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을 맞는 해다. 예술은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치유해왔을까? 민족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했던 100년 전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그 속에서 바라본 우리의 모습을 기록하는 작업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예술은 그렇게 아픈 역사를 품고도 도도히 흐르고 있다
Part 1
‘1919년’으로 들어가는 예술의 문턱에서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문화는 지배 계급의 이념과 정당성을 전파하고 지키기 위한 진지였다. 지배 계급이 보편이라고 강요하는 문화는 사실상 보편이 아니라, 자기 예찬이고 선전이며, 피지배계급으로부터 자발적 숭배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문화는 권력의 관리와 감독에 저항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중 예술은 지배의 표적을 향한 창과 화살일 수는 없었지만 변화의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은 표상이었다.
부당한 권력에 의한 제국과 식민으로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음악회장은 민족의 현실을 일깨우는 화약고와도 같았다. 베르디(1813~1901) 시절에 오페라극장은 ‘복합적인 사회성의 장소’(전수연)였다. 특히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은 오락 기능뿐 아니라 정치적 역할도 담당했다. 당시 라 스칼라 극장에 ‘한 막 당 세 번 이상 커튼콜을 허용할 수 없다’는 규정은 작품에 대한 몰입과 감정이 관객들 사이로 전이되며 일어나는 거센 운동에 대한 사전의 방지였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무대 위의 미장센이 무대 너머로 흘러 넘쳐 현실을 멜로드라마로 만들곤 하였다. 예를 들어 1848년 9월 3일 펠리체 극장에 모인 제노바의 남성들은 칼을 뽑아 들고 외국 놈들을 알프스와 이손초 강 너머로 쫓아 보내기 전에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입을 모아 맹세했다. 이날 이들은 극중 인물들과 한 치 다를 바 없었다. 베르디의 ‘에르나니’에 나오는 합창 ‘일어나라 카스티야의 사자여’ 장면 그대로다. 허구이긴 하나 오페라 무대에 대한 열정적인 반응이 곧바로 반정부 시위로 변모되는 루키노 비스콘티의 영화 ‘센소’(1954)의 첫 장면도 그렇다.
이처럼 작곡가들은 민족의 가슴에 숨어 있는 저항의 화약에 불을 붙여나갔다. 설령 검열로 인해 ‘현실’을 고발하지 못할 때면 역사 속의 인물과 배경을 소환하여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다’라며 검열의 혹리(酷吏)를 피했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들은 ‘이것은 지금 우리의 이야기다’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일종의 ‘돌려차기’였던 셈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1907년 발표된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의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는 스위스 구국독립의 투쟁에 앞섰던 윌리엄 텔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다. ‘서사’란 ‘스위스’를 당시 조선어로 발음한 것으로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10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정치소설’이란 표제를 달고 나왔던 ‘서사건국지’는 독일 실러의 원작 희곡을 중국의 정철관이 소설로 각색했고, 그것을 박은식이 역술한 것이었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했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1864~1921)도 프랑스 100년 전쟁의 영웅 잔다르크의 생애를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기술한 ‘애국부인전’을 같은 해에 내놓았다. 이들은 베르디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빌려와 현실을 고발하고 애국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독립을 외치는 예술들은 현실만을 담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극복의 서사를 담아 염원을 녹여 넣기도 했다. 지난 달, 14·15일에 있었던 서울시향의 ‘시벨리우스 스페셜’의 첫 무대를 장식했던 ‘핀란디아’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핀란드는 1809년 이래로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는데, 이 곡에서 시벨리우스(1865~1957)는 러시아의 ‘압제’는 무론 ‘저항’하는 핀란드인의 정신과 희망을, 그리고 종국에는 찬가풍의 선율(핀란디아 찬가)로 하여금 승리의 미래를 암시한다. 우리는 이로 인해 핀란드와의 역사적 정서의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음과 동시에 최성환 작곡의 ‘아리랑’을 떠올려 볼 수도 있겠다. ‘아리랑’은 2008년 2월 26일에 로린 마젤/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방북하여 가졌던 동평양대극장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기도 했다. 밝은 기운의 장조로 진행되는 곡의 중간에는 슬픔의 정서가 느껴지는 단조가 자리한다. 이는 우리민족이 겪은 수난을 상징한다. 하지만 그 슬픔은 이내 곧 극복되고 경쾌하게 진행되는 아리랑의 선율이 펼쳐진다.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기념사업들이 발주되었고, 역사물들이 쏟아져 나오며, 박물(博物)과 기념비라는 한정된 장소를 넘어 일상과 맞물려 있는 공공장에 전시되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이 사실을 알리고 있다. 공연예술계 역시 이러한 발걸음과 보폭을 맞추고자 한다. 독립 투사의 활약을 담은 작품을 서랍에서 꺼내고, 역사 속 소재 찾기에 골몰하던 예술가는 ‘1919년’의 방점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음악회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경 너머의 저항과 독립의 정신을 담았던 작품들을 모아 관객과 나눌 준비를 하고 있다.
