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 내한공연 ‘전쟁과 평화’

전쟁을 딛고 평화를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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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9년 3월 4일 9:00 오전

‘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1월 21일 롯데콘서트홀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의 첫 내한공연 ‘전쟁과 평화’가 막심 엘랴니체프가 리드하는 일 포모도로 앙상블의 반주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다. ‘전쟁과 평화’는 에라토 레이블에서 내놓은 바로크 아리아 앨범집의 공연판이다. 2015년 말 디도나토는 17~18세기 나폴리 작곡가들의 바로크 아리아집을 준비하는 도중에, 그해 11월 파리 바타클랑 극장 테러 소식을 듣고 앨범 테마를 바꿨다. 인류가 반복한 전쟁과 평화를 정면으로 마주하자는 선택이다. 주변에서 아홉 곡의 아리아를 하룻밤에 부르는 건 무리라고 지적해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지로 강행했다. 복싱으로 단련한 체력이 없으면 어려운 도전이다. 단순히 평화를 노래하는 리얼리즘의 강박에서 벗어나 작품 사이에 디도나토가 제공하는 미학적 연결고리를 관객이 해석하는 형태였다.

이날 부른 여섯 개의 헨델 아리아는 지난 10년간 디도나토가 아성을 쌓은 핵심 레퍼토리다. A-B-A 형식의 다카포 아리아에서 메조소프라노의 진가가 나타나는 파트는 악보에 기록되지 않은 후반부 A 부분의 상상력이다. 대개 해석의 자유가 허용된 패시지에선 체칠리아 바르톨리나 율리아 레즈네바 같은 테크니션들이 화려한 어질리티로 곡을 마무리하기 일쑤다. 디도나토는 달랐다. ‘전쟁’을 테마로 삼은 전반부, ‘예프타’ ‘아그리피나’ 아리아에서 디도나토의 표정은 분노했지만, 목소리는 쥐어짜지 않았다. 목적음에 다다르기까지 지나치는 경과음들을 기교로 처리하지 않았고, 절묘한 억제를 통해 곡의 골격을 풍성한 울림으로 채웠다.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에서 비브라토를 뺀 담백한 해석에도 공명이 지속된 건 ‘디도나토식 힘빼기’의 백미였다.

후반부 ‘평화’를 전하는 방식은 논쟁적이다. 디도나토는 퍼셀과 패르트, 헨델 아리아를 통해 혼란기에 평화를 찾는 법을 관객에 물었고 본인이 먼저 답을 내놨다. 영문 텍스트에서 디도나토의 설득력은 극치를 이루기에, 선곡은 현명했다. 텍스트의 뉘앙스를 목소리 톤에 반영하는 순발력은 탁월한 메사 디 보체와 어울리면서 작곡가를 달리해도 흐름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생물이 꿈틀대는 듯한 비브라토가 발군인 바르톨리와 비교하면, 디도나토의 개성은 희미한 편이다. 바르톨리처럼 고음악 앙상블을 목소리로 압도하거나 밀고 당기기를 즐기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굵고 탄력 있는 톤으로 고악기의 여린 소리를 맞춰 목소리의 색채를 조율하고 조응한다. ‘양키디바’로 불리지만, 파트너나 앙상블에 맞춘 최적의 소리를 찾는 데 디도나토의 숨은 저력이 있다.

외형상으로 콘서트는 열린 해석을 지향하지만, 사실상 본인의 시각이 건강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이런 소리는 디도나토의 것’이라는 연상은 어렵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이는 디도나토일 것’이라는 강한 인상이 앙코르 이후 연설까지 이어졌다. “혼돈에서 당신은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디도나토의 자세는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유태인 의사 빅터 프랭클에서 빌렸다. 체험의 진정성을 근거로 아우슈비츠 기억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시오니스트의 위험처럼, 자칫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의 목소리가 명령형으로 전달되는 방식은 유의해야 한다. 오페라 가수가 과거의 텍스트에서 인류 보편의 가치를 찾아내더라도 그 교훈이 미래 지향적 기억으로 전수되려면, 일단 가수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인구가 좀 더 늘어야 한다.

글 한정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롯데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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