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년 전의 음악을 그 시대의 소리와 작법에 충실하게 연주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묻는다면, 작곡가가 숨겨놓은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 탐험하는 고고학자의 즐거움이라고 답하리라. 우리에게는 ‘고음악’이라는 단어로 더욱 익숙한 당대연주. 클래식 음악에서 당대연주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영역이 또 있을까. 음표 하나를 놓고 숱한 연구와 논쟁을 불사하고, 한 번의 터치에도 찬반이 오간다. 무척이나 학구적이고, 들여다볼수록 매혹적이다
기획·진행 이정은 기자
Part 1 역사주의 연주를 둘러싼 현재진행형 논의
*이 글에서는 고음악 또는 당대연주를 지칭하는 용어로 ‘역사주의 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를 사용한다
필자가 우리 시대 역사주의 연주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15년, 젊은 연주가 한 사람을 만나면서이다. 20대 중반이 채 안 되던 장 롱도(Jean Rondeau)라는 이 하프시코드 연주자는 2015년에 ‘이매진(Imagine)’이라는 데뷔 앨범을 발표하였고, 이 앨범의 홍보영상을 접하면서 필자는 그에게 매혹되기 시작했다. 이 영상에는 롱도가 연주하는 바흐의 ‘샤콘’ BWV1004의 다섯 번째 악장이 담겨있다. 또한 여기서 롱도는 피아노를 위해 편곡된 브람스의 음악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한다.
영상은 롱도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걸어가다가 지극히 평범한, 조금은 낡고 어수선한 주택으로 들어간다. 누군가의 공방처럼 보이는 이 주택에는 하프시코드가 놓여있고, 롱도는 악기를 열고 그 앞에 앉아 음악을 연주한다. 필자는 롱도의 영상을 보면서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의 연주영상을 떠올렸다. 이 영상의 도입부 역시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숲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된다. 롱도처럼 이들 역시 그들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다. 이들의 목적지는, 숲길의 끝자락에 지어진 집이다. 이 집에 들어선 후 존 레논은 피아노 앞에 앉아 ‘이매진’을 노래한다. 롱도는 필자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역사주의 연주자들, 예컨대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존 엘리엇 가디너, 필리프 헤레베허 등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달랐다. 물론, 그는 젊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들 선배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구도자’와 같은 모습과 태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록 음악 가수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외모와 옷차림의 롱도에게서 선배 연주자들이 보여주는 격조와 무게, 진중함을 찾기도 쉽지 않다. 나아가 그의 연주를 접하면서 정격·원전·당대악기·작곡의도·객관 등을 질문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다. 오히려, 이들이 문제가 되기보다는 하프시코드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는 바흐와 브람스의 따뜻하고 감성적이며 친밀한 음악에 몰입되면서 이 연주자와 그리고 두 명의 작곡가들(그리고 부분적으로 존 레논)과의 교감을 체험한다.
◇ 오래된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의 의미
역사주의 연주란 위에서 언급한 연주자들(그리고 언급하지 않은 수많은 연주자들)에 의해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펼쳐진 ‘새로운 연주관행’ 또는 이를 구현하기 위한 움직임 또는 태도를 칭하는 용어이다. 아르농쿠르 등은 이미 1970년 이전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역사주의 연주가 기존의 연주문화에 도전하면서, 점진적으로 이것의 중심을 파고들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이후의 일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주의 연주는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역사주의 연주 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18세기 이전의 음악, 특별히 바흐를 포함한 바로크 음악연주에 몰두했다. 그리고 이 음악을 19세기 이후 등장하는 거대한 성악편성과 오케스트라의 음향, 지나치게 느린 템포, 낭만적인 긴 호흡의 프레이징, 연주자의 주관적 해석으로 연주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작품이 작곡된 당대 연주관습, 또는 작곡가가 구상했음 직한 연주, 작곡가가 들었음 직한 음향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이를 위해 당대 악기를 재현하였다.
방법론적으로 이들은 당대 연주관행이 기록되어 있는 문헌(이론서들)과 필사본 또는 원전들을 연구하였고, 그 연구 결과를 실제 연주에 반영하였다. 영미권에서 통용되는 HIP, 그러니까 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는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한 용어이다. 물론, 역사주의 연주란 이 용어의 한국식 용법이다. 엄밀하게 번역하면 ‘역사적인 지식에 바탕을 둔 연주’ 정도가 되겠지만, 용어의 의미가 담보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국내에서는 역사주의 연주라고 간단하게 칭하고 있다(원전연주·시대연주·고음악연주 등의 용어도 사용된다).
점진적으로, 역사주의 연주는 청중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면서, 역사주의 연주는 우리 시대 연주문화의 핵심을 점하기 시작하였다. 청중은 이러한 연주를 통해 바로크 음악의 섬세한 뉘앙스, ‘음악은 곧 춤’이라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사실, 가사의 새로운 발견,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음향, 작품의 구조를 공간적·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능력 등을 경험한 것이다. 청중의 마음을 사기 시작하면서, 그러니까 1990년대를 거치면서 역사주의 연주의 내·외부로부터 의미 있는 질문들이 대두되었다.
‘과연 진정한 역사의, 또는 음악연주의 재현이 가능한 것인가’ ‘작곡가의 의도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 ‘이들이 기대고 있는 역사적인 문헌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 것인가’ ‘여전히 연주의 많은 부분이 관습과 구술에 의해 이루어졌던 18세기 음악의 연주관행을 당대 이론서들이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는가’ 등이 그 질문이다. 복원된 당대 악기들의 친근하고 섬세한, 때로는 연약한 음향들은 바로크 음악이 지닌 뉘앙스를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전달하지만, 특별히 복원된 목관·금관악기에서 발견되는 지속적으로 이탈하는 음들에 대해 얼마만큼, 또는 언제까지 관대할 수 있는가 등도 질문이다.
◇ 음악에 새겨진 시간과 생각의 결
역사주의 연주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래서 이것의 과거를 한마디로 요약하기도, 그리고 이것의 미래를 가늠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료해 보이는 것은 몇 가지 있다. 예를 들면, 이것이 서구의 클래식 음악 문화에 새로운 물꼬를 텄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작곡가의 의도를 비롯해 원전·청중·당대악기·관습·가사·뉘앙스 등에 관한 수많은 성찰과 질문을 이끌어냈다는 것, 그리고 이들에 대한 판단은 도덕이나 가치의 문제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그리하여, 혹 바흐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는다면, 결코 불쾌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그러니까 바흐의 음악적 포용력을 충분히 인정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한, 청중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넓고 깊어졌음도 역사주의 운동이 추진되어 온 결과이다. 뒤돌아보면, 이러한 선택의 끝자락에서 필자는 장 롱도를 만난 것이다.
그의 연주에는 하프시코드가 상징하는 시간의 흐름이 있고, 바흐와 브람스와 존 레논의 음악이 겹쳐진다. 과거의 음악을 해석하는 고뇌에 찬 프랑스 20대 청년의 감수성도 녹아들어가 있다. 이것이 역사적이 아니면 다른 그 어떤 것도 역사적일 수 없을 것이다.
글 이가영(음악학자, 성신여대 작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