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금관주자로서 해외 오케스트라의 수석에 오른 김홍박. 그가 걸어온 길, 그가 꿈꾸는 길
김홍박을 떠올리면 유목형 호르니스트가 그려진다. 나직하고 안정된 음색과는 달리 그는 열심히,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그가 현재 정착한 곳은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2015/2016 시즌부터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OFO)의 호른 제2수석(co-principal)으로 활약하고 있다. 1879년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와 스벤센이 세운 크리스티아니아 음악협회에 뿌리를 둔 오슬로 필은 1919년 창단해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르웨이의 대표 오케스트라다.
김홍박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 진학했다. 졸업 전부터 고국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고, 2007년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향에 부수석으로 입단했다. 그는 당시 객원으로 참여한 프랑스의 호른주자들을 보며 국제무대 진출의 꿈을 키웠다. 이후 말레이시아 필·스웨덴 로열 스톡홀름 필·요미우리 닛폰 심포니 등의 객원 수석을 지냈다. 2012년에는 스웨덴 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호른 제2수석으로, 지난해에는 노르웨이 오슬로 필의 제2수석으로 선임되며 한국 금관주자로서 당당히 해외 오케스트라 수석 타이틀을 지니게 됐다. 어찌 보면 김홍박의 노마드적 행보는 그의 실력이 만든 기회에서 비롯됐다.
그는 음악 안에서도 종횡무진이다. 일 년에 70여 회에 이르는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OFO 목관 5중주단과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실내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솔리스트로서 레퍼토리 확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최근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에 매진하고 있는 그는, 7월 14·16일 색채감이 뚜렷한 프랑스의 몽환적 선율로 한국의 청중을 만난다.
오슬로에서의 조화로운 삶
스웨덴 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호른 제2수석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에 발을 디딘 김홍박은 2014년 12월 오슬로 필하모닉의 수석 오디션에 합격해 수습 기간을 거쳤고, 2015/2016 시즌 오프닝 무대를 시작으로 오슬로 필의 종신 단원으로 합류해 첫 시즌을 보냈다.
“단원들이 굉장히 친근하게 대해주어 첫 시즌부터 오케스트라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유카 페카 사라스테 같은 명지휘자들의 지휘 아래 훌륭한 솔리스트들과의 협주,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비롯한 여러 유럽 도시에서의 투어 등으로 첫 시즌부터 좋은 경험을 많이 가졌죠. 또 이곳 단원들과 지난해 말 결성한 OFO 목관 5중주단을 비롯해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실내악 연주도 병행하며 바쁜 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오슬로 필은 첫 지휘자 요한 할보르센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가 활약했고, 1979년부터는 마리스 얀손스가 부임, 활발한 해외 투어와 EMI 클래식스 레이블과의 전속 계약으로 전성기를 맞았다. 23년간 얀손스가 책임진 포디엄에는 이후 앙드레 프레빈·유카 페카 사라스테가 차례로 올랐으며, 3년 전부터는 러시아의 젊은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가 오슬로 필을 이끌고 있다. 1996년 얀손스와의 내한이 유일한 우리나라에서는 오슬로 필은 다소 생소한 오케스트라다.
“오슬로 필의 명성을 높인 마리스 얀손스의 색깔이 아직까지 오케스트라에 남아 있습니다. 개개인의 화려함보다는 하나로 통일된 세련된 움직임을 통해 ‘오랫동안 함께 호흡한 오케스트라’의 저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리스 얀손스는 당시 카라얀과 므라빈스키에게서 물려받은 카리스마로 의욕적인 레퍼토리를 펼치며 오슬로 필을 절도 있게 조련한 인물이다. 얀손스로부터 연유된 통일감에 현 상임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가 부드러우면서도 명확한 디렉션으로 섬세한 뉘앙스를 덧입히고 있다. 김홍박은 페트렌코를 “부드럽고 영리한 지휘자”라고 설명한다.
“페트렌코는 평소에도 굉장히 젠틀한 사람입니다. 유머러스한 성격으로 리허설 분위기를 밝게 유지하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단원들을 이끄는 지휘자죠. 이제껏 함께한 지휘자 가운데 가장 편안하다고 느낀 분이기도 합니다.”
천국에는 호른주자가 가장 많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기도를 가장 많이 받기 때문이란다. 혹여나 ‘음 이탈을 하는 것은 아닐까’ 단원들은 물론 관객석에 앉은 청중까지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호른. 악기의 특성상 정확한 음정을 내기 어렵고, 조금의 실수라도 크게 두드러지는 음색 때문이다. 그는 공연 전 단원들과 대화로 긴장을 풀고 음악에 즐겁게 임하는 것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주를 선보인다.
