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K, 1080p 고화질로 만나는 브람스 관현악의 모든 것
4K, 1080p 고화질로 만나는 브람스 관현악의 모든 것
미국 5대 호 가운데 하나인 이리 호(湖) 남단에 자리한 호반의 도시 클리블랜드. 이곳에는 1918년 창단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건재함을 자랑한다. 소위 미국 ‘빅 5’ 오케스트라 가운데 선두 주자 격이다. 서쪽으로 시카고 심포니, 동쪽으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보스턴 심포니를 비롯한 ‘빅 5’ 외에도, 미 북동부 지역은 피츠버그 심포니,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볼티모어 심포니를 거느리며 일찌감치 오케스트라의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전용 홀을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931년 개관한 클리블랜드의 세브란스홀은 보스턴 심포니홀만이 동급으로 대접받을 만한 최고 콘서트홀로 손색이 없다.
‘아르데코’ 양식의 세브란스홀 외관은 다분히 고전주의의 향취를 자아내고 그리스 로마시대와 이집트풍을 혼합한 장엄하고 아름다운 내부 인테리어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 1946년부터 1970년까지 무려 24년이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지휘자 조지 셀(1897~1970)이 1958년 무대에 늘어선 푸른색 벨벳 커튼을 걷어내고 영구적인 음향 판을 세팅하자 홀의 어쿠스틱은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셀 셀(Szell Shell)’로 불리는 두터운 나무 벽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 6025개의 파이프로 만든 에른스트 스키너 파이프오르간은 압도적인 위용으로 홀의 정점을 이룬다.
세브란스홀을 낱낱이 살펴볼 수 있는 기막힌 영상물이 ‘4K급’에 육박하는 1080p 고화질로 출시됐다. 마치 공연장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레퍼토리는 어떠한가. 총 3장의 디스크에 연주 시간만 341분, 인터뷰까지 포함해 6시간을 훌쩍 넘기는 엄청난 분량은 오로지 브람스에 ‘올인’한다. 브람스의 교향곡, 협주곡, 서곡을 총망라하는 ‘브람스 관현악 백과사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LP 시대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브람스 녹음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처럼 고화질에 소름끼치도록 선명한 고음질로 무장하고, 연주 수준 또한 정상급에 도달해 3박자를 모두 갖춘 음반은 이번이 처음이라 단언한다.
프란츠 벨저 뫼스트(지휘)/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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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리아 피셔(바이올린)/예핌 브론프만(피아노)/
프란츠 벨저 뫼스트(지휘)/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Belvedere BVE08009 (3Blu-ray)
첫 번째 디스크를 플레이어에 걸면 등장하는 2014년 1월, 세브란스홀 파사드에서 로비를 거쳐 무대로 향하는 카메라 워크는 일품이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주요 악기가 도드라질 때 카메라는 어김없이 연주자를 클로즈업해주고 순간순간 세브란스홀 내부 장식을 비춰 시청자가 화면만으로도 지루하지 않게 배려한다. 부악장 페터 오토가 무대로 나오는데 그의 의상은 나비넥타이를 맨 완전 정장 차림이다. 가만히 보니 이 브람스 시리즈 내내 지휘자뿐 아니라 단원들도 모두 연미복을 입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열연했던 배우 에이드리언 브로디를 닮은 오보에 수석 프랭크 로즌웨인이 정성껏 A음을 튜닝해주고, 드디어 지휘자 프란츠 벨저 뫼스트가 등장한다. 2002년부터 도흐나니의 뒤를 이어 포디엄에 올랐으니 올해 벌써 14년째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타계한 지금, 벨저 뫼스트는 국가적 지지를 받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지휘자다. 개인적으로 벨저 뫼스트의 음악은 우직하고 정확하지만 한편으로는 뜨거운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본다. 굳게 다문 그의 입술과 다소 날카로운 인상은 그러한 면을 배가시킨다. 벨저 뫼스트는 두 차례의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 악보에 나타난 음악 그 이상을 들려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브람스 교향곡 시리즈는 그런 면에서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작곡가의 이상을 뚜벅뚜벅 걸으며 표현했다.
브람스의 포문을 여는 ‘대학축전 서곡’. 벨저 뫼스트가 이끄는 그의 악단은 이른바 ‘학생의 노래’ 부분부터 치고 나가며 장엄한 축제를 완성한다. 디테일 구축에서 한발 나아가 두터운 질감으로 오케스트라 연주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는 교향곡 4번의 마지막 ‘샤콘’ 악장에서 극대화된다. 무려 32회의 변주에서 색깔을 달리 입히며 진군하는 ‘클리블랜드 사운드’는 조지 셀 시절을 연상케 할 정도로 중후하다. 므라빈스키와 클라이버가 지휘한 음반에서 느껴지던 ‘면과 면의 중첩적 대비’가 21세기에 재등장한 느낌이다.
협주곡에서는 협연자와의 힘겨루기가 아닌,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율리아 피셔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는 바흐의 평균율에서 첫선을 보인 D장조의 화려함과 기능적인 완성이 극대화된다. ‘대학축전 서곡’에서 시작된 축제가 절정에 도달하고 있다.
피아노 협주곡은 더욱 감동적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의 최근 연주 실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데, 우선 육중한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브람스 협주곡 1번은 그야말로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다. 과묵한 브람스의 가슴에 내재된 클라라에 대한 연정과 시대적 방황이 오케스트라의 곰삭은 뒷받침 아래 직설적으로 피어오른다. 2악장, 현악기의 배음은 한없이 무거운 중량감으로 홀을 가득 채운다. 음향이 워낙 좋아 오디오 앰프의 볼륨을 무한대로 올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협주곡 2번 3악장의 첼로와의 2중주는 같은 연장선상에서 로맨틱의 정수라 할 만하다.
이 전집의 옥에 티는 연주의 질이 아니라 교향곡 1·2·3번이 세브란스홀이 아닌 유럽의 공연장에서 녹화되었다는 점이다.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둥지를 떠나 2014년 9월 유럽 투어 중에 런던 로열앨버트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연주된 교향곡 1번이 담겨 있다. 지휘자와 단원들의 음악에 대한 경외감은 여전하나 세브란스홀과는 왠지 다른 환경에서 오는 이질적인 사운드가 당황스러울 정도다. 이는 빈 필하모닉의 본거지인 무지크페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브람스의 교향곡은 명연으로 치켜세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교향곡 1번의 투쟁적인 피날레 악장은 귀를 강타하고, 교향곡 2번 2악장 아다지오의 황혼녘에 뒤돌아선 인간의 쓸쓸한 회고는 더욱 적적하게 다가온다. 교향곡 3번의 4악장 밝고 차분한 코다. 벨저 뫼스트는 자신의 고국 오스트리아에서 브람스 사이클의 최후를 담담하게 마감한다.
벨저 뫼스트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밀월 관계는 현재 최고조에 달해 있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브람스 교향곡 전곡 영상물이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만족시켜주는 흔치 않은 명연주, 브람스를 좋아하는 애호가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