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SUBJECT
실내악·오페라·발레와
만난 피아노
우리가 몰랐던 피아노 협업의 세계
피아니스트의 역할과 활약은 생각하는 것보다 넓고 다양하다. 공연장에서 음악가들과 함께 하는 것은 기본이고 오페라, 합창, 발레 등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중요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과 중요도가 ‘반주’로만 국한되는 일이 많고,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오해 아닌 오해로 인해 전문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기도 한다.
이번 특집에는 ‘앙상블’의 일원이 되어 활약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세계를 담았다.
그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현장부터 다양한 공연 현장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들의 역할,
나아갈 방향까지 집중 탐구한다.
기획·총괄 허서현 기자
PART1
앙상블 피아니스트
PART2
오페라 코치
PART3
발레 피아니스트
PART4
명파트너들의 음반과 공연
자문 및 도움
PART 1 고예빈(드레스덴 음대 독주 피아노 석사 과정 졸업, 하노버 음대 실내악 피아노 석사 과정 재학 중)·변혜림(카를스루에 음대 독주 피아노 석사 및 박사 과정 졸업, 하노버 음대 리트 및 실내악 피아노 과정 졸업)·유재연(한예종 피아노 반주 전공 전문사 졸업, 미국 맨해튼 음대 컬래버레이티브 피아노 석사 과정 졸업)
PART 2 가진이(오스트리아 린츠 극장 수석 오페라 코치 및 총 음악 감독 어시스턴트)·엄미연(독일 마인츠 극장 레페티토어린)·이은정(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오페라 극장 레페티토어린)·이인선(페트루첼리 바리 극장 객원 음악코치)·이혜령(독일 데트몰트 극장 제2상임지휘자)
PART 3 김소현(캐나다 국립 발레 학교 클래스 피아니스트)·지신현(서호주 공연예술 아카데미 클래스 피아니스트)
PART1
앙상블 피아니스트
#1 개념 짚기
‘반주’가 아닌 ‘실내악’
우리가 흔히 ‘바이올린 소나타’로 알고 있는 작품의 원제목은 다음과 같다. ‘Sonata für Pianoforte und Violin’, 직역하자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다. 편의상 ‘독주악기’의 소나타를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악 소나타 원제목에는 이 장르가 피아노와 2중주라는 것이 명시되고 있다. 소나타는 두 악기로 동등한 구조 위에 완성된다. 하지만 통용되는 ‘반주’라는 이름 하에서 우리는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조적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한 소나타 전체에 대해 어그러진 감상을 하는 것에 그치게 되는 것 아닐까.
최근 현악을 중심으로 현악기 주자와 피아니스트, 두 연주자의 이름을 나란히 내건 ‘듀오 리사이틀’의 공연명이 심심찮게 사용된다. 누구보다 작품의 가까이에서, 더 나은 해석과 전달에 힘쓰는 연주자들이 내건 올바른 방향성이다. 하지만 공연장에 진열된 이름이 전체의 인식 변화를 가져오진 않는다. 여전히 피아니스트의 대부분이 직면한 일상에서는 ‘반주자’를 대체할 용어를 찾기 힘들고, 계속되는 지칭은 피아니스트들의 음악적 영역에 한계를 만든다.
해당 형태의 무대에 오르는 피아니스트의 개념 정의를 위해, 본지에서 주요 근거로 삼은 것은 해외 교육 기관의 전공 명칭이다. ‘협업’과 ‘실내악’이라는 관점에서 피아니스트를 바라본다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용어의 확장과 한계, 궁극적 지향점은?
이에 따라 동등한 위치의 피아니스트 역할을 강조하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깊게 다룬다는 전문성에 방점을 찍어 ‘앙상블 피아니스트’라는 용어에 힘을 싣기로 했다. 이는 일부 피아니스트들을 통해 이미 통용됐지만, 보편적 명칭은 아니다. 이 개념을 잘 설명하기 위해 여러 영역의 피아니스트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용어를 들고 그들과 ‘부딪혔다’는 표현이 맞겠다.
우선 앙상블 피아니스트가 가져야 하는 전문성을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동의를 얻었다. 솔로로 연주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공부, 연주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 동시에 혼자 연주할 때와는 다른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이 용어 사용에 설득력을 더한다. 타인의 연주에 대한 배려와 소통의 유연함도 중요한 자질로 여러 번 언급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다. “수많은 실내악 무대에 섰지만, 나 자신을 ‘앙상블 피아니스트’로 명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실내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다. 연주 형태에 따라 굳이 다른 호칭을 써야 하는 이유가 있나.” 개념의 확립을 위한 용어의 사용은 필요하지만, 이 용어가 하나의 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오히려 피아니스트들에게 음악적 한계를 설정하는 꼴이 된다는 것.
얼핏 용어의 사용을 두고 찬반으로 나뉜 듯 보이지만, 이 모든 피아니스트의 목소리가 지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 한 곳이다. 이들은 ‘반주’라 불리는 앙상블 연주에서도, 솔로 연주 못지않은 음악적 완성도를 추구한다. 이들의 노력과 성장에 발맞춰 이제 대중의 인식에도 결정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글 허서현 기자
#2 발전 현황과 과제
국내 교육 과정 설립과 안착
이영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피아노 반주 전공 교수
민경식 목원대학교 피아노과 교수
국내 교육 과정은 1994년, 피아니스트 임헌원이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과정에 ‘반주과’를 신설하며 시작되었다. 사실 ‘반주’라는 소극적 개념의 인식 개선을 위해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역설적이게도 국내 교육 과정의 명칭이다. 현재 해당 교육 과정은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중심으로 국내 약 20여 개의 음대에 개설되어 있다. 명칭은 모두 ‘피아노 반주’ 전공. “우리나라의 대학 전공명은 정형화 되어 있었다. 해당 전공에 대해 고민하며 ‘키보드 컬래버레이티브 아츠’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지만, 한국말로 전환하기도, 영어를 그대로 쓰기도 어려웠다”는 것이 이영희 교수의 기억이다.
2007년, 중앙일보는 ‘음악계 청년 실업에 … 피아노 ‘반주 전공’이 뜬다’를 제목으로 해당 교육 과정을 다룬 적이 있는데, “반주자는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하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언급하며, 해당 현상을 음악계 전반의 ‘청년 실업’과 관련짓기도 했다.
최초의 교육 과정이 신설된 후 30년 동안, 피아노 반주 전공은 이러한 급물살을 타고 양적 성장을 이뤘다. 피아노 연주가 필요한 모든 곳에 앙상블을 공부한 피아니스트들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해당 교육 과정을 거친 학생들이 ‘반주자’로서의 위치에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이 교수는 언급한다. 동시에 이 현상이 “클래식 음악계 전체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정도는 끌어올렸을 것이라고 자부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두 교수 모두 현재의 교육 과정에 심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앙상블에 관해 공부할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석사과정에 준하는 전문사 과정이 6학기임에도, 학생들이 졸업하면서 아쉬움을 이야기한다며 “국내에 박사 과정이 더 활성화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민경식 교수가 재직 중인 목원대에서는 원래 학부에 ‘피아노 반주’ 전공이 따로 개설되어 있었다. 4학기에 불과한 석사 과정보다는 방대한 커리큘럼을 다룰 시간이 넉넉했다. 현재는 대학 지원 수요 감소와 함께 ‘피아노’ 전공으로 통합되었지만, 심화 전공으로 ‘피아노 반주’를 선택할 시스템은 남겨두었다. 민 교수는 “실력을 갖춘 앙상블 피아니스트를 길러내는 것도 노력해야겠지만, 인식의 변화도 중요하다”며, “각 대학에서도 해당 과정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수도권 대학 대부분에도 피아노 반주 전공이 개설될 만큼 비중은 높지만, ‘피아노 반주’ 전공만을 전담하는 교수의 배치는 적다. 전임이 없으면, 학교 내에서 해당 전공에 대한 발전이 더딜 수밖에 없다. 전문성 향상을 위한 교육 과정 발전 방향에 책임감을 가지고 고민해야 할 때다.
