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생, 음악평론가로 시작해 무용평론가·연출가·정책가, 그리고 작가로서 동시대 예술을 ‘기록’하고 ‘기획’한 101세의 노장. 그의 이야기(His Story)는 곧 한국 예술의 역사(History)다. ‘객석’은 창간 기념호를 맞아 오랫동안 이 땅의 예술을 걸어온 선배를 만나 과거와 오늘, 미래를 들어보았다
박용구 선생은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실버타운에 살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세이장(洗耳莊)에서 평창동 빌라로, 그리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한 세기를 살아내며 예술의 첨단을 이끌어왔지만 선생은 이곳의 일상에 늘 놀란다.
“내 사진을 찍을 땐 체력단련실에서 촬영했으면 좋겠어요. 난 지극히 20세기 사람이고 단련실의 기계들은 21세기의 메커니즘으로 된 것이에요. 20세기의 사람과 21세기의 테크놀로지가 한데 어울리게 찍어보면 어떨까 싶어. 운동하는 모습은 ‘바이탈리티’도 있고 좋잖아.”
100세가 넘은 지금도 선생은 매일 읽고 쓰기를 반복한다. 메모에는 한글과 영어, 일본어가 뒤섞여 있다. 비록 마감이 걸려 있지 않은 원고지만, 미래 ‘인간족’(선생은 인간을 인간족이라 표현하신다)의 문화와 예술을 구상하는 데 요긴한 것들이다.
“100살이 넘으니깐, 육체는 게을러지고 움직이기는 싫어요. 그런데 머리는 유연해지고 명석해진다고. 그래서 옛날에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돼요. 거 이상하지. 하하. 요새는 2045년 인간족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
부인 정덕미 여사가 말하는 선생의 일상은 반복적이고 간단하다. 오전 11시 기상, 12시에 빵·치즈·달걀·커피를 든다. 오후 3시에는 체력단련실에서 40분 정도 운동을 한다. 낮에는 TV를 시청하고 책과 신문을 두루 읽는다. 애용하는 것은 TV조선, 일본 NHK의 드라마와 스모 중계. 틈틈이 소량의 간식과 낮잠으로 휴식을 취한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는 조금씩 글을 쓰고 책을 읽다가 새벽 1시쯤 잠든다. 그리고 새벽 3시경에 일어나 간식을 들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정덕미 여사는 낮잠과 간식을 즐기는 선생을 ‘착한 아기’에 빗대며, 한편으로는 독서와 집필로 인해 “눈이 괜찮은지 모르겠어요”라며 걱정한다.
2013년 백수(白首)를 맞은 선생은 여전히 ‘현역’이었다. 1966년 예그린악단의 단장 시절에 제작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개관 기념작으로 2월에 다시 올랐다. 선생에게 인터뷰와 강연 요청이 들어왔고, 이를 꼼꼼히 소화해냈다. 선생이 대본을 집필한 창작 발레 ‘심청’도 유니버설발레단에 의해 같은 해 5월 국립극장에 올랐다. 1986년 초연 이후 27년 만이었다. 두 작품의 귀환에 대해 이야기하며 “올해는 내게 겹경사야”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해 여름 ‘먼동이 틀 무렵’도 출판사 수류산방에서 출간됐다. 삼청동에서 가진 출판 기념회에는 평양고보 후배인 김동길 박사, 이강숙(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이상만·이순열(음악평론가), 최정호(음악평론가·전 연세대 교수), 황병기·한명희(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김혜식(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만약 그 자리에 폭탄이라도 떨어졌다면 한국 근현대예술사의 ‘중허리’가 다 날아갔을 것이다.
1960년대와 1980년대의 작품이 21세기 초입에 재등장했다는 것. 그것은 수십 년 뒤를 내다보는 선생의 혜안이 낳은 것일 거다.
