자신으로서 서로를 부른다. 그들 자체로서 서로를 호명한 그 관계에 충실한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지속이다. 이 지속은 동화 속에서처럼 가정 안에서의 행복한 미래의 지속과 관련이 없다. 사랑이 아닌 세계를 거부하며 서로를 끊임없이 호명하는 이 관계가 바로 충실성이며, 지속성인 것이다.

그들의 죽음 이후 두 가문은 화해의 상징으로 두 연인을 위한 순금 조상을 세운다. 금으로 만든 상은 사랑의 지속을 위한 징표인 동시에 사랑의 박제화다. 순금이란 영원성과 동시에 본질을 벗어난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선가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한다. 순금의 조상으로 굳어진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손과 팔, 얼굴과 몸을 지닌 배우가 사랑 없는 세상을 거부하고 사랑을 향한 도약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음의 연극이 아니라 이처럼 계속되는 사랑 탄생의 연극이다.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반복되는 도약이 사랑에 대한 충실성이며 ‘로미오와 줄리엣’을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다.

글 조만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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