‘제대로 알고 치고 싶었다’는 것이 한 앙상블 피아니스트의 학업 동기다. 자신의 음악적 해석을 뒷받침할 공부와 근거를 얻고 싶었다는 것. 초견(처음 보는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하는 것)이 좋다는 한 교수의 추천에 시작했다가, 그간 피아노 솔로로는 풀지 못했던 작곡가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를 통해 해결됐다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독일어 텍스트를 정확한 발음으로 술술 읽어 내려가야 하는 수업은 그에게 일상이 되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하며 즐거움을 느낀 또 다른 피아니스트는 더 많은 연주 기회를 통해 음악가로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공통점은 이들 모두 그간의 교육 과정을 통해 자신을 하나의 독립된 ‘연주자’로서 명확히 인식한다는 것이다.
앙상블 피아니스트에 대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솔로 피아니스트’로서의 역량 부족으로 인한 차선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실제로 앙상블 피아니스트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치우치지 않고 모두 다뤄야 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어울리는 악기 혹은 분야 등을 찾아간다. 피아니스트 본연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성향, 성격, 음색, 그리고 정의할 수 없는 여러 요소가 이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피아니스트로서 무대에 오르고, 완벽한 음악적 완성도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 민 교수는 “적어도 무대 위에서 반주자가 소외되던 시절은 지난 것 같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내적으로는 인정 받았으나 아직은 그 지위나 역량이 따르지 못하는 것뿐이다. 인정받은 만큼의 영향력이 생기는 날이 오길 바란다. 이제 더 젊은 연주자들이 활약할 길을 열어줘야 할 때.”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글 허서현 기자
앙상블 피아니스트 교육의 현주소
한국 | 현재 국내 음악대학에 개설된 ‘피아노 반주 전공’은 대부분 석사 과정이다. 경희대·국민대·동의대·목원대·부산대·상명대·성신여대·세종대·수원대·숙명여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추계예술대·한국예술종합학교·한세대·한양대(가나다순) 등이 있으며, 그중 박사 과정 및 석·박사 통합 과정을 개설한 학교는 국민대·상명대·성신여대·연세대 등이다. 기악 소나타, 가곡(독일·프랑스·영미·스페인 혹은 러시아), 오페라 아리아, 피아노 외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이 실기 공부 범위다. 다른 악기 클래스에 소속돼 듀오 연주를 실습하는 경우도 많다.
미국 | 우리나라 커리큘럼처럼 성악과 기악을 모두 아우른다. 미국 대부분의 음대에 컬래버레이티브 피아노 과정이 있으며, 전임 교수의 숫자도 많은 편. 좋은 솔리스트들과의 연주 경험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술이 활성화되어 있는 도시의 학교를 고르는 것도 앙상블 피아니스트 지망생들에게 중요하다.
독일 | 미국이 모든 음식을 맛보는 뷔페라면, 독일은 한 가지 음식만을 고수하는 전문 식당가다. 가곡 피아노 과정(Liedgestaltung)과 실내악 피아노 과정(Kammermusik)으로 나뉘어 있다. 주로 전담 교수에 따라 학교를 선택한다. 실내악 피아노 과정은 독일 내 음대의 반 정도에 개설되어 있다. 대부분 실내악 팀을 꾸려서 함께 입학하며, 학교에 따라 팀 없이 피아니스트가 입학에 여러 앙상블을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석사 과정에 준하는 Master 학위 과정이어서 실기 위주의 수업이 진행된다. 가곡 피아노 과정은 물론이고, 소통이 중요하기에 언어(독일어나 영어) 실력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리트 피아니스트란?
대우와 중요성 | 독일에서는 ‘리트 피아니스트’에 대한 구분이 국내에 비해 훨씬 뚜렷하다. 리트 콩쿠르가 많고, 현대 가곡의 연주 비중이나 관객의 관심도가 높다는 것도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다. 솔로 피아니스트는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리트 피아니스트는 하나의 가곡 연주회를 위해 성악가와 ‘함께’ 프로그램을 짠다. 연주비도 성악가와 동등하다. 네트워크도 활발하며, 적극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함께 모여 세미나를 하며 ‘연주 투어를 할 때, 성악가의 부재는 연주회를 취소할 근거가 되는데, 리트 피아니스트의 부재는 왜 대체할 피아니스트가 있다고 인식되는가’를 이야기하며 그 부당함을 논의할 정도.
가곡 피아노과 | 인식 개선에 대한 변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독일의 거의 모든 음대에 개설된 ‘가곡 피아노 과정(Liedgestaltung)의 영향이 크다. 국내에서는 해당 과정을 ‘가곡 반주과’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지만, 그 원어가 가지고 있는 범위는 조금 더 넓다. 본지는 정확한 의미 번안을 위해 고민했고 그 결과 결국에는 ‘가곡 피아노 과정’으로 간추리게 되었지만, 원어의 의도는 ‘가곡’을 배운다는 것에 더 방점이 찍혀있다.
교육과정과 의미 | ‘가곡 피아노 과정’(Liedgestaltung:리트게슈탈퉁)에 사용하는 독일어 ‘Gestaltung’의 사전적 의미는 영어로는 structuring, shaping, styling, forming, designing, creation, composition 등이 될 수 있다. 이 ‘Gestaltung’이라는 말은 독일어에서 자주 나타나는 ‘포괄적 용어’(Umbrella Term)라는 뜻으로 인식되고 있다. 넓은 범위의 주제를 편하게 하나로 묶어주는 말이다. ‘Liedgestaltung’이라는 학업 과정에서 피아노 음악뿐 아니라 문학, 성악가와의 협업, 성숙한 무대 준비 등을 배우기 때문이다. 정확히 하나의 단어로 콕 짚어 말하기 어렵기에, 독일인들이 이 모든 의미를 내포할 단어로 Gestaltung을 선택한 것 아닐까. 또한 ‘Liedgestaltung’라는 단어는 사실 피아니스트에게만 한정되는 뜻이 아니다. 리트를 공부하는 성악가 역시 ‘나는 리트게슈탈퉁을 공부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독일에서도 이 학업에 대해 ‘Liedgestaltung’이라는 단어를 대체할 더 적합한 단어를 쓰게 될지, 아니면 이대로 만족하고 두게 될지 궁금하다.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결국 (예술)가곡 피아노과가 적합할 것 같다. ‘Gestaltung’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살펴본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피아노(Klavierg) 전공을 Klaviergestaltug이라고는 부르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것을 내포하는 학문이라는 것은 커리큘럼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자문 변혜림
#3 커리어 인터뷰
피아니스트가 앙상블에 빠질 때
안은유는 룩스 트리오(바이올린 이재형·첼로 채훈선)의 멤버이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는 피아니스트의 삶에 대한 그의 고민에는 솔리스트로서의 성장과 동시에 앙상블 피아니스트로서의 성장도 담겨 있다. 한편, 박영성은 젊은 솔로 연주자들과 무대에 서며 앙상블 피아니스트로 국내 무대에 자리 잡았다. 앙상블 피아니스트로서의 명확한 첫 시작도, 계기도 없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연주해주고 싶다는 생각보다, 다른 악기 연주자와 고민하고 합일점을 찾아가는 즐거움에서 앙상블 피아니스트의 길을 시작했다고 한다. ‘앙상블 피아니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는 일리야 라쉬콥스키는 다만 스스로 피아니스트라고 정의하며 ‘반주’가 아닌 ‘연주’의 주체로서 무대에 서고 있다. 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통해 국내 앙상블 피아니스트 활동의 현주소를 바라본다.