“연주 시작 전 동료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눕니다. 함께 좋은 에너지를 나누고 호흡하다 보면 자연스레 즐거운 연주가 나오기 때문에 부담감이 느껴지지 않아요. 함께 연주하는 음악가들과의 존중과 신뢰가 중요하다는 것을 오케스트라 생활을 통해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김홍박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노르웨이에서의 아름다운 삶을 만끽하고 있다. 지난해 결혼한 그는 종종 아내와 웅장한 자연을 찾아 삶의 여유를 찾고, 음악 안에서의 감사함을 느낀다.
“노르웨이에는 뛰어난 자연경관이 많아 아내와 함께 여행하곤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긴 피오르인 송네피오르를 찾았을 때, 병풍처럼 웅장하고 아름답게 늘어선 산줄기에 울려 퍼질 호른 소리가 너무 궁금해 악기를 꺼내어 아내 앞에서 작은 리사이틀을 열었던 기억이 납니다.”
호른의 음색으로 맛보는 프랑스 색채
김홍박은 이번 리사이틀을 ‘프렌치 호른’이라는 타이틀 아래 프랑스 레퍼토리로 엮었다.
“올 초 스웨덴 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6회에 걸쳐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연주했습니다. 몽환적인 색채감이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프랑스 음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은 계기였죠. 개인적으로도 프랑스 작품에 한 번도 도전하지 못했기에 프랑스 음악의 색깔을 깊게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레퍼토리는 프랑스의 인상이 잘 드러나는 후기 낭만부터 현대까지의 곡들로 구성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 청중을 만나는 무대라 작품 선정에 특히 심혈을 기울였죠.”
이번 리사이틀에서 그는 샤브리에 ‘라르게토’와 쾨슐랭의 호른 소나타 Op.70, 구노 ‘6개의 멜로디’에 이어 생상스 ‘로망스’, 토마시 ‘코르시카의 노래’, 드페예 ‘알파’, 프랑세 ‘디베르티멘토’를 선보인다.
“처음에는 후기 낭만의 구노·생상스, 인상주의인 샤브리에·쾨슐랭, 그리고 근현대의 토마시·프랑세·드페예의 작품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연습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시대가 아니라 음악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중이 ‘프렌치 호른’이라는 주제를 잘 느낄 수 있도록 프랑스의 색깔이 잘 드러나는 곡들을 전반부에 구성했고, 후반으로 갈수록 화려하고 경쾌한 테크닉의 곡을 연주할 예정입니다.”
리사이틀의 문을 여는 샤브리에 ‘라르게토’는 곡의 제목과 같이 느린 템포로 호른의 음색을 드러내는 가운데, 어우러지는 반주의 몽환적인 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어지는 쾨슐랭의 호른 소나타 Op.70 역시 여유로운 템포 속에 호른과 피아노가 대위법적으로 서로의 인상을 주고받는다. 그는 더욱 깊이 있는 표현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만의 색채감을 이해하기 위해 모네·르누아르 등 당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며 그들의 터치에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오케스트라 내의 프랑스·벨기에 출신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며 저의 해석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듣기도 했습니다. 홀로 공부한 것과 당시의 예술 사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현지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고유의 감성을 녹여내려 합니다.”
눈에 띄는 곡은 마지막을 장식하는 두 현대곡이다. 큰 도약과 무조성의 선율이 도드라지는 드페예의 ‘알파’와 빠른 패시지의 프랑세 ‘디베르티멘토’는 호른의 기교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작품으로, 호른 연주자들의 노련함을 가늠할 수 있는 곡이다. 그는 “까다로운 리듬과 도약하는 패시지를 가볍게 표현해 좀 더 생동감 있는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며 연주를 앞둔 기대감을 내비쳤다.
오케스트라 수석, 실내악 멤버 또 솔리스트로 바쁜 삶을 이어가는 김홍박은 지치지 않고 음악을 탐구해가는 21세기형 노마드다. 이달 14·16일의 리사이틀 이후 그는 9월 한국에서 한 차례 협연 무대에 오르며, OFO 목관 5중주단과 함께 노르웨이 전역에서 연주를 가진다. 내년에는 목관 5중주 음반도 발매할 예정이다. 오슬로 필과는 2016/2017 시즌 유럽 투어와 아시아 투어를 앞두고 있다. 당당히 호른 수석 자리에 앉아 세계 곳곳을 누빌 김홍박. 그의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사진 MOC프로덕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