‘박용구’에 고인 한국 예술 100년
1914년 경북 풍기에서 태어난 박용구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니혼 대학 예술학부 입학 후 중퇴했고, 1936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 후 일본 ‘음악평론’의 기자로 재직했다. 당시 일본에 유입되는 클래식 음악 공연과 음반을 섭렵하는가 하면 야마네 긴지·하라 타로 등 기라성 같은 음악평론가 문하에서 예술을 글로 적고 남기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동경 유학생으로 구성된 동경학생예술좌에 입단해 연극을 공부하기도 했다. 유치진·이해랑·이진순 등의 동료들은 후에 대한민국 예술계를 주름잡는 거물이 된다. 이들의 자서전과 회고담에는 박용구의 이름이 늘 거론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선에 귀국한 청년 박용구에게 조국은 없었다. 우울해진 박용구는 1940년 하얼빈으로 훌쩍 떠난다.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라미라가극단에 입단해 가극 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서울 동흥실업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당시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총력을 기울이던 때로 무기가 될 만한 쇠붙이는 물론 모든 것이 전장으로 동원되던 때였다. 복잡한 세상··· 박용구의 글도 전장으로의 부름을 받았고, 작곡가 김순남(1917~1983) 등과 친일 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을 맞았다. 해방 소식이 들리자 박용구는 음악 교과서 ‘임시중등음악교본’을 펴냈다. 그리고 ‘음악유산 섭취의 문제’(1946) ‘조선 가곡의 위치’(1948) 등의 평론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 땅의 음악이란, 민족의 음악이란 어떠해야 하는가··· 그 답을 김순남의 가곡에서 찾기도 했다. 음악을 둘러싼 행정과 교육, 창작과 향유 등을 아우르며 평론을 썼고 이 글들은 1949년 ‘음악과 현실’에 묶여 세상에 나왔다.
해방공간에서 박용구는 한마디로 잘나가는 음악평론가였다. 그러던 1949년 겨울. 박용구가 남긴 유서 한 장이 신문에 보도된다. 좌·우익의 대립을 견디지 못한 음악평론가의 자살이 보도될 정도로 당시는 예술과 정치가 깊이 맞물려 있던 때였다. 박용구는 월북 예술인에게 투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국민보도연맹’ 행사에 참석해 월북한 김순남에게 투항을 권하는 연사로 선정된 것이다. 함께 세파를 견디며 민족음악의 미래를 논하던 지음(知音)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데올로기로 이분화된 땅 어디에도 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박용구는 유서 한 장 남기고 일본으로 밀항을 결심한다. 자살 대신 택한 것이었다.
석 자의 이름을 지우고 ‘아리마 류시(有馬入史)’라는 이름의 밀항자로 산 일본에서의 10여 년. 대한민국의 음악사는 박용구의 그런 10년을 ‘부재’로 기억한다. 하지만 박용구는 고마키 발레단에서 일본 최초의 창작 발레 ‘니치링(日輪)’ 대본을 썼고, 여러 예술가와 교류하며 당시 일본으로 몰려든 세계 예술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접했다.
“패전한 일본이 부활한 때가 1950년부터 1960년대였어요. 동경 유학 시절 수학했던 친구들이 모두 중견이 되어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더라고요.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았어. 극단 배우좌나 민예에서 연출을 공부하며 10년 동안 좋은 공부를 했다고 봐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박용구는 귀국했다. 하지만 간첩죄로 구속되었다. 대한민국은 그에게 영욕의 땅이었다.
“처음 일본에서 돌아오니 김순남, 정지용 등 친하던 친구들은 이북에 가 있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밀항선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게 하고, 다시 돌아온 나를 조총련과 연관된 간첩이라며··· 그 건물조차 어딘지 모르는 사람을 반년 동안 감옥에 가둔 게 대한민국이었어.”
쓸쓸히, 다시금 이 땅에서 공연을 보고, 읽고, 쓰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6년, 오페라와 연극 연출 경험이 있는 박용구는 당시 공화당 의장이던 김종필로부터 예그린악단 운영에 대한 백지위임을 받아 단장으로 취임한다.(정치가로만 알려진 김종필(1926~)은 원로 예술가들이 1960~1980년대를 회고할 때 빈번히 등장하는 패트런이다. 음악평론가 이상만도 1970년대 세종문화회관 건립 당시, 김종필의 백지위임에 대한 비화를 두 권의 구술서에 흥미진진하게 풀었다) 이후 박용구는 ‘한국적 뮤지컬’이라는 방향 정립과 함께 예그린악단을 이끌며 뮤지컬 창작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효시로 자리 잡은 ‘살짜기 옵서예’는 1966년 초연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친 작품으로 기록된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난 뮤지컬을 할 거 같아요. ‘살짜기 옵서예’는 당시에 정말 하고 싶어서 한 거였지요. JP(김종필)는 통이 큰 사람이라 내가 하는 일에 일체 간섭을 안 했어.”