피아니스트 박영성
악기와 연주자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떤 음악가와 연주하기 편한가?
음악적 성향과 결이 비슷한 음악가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기교의 화려함보다 소리에 집중하는 연주자를 더 선호한다.
레퍼토리 선정을 할 때, 독주자와 어떻게 이견을 조율하는가?
누군가와 함께 프로그램을 짤 때, 다양한 시대의 작품을 포함할 것을 권한다. 모두가 하는 작품 외에도 숨은 좋은 작품들이 많다.
파트너가 피아노의 역할과 존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생기는 문제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같이 현악기가 피아노를 모방해야 하는 경우, 또는 피아노가 현악기의 피치카토와 같은 주법을 모방해야 하는 경우처럼 상대 악기의 음색과 연주법뿐만 아니라, 작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
때론, 리허설에서 드러나지 않는 문제점이 본 공연에서 나타나기도 할텐데.
좁은 연습실에서 들렸던 소리가 넓은 콘서트홀에서는 잘 안 들리는 문제가 종종 생긴다. 지난해 금관 5중주랑 무대 리허설 중 피아니스트 쪽으로는 중요한 선율이 하나도 들리지 않아 당황한 적이 있다. 그럴 때 연주자에게 중요한 대목에서는 피아노와 시선을 마주쳐 달라고 주문을 하기도 한다.
이상적인 연주는 무엇인가?
좋은 연주란 주관적이지만, 상대 연주자의 악기 소리가 내가 내고자 하는 소리와 일치할 때 연주에 대한 만족이 크다.
박영성(1990~)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하고 아헨 모차르트 콩쿠르, 중앙콩쿠르, 성정음악콩쿠르 등에 입상했으며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양인모·임지영, 플루티스트 박예람,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등과 연주하며 앙상블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피아니스트 안은유
뮌헨 음대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크리스토프 포펜과 포레 피아노 콰르텟의 피아니스트 디르크 모메어츠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포펜 교수님은 레슨 때마다 지휘하시며 ‘멀리서 숲을 보듯’ 음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셨고, 모메어츠 교수님은 ‘나무 한 그루 한그루를 살펴보듯’ 음악을 함께 만들어주셨다. 두 분을 만난 건 참 행운이었다.
언제부터 독주보다 앙상블 연주에 더 비중을 두게 되었나?
처음에는 무안할 정도로 피아노 연주만 지적하셔서 자존심도 상하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악기와 소리를 맞추고, 곡을 완성해가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쾌감과 전율을 느꼈다.
독주와 앙상블 연주는 소리 내는 방식부터 차이가 있다. 피아노에서는 비브라토나 음을 지속하며 크레셴도가 불가능하고, 유연한 보잉 대신 까다로운 레가토로 결을 맞추어야 하는 어려움 등이 있다. 다른 악기를 이해하기 위해 어떠한 방식으로 연주법에 접근했나?
피아노의 선율을 다른 악기의 음색으로 듣는 훈련이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한동안 소리의 본질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멤버인 훈선과 재형에게 피아노 악보의 특정 부분을 가리키며 첼로나 바이올린으로 연주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관현악단이라는 ‘직장’에 들어가면 되지만 피아니스트에게는 안정적인 직업의 폭은 매우 좁다.
그 질문에 대해 여전히 깊이 고민 중이고, 하나씩 알아가고 있다. 쉽게 답하기 어렵다.
피아니스트 안은유로서의 계획이 궁금하다.
유학 생활이 길었던 만큼 짧게 숨 고르기를 한 다음, 앙상블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양한 모습으로 국내 관객에게 연주를 들려드리고 싶다.
안은유(1991~) 서울예고·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대를 졸업하고 쾰른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뮌헨 음대에서 실내악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2014년부터 룩스 트리오의 멤버로 활동하며 2018년 ARD 콩쿠르에 입상했다.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콥스키
어떤 피아니스트가 좋은 앙상블 피아니스트인가?
위대한 ‘앙상블 피아니스트’들은 누구인가? 라흐마니노프(1873~1943), 아르투르 루빈스타인(1887~1982),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3~1989) 등이다. 즉 피아니스트란 ‘앙상블 피아니스트’와 ‘비앙상블 피아니스트’로 나눌 수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미켈란젤리(1920~1995)는 실내악 연주를 한 적이 없다. 또한, 독주를 많이 하지 않았던 제럴드 무어(1899~ 1987)와 이타마르 골란(1970~)과 같은 피아니스트도 있지만, ‘피아노 치는 것’은 ‘혼자 연주’하거나 동시에 ‘함께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꾸준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시리즈에 협연자로 참여해오고 있다. 협주곡 연주가 앙상블 연주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좋은 실내악 연주가 협연에 영향을 준다. 실내악을 연주할 때처럼 각 악기의 독주 파트에 귀 기울이며,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동시에 친밀한 영적교감을 나누려고 한다.
지휘자 도미니크 라우이츠와 마이클 멀렛에게 지휘를 배웠다. 그 배경이 앙상블 연주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실내악 연주를 통해 실내악을 배운 것이다. 선생님들이 아닌 내 음악 파트너들에게서 말이다. 그리고 많은 음반을 듣는 것이 도움이 됐다. 좋은 음악 파트너와 좋은 음반, 이 두 가지면 충분하다.
좋은 연주자는 어떤 부분을 볼 때 알 수 있는가?
악보를 정확히 읽어오는 연주자와 연주하기 편하다. 하지만 무대에서만큼은 독주자의 자발성도 필요하다. 또한, 피아니스트와 레퍼토리를 상의하는 연주자는 좋은 매너를 가진 연주자라고 생각한다. 더욱 많은 연주자들이 피아니스트와 함께 레퍼토리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면 매우 좋을 것 같다.
독주회부터 앙상블까지, 5월에도 많은 공연을 앞두고 있다.
개인 독주회(5.11/예술의전당)를 비롯해 첼리스트 홍은선(5.2), 한재민(5.27·30) 테너 존노(5.28)등과의 연주도 앞두고 있다.
