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안무의 차원에서 춤은 동사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춤을 현란한 운동성의 세계와 동일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것은 스펙터클한 움직임을 전시하는 춤의 근대적 욕망의 기저와 조건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이며, 춤이 다른 예술 장르들 틈새에서 독립적인 예술 형태로 발전하기 위해 제시한 물 흐르듯 이어지는 운동성이라는 이상향을 의문시하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사가 개입되지 않는 인간 활동이 거의 없는 만큼, 광범위하고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춤의 영역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안무는 춤과 다르다.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하는 시각은 춤의 자율적 영역을 확보하려는 근대적 기획에서 비롯된 편견일 뿐이다. 안무는 춤에 대한 일종의 거리감각을 내포한다. 춤을 춤이라고 여기는 관념을 다시 검토하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요소와 조건을 들여다보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동사를 다룬다는 것 또한 춤이나 일상에서의 그 관성적 사용과의 거리가 중요하다. 가령, 움직임의 매끄러운 흐름 혹은 연속성 안에 갇힌 테크니컬한 스텝은 얼마나 ‘걷는다’라는 의미와 멀어져 있는가? 혹은 ‘걷는다’라는 개념의 추상은 어떻게 거기에 잠재된 독특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여기에 중단과 머뭇거림의 미학이 있다. 이미 있지만 의식하지 못했던 무엇을 다시 발견하는 순간, 혹은 오래된 사용이 비활성화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기존의 목적 추구 방식이 무위로 돌아가게 되거나 중단되고 망설임을 불러오지만, 또 다른 창조, 즉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용어로 ‘탈창조’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것이면서 기존의 것이 아닌 모순 사이에서 틈을 내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노경애의 ‘21°11’’(12월 11일, 이음센터)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걸음걸이 사이에서 그러하듯이, 그리고 정세영의 ‘세 마리 곰’(12월 6~9일, 문래예술공장 M30)이 비극적 상황을 구성하는 술어를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전혀 다르지만 그렇지 않은 또 다른 길을 내듯이.
걷기의 무수한 조합
우선 노경애 안무의 ‘21°11’’에서 중단과 머뭇거림의 순간은 수시로 발생한다. 출연자들이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무대 양옆 단상에 관객들이 섞여 앉게 되는 순간부터 어떤 낯섦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무용수들과 함께한 뇌성마비 시각예술 작가들의 존재 자체로 인해 겪게 되는 다차원적인 미세조정의 순간이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둘씩 나와 무대를 걷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일어난다. 일종의 시지각적 지각변동을 거쳐 이내 그 자체의 특이성으로 다가온다. 사람마다 걸음걸이는 사실상 무한히 달랐다.
이 작업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걷기의 대위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걷기들을 보면서 일련의 판단 중지와 망설임의 과정이 조금씩 더해지자, 무용수와 장애인 출연자가 함께 걷는 순간에도 통상적인 차별의 기제가 작동하기보다는 그저 다름 혹은 다양성 그 자체로서 인식될 뿐이다. ‘걷는다’라는 동사에는 무궁무진한 개별의 몸짓이 잠재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서로 다른 선율이 포개져서 또 다른 음 구성을 이루듯이 걷기의 조합이 무수히 펼쳐졌다. 그뿐만 아니라 걷기는 몸 전체에 해당하는 얘기였다. 특히 뇌성마비 출연자들의 경우, 몸 부분들은 각각의 걷기를 행하는 상태라고 할까. 안무가 머스 커닝햄이 움직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을 걷는 것으로 보고 심지어 “나는 발, 다리, 손, 몸통, 머리로 걷는 것을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인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히려 무용수들에게는 애써서 도달해야 하는 어떤 비관성적 지점인 것이다.
이러한 기준의 변환은 사실 조금 앞서 공연된 ‘움직이는 표준’(11월 18·19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탐구된 바 있다. ‘21°11’’에서는 이미 중심이 많은 몸과의 차이와 그로 인한 입장의 전복을 보여주지만, 여기서는 균형을 잡는 중심점을 이동시킬 때 위태로워지는 몸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동하다’라는 동사는 어쩌면 이러한 모순적 지점에서, 가장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지점을 건드림으로써 제대로 사유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적어도 거기에는 새로운 컨트롤 지점과 또 다른 균형점의 계속된 생성이라는 의미가 잠재되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이 두 작품은 개별적이기도 하면서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듯 보이기도 한다. 다중심의 몸이든 중심을 변화시키는 몸이든 ‘걷다’나 ‘이동하다’에 가정된 전제 조건에 대한 통념을 깨고 있음은 분명하다.
동사를 다루는 또 다른 방식
한편 이와는 좀 다르게 동사를 다루는 방식은 정세영의 ‘세 마리 곰’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말에 담긴 소리와 의미 혹은 이미지와 의미의 분열을 통해 그 사이의 지연된 망설임 같은 것을 겪게 하는 방식이다.
이번에는 안무보다 연출의 타이틀을 택했지만, 정세영의 작업은 여전히 안무적이다. ‘세 마리 곰’은 비극적 텍스트에 기반하지만, 내러티브를 쫓아가는 대신 그로부터 주어진 비극적 상황을 동사의 세계로 간결하게 압축하면서 그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감각에 집중한다. 사실 비극이라는 것은 ‘잡아먹힌다’ ‘팔이 잘린다’ 등 재현 불가능한 일련의 상황을 포함하기 마련이다. 보통 연극에서는 말 그대로의 의미와 이미지를 서로 닿게 하려고 애쓰지만, 그는 오히려 그 간극을 벌려놓는 편을 택한다. 그리고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등가물을 설계하여 우회적이지만 더없이 통렬하게 비극의 감각을 끌어낸다. 이는 곰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나오는 스피커를 그대로 노출하거나 캐릭터가 아닌 출연자의 이름 그대로 사용하는 등, 극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과 또 다른 차원이라고 할까. 가령, 출연자가 수돗물을 뒤집어쓰고서 길게 늘어뜨린 전기선을 붙잡고 있을 때, ‘몸이 탄다’라는 술어의 감각은 새롭게 재편된다. 그것이 아니면서 그것이기도 한, 창조를 넘어선 ‘탈창조’인 것이다. 혹은 ‘재현하다’라는 단어를 비잠재성의 수준에 놓아버린다. 말하자면 그것을 하지 않음 자체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보는 잠재성의 파괴가 아닌 잠재성의 실현이다. 또 다른 퍼포머는 ‘부딪히다’라는 동사가 제시되는 동안 전동차를 타고서 숲처럼 설치된 나무 기둥 사이를 유유히 배회한다. 하지만 이미 관객은 부딪힐까 하는 위기감을 그 어느 때보다 실감한다. 실종된 두 마리 곰을 찾아 나선 곰과 말하고, 곰이 먹던 수프를 같이 먹는 소녀 이야기. 우화나 신화 같은 이 이야기는 곰과 함께 살다가 곰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의 녹화 영상을 남긴 실화에 대한 텍스트와 병치된다. 하지만 이 역시 보여주지 않기를 택하면서 빛이 가득한 빈 스크린을 내보낼 뿐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볼 대상이 없어도 잠재태로 존재하는 지각 능력에 대해 말했듯이, 텅 빈 서판이 글을 쓰지 않는 순간에도 글쓰기의 기술을 완벽히 가진 최고의 창조자라고 했듯이, ‘세 마리 곰’은 재현하지 않음 자체를 함이 지적 허영이나 부정의 제스처에 그치는 것이 아닌, 최고의 창조를 이뤄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글 허명진(무용평론가) 사진 노경애·연극연습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