한국의 음악사를 살펴보면 1919년 그해에 여러 투쟁가가 나왔다. 당시 막 유입되어 퍼지기 시작하던 서양음악식 어법과 문법으로 지은 단순한 노래조와 창가류가 많다. 지금까지도 노래의 악보와 가사가 남아 있어 당시의 상황과 민족의 심정을 짐작케 한다. 무엇보다 저항의 정신은 피 튀는 백병전뿐만 아니라, 무기 들고 나가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네의 마음에도 들끓었다. 만주 길림성에 설립되었던 민족학교 광성중학교에서 1914년에 발행한 ‘최신창가집’에 게재된 ‘자장가’가 이러한 시대의 한 모퉁이 풍경을 보여준다. 이 노래에는 아이가 얼른 자라 광복사업에 나서길 바라는 어미로서의 기원과 기다림이 녹아 있다. 조용하게 읊조리는 자장가가 ‘항일음악 330곡집’(민족문제연구소)에 수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장하다 자장자장 얼른 소학교/장하다 자장자장 발셔 중대학/박사동이 되고서 영웅동이 되어라/우리나라 광복사업에 아라 자장’ 이러한 노래와 음악들은 지금은 흩어진 기록과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기억이란 역사가 지닌 어쩔 수 없는 부작용-망각-과의 싸움이며, 그 쟁투의 노력은 예술과의 협업을 통해 방부(防腐)의 기능을 확대하곤 한다. 3월이다. 공연계 도처에 ‘그날의 기억’과 ‘그때의 기록’을 회상하고 잊지 않기 위한 장이 펼쳐진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Part 2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사람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며 펼쳐질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 그때의 기록을 회상하며 작품 속에 담은 사람들을 만나 지금 왜 우리가 그날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들어보았다.
서울예술단 ‘윤동주, 달을 쏘다’ 작가 한아름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남기를
서울예술단의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는 2012년 초연 이래 2013·2016·2017년 재연을 거치며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총 대신 연필을 들고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면서도 아름다운 시어를 놓치지 않은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그의 동료 송몽규·강처중 등을 다룬 ‘윤동주, 달을 쏘다’는 매 시즌 90% 이상의 객석점유율을 기록하며 많은 관객의 마음 속 깊이 다가갔다. 작품의 극본과 작사를 맡은 작가 한아름을 만나 윤동주를 무대에 그려낸 과정에 대해 들었다. 우리가 아는 윤동주와 우리가 몰랐던 윤동주, 그리고 우리가 상상하는 윤동주에 대한 깊은 고민이 배어났다.