글 임원빈 기자
일리야 라쉬콥스키(1984~)
노보시비르스크 음악원, 하노버 음대, 파리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에서 수학했다. 마린스키 심포니, 도쿄 심포니 등과 협연한 바 있는 그는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 양인모 등과 함께 호흡을 맞췄으며 현재 성신여대 음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PART2
오페라 코치가 된 피아니스트
#1 개념 짚기
성악가들 연습부터 공연 준비까지
오페라 공연 한 달 전, 연습실 피아노 앞에 ‘한 사람’이 앉아있다. 공연을 준비하는 성악가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한 명씩 들어온다. 리허설을 앞두고 각자 오페라의 노래를 연습하는 시간이다. 발음도 여기서 꼼꼼히 체크한다. 일 대 일 연습이 끝나면, 앙상블 노래를 위한 단체 연습도 진행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이 사람은, 성악가들의 선생일까?
그는 오케스트라를 대신해 오페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피아노로 연주해내야 한다. 연습을 위한 지휘자가 없을 때면 직접 손을 들어 성악가들을 진두지휘한다. 결석이라도 한 성악가가 생기면, 대신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이 사람의 일이다. 오케스트라와 함께 리허설할 때는 객석에 앉아 지휘자의 귀가 된다. 오케스트라 음향 밸런스를 판단하고, 성악가들에게 전하는 피드백에도 끊임없다. 혹자는 이들의 역할을 두고 ‘피아노 치는 지휘자’라 말한다.
여기까지가 오페라 극장에 소속된 ‘레페티토어(Repetitor, 여성일 경우 레페티토어린)’들이 하는 일이다. 현재 독일 및 오스트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오페라 코치들 중 피아노 전공자들이 보여준 여정은 피아니스트들에게 오페라계로의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고, 커리어 발전의 길라잡이가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에서도 피아노 앞에 앉아 이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존재한다. 국내에서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오페라 코치 과정’이 개설되어 있지만, 실제 ‘오페라 코치’직으로서는 활동의 영역이 아직 넓지 않다. 해외에서도 이들이 활동하는 곳은 오페라 제작 시스템이 단단하게 구축된 오페라 전용 극장이다. ‘오페라 코치’의 활동은 연습실에서 국한되지만, 연습을 단단히 여며가는 과정에 이들은 단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종합적인 시선과 앙상블 능률을 높이는 피아니스트로 활약한다. 글 허서현 기자
오페라 극장에 소속된 ‘레페티토어’
오페라 극장의 구조
게엠데 | 총음악감독(General Musik Direktor)
카펠마이스터 | 상임지휘자를 뜻하며, 제1상임지휘자(수석 지휘자), 제2상임지휘자(부수석 지휘자)로 나뉜다. 제2상임지휘자의 경우 극장에 따라 레페티토어로서의 의무를 해야 함이 기재된 곳도 있다.
슈투디엔라이터 | 수석 오페라 코치(Studienleiter)로 레페티토어의 팀장급이다. 극장 규모에 따라 2~8명 정도의 레페티토어들이 있다. 레페티토어들의 리허설 일정을 분담하고, 연습 상태를 체크한다. 극장 오디션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한다.
레페티토어 | 오페라 코치(Repetitor)로 해석되며, 리허설 전 성악가들과 1:1 음악 연습을 한다. 액팅 리허설에서는 피아노 반주를, 오케스트라 리허설에서는 음악적 피드백을 맡는다. 공연 기간에는 작품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건반 악기 연주를 담당한다. 최근에는 코레페티토어로 많이 불리고, 독창자들의 연습을 담당하는 솔로 레페티토어의 명칭도 사용한다.
콰이어디렉터 | 합창 지휘자(Chordirektor)
#2 커리어 인터뷰 1
피아니스트 4인의 레페티토어 도전기
가진이 오스트리아 린츠 극장 수석 오페라 코치·음악감독 어시스턴트
엄미연 독일 마인츠 극장 레페티토어
이은정 잘츠부르크 오페라 극장 레페티토어
이혜령 독일 데트몰트 극장 제2상임지휘자
오페라에 매료된 피아니스트들이 극장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산은 험준하다. 오페라에 사용되는 언어를 발음까지 모두 익히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극장마다의 시스템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럽에서 현재 오페라 코치로 활동 중인 한국인들의 생생한 증언을 모아 전달한다.
※ 본 인터뷰는 오페라 코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가진이·엄미연·이은정·이혜령의 자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어떤 학업의 과정을 거치셨나요?
국내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으로 학부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후에 ‘음악극장 코치(Musiktheater-Korrepetition)’을 배우며 역량을 쌓았습니다(음악극장 코치는 국내에서 오페라 코치과, 지휘과, 컬래버레이티브 피아노 과정 등으로 통용된다).
독일의 오페라 코치 교육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레퍼토리를 공부합니다. 전공 수업 외에 지휘, 파티투어슈필(오케스트라 총보를 피아노로 연주), 초견, 통주저음반주 등을 들었고, 기악 및 리트 피아노 연주 수업도 들어야 했습니다. 학교 오페라 프로젝트를 통해 실제 극장에서처럼 코레페티토어로서 참여해볼 수도 있습니다.
‘오페라 코치’는 모든 오페라 극장에 상주하나요? 그 규모와 대우는 어느 정도인가요.
독일어를 쓰는 나라의 시즌제 극장 중 상주하는 단원이 있다면 어디에나 오페라 코치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극장 크기에 따라 많게는 10명 이상까지 근무하기도 합니다. 극장에서의 근로 계약은 2년 단위로 이뤄지고,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계약은 연장됩니다. 음악가로서의 삶에 있어 꽤 안정적인 편이죠. 한 달에 2~3천 유로5월 한화기준 약 267만 원, 큰 극장은 4천 유로 정도(약 531만 원)의 봉급을 받습니다. 사실 하는 일에 비해 급여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저희끼리는 농담처럼 ‘잡부’라고 표현할 정도죠. 무대 위 연주가 거의 없기 때문에 관객의 박수를 받진 않지만, 함께 무대를 준비하는 성악가들과 지휘자들에게 많은 박수를 받는 직업입니다.
극장 입단 과정은 어땠나요?
졸업 후 여러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객원으로 오페라 코치 경력을 쌓습니다. 극장은 공고를 보고 지원하는데, 면접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진 않습니다. 언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인을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죠.
어느 정도의 언어 구사 능력이 필요한지 궁금합니다.
오페라 코치는 성악가들을 연습시키기 때문에 오페라 작품에 사용되는 모든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와 영어에 대한 발음은 제대로 배워놔야 합니다. 다양한 국적의 성악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영어 회화도 가능해야 하죠. 러시아, 체코 등 특수 언어로 인식되는 작품에서는 그 나라의 언어 코치 도움을 받습니다.
피아니스트에서 오페라 코치가 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더불어 수준 높은 피아노 실력이 오페라 코치 활동에 도움이 될 때도 있나요?
성악가들의 호흡을 이해하고, 오페라 코치로서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입니다. 오페라 코치를 시작했을 때, 성악가들과의 호흡은 이미 익숙한 것이어야 할 정도죠. 한 가지 더 중요한 지점은, 지휘에 맞춰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타이밍과 사운드를 피아노로 연주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기 낭만 오페라 레퍼토리로 올수록 오케스트라 편성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탁월한 피아노 테크닉이 요구됩니다. 글 허서현 기자
이탈리아의 극장 시스템은?