▲ 1967년 예그린악단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 두 번째 줄 가운데가 나영수이고 다음 왼쪽으로 황익평, 문혜란, 임영웅, 박용구, 최창권, 곽규석(후라이보이). 맨 앞줄 가운데 앉은 남자가 황운헌(문예부장)이다
단단히 기른 안목과 엄격한 기준으로 시인 황운헌, 작곡가 최창권 등 최고의 ‘꾼’들을 예그린악단으로 스카우트했다. 스카우트된 이들은 또 다른 ‘꾼’들을 예그린악단으로 끌어들였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연출가로 알려진 임영웅도 동아방송 프로듀서를 거쳐 예그린악단 연출부에서 근무했다. 2012년, 패티김이 출간한 ‘그녀, 패티김’에서도 그녀가 ‘살짜기 옵서예’의 기생 애량 역을 맡았던 기억은 언제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박용구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땐 예그린의 작품이 재밌었어. 입장료가 30원인가 그랬는데, 마지막 날에는 100원까지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야매표가 돌았지요. 그런데 난 돈하곤 관계없어요. 그때 내가 돈을 밝혔으면 지금 몇백 억대 부자가 되었을 게야.”
“금년에 박근혜 여사가 내의와 양말, 연하장을 보냈어요”라고 말하는 박용구는 당시에 육영수 여사로부터 해마다 연하장을 받기도 했다.(선생은 인터뷰 도중 1960년대와 1970년대 ‘박통’ 시절을 회상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후 박용구는 건축가 김수근이 1966년 창간한 ‘공간’을 함께 만들었다. 김수근은 일본 망명 시절에 만났다. 건축을 중심으로 한 ‘공간’에는 설계도와 함께 음악·전통예술·무용·연극·미술 등을 망라한 문화의 설계도가 한 편에 실렸다. 그리고 종로구 원서동의 공간 사옥 지하에 위치한 소극장 공간사랑(空間舍廊)을 1978년에 개관했다. 박용구는 이곳에서 당시 유입되던 전위적 예술의 모태를 마련했다. 그리고 ‘객석’이 창간된 1984년, 박용구는 주요 필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객석’과 ‘공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객석’ 발간은 우리나라 문화사의 역사적 사건이었어. 그때 우리나라는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의 싹이 틀 때였고, 그런 시기 속에 예음이 생기면서 역사적 필연을 제대로 밟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80년대부터는 음악을 넘어 다양한 장르로 나아갔다. 비평과 창작을 아우르는가 하면, 서재에서의 사유와 현장에서의 정책을 연결 짓고자 고민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영상 문화가 급속히 퍼진 1980년대 말에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가 읽고 쓰던 20세기는 그렇게 저물었고, 선생의 몸과 기억은 21세기의 문턱을 넘어 지금에 이르렀다.
‘박용구’라는 음악의 일가(一家)
과거가 켜켜이 쌓여 있는 선생의 몸과 기억. 선생이 입을 열면 역사의 이면이 쏟아져 나오기에 그 증언을 담는 것이 곧 역사 쓰기였다. 그런 선생의 삶은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객석’에 25회에 걸쳐 연재되고, 선생의 구술(口述)을 담아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2001)과 ‘20세기 예술의 세계’(2001)가, 그리고 수류산방에서 ‘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2011)가 출간되었다.
무엇보다 선생이 발간한 음악 관련 서적은 다양하고 방대하다. ‘음악과 현실’(1949) 이후 ‘교양의 음악’(1965) ‘음악의 주변’(1970) ‘음악의 광장’(1975) ‘음악이 만나는 자리’(1977) ‘음악의 문’(1981) ‘음악의 초상’(1989) 등 수많은 평론집과 개론서를 출간했다. 이 책들을 섭렵한 ‘박용구 키드’들은 1976년에 창간한 ‘춤’과 1984년에 세상에 나온 ‘객석’ ‘음악동아’ 등의 주요 필자가 되기도 했다.
