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당신의 소음을 들려주세요 뮤지컬 ‘청춘소음’
1.1~2.26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
불확실한 청춘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소음’이 가득하다. 가보지 않은 여행지 후기로 돈을 버는 가짜 여행작가 영원(김이담 분)은 마음에 피어나는 ‘양심의 소음’을 숨기고,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하며 진상들을 상대하는 아름(랑연 분)은 현실을 위해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덮는다. 마음의 소음을 숨긴 두 사람은 윗집과 아랫집으로 만난다. 층간 소음으로 엮이게 된 이들은 “당신과 나 사이, 고작 15센티 벽 하나”라는 노랫말처럼, 어쩐지 가까이 있을수록 서로의 소음은 외면할 수가 없다.
뮤지컬 ‘청춘소음’(극본 변효진, 작곡 김민서, 연출 우진하)의 큰 흐름은 흔히 로맨스 드라마에서 자주 보이는 ‘혐관(혐오 관계) 로맨스’다. 죽일 듯이 미워하던 남녀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시시껄렁한 이야기. 그러나 에피소드를 촘촘히 채워가는 아기자기한 연출, 적절한 현실 밀착형 대사들이 대학로 뮤지컬 고유의 매력을 끌어올린다. 피아노·퍼커션·베이스기타·바이올린 등으로 구성된 라이브 음악이 사랑스러운 넘버들을 뒷받침한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대신에, 다양한 리듬과 화음들이 돋보였다. 감정에 지나치게 호소하지 않아 오히려 신선하다.
‘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뮤지컬 부문에 선정된 뮤지컬 ‘청춘소음’의 등장 배우는 단 세 명이다. 남녀 주인공을 제외한, 한 명의 멀티맨(1인 다역)이 전부다. 뮤지컬 ‘김종욱찾기’에서부터 등장한 멀티맨의 활용은 소극장 뮤지컬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치이자 유머 포인트였다. 소극장 배우 활용으로 유용하긴 하나 이제 더 이상 신선하진 않다. 같은 빌라 지하에 사는 중길(김승용 분)이자, 정신과 의사이자, 여주인공의 전 남자친구인 멀티맨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무대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주연 배우도 장면에 따라서는 앙상블이다. 적은 수의 배우로 연출해낸 감각적인 아이디어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세 명으로는 채우기 버거워 보였다면, 이를 과연 배우나 연출의 역량 부족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배우의 역량을 논하기엔, 세 사람의 앙상블 호흡은 완벽에 가까웠다. 멀티맨의 활약은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 등장하는 ‘지니’에 비견할 만했다. 호흡에 편승하지 못한 쪽은 위치를 헷갈리는 조명이었다.
“다 뒤졌어, 끝장을 보는 거야!”를 외치던 두 남녀는 결국 그렇게 ‘미워하며 가까워지다’ 서로의 마음속 숨겨진 소음까지 듣게 된다. 모르는 새에 서로를 의지하게 된 마음은 변하지 않는 현실에서도 위로가 된다. 극장을 나선 관객에게도 서울의 밤거리가 평소보다는 조금 더 낭만적으로 다가왔다면, 이 뮤지컬이 전하는 위로란 이렇듯 알게 모르게 마음에 스며드는 힘을 가진 것 아닐까.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시작프로덕션
스크린과 장르의 경계를 넘을 수 있을까 월드 시네마 콘서트 ‘한국편’ with 이동준
1월 8일 롯데콘서트홀
지난 몇 년간 한국의 영화계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할리우드와 칸을 오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한 영화계 인사들의 소식이 끊기지 않았다. 한국 영화계는 ‘봉준호 보유국’, ‘오징어 게임 보유국’으로 수식되었고, 이와 함께 자연스레 부상한 것은 한국의 영화·드라마음악이었다. 대표적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음악은 ‘밈’으로 제작되어 ‘틱톡’과 유튜브 ‘쇼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내 영화음악 작곡가들의 이름이 아카데미 음악상 부문에 오르내리는 것을 좀처럼 보기는 힘들다.