이탈리아에는 라 스칼라 극장을 비롯해 나폴리 산카를로 극장, 로마 오페라 극장 등 14개의 극장(Fondazioni liriche e sinfoniche)이 있습니다. 상주하는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있고, 국가 재정을 받습니다. 이탈리아 극장에서 코레페티터와 같은 역할을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마에스트리 콜라보라토리(Maestri collaboratori)입니다. 이탈리아에는 더 많은 직책 안에서 세분되어 있습니다. 오페라 스코어 확인이나 무대 전환을 돕는 마에스트로 디 팔코스체니코(Maestro di Palcoscenico), 연출 연습 및 지휘자 부재 시의 연습 지휘 등을 맡는 디렉토레 무지칼레 디 팔코스체니코(Direttore Musicale di Palcoscenico)를 포함해 조명, 프롬프터 등에도 담당자가 있습니다. 드러나진 않지만, 정년이 보장된 직업들입니다. 이탈리아에는 거의 모든 국립 음악원에 오페라 코치 전공(Maestri Collaboratori)이 있습니다. 극장 산하 아카데미에서도 이 과정을 운영하고 있어,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습니다. 자문 이인선
#3 커리어 인터뷰 2
레페티토어는 무대 뒤에서 빛난다
오페라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의 노래는 레페티토어를 거쳐 다듬어진다. 그래서 레페티토어는 무대가 아닌 커튼 뒤에서 빛난다. 반면, 합창단 피아니스트는 리허설과 무대 모두 분주하다. 지휘자의 호흡을 수십 명의 단원에게 전달하는 중간역할자이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극장과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솔로 레페티토어를 지낸 지휘자 윤호근과 15년째 국립합창단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서미경의 이야기를 통해 무대와 무대 뒤에서 일어나는 이들의 활약상을 그렸다.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한 지휘자 윤호근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관현악·합창지휘를 비롯해 실내악·가곡 반주 과정을 차례로 밟았다. 모든 오페라 지휘를 염두에 둔 전공으로 보인다.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의 음악이 있는 독일로 떠났다. 두 작곡가의 작품을 바로 지휘할 수 없으니, 반주과에 간 것이고, 관현악곡들을 많이 쓴 두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지휘과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목표는 바그너와 R. 슈트라우스가 연주되는 극장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 극장과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솔로 레페티토어를 지냈다. 레페티토어라는 직책은 한국에서는 아직 생경하다.
대형 극장의 경우, 여러 명의 레페티토어가 있고, 한 프로덕션의 모든 리허설을 책임지고 있다. 한 명이 피아노를, 또 다른 누군가는 지휘를 하며 리허설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중 솔로 레페티토어는 독창자를 연습시키는 사람인데, 단순히 박자와 소리만 맞추는 것이 아닌 음악과 가사를 연결 지어 리허설을 해야 하기에 때론 지휘자보다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필요로 한다.
레페티토어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선발되는가?
베를린 슈타츠오퍼 입단 당시, 1·2차로 나누어 오페라의 한 대목을 피아노로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시험을 진행했다. 시험곡은 자유롭지만, 통상적으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2막 피날레처럼 어렵고 복잡한 큰 장면들이 시험곡으로 많이 연주된다. 나는 2차 오디션에서 R.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와 푸치니의 ‘토스카’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입단 이후 4년간 총감독(GMD) 다니엘 바렌보임과 함께 많은 공연을 진행했다.
레페티토어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나는 프랑크푸르트 극장에서 이미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수십 곡의 레퍼토리가 축적되어 있었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습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큰 극장에 지원하기보다 작은 극장에서 소규모 오페라를 시작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앙상블 피아니스트로서의 첫 시작은 테너 박인수(1938~)와의 전국 투어 연주였다. 당시 학부생이었다.
박인수 선생님과 공연을 함께 다니며 성악가의 컨디션을 빠르게 캐치하고, 컨디션에 따라 어떻게 호흡을 하는지를 살피고, 그 컨디션에 맞춰 템포를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여전히 앙상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도 활발하다. 지난 3월 베이스 한혜열과 함께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겨울 나그네’ 등 연가곡을 선보였다.
레페티토어 출신 음악가들은 다양한 기회에 열려있다. 나 역시 기회가 있다면, 공연 기획도 하고,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도 무대에 서기도 한다.
피아니스트와 앙상블 피아니스트는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피아니스트가 ‘반주’라는 의미에 스스로 갇히게 되는 건, 그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은 반드시 모두 피아니스트여야 한다. 잘 부르도록 조력하는 정도가 아닌, 성악가 보다 더 음악적 소양이 있어야한다.
윤호근(1967~) 서울예고·추계예술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독일 만하임 음대에서 관현악·합창지휘, 가곡·실내악 피아노 과정을 수학했다. 프랑크푸르트 극장·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솔로 레페티토어를 지냈으며 2018년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직을 역임했다.
국립합창단 피아니스트 서미경
한국예술종합학교 성악과의 오페라코치를 전공했다. 실제로 이 공부가 합창 반주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다.
오페라 코치와 앙상블 피아니스트의 역할은 일맥상통한다. 공부한 것들이 리허설을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 도움이 됐다. 최근에는 아카펠라 작품을 자주 다루는데, 오페라 코치의 입장에서 ‘어느 파트를 도와주면 되겠구나’ ‘이 파트가 연습할 때는 어느 파트를 연주해주면 좋겠구나’하고 빠르게 판단이 된다. 또한 오페라의 연출과 동선 공부는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줬다. 때론 칸타타나 오라토리오를 할 때, 독창자가 연기도 하고 무대에서 움직이기도 하는데, 더 세밀하게 무대를 신경 쓰게 되었다.
생각보다 성악곡에는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은 것 같다. 합창곡에서 피아니스트가 신경 써야 할 것들은 또 무엇이 있는가?
기본적으로 부분 연습을 위한 마디 수 파악도 빠르게 되어야 하고, 연주할 때 가사도 함께 읽어야 한다. 혼성 합창은 4~8성부로 구성되었기에 여러 성부를 읽어가며, 각 파트와 함께 호흡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립합창단은 피아니스트에게 제도적 안정성이 보장된 곳이기도 하다. ‘직업 피아니스트’이기에 따르는 제약은 없는가?
여러 지휘자의 해석을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개인 활동의 제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체 연주 스케줄을 피하면 탄력적인 활동이 가능하다. 구성원으로서는 책임과 사명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지휘자의 해석을 따라야 하기에 음악적 제약은 불가피하다.
피아니스트가 지휘자의 해석에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때 ‘제약’이 된다. 능동적인 방식으로 지휘자의 해석을 고민하고, 더불어 자신만의 해석을 녹여 내는 것이 좋은 연주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해석에 이견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하는가?
해석의 중간 지점을 잘 타협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지휘자의 의견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대부분 리허설 과정을 통해 지휘자와 달랐던 해석이 수용되고,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피아니스트서의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오페라 서곡을 위한 밤’이나 네 손을 위한 작품,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모아 무대에 올리고 싶기도 하다. 합창 앙상블 피아니스트를 위한 교재를 출간하는 것이 작은 포부이다.
글 임원빈 기자
서미경(1977~) 추계예술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오페라 코치과 전문사를 졸업했다. 도니제티 아카데미에서 반주법을, 주세페 베르디 아카데미에서 합창 지휘법을 수료했다. 현재 국립합창단 피아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국립합창단 피아니스트
국립합창단에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상주한다. 다른 합창단처럼 수석, 부수석의 호칭은 없지만, 입사일 기준으로 선·후임 관계가 있다. 지휘자는 레퍼토리를 선정할 때 두 명의 피아니스트의 연주 스타일을 고려해 곡을 분배하고, 전·후반부 연습을 각각 맡는다. 입단 과제 중 초견 시험이 있다. 팁을 주자면, 빠르게 악보를 읽는 능력을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합창곡을 접해본 경험이 있는가?’에 초점을 둔 시험이기도 하다.