101세에 이른 음악평론가에게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기억은 무엇일까. 여쭈니 곰곰이 생각하다가 작곡가 김순남을 꼽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에서 미래의 지도를 그리던 벗, 지음(知音)이여.
“내가 제일 애처롭게 생각하고 아깝게 생각하는 이는 김순남이에요. 지금도 김순남 가곡만 한 노래들이 없어. ‘산유화’ ‘탱자’ 같은 곡들은 슈베르트와 맞먹는다고 생각해요. 슈베르트가 20세기에 살았더라면 화음이나 스타일에서 순남이와 비슷하게 쓰지 않았을까 싶어요. ‘남조선 형제여 잊지 말아라’ ‘인민항쟁가’ 같은 해방가요를 썼기에 남조선에서는 별로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 하지만 난 지금도 천재라고 생각해요. 즉흥연주를 그렇게 즐겼다고. 즉흥연주 하는 걸 작품으로 남겼으면 슈베르트에 지지 않는 작품들이 되었을 거야.”
선생의 기억에 단단히 자리 잡은 또 다른 이는 소프라노 오경심이다.
“(한참을 회상한 후에) 목소리가 참 드라마틱했어요. 내가 다닌 일본고등음악학교 1년 후배였어.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결혼한 몸으로 입학했는데 시험 칠 때 한복을 입고 왔더라고. 미인은 아니었는데 당돌하게 생겼지. 목소리는 꼭 새소리 같았어. 여수·순천 사건(1948) 때, 순천여고 선생으로 있었는데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에 참가했다가 잡힌 거야. 사령관이 ‘네가 진짜 소프라노냐 그럼 노래해봐라’ 하니까 앞에서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당돌하게 불렀다고 해요. 그걸 계기로 사형을 종신형으로 낮췄는데, 결국에는 사형당했어. 내가 일본의 ‘음악평론’사에 있을 때 조선일보 동경지사장이 와서 신인 음악회를 할 건데 당신이 음악기자니깐 유학생 중 뛰어난 조선인을 추천해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때 오경심하고 바이올린 하던 김동진을 추천했어. 조선일보 신인음악회(1938년, 경성 부민관)에 섰던 유학생들은 전부 내가 추천했지요.”
평론은 씨, 창작은 꽃이다
선생은 음악으로 평론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하지만 선생의 관심은 이후 다양한 장르로 옮겨간다. 그래서 선생의 만년(晩年) 작에 해당하는 ‘예술의 초상’(1989)에는 음악 외에도 무용·대중음악·영화·건축·미디어 등을 아우른 성찰이 녹아 있다. 이에 대해 선생은 서문에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내가 ‘음악과 현실’에서처럼 음악에만 머무를 수 없었던 이유의 중요한 부분이 바로 ‘생활의 변혁에서 오는 의식의 변혁’이라는 세계사적인 틀 속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부터 선생의 글은 걷잡을 수 없이 넓어졌다. 인용하는 서적은 방대했다. 혜안의 반경도 넓었다. 예를 들어 1983년 ‘공간’에 3개월간 연재한 ‘한국 음악의 방법론 서설-우주 시대의 예술을 위한 메모’는 만만치 않은 글이다. 한국 음악의 박자와 구조에 대해 논하는 이 글에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아카드족, 공자의 ‘시경’ 등이 인용되었고 서양문화의 성격과 한계를 넘어 동이족 문화의 성격과 그 가능성을 점친다. 이 글은 후에 한·중·일의 문명을 탐구해 1995년 발간한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와 2011년에 탈고하고 2013년에 출간한 ‘먼동이 틀 무렵’에 녹아들어 선생의 만년 작들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선생의 만년에 나타나는 또 다른 특징은 창작으로의 열망과 실천이다. 이에 대한 출사표는 1981년에 나온 ‘음악의 문’의 서문에 담겨 있다.
