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5월 1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45년에 창단된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이 세 번 이상 멤버가 변경되면서도 러시아 실내악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전설적인 이름을 유지한다는 것에서, 이 단체가 지키고 있는 정체성과 비전, 음악적 특징 등을 기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제1바이올린의 루벤 아하로니안의 연주는 날카롭고 이지적인 면이 강하다. 리듬을 타거나 선율에 취하지 않고 거의 움직임이 없이 똑바른 자세로 연주하는 모습에서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에 비하면 다른 멤버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감성적 이미지를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제1바이올린과 3중주의 대립구도는 차가운 외면과 끓어오르는 내면의 괴리된 고통을 투영한다.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남다른 권위는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이러한 특징이 그의 인격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거와 오늘의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을 이어주는 독특한 전통이자 가치이다.
첫 곡인 하이든의 현악 4중주 Op.33 No.5는 소위 ‘러시아 4중주’라고 불리는 세트로, 러시아 연주자들의 흥미로운 시작이었다. 제1바이올린은 무심하게 음표를 연주하는 듯하지만 그의 소리는 상당한 압도감을 지녔으며, 다른 악기들은 표현적인 연주로 분위기를 이끌어갔다. 전체적으로는 제1바이올린의 해석을 우선하여 담백하게 연주되었는데, 흥미는 덜했지만 고전음악의 절대적이고 순수한 이미지와 연결되었다.
이어지는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9번은 그들의 대표 레퍼토리로서, 이번 공연에서 가장 기대를 모았다. 이 곡에서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음향적 특징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1악장에서 감정을 억제하고 유리알을 옮기듯 한 음 한 음 소중히 내는 소리에는, 감정을 감추고 통치자가 원하는 목소리를 내야했던 예술가의 고통이 아로새겨져 있다. 느린 2악장에는 극도의 집중력으로 억눌린 잠정을 쌓아나갔으며, 3악장은 특히 제2바이올린과 첼로가 제1바이올린에 저항하듯 거칠게 표현하며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4악장은 비올라의 서정적인 선율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죽음을 표현할 때면 으레 비올라를 등장시켰다. 죽음을 통해 안식을 찾는 작곡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지막 5악장은 피날레로서 부각되어야 함에도, 제1바이올린과 3중주의 건조한 대화로 일관한 것은 아쉬웠다. 가장 격렬한 부분에서조차 고상하게 그리는 그들의 해석은, 물론 존중받아야 하지만 공감하기는 어렵다.
후반부는 차이콥스키의 현악 4중주 1번이 연주되었다. 1악장에서부터 제1바이올린의 무심한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미끄러지듯 유연한 활을 타고 전달되는 독보적인 음색은 잊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세 악기가 제1바이올린에 눌려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차이콥스키의 작품에 어울려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에게 기대하는 감성적 감흥을 제한하는 문제가 있는데, 이 작품의 속내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2악장 ‘안단테 칸타빌레’에서는 일관적으로 유지되었던 제1바이올린과 3중주의 구도를 깨고, 한 목소리로 꿈과 환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갔다. 이성적인 날카로움을 내려놓고 따뜻하고 차분하게 그린 이미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3악장에서는 제1바이올린의 컨디션을 의심할 정도로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마지막 4악장에서 보로딘 현악 4중주단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며 마무리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S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