PART3
발레 피아니스트
#1 개념 짚기
춤을 담은 음악 창작자
지난 3월 30일, 국립발레단이 노사단체협약 체결 이후 ‘게스트 클래스 반주자’ 명칭을 ‘클래스 피아니스트’로 변경했다. 발레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식 변화에 따른 가시적 결과다.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이들의 활동 범위도 확장될 기세다.
‘발레 클래스’는 무용수들이 트레이닝을 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국립발레단의 경우, 매일 오전 11시가 그 시작이다. 발레단 외에도 발레를 배우기 위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늘 이 클래스가 진행된다. 마스터가 제시하는 동작에 따라 움직임은 점점 커지며 몸을 워밍업한다. 이때, 움직임에 걸맞은 라이브 연주를 제공하는 사람이 바로 발레 피아니스트다. 클래스를 담당하기 때문에 ‘클래스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것.
해외에서는 이러한 피아니스트의 존재가 매우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발레’라는 문화에 익숙하기 때문인데,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는 발레 레피티토어, 발레 피아니스트 양성을 위한 교육 과정이 국립 음악원 기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한국무용음악협회의 ‘전문발레반주자과정(BATP)’이 실용적인 교육을 피아니스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의 무용음악 전문사 과정, 국민대 종합예술대학원의 무용음악 전공 과정이 발레 피아니스트들과 연관된 전문 교육 기관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발레 피아니스트들의 점점 넓어지는 활동 반경과 창의적인 감각이다. 대표적으로 그간의 교육과 경험을 토대로 발레 클래스를 위한 음원과 악보집 제작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또한 발레의 대중화와 함께 그 수요도 늘어난 상황이다.
무엇보다 이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어느 정도 보장 받는 즉흥성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게는 클래식 음악부터 재즈, 영화 음악 등 레퍼토리 사용에 제한이 없다. 그래서 클래스에서 어떤 음악을 사용할까 고민하며 몇몇 음표를 그리기 시작했다가,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해 열정을 쏟는 피아니스트도 있다. 무용수의 움직임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이들의 시야를 무용 음악으로 넓히고 있으며,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주체로서의 잠재력은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다.
글 허서현 기자
이 발레 동작에는 이런 연주를!
[플리에] 바를 잡고 클래스에서 제일 처음으로 수행하는 동작. 첫 동작이라 근육을 서서히 이완하기 위해 느리다. ‘구부리다’는 뜻을 가진 이 동작은, 무릎을 천천히 구부리고 펴는 동작이다. 음악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곡으로!
[그랑 쥬떼] 클래스의 제일 마지막 동작. 가장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동작의 조합이다. 크고 화려한 왈츠를 주로 연주한다.
#2 커리어 인터뷰
현장에서의 즉흥 경험을 노련함으로
발레 피아니스트에게, 무용수의 움직임은 또 하나의 악보다. ‘무용수’라는 새로운 악보를 읽어내기 위해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경험과 지식은 무엇일까. 한국무용음악협회를 운영하고 있는 김은수는 현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를 직접 깨달았다.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공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김지현은 발레 피아니스트를 위한 여러 교육 과정을 거쳤다. 발레 피아니스트의 다양한 활동상이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다.
국민대 무용음악 전공 주임교수 김은수
“고급 옷감으로 만들었지만, 크기가 맞지도 않고 불편하다면 그 옷은 입기가 참 곤란하죠. 오히려 평범한 옷감이더라도 몸에 꼭 맞고 편안하다면 입기 좋은 옷이 됩니다. 발레 피아니스트에게 테크닉이란 그런 것이에요. ‘얼마나 잘 치냐’보다는 ‘얼마나 춤추기 좋은 음악을 만드느냐’가 중요합니다. 물론, 가장 좋은 옷은 ‘좋은 옷감’으로 만든 ‘몸에 꼭 맞는 옷’이겠죠?”
발레 피아니스트에게 필요한 테크닉을 묻자, 김 교수가 가장 먼저 제시한 전제 개념이다. 피아니스트로서 발레에 발을 디뎠을 때, 그 자신도 겪었던 좌충우돌이다. 이화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던 1990년, 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 한국 공연에 필요한 반주자를 찾는 자리에서 우연히 연주하게 된 것이 관심의 시작이었다. 적어도 음악에 대한 모든 권한이 피아니스트에게 일임된다는 것, 그리고 내 음악에 맞춰 무용수가 춤을 추는 감동이 이 길로 접어든 첫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발레 음악에 어울릴 클래식 음악을 고민했지만, 현대무용을 접하면서 다루는 음악의 범위도 넓어졌다. 영화 음악, 대중음악 할 것 없이 모든 장르를 다 쳐봤는데, 다 가능했다. 이 무한한 가능성을 무용수의 움직임과 어떤 규칙으로 연결해야 할지가 관건이었다. 박자, 다이내믹, 프레이징, 페달까지 무용수의 호흡에 맞춰 연주 계획을 세웠다. 나름의 원칙을 세워졌을 때쯤, 발레 클래스 음반을 제작했고 예상치 못한 좋은 호응을 얻었다.
“발레 피아니스트의 실력은, 무용수들이 제일 잘 알 거예요. 그 음악에 맞춰 몸을 맡겨보는 거죠.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마치 그려내는 것처럼 이미지화에서 표현해야 해요. 움직임을 담아내는 피아노 연주는 시각적 현상을 묘사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케스트라 작품을 피아노로 연주할 때, 특정 악기의 음색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처럼 움직임의 흐름을 피아노에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것이죠.”
자신이 깨달은 원리가 현장의 발레 피아니스트들이 연주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세미나도 열었다. 관심도가 높았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발레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어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발레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졌고, 변화에 따른 심화된 개편을 계획 중이다.
“피아노로 시작해, 점차 무용음악에 필요한 모든 사운드를 경험하다 보니 음악에 대한 시각도 넓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반주’로 시작했지만, 학문 융합의 흐름에 따라 무용음악도 하나의 독자적 예술 영역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무용음악이 ‘무용’의 하위 개념도, ‘음악’의 하위 개념도 아니라는 생각이죠. 특히나 무용수들은 음악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습니다. 그들은 춤을 이해한 음악을 필요로 하고, 앞으로 이 예술의 범위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김은수(1962~) 이화여대 음대 및 동 대학원 피아노 전공을 졸업하고 동덕여대 예술대학 음악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지금까지 16집의 발레피아노 음반을 발매했으며, 한국무용음악협회 협회장이다.
무용음악협회
전문발레반주자과정(BATP)
2003년에 시작한 전문발레반주자과정은 한 학기당 10회로 총 3학기 과정이 진행된다. 학기 사이에는 클래스에 직접 들어가보는 실습도 있다. 초급에서는 무용수들이 바(bar)를 잡고 동작하는 바 워크에 맞춘 연주를, 중급에서는 센터 워크에 맞춘 연주법을 배운다. 고급에서는 클래스 현장 활용에 필요한 부분을 다룬다. 유아부터 성인까지 발레를 배우는 대상이 다양해졌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다. 최근에는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세미나를 열며 해외의 발레 피아니스트들도 도움을 얻었다.