‘윤동주, 달을 쏘다’는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5번째 시즌이자,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공연되는 것이라 더욱 의미가 깊을 것 같다. 초연 당시에는 ‘윤동주를 소재로 뮤지컬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겠냐’는 우려가 많았다. 당시에는 송몽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윤동주의 삶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이 없었다. 다행히 작품이 호평을 받고 흥행에도 성공했고, 영화 ‘동주’(2016) 등을 통해 윤동주에 대한 바람이 사회 전반에서 불면서 우리 작품의 재공연도 탄력을 받았다. 여리고 감성적인 이미지를 넘어 저항적인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싶었다.
윤동주의 생이 워낙 짧기도 했고 참고할 만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 삶도 짧았고,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넘어간 시기의 자료도 찾기 힘들었다. 극화시키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아서 사료들 간의 간극을 극적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했다. 예컨대, 윤동주는 죽기 직전 알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그 비명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지더라. 어머니, 고향, 억울하다…? 무엇을 떠올려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 사람이 되지’라는 구절(‘아우의 인상화’)을 발견했다. 윤동주가 죽기 전 ‘사람’이라고 외쳤을 것이라 생각하니 많은 부분이 풀리면서,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윤동주를 그려보자고 가닥을 잡았다. 누군가를 사랑했고, 친구와 재밌게 놀기도 하고, 장가가서 아이를 낳을 상상도 했을, 그런 ‘사람 윤동주’를 그리고자 했다.
‘달을 쏘다’라는 윤동주의 산문에서 작품의 제목을 따 왔는데, 윤동주와 달은 구체적으로 어떤 연결성을 지니는가? 윤동주 시의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를 ‘부끄러움’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부끄러움을 드러내는 장치로 달을 내세웠다. 조용히 글을 쓰는 밤, 사방이 고요한데 오직 달만이 윤동주를 내려다보는 것을 상상했다. 윤동주가 살던 시대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괴로운 와중에도 부끄럽게 살지 않기 위해 용기를 냈던 윤동주를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로 달을 위치시켰다.
노래 가사로 윤동주의 시를 사용하지 않고 새롭게 창작했다. 유일하게 넘버로 활용된 윤동주의 작품은 산문 ‘달을 쏘다’뿐이다. 사실 시를 활용하는 것에 유족들은 상당히 열려있었다. 창작자들이 원한다면 자구를 바꿔도 된다고도 했다.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시는 시만의 운율이 있고 해석의 여지가 있는데, 거기에 음악을 붙이는 순간 시의 정서가 확정되기 때문이다. 시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한 채 낭독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관객들도 시가 그대로 읊어지는 장면에서 큰 울림을 받는다고 하더라.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부모와 10대 자녀들이 함께 많이 봤으면 좋겠다. 공연이 끝나고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을 기회를 가진다면 좋겠다. 윤동주 선생도 본인의 시가 온전히 읽히는 시간을 기다릴 것 같다.
글 이정은 기자 사진 서울예술단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연출가 김동연
어둠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다
약육강식이 자연의 섭리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강자의 횡포를 당해낸 약자에게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특히 생태계의 논리가 아니라 인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의 국민들은 억울하다. 이 억울함 앞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뮤지컬 ‘신흥무관학교’는 평범하지만 아름다웠던 청춘들이 모여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미래를 준비해나간 과정을 그린다.
“1907년부터 시작해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이 앞부분에 속도감 있게 그려진다. 학교에서의 훈련 모습을 거쳐 1920년 청산리전투까지 일제강점기 초반의 이야기를 다룬다. 쉽게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이후부터 영화 ‘암살’ 전까지라고 보면 된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직접 신흥무관학교라는 이름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의병들이 모여 훈련받는 모습이 나왔다. 학교가 해산된 이후에도 이곳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암살’에 나오는 독립군이 되거나 의열단에 들어가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신흥무관학교’는 육군본부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다. 6·25전쟁이나 북한 관련 소재를 주로 다뤄왔던 군 뮤지컬에서 신흥무관학교는 처음 등장하는 소재다. 국방부에서 장병들을 상대로 소재 공모를 한 결과 채택됐다. 현재의 젊은 장병들이 과거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청춘들을 표현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작진도 흔쾌히 동의했다.