“‘음악의 문’은 나의 마지막 평론 작업의 매듭 구실을 하게 되리라. 작금에 나는 창작에 몸이 달아 있다.”
여기서부터는 창작을 중심으로 선생의 계보가 다시 쓰여진다. 1955년일본 최초의 창작 발레 ‘니치링’(日輪) 대본을 집필한 선생은 귀국 후, 특히 1980년대부터 희곡·오페라·무용 등의 대본을 집필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 식전 기획단장 겸 시나리오 집필을 맡기도 했다. 이 작품들을 모아 1984년에는 작품집 ‘흙비’를, 2003년에는 ‘바리’를 출간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를 앞둔 1999년, 선생은 ‘영고 21 미래선언’을 선포하며 예술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한다. 이른바 ‘심포카(symphoca)’라 불리는 심포닉 아트(symphonic art). 이 형식 안에서 음악·무용·연극·영화(영상)·뮤지컬 등은 울타리를 걷고 서로 교향(symphonic)한다. 2005년 출간한 ‘삼별초’는 이러한 심포닉 아트 형식에 녹여 넣기 위한 대본이었다.
“반드시 ‘심포카’라는 이름이 붙지 않아도 국가와 뿌리와 민족과 장르를 초월한 것이 만들어지는 독특한 양식이 미래 예술의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이렇듯 동서고금과 여러 장르를 자유롭게 오간 선생의 글쓰기는 만년에 이르러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었다. ‘창작’과 ‘비평’에 대해 말한 선생의 옛 글 중 둘의 관계를 잘 담고 있는 한 대목을 옮겨본다.
“창작은 삶의 근원과 이어지는 탄생이다. (···) 태어난다는 것은 자라나는 것, 그 경이로움에서 사람들은 그 비밀을 해명하려는 의식에 눈뜬다. 곧 비평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창작을 뒤쫓는 것이 아니다. ‘탄생’과 동시에 그것을 ‘해명’하려는 의식의 활동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선생은 ‘대동강’에 글을 싣고 있다. ‘대동강’은 선생이 수학한 평양교보에서 발행하던 교지명이다. 비록 학교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후예들은 사라진 기억을 잇고 있다.
“작년엔 내가 내다보는 남북통일론을 써서 보냈어요. 권두언에 실렸더라고. 금년에는 2045년의 인간족의 문화에 대해 쓸까 하며 자료를 얻고 있어요. 30년 후의 이야기니 재미있는 글이 될 거 같아요. 나는 비관 반, 낙관 반이야. 인간족이 사라지면 무엇 때문이며, 그다음에 살아남은 이들은 어떻게 될지를 상상해보는 거죠.”
이번 인터뷰를 계기로 선생의 만년 작들을, 평론보다는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이 땅에 흘러간 100년의 현실이 담겨 있다. 선생의 작품은 늘 통합을 예견할 수 없는 갈등과 분단에서 시작한다. 일제강점기의 일본과 조선처럼, 해방공간의 좌·우익처럼, 전후의 남과 북처럼. 그 갈등은 작품 속 나약한 생명체와 문명을 유목의 삶으로 내몬다. 선생이 평양·경성·동경·하얼빈 그리고 서울로 떠돈 것처럼. 그리고 생존을 위한 정착이 시작되면서 서로 낯선 것들은 이접(異接)한다. 선생이 고안한 ‘심포카’(심포닉 아트)처럼. 그리고 혼재의 혼란을 이겨낸 것들은 이내 곧 새로운 문명과 예술로 태어난다.
“그랬어.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했던 게 아니라 대한민국과 시대가 나를 그렇게 만든 거 같아요. 난 거기서 다만 올라갔다 내려왔다 했을 뿐이에요.”
2013년에 출간한 심포카 시놉시스 ‘먼동이 틀 무렵’의 표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인용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선생님, 건강하십시오.
“피지배, 전쟁, 분단, 독재와 개발의 모든 상처를 겪었던 이 땅에 100년의 통찰을 가진 박용구 선생이 성성히 살아 계시다는 것은 보석과도 같이 빛나고,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사진 심규태 자료 제공 박용구·수류산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