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밑에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한국가곡 ‘봉선화’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에 봉선화를 본 적 있는가. 봉선화는 늦봄에 싹을 틔워 초여름에 만발하는 꽃이다. 채 지기도 전에 손톱에 물 들인다고 꽃잎을 뜯어갔던 예전에는 지금보다 좀처럼 시들어가는 봉선화를 찾기 어려웠을 성 싶다. 그런데 ‘봉선화’의 작사가인 시인 김형준(1885~1965)은 그 모습을 본 모양이다. 집 앞의 져가는 봉선화를 보며 그는 일제 치하에서 핍박받는 우리 민족을 떠올렸다. 김형준은 이웃집에 사는 청년 작곡가로부터 청탁받은 곡의 가사로 붙이기로 한다. 그 작곡가가 바로 난파 홍영후(1898~1941)다.
당시 스물 초반의 홍난파는 3.1운동 이후 작곡을 시작해 이듬해인 1920년 ‘봉선화’를 발표했다. 애상조의 바이올린 기악곡이었다. 문필가로도 활동한 그는 자신의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첫 장에 ‘애수(哀愁)’라는 이름으로 곡을 실었다. 제목처럼 단조 선율이 서정적이며 처량하다. 여기엔 시대적 배경과 그의 개인적 상황이 맞물려 작용했다. 아끼던 바이올린을 팔아서 번 돈으로 독립선언문을 인쇄·배포했으나 독립은 좌절됐고, 재학 중이던 도쿄 우에노음악학교(현 도쿄음악학교)로부터 복학 신청까지 거부당했다. 시대적 아픔이 담긴 선율에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가사가 조합된 노래가 ‘봉선화’인 것이다.
시와 노래가 합해진 ‘봉선화’는 곧잘 한국가곡의 효시로 일컬어진다. 이때의 가곡은 시조에 곡을 붙인 전통 음악을 칭하는 가곡과는 구분된다. 서양식 곡조에 우리말로 노래한 창가에서 분화된 한 장르로서의 가곡을 뜻한다. 일찍이 선교사로부터 서양 문물을 접하고 일본에서 유학한 홍난파는 서양식 기법으로 작곡하되 한국적인 정서를 녹이는 데 능통했다. 그리하여 해방 전 일본에서 울려 퍼진 애절한 ‘봉선화’는 우리 민족을 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1942년 소프라노 김천애는 한복을 입고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봉선화’를 불렀다. 모진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 끝내 다시 피어날 봉선화의 모습을 간절히 바랐으리라.
정작 곡의 주역인 홍난파와 김천애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뒷맛을 씁쓸하게 한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피고 지는 꽃보다 푸르른 신념이 그리워진다.
글 박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