“작품에는 지청천이나 우당 이회영 선생처럼 실존 인물들도 등장하지만, 주인공은 팔도·동규·나팔·혜란 등과 같은 평범한 청춘들이다. 이들은 실제 존재했을 법한 인물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노비건 양반이건 모두 독립을 위해 싸웠고, 이들 중 대다수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한다. 작품은 실존 독립투사들의 이름이 화면에 빼곡히 쓰였다가 지워지면서 시작되는데, 이들 모두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다. 특히 ‘학교’라는 공간은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 학생들은 배우고, 우정을 쌓으며,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연대했다. 그들의 삶이 현재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고,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공감했으면 한다.”
‘신흥무관학교’ 속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초반 무장 항쟁이 성행하던 시절이다. 억압 속에서 예술이 더욱 꽃피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쪽과 사회적인 메시지를 예술에 담으려 하는 쪽으로 갈리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함께 모인 미술학도들은 다다이즘이라는 새로운 예술 형태를 만들어내며 예술 자체에 탐닉했다. 반면, 종군기자가 되어 전쟁 한복판에 뛰어든 헤밍웨이나 다수의 저항시를 남긴 한용운 시인도 있다. 공연은 두 가지 모두에 걸쳐져 있다고 본다.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을 외쳤던 공연들은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 1970~1980년대 성행했던 민중 연극은 사회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띤다. 연극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하다.” 지창욱·고은성·강하늘·조권 등 현역 군인들이 참여하는 만큼 에피소드 역시 흥미롭다. 국방부 태권도 시범부대에서 차출된 장병들이 앙상블로서 수준 높은 무술을 선보인다.
“연습·공연 기간에는 자대에서 나온 배우들로 별도 부대가 편성된다. 일종의 파견 부대로, 국방부 내 시설에서 관리하다 보니 지각이 있을 수 없다. ‘실수하고 다치면 자대 복귀’라고 하니 눈빛이 바뀌더라.(웃음)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자대에서 훈련하는 만큼 열심히 연습하지만,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일 뿐 아니라 사회와 연결될 수 있는 활동이다 보니 모두 열정이 넘친다. 아름다운 청춘들이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육군·쇼노트
서울시합창단 ‘유관순 오페라 칸타타’ 작곡가·연출가 이용주
마침내 과거에서 벗어난 삶을 위하여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릴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때 겪은 고통이 아니라 고문관에게 잘 보이려 했던 자신의 비굴함이라고 했다. 그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의 자존감에 치명적인 것은 부당한 대우 자체보다 이에 굴복한 자기 자신인 것이다. 3·1운동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유관순은 일본군의 끔찍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자존감을 지켰다.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한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인 4월 1일, 유관순은 고향인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이후 만세의 물결은 전국적으로 번져가지만, 부모님은 현장에서 일본 총칼에 죽임을 당하고 유관순은 오빠와 함께 투옥된다. 서울시합창단은 그를 기억하는 오페라 칸타타를 선보인다.
“3·1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전반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다. 문제는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러한 관계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진정성 있는 사죄 대신 현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타협하려고만 한다. 유관순이 독립운동에서 외쳤던 만세의 외침은 오늘날 수요집회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 사죄하라고 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민족이 주체가 되어 독립을 외쳤다는 환희와, 아직도 그 아픔이 유효하다는 데서 비롯한 상처가 공존하는 100주년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의 장르는 오페라 칸타타로, 칸타타가 지니고 있는 합창·중창·독창의 음악적 요소와 오페라의 연기적 요소를 결합했다.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명확하게 인지하며 감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작품에서는 연기적인 요소가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음악을 통해서만 스토리를 인지하기에는 음악이 갖는 추상성이 문제가 된다. 자신의 상황에 따라 주관적인 감정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개개인의 주관성을 통해 해석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 고증자료를 바탕으로 한 내레이션 또한 추가했다.”
