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결성된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은 ‘16개의 줄을 가진 하나의 현악기’라고 불렸다.
긴 세월을 머금었음에도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을 여전히 생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작은 1945년이었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네 명의 학생은 의기투합해 현악 4중주단을 결성했다. 당시 그들은 예상했을까. 그 악단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을 거라는걸. 창단 당시 이름은 모스크바 필하모닉 현악 4중주단(Moscow Philharmonic Quartet)이었고, 10년 후 보로딘 현악 4중주단(Borodin Quartet)으로 개명했다. 현재는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루벤 아가론과 세르게이 로몹스키, 비올리스트 이고리 나이딘, 첼리스트 블라디미르 발쉰이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마지막 4중주’는 25년간 단 한 번의 단원 교체 없이 이어진 현악 4중주단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토록 오랜 기간 호흡을 맞췄지만 영화 속 단원들은 반목을 일삼는다. 네 대의 악기가 하나의 소리를 찾아가는 동안 인간적인, 혹은 음악적인 갈등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는 사이좋은 실내악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너무 의지하는 순간 음악에 균열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를 부단히 의심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함부로 믿지 말며, 그런 와중에도 공통의 신념이 있어야지만 하나의 소리가 피어난다.
70년이 넘는 세월이다. 긴 시간 동안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단원은 여러 번 교체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정신은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라는 국가, 모스크바 음악원이라는 학교.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강건한 소리는 순수한 혈통에서 기인한다. 독일의 한 매체에서는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을 보고 “열여섯 개의 현을 가진 악기” 같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오는 5월,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이 다시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내한을 앞둔 비올라 주자 이고르 나이딘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70년 세월 동안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주요 단원이 여러 번 교체됐다. 긴 시간 동안 여전한 것과 변화된 것이 있다면.
새로운 연주자는 항상 신중히 선정해왔다. 기존 단원들과 연주 스타일이나 음악적인 해석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새 연주자가 영입되면 우리에게 ‘새 피’가 수혈된다고 생각한다. 미세한 차이는 있겠지만,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연주 스타일은 1960년대든, 1980년대든, 2000년대든 큰 변화는 없다고 본다.
보로딘 현악 4중주단에게 가장 중요한 작곡가로 베토벤과 쇼스타코비치를 꼽을 수 있다. 이 두 작곡가는 보로딘 현악 4중주단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베토벤은 현악 4중주의 기둥이 된 작곡가이다. 우리는 74년 동안 베토벤을 연주해왔고, 그의 작품을 여러 번 녹음했다. 쇼스타코비치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이다. 우리 악단의 초기 단원은 쇼스타코비치를 직접 만나 그의 앞에서 직접 현악 4중주를 선보였다. 이번 내한에서는 한국 관객을 위해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9번을 연주할 예정이다. 쇼스타코비치가 아내인 이리나 쇼스타코비치에게 헌정한 곡으로 5악장이 강렬하게 이어진다.
더불어 데카 레이블과 함께 진행한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전곡 녹음 프로젝트도 설명해 달라.
우리는 지난 해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전곡 음반 세트 신보를 발매했다. 이 음반에는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1번부터 15번까지를 실었다. 알렉세이 볼로딘과 함께한 피아노 5중주도 담았다.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류비모프와 트럼피터 세르게이 나카랴코프와는 1934년에 나온 ‘여자친구’를 녹음했다.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영화음악인데 그동안 자주 연주되지 않았다. 1933년에 발표한 피아노 협주곡 1번처럼 쇼스타코비치가 개인적으로 선호했던 피아노와 트럼펫의 조화가 돋보이는 곡이다.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으로 연주자들이 구성돼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육 과정이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지속력으로 보는 시선도 있는데.
1945년 창단 이래로 모스크바 음악원은 우리 단원에게 교육적 ‘어머니’이자 ‘엔진’이다. 계획적으로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만 단원으로 선정한 건 아니다. 의도라기보다는 우연이었다. 현악 4중주에 잘 어우러지는 각 연주자들의 기질 때문에 함께하게 됐다. 많은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모든 단원이 모스크바 음악원 출신인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아마 20세기 초반에 음악원에 있던 원로 교수님들로부터 시작된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 비슷해서인 것 같다.
보통 해외 공연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어떠한 기준으로 결정하는가. 이번 내한 프로그램을 선정한 이유도 궁금하다.
프로그램을 선택할 때마다 타협이 필요한 지점이 발생한다. 예컨대 우리가 먼저 이번 시즌에 연주할 곡을 제안하지만, 각 공연 관계자들마다 요청하는 곡이 다를 때가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한국, 그리고 서울 관객에게 러시아 불후의 명작인 차이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를 들려주고자 한다. 또한 현악 4중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33의 5번도 연주할 예정이다. 유럽에서 작곡됐지만 빈을 방문한 러시아 왕자 파벨에게 헌정된 곡이다.
보로딘 현악 4중주단 활동이 당신의 음악 인생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현악 4중주는 현재 우리 삶에서 가장 우선적인 활동이다. 그렇기에 삶에 있어 다른 일은 우선순위가 밀린다.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헌신이 필요하다. 이 헌신은 현악 4중주의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규칙적이고 빈번한 리허설도 필수다. 물론 이건 우리의 의견이고, 다른 4중주단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앙상블 연주가 없을 때 단원들은 무엇을 하며 일상을 보내나.
우리는 연습을 자주 한다. 공연 날짜에 맞춰서 완성도를 높여야 된다는 사명감이 있다. 여가 시간이 생기면 보통 친구들이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휴가를 즐기기도 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번 내한 공연을 통해 개인적으로 기대하는 점은.
한국 공연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이전 내한 공연 때 음악에 관심이 깊은 한국 관객의 모습이 기억난다. 열정적이었다.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2019년 보로딘 현악 4중주단에게 가장 중요한 일정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콘세르트헤보에서 쇼스타코비치 사이클을 진행하고 있다. 11월부터는 1년간 뉴욕 92번가 Y에서 이 사이클을 이어간다.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한 프로젝트이다.
글 장혜선 기자 사진 SBU
보로딘 현악 4중주단 내한공연
5월 15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차이콥스키 현악 4중주 1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