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필자들이 꼽은 화제의 무대
1월 25일~2월 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연극 ‘빌미’(최원석 작·연출)는 참 독특한 공연이다. 극작술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연출 콘셉트가 놀랍거나 신선한 것이 아님에도 관극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수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불쾌한 여러 가지 것들이 스멀스멀 한 곳으로 모여들더니 “그래서 지구는 멸망했습니다” 급의 급작스럽고 극단적인 결말로 치닫는 작품. 무엇이 불쾌했고 왜 그렇게 내달려야 했는지 곱씹어보는 시간이 꽤나 길었다.
‘빌미’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욕망이다. 욕망은 작품에 따라 그것을 교묘하게 은폐하느냐, 대놓고 강요하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전이시키느냐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변주되고 형상화된 익숙한 소재이다. 이 작품에서 욕망이 주목된 것은, 인물들이 발 딛고 있는 사회시스템 위에서 작동되는 욕망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작가로서 최원석의 이름을 알린 작품은 ‘변태’(2014)로, 모든 단단한 것을 녹여버리는 자본의 힘, 그것에 의해 물화되어버린 인간 존엄과 인문학의 가치 상실을 건조하고 서늘하게 그려낸 바 있다. ‘빌미’는 전작과 달리 감정들이 충돌하고 격동하는 뜨거움을 가졌다. 이는 자본과 사회구조에 대한 작가의 예민한 시선이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을 세습하고자 하는 최명광 교수와 그의 가족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철수네 가족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에 따라 갑과 을로 구분되는 시스템에 익숙한 그들은 수직적 위계와 거기에서 비롯된 욕망들을 거짓말로 포장하고 감춘다. 그들의 관계는 겉으로는 돈독해 보이지만, 최명광의 딸 승연이 데려온 결혼상대 진성필의 돌발적인 죽음, 철수 아들 하늘이 기억하는 부모들의 불륜 등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흘러가면서 여러 거짓들로 포장한 욕망들이 추악한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승연을 제외한 모두가 죽음을 맞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휘모리장단처럼 몰아치는 후반부의 속도감은 고속열차의 차창 밖 풍경처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할 틈도 없이 빠르고 극단적인데, 작품 초반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캐릭터와 상황들을 커다란 솥에 한꺼번에 쏟아 넣고 휘젓고 있는 작가의 뚝심이 인상적이다. 어떤 이야기든 중도에 힘 빠지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가의 근성이 ‘빌미’에서도 발휘되고 있었다.
공력 있는 배우들이지만 연기 스타일이 제각각이어서 얼핏 연출의 의도인가 궁금하기도 했고, 섬처럼 고립된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를 둘러싼 바닥에 채운 물은 공들인 노력에 비해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아쉽다. 물속에서 긴장하는 배우들의 표정도 그렇거니와 폭우라는 설정에 걸맞지 않게 평온한 수면은 상황의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위에 있든, 어떤 역할을 맡든 상관없이 자본이 최우선의 가치인 우리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들의 욕망이 얼마나 추악하고 비루한 것인지를 폭로하고 전시하고 있다는 것은 연극 ‘빌미’의 분명한 미덕이다. 공감과 소통이 사라지고 욕망만 넘쳐나는 현실은 수많은 SNS의 가식과 허세처럼 끝없는 거짓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그 뒤에 숨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짓’이며, ‘빌미’는 그 거짓의 끝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P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