국립발레단 클래스 피아니스트 김지현
발레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피아노 전공을 꿈꾸다 돌연 작곡과(이론 전공)로 입학했다. 늘 피아노만 치다 새 전공을 통해 다양한 음악 세계를 접한 것이 터닝 포인트였다. 특히 발레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무용음악협회 발레반주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피아노와 발레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시절 발레에 흠뻑 빠져 무용음악협회의 발레반주자과정과 인턴쉽, 해외 연수를 수료했다.
발레 피아니스트로서 나만의 스타일이 있나.
실제 클래스에서는 자유로운 즉흥 연주를 즐겨 한다. 그날 클래스의 분위기와 무용수들의 상태를 체크한다. 매일 치열한 연습으로 땀 흘리는 무용수들이 힘을 얻도록 역동적인 연주를 하려고 한다.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준비해 클래스의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무용수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넣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좋은 발레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한 역량은 무엇인가.
발레 피아니스트는 악보가 아닌 무용수를 보면서 연주한다. 발레와 함께 피아노도 춤을 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곧 무용수’라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직접 발레를 배워보는 것도 추천한다. 그냥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발레 호흡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고, 무용수의 삶 또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발레 피아니스트는 동작에 따른 적절한 선곡을 물론, 편·작곡, 즉흥연주 등 다방면의 역량으로 클래스의 음악적 흐름을 디자인해야 한다. 상상력과 순발력이 중요하다.
국내 발레단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음악적 인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앞으로 발레 피아니스트 분야에 대한 전망도 궁금하다.
인재들은 충분히 준비되어있다. 다만 주요 발레단을 제외한 소규모 민간 발레단에서 발레 피아니스트를 포함한 음악 스태프를 고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규모나 재정의 이유와 더불어 발레 피아니스트에 대한 인식과 체계가 바로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발레 대중화와 더불어, 피아노 라이브 음악과 함께 하는 발레 클래스의 가치가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피아니스트를 필요로 하는 곳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음반과 저서 등을 꾸준히 발매해왔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활동 범위는.
8월에 발레 피아노 5집 ‘Dear Dancer’가 발매 예정이다. 무용수를 향한 존경과 응원의 마음을 담은 자작곡 음반이다. 어떤 활동을 하든지 ‘무용수와 음악적 소통’ ‘발레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교’ ‘발레 음악의 재조명과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독립적인 아티스트로 나아갈 수 있게 롤모델이 되고 싶다. 글 허서현 기자
김지현(1985~) 성신여대 음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무용음악 전문사 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한예종 무용원 반주강사, 경희대 무용학부 출강 중이며 저서 ‘발레 음악 산책’ 외에 악보집과 6개의 음반을 발매했다.
발레 피아니스트 음반과 악보집
PART4
기억할 음반과 공연
#1 세계적인 앙상블 팀의 디스코그라피
파트너십을 말하다, 파트너십을 듣다
피아노는 ‘합이 좋은’ 악기로 무엇과도 앙상블을 이룬다.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파트너십’은 무얼까. 처음부터 통하는 것일까, 아니면 만들어지는 것일까.
앙상블 피아니스트와 그 파트너를 중심으로, 그들의 말을 빌려 살펴보고, 음반을 통해 호흡을 느껴보자. 정리 박서정 기자
이매뉴얼 액스(피아노) & 요요 마(첼로)
“내 실내악 연주자로서의 삶은 요요 마와만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48년 전에 만났고 아직도 함께 연주합니다! 말하자면 아주 오래된 부부와 같은 사이이지요. ‘싸우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요. 각자의 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의 작업이 늘 반갑고 기다려집니다.” (이매뉴얼 액스, ‘객석’ 2021년 3월호)
베토벤 첼로 소나타
요요 마(첼로)/이매뉴얼 액스(피아노) | Sony 19439883732
1980년대 이매뉴얼 액스(1949~)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1947~), 첼리스트 요요 마(1955~)와 트리오를 결성했다. 액스-김-마 트리오는 1988년 첫 내한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이들은 여전히 돈독한 음악적 우정을 자랑한다. 특히 액스와 마는 듀오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음반에는 두 사람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이 수록됐다. 마의 과감한 보잉을 액스가 부드럽게 받쳐준다.
안네 조피 무터(바이올린) & 램버트 오키스(피아노)
“램버트를 만난 건 행운입니다. 나는 단번에 우리가 완벽하게 호흡하고 연주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그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습니다.” (안네 조피 무터)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7번 외
안네 조피 무터(바이올린)/램버트 오키스(피아노) | DG 479294
안네 조피 무터(1963~)는 자신의 이름을 딴 실내악단(무터 비르투오지)을 창단할 만큼 실내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호흡을 맞춘 연주자의 목록도 화려하다. 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앙드레 프레빈, 첼리스트 요요 마·린 하렐…. 그중 램버트 오키스(1946~)를 빼놓을 수 없다. 1988년부터 호흡을 맞춰온 이들의 활동 25주년을 기념하는 음반이다.
기돈 크레머(바이올린) & 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커플’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역설적인 부분입니다. 음악적인 커플은, 사랑에 빠진 커플보다 훨씬 더 친밀해질 수 있습니다.” (기돈 크레머)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3번
기돈 크레머(바이올린)/마르타 아르헤리치(피아노) | DG 4151382
기돈 크레머(1947~)와 마르타 아르헤리치(1941~)의 만남은 “가장 이상적인 듀오”로 일컬어진다. 수십 년 간 서로의 연주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적 발견을 하는 이들을 두고 서로가 서로의 뮤즈라고 할 만 하다. 2007년 발매된 이 음반은 1984년 12월 뮌헨에서 녹음된 LP를 CD로 복각한 것이다.
반더러 트리오
“피아노 트리오 안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개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냥 앙상블일 수는 있어도 뭔가 부족하죠. 세 악기의 개성적인 음색과 앙상블이 완벽한 균형을 이룰 때 훌륭한 피아노 트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반면, 같은 실내악이라도 현악 4중주는 소리의 동질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제1바이올린이 실질적인 리더의 역할을 하고, 나머지 연주자는 비교적 드러나지 않지요.” (반더러 트리오, ‘객석’ 2013년 5월호)
슈베르트 피아노 트리오 1&2번
반더러 트리오 | Harmonia Mundi HMC902002/03
프랑스의 트리오 반더러(Trio Wanderer)는 1987년 결성, 올해로 창단 35주년을 맞았다. 피아니스트 빈센트 콕(1963~), 바이올리니스트 장 마크 필립 바자베디앙(1965~), 첼리스트 라파엘 피두(1967~)는 파리 음악원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다. 이들이 말하는 ‘장수 비결’은 서로에 대한 존중심. 음악적 의견이 갈릴 때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수결(트리오라 2대 1로 나뉘기 때문)로 해결하지만, 반대 의견도 항상 존중한다고.
