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관악 주자로는 처음으로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 수석 자리에 오른 조인혁. 그를 뉴욕 현지에서 만났다
지난 10월 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로시니 오페라 ‘윌리엄 텔’을 선보였다. 80년 만에 메트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라 큰 화제였다. 그런데 29일 공연 도중 정체불명의 한 남성이 오케스트라 피트 안으로 백색 가루를 뿌리는 것이 경찰에 신고됐다. 총 4막 가운데 3막까지 마친 상황이었고, 마지막 인터미션 중 뉴욕 경찰과 소방국이 극장으로 출동해 공연이 중단된 초유의 사건이었다. 관객들은 극장에서 대피해야 했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역시 안전상의 이유로 피트 안 출입금지가 내려졌다. 바깥에서 휴식을 취하던 연주자들은 악기와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귀가해야 했다. 탄저균으로 의심되던 그 백색 가루는 사람의 뼛가루로 밝혀졌는데, 오페라 애호가였던 죽은 친구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친구가 벌인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올해 4월, 한국 관악기 연주자로는 처음으로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가 된 클라리네티스트 조인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미 4시간가량 연주를 마친 상황이었죠. 인터미션 때 피트 안에 클라리넷을 두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결국 악기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원래는 그날 저녁 로시니 오페라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 공연까지 취소됐거든요. 다음 날 아침 피트로 돌아가 보니 리드가 바싹 말라버려 못 쓰게 되어버렸죠.”
조인혁의 시작, 그리고 끝없는 모험
경남 거창에서 나고 자란 조인혁은 집안 창고에 오랫동안 묵혀 있던 아버지의 클라리넷이 장난감 총인 줄 알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 레슨을 받았지만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때에 낡은 클라리넷을 보았고, 호기심을 갖는 아들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그가 대도시에서 꾸준히 레슨을 받을 수 있도록 장거리를 오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인혁의 유학 생활은 1998년,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서 수학하고, 유럽의 주요 악단을 거쳐 메트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로 당당히 입성하기까지 그의 여정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준비했고, 꾸준히 도전했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건 당연했다.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서 공부하던 당시 선생님이 파리 오케스트라 수석 주자였는데, 한번은 제게 파리 오케스트라에서 세컨드 클라리넷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어요. 이후 선생님이 불러주실 때마다 옆에서 연주하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죠. 일본 지진 때문에 투어를 꺼리던 단원을 대신해 정식으로 무대에 설 기회도 얻었어요. 유학을 마치는 대로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길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파리 오케스트라에서의 경험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발판이 되었지만, 정식 단원이 되기 위한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이어가던 중 스위스의 대표 악단인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입단할 기회를 잡았고, 이후 유럽의 가장 오래된 악단 중 하나인 무지크콜레기움 빈터투어 오케스트라의 수석 자리에까지 올랐다. 평생직장이 될 거라 생각한 그곳에서 그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섭렵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빈터투어에서 생활한 지 일 년쯤 지났을 때 바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후 수석 모집 공고가 났고, 그는 이 오디션의 최종 합격자가 되었다. 기쁘기도 했지만,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갑작스레 떠난 수석 주자의 빈자리를 채우는 그의 마음도 무거웠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동료의 비극을 맞은 동료 단원들도 그를 반겨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무지크콜레기움 빈터투어 오케스트라의 종신단원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고민 끝에 운명처럼 다가온 새로운 도전을 택했다.
바젤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자전거를 타고 서쪽으로 10분만 달리면 그가 치열하게 음악과 씨름하던 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자, 같은 유학생이던 아내를 처음 만난 프랑스였다. 또 그 반대편은 독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의 일정은 빈터투어에서보다 여유 있는 편이었다. 개인 연습을 충분히 할 수 있었고, 가족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젤 심포니 안에서도 좋은 연주를 이어가며 자신의 가치를 차근차근 증명해나갔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뉴욕에서의 새로운 도전
지난 수년 동안 삶의 터전이던 스위스에서 보낸 시간이 여백과 같은 반면, 뉴욕에서 보낸 첫 3개월은 정신없는 일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총천연색 그림 같았다.
“더 넓은 곳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좁아진 듯한 느낌도 들어요. 유럽에 있을 때보다 음악에만 집중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상상 속에서만 생각하던 뉴욕에서의 삶은 우연히, 그렇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여행하며 막연하게 그려본 뉴욕행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메트 오케스트라에는 두 명의 수석 클라리넷 주자가 있다. 워낙 공연이 많고 오페라의 특성상 악곡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기본 레퍼토리는 두 명이 번갈아가면서 연주를 하지만, 리허설이 길거나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인 경우에는 한 명이 공연 전체를 전담하게 된다. 그가 수석 주자로 오른 첫 번째 무대는 메트 오페라의 시즌 오프닝 연주로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메트에서의 첫 연주인데 하필이면 처음 해보는 곡이었어요. 리허설 때 래틀은 정확히 지휘를 한다기보다는 음악을 만드는 데 심취해 있었죠. 생각보다 따라가는 게 쉽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막상 함께 연주를 하고 나니 래틀의 진가를 알 수 있었어요. 연주가 끝났는데도 가슴에 묵직한 게 박혀 가시지를 않더군요. 사실 유럽에서의 목관 파트 앙상블과 미국, 특히 메트에서 목관이 노래하는 방식은 다르기 때문에 나름대로 전략을 세웠는데… 리허설 과정에서 래틀이 필요한 소리를 뽑아낼 수 있도록 좋은 제안을 많이 해줬어요.”
그는 2013년 카를 닐센 콩쿠르에서 입상의 영예를 안게 되면서 독주자로서 존재감을 확인시켜줬다. 더 이상 외줄타기 같은 오디션을 하지 않아도 되고, 마음만 먹으면 안전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달랐다. 자존심에 목숨을 건 사람도 아니었고, 유명세나 높은 자리만 찾는 성공지상주의의 면모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적일 수 있는 ‘메트 입성’에 굳이 ‘성공’ 같은 표현을 붙이지 않는 것이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응원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월 5일, 연주하다가 처음으로 별을 봤어요. 낮 12시에 푸치니 작품을 연주하고, 곧바로 저녁 7시에 다섯 시간짜리 로시니 작품을 연주했거든요. 총 연주 시간이 8시간 21분이더군요. 계산해봤는데 베토벤 교향곡 전곡에 브람스 교향곡 전곡을 다 합하면 8시간 20분이에요. 일 년에 한두 번은 스케줄이 이렇게 잡힌다고 하던데, 모든 연주를 끝내고 나니까 악기를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 않았어요.(웃음) 아직은 3개월밖에 되지 않아 적응하는 중이에요. 새롭게 배워야 할 일들을 부담 없이 즐길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