역사적으로 큰 아픔을 지닌 이 시대, 조선 땅에는 일본을 통해 서양음악이 유입되고 있었다. 19세기 말 한국의 노래 음악이 서양음악과 만나면서 작곡가 홍난파·김동진의 주도 아래 가곡의 형태로 발전되었다.
“대중적인 민중가요가 인기를 끈 시대였다. 작곡하는 입장에서 민족운동과 관계된 음악들이 뛰어난 예술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필연적인 결과다. 변절하지 않고 버티는 것만도 힘든 시대에 과연 어떤 예술을 추구할 수 있었을까. 안익태 선생은 꽤 예술성 있는 음악을 선보였지만, 이후 친일·친나치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비밀리에 출판될 수 있는 문학의 경우, 저항정신이 강력한 소재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작곡가 이용주는 이번 작품 전에도 오페라 음악극 ‘윤동주’나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상처 입은 영혼-이화 이야기’의 작곡을 맡았다.
“이전 작품을 준비하면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는데, 용서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해자가 도저히 진정성 있는 사죄를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일본의 잔혹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표현하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일본에 대한 고발이 아니다. 일본에 진정성 있는 사죄를 요구하는 부분을 특별한 연출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국민을 넘어서서 더 많은 사람이 보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글 권하영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무용극 ‘여성독립운동가열전’ 안무가·연출가 양길호
민족을 품은 어머니의 정신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 펼쳐진 융복합무용극 ‘여성독립운동가열전’이 2월 9일부터 10일까지 동양예술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열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8문화협력네트워크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성북문화원이 주관해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어떻게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인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는 김구, 안창호, 윤봉길, 이봉창 등 주로 남성 독립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다양한 역할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 이은숙, 조화벽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성공 이후부터 1945년 해방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과 한국전쟁을 맞이하는 지점까지의 이야기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안살림을 맡았던 정정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강원도 양양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조화벽의 삶을 독립운동과 가족, 동시대성을 여성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시대정신과 여성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안무와 연출을 하는데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안무가로서 그녀들의 감정과 상황을 한국적인 음악과 몸짓으로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들을 몸으로 표현하려고 했고, 그 당시 영상과 사진 자료를 토대로 관객이 그 상황과 감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투쟁하는 여성독립운동가의 모습보다는 우리 곁의 어머니, 누이로서 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방법으로 투쟁했던 한과 감정을 담으려고 했다. 이들은 근현대사의 여인들 중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했던 사람들이다. 자유와 평등의 근대정신이 동틀 무렵의 조선은 식민지였고 그 현실에서 여성으로서의 독립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 현실 속의 나가 바로 이 무대의 여성 주인공이고 그들이 품었던 어머니의 정신이 지금 현대를 사는 여성의 뿌리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으로 이어졌음을 나타내고 싶었다.
여성독립운동가열전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표현했던 것은 무엇인가. 투쟁의 의지, 고독과 외로움, 가족과 나라에 대한 그리움, 슬픔, 희망 등 복합적이었다. 춤의 모티브를 격동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꿋꿋이 살아낸 인간의 의지, 그리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나는 고려인이다’ ‘카레이스키’ ‘전봉준 37’ 등의 작품으로 무용을 통해 역사적인 인물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소외받은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져 보인다.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유럽에서 활동하며 그들만의 현대무용을 바라보는 마음이 조금은 무거웠다. 우리의 역사 속 사건과 사람들을 춤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고 과거와 현재 속에서 우리의 미래를 비춰보고 싶었다.
앞으로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무대에 전하고 싶은가. 처음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안수길의 ‘북간도’를 읽고 나서였다. 망국인의 통한을 그린 이 소설을 접하고 잊혀진 이야기, 사람들, 기억하지 않고 기록하려하지 않는 이야기들 속에 우리의 가족들의 눈물과 회환과 슬픔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춤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나는 이것이 앞으로 우리 춤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본질의 이야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글 국지연 기자 사진 성북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