헬무트 도이치(피아노)와 성악가들
“낯선 성악가와 연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가까운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음악을 자극하고 풍부함을 더하는 경험을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리허설에서 놀라울 정도로 대화도 설명도 전혀 필요 없는, 그저 음악을 통해 서로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인연을 나는 종종 맺어왔습니다.” (헬무트 도이치, ‘객석’ 2016년 4월호)
후고 볼프 이탈리아 가곡집
디아나 담라우(소프라노)/요나스 카우프만(테너)/헬무트 도이치(피아노) | Erato 9029565866
헬무트 도이치(1945~)는 1960년대에 가곡 전문 피아니스트로 시작해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등과 호흡을 맞추며 인지도를 높였다. 성악가의 음역과 음색에 따라 세밀하게 피아노의 소리를 조율하는 그는 “파트너가 이상적인 그림에 다가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디아나 담라우, 요나스 카우프만과 함께한 이 음반은 2018년 유럽 12개 도시 투어 공연 실황이다. 300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한 후고 볼프(1860~1903)의 ‘이탈리아 가곡집’ 중 43곡이 수록됐다.
손열음(피아노) &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사실 바이올린과의 듀오를 하다 보면 피아니스트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자, 주도적으로 말하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주미는 항상 피아노에게 배우려 해요.” (손열음, 객석 2013년 12월호)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외
손열음(피아노)/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 | Decca 4814774
손열음(1986~)과 클라라 주미 강(1987~)은 2013년부터 듀오 리사이틀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동문으로 학창 시절부터 함께 해온 이들은 서로를 “말이 필요 없는 사이”라고 설명한다. 2016년에는 듀오 앨범을 발매했다. 클라라 슈만 3개의 로망스와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세 개의 로망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이 수록됐다.
#2 화제의 공연 리뷰
헬무트 도이치 & 디아나 담라우·요나스 카우프만 3.21~4.13
성악가가 가곡 피아니스트를 만날 때
2018년, 소프라노 황수미(1986~)를 인터뷰할 때 그녀는 가곡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리아·가곡·오라토리오 등 성악 장르를 통틀어 예술성을 평가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2014)을 통해 세계 무대로 도약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후에 그녀는 헬무트 도이치와 가곡 음반(DG, 2019)을 선보였고, 인터뷰에서 그녀는 가곡에 대한 헬무트 도이치의 조언을 털어놓았다. “오페라 가수들이 소리의 전성기가 지나면 가곡을 부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곡 테크닉은 젊었을 때부터 연마해야 나이가 들어서도 가능한 것이다. 뒤늦게 가곡 세계에 뛰어든다면 그것은 이미 늦다.”
황수미가 전해준 헬무트 도이치(1945~)의 조언은 그가 많은 성악가와 작업하며 쌓은 연륜을 보여준다. 전설적인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의 독창회를 반주한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반주자’라는 별명, 100회 이상의 음반 녹음 등 화려한 경력으로 그를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 시대에도 주목받는 성악가들과 계속 작업한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무엇보다도 디아나 담라우와 요나스 카우프만이 독일 가곡을 부를 때, 항상 그와 함께한다는 점에 이르면 더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 없을 듯하다.
디아나 담라우와 요나스 카우프만은 이탈리아·프랑스 레퍼토리에도 부족함이 없는 성악가들이지만, 자신들의 탁월한 테크닉을 반석 삼아 모국어로 노래할 때는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 두 사람이 또 한 명의 독일 가곡 해석의 권위자를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 사람은 이미 2018년에 볼프의 ‘이탈리아 가곡집’으로 뭉쳤다. 4년 만에 재개된 랑데부의 테마는 슈만과 브람스의 ‘사랑 노래’이다. 3월 21일 뮌헨에서 시작된 투어는 독일의 에센, 프랑크푸르트, 베를린을 비롯하여 런던, 룩셈부르크, 파리, 빈 등 유럽 12개 도시에서 관객과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뛰어난 오페라 가수답게 카우프만과 담라우는 적극적으로 음악을 해석하고 표현했다. 특히 브람스의 ‘헛된 세레나데’나 ‘영원한 사랑의’ 같이 2명의 남녀가 대화하는 내용의 노래는 번갈아 가며 노래하는 재치를 선보였다. 40곡에 달하는 슈만과 브람스의 잘 알려지지 않은 가곡들이 6개의 스테이지로 묶여서 연주되었다. 조성과 분위기가 촘촘하게 맞물리는 프로그램은 “가곡이라는 장르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만족스러운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냈다”(오페라투데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특히 도이치에 대한 호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청중은 도이치가 그저 반주만 한 것이 아님을, 노대가의 탁월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오페라매거진) “그는 노래의 분위기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무대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고 존재감을 각인시켰다.”(FAZ)
하이네, 뤼케르트 등 ‘독일’ 시인들의 시에 ‘독일’ 작곡가가 음을 입힌 곡들을 최고의 ‘독일’ 가곡 해석자 3명이 만나 황홀한 시간을 만들어가는 광경은 사명감까지도 느껴지는 거룩한 광경이었다. 그들 못지않은 훌륭한 문학적 자산을 가진 나라에서 온 이방인의 눈에는 몹시도 부럽게만 다가왔다.
글 오주영(성악가·독일 통신원)
#3 화제의 공연 프리뷰
피아니스트 마르쿠스 하둘라 & 테너 김세일
오는 5월, 음반에 수록된 슈만의 가곡으로 녹음 2년 만에 함께 무대에 오른다.
김세일 슈만의 가곡 중 특히 하이네의 시에 의한 작품으로 구성했다. 그 대표작이 ‘시인의 사랑’이다. 연주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다.
마르쿠스 하둘라 슈만의 가곡 중에는 가사가 아닌 피아노로 이야기를 끝맺는 작품이 있다. 강렬한 행진곡 테마로 시작하는 ‘두 사람의 척탄병’ Op.49-1이 그 예다. 전쟁의 패배는 프랑스 국가(國歌)가 고통스러운 화음으로 부서져 소멸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처음 서로의 호흡을 확인한 순간은 언제였나.
김세일 2019년 여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음반 녹음을 위해 피아니스트를 수소문하던 중 마르쿠스 하둘라를 알게 됐다. 서로 통성명만 하고 바로 리허설에 들어갔다. 한 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음악을 통해 서로를 알기에는 충분했다.
마르쿠스 하둘라 리허설 첫 곡으로 슈만 ‘시인의 사랑’을 연주했는데, 말하지 않아도 이번 작업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리트 연주에서 피아니스트와 성악가는 어떻게 호흡을 맞춰 가는가.
마르쿠스 하둘라 우선 잘 듣는다. 단순히 음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어떻게 소리를 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언제 프레이즈에 들어가는지 서로의 음악에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음악적 파트너십을 무엇이라 정의하겠는가.
마르쿠스 하둘라 음악에서 파트너십이란 서로에게 끊임없이 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리트 듀오’ ‘실내악단’을 자처하면서도 따로따로 음악을 만들뿐 상대에 대한 리액션이 없는 경우를 종종 본다. 파트너십을 쌓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건 호기심과 협동심이다.
김세일 능력 있는 연주자는 정말 많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음악적 파트너는 드물다. 아무리 뛰어난 솔리스트라도 상대의 음악에 귀 기울지 않는다면, 부족한 ‘반주’에 그치고 만다.
글 박서정 기자
음반
슈만 ‘시인의 사랑’ 외
김세일(테너)/마르쿠스 하둘라(피아노)
Sony Music S80560C
공연
김세일·마르쿠스 하둘라 듀오 리사이틀
5월 1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슈만 ‘리더크라이스’ Op.24, ‘벨사살’ Op.57, ‘두 사람의 척탄병’ Op.49-1, ‘시인의 사랑’ Op.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