클래식 음악계는 이미 오래전에 영화음악을 클래식 음악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발판을 마련해오고 있다. 상업 음악으로만 국한했던 영화음악의 독립적인 예술 가치를 인정하고, 유럽 무대에 세우는 것이다. 2020년 빈 필은 미국의 영화음악 작곡가 존 윌리엄스를 지휘대에 세우고, 빈 무지크페어아인에서 그의 영화음악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 등으로만 구성된 공연을 선보였다. 베를린 필 역시 발트뷔네 페스티벌과 같은 야외무대에서만 연주하던 영화음악을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해 무대에 올린 것도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한국 영화음악을 톺아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을 것이다. 황미나가 지휘를 맡은 J-아트 필하모닉은 한국의 영화음악 작곡가들의 음악을 돌아보았다. 작곡가 이동준이 참여한 영화 ‘7번방의 선물’ ‘마이웨이’ ‘각설탕’을 필두로 영화 ‘왕의 남자’ ‘괴물’(작곡 이병우),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작곡 조성우), ‘오징어 게임’(작곡 정재일), ‘신세계’(작곡 정현수) 등 한국의 기념비적인 영화음악들을 연주했다.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봤을 영화음악의 도입부이지만, 곡의 끝까지 들어본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질문이 잘못됐다. ‘한국 영화음악을 영상과 분리해 감상할 기회가 우리에게 얼마나 주어졌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 일본 영화음악 작곡가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애니메이션의 음악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공연이 성행하고 있지만, 한국 영화음악만 모아 들어볼 기회는 적었다.
영화의 장면 장면에 가렸던 음악의 면모를 들추니, 이토록 애절한 선율이 이어졌었나 생각했다. 영화를 보지 않았어도 괜찮다. 친숙한 음악이 개인의 기억 속 한 장면을 자연스레 끌어내 서사를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모아두니 아쉬운 점도 보인다. 영화 장르의 한계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연주된 곡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존 윌리엄스의 ‘스타워즈’와 ‘슈퍼맨’, ‘E.T.’와 ‘해리포터’의 음악이 서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시네마 콘서트는 ‘한국 편’에 이어 여러 나라의 영화음악을 선보일 예정이다. 다시 한국의 차례가 되었을 때, 새로운 장르의 영화음악을 만나볼 수 있을지 궁금증이 든다.
글 임원빈 기자 사진 이든예술기획
언행일치를 향해 연극 ‘레드’
2022. 12.20~23 2.19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작품의 이름이 간략하듯, 극 중 등장인물과 공간, 사건도 간략하다. 인물은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와 그의 제자인 가상 인물 ‘켄’ 단 두 명, 공간은 오직 로스코의 작업실, 사건은 레스토랑의 벽화 의뢰뿐이다. 작품 줄거리 설명도 간단하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그러나 이렇게 덜어낸 무게만큼, 대사에 올려놓은 무게는 가혹할 정도로 무겁다.
연극 ‘레드’가 10년 넘게 호평으로 공연을 이어 올 수 있는 이유는 다섯 막이 일관성 있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저 일관성이 있는 정도를 넘어 ‘일관성’을 달성하는 것이 이야기의 흐름이다.
두 인물은 1~2막에서 각자의 분명한 의견을 피력하지만, 행동은 그 말과 일치하지 못하고 조금씩 모순돼 있다. 로스코는 심각한 사유 없이 완성되는 예술의 가치를 절하하며 상업예술이라 비판하지만, 스스로 자본주의의 상징과 같은 고층 빌딩 속 고급 레스토랑의 벽화 의뢰를 동시대 그 어떤 화가도 받지 못할 어마어마한 계약금과 함께 받아들인다. 켄은 즉흥성을 이용해 작품을 완성하는 화가 잭슨 폴록(1912~1956)이나, 추상 표현주의의 뒤를 이은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1987)·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의 작품에 더 흥미를 보이지만, 엄격하고 철학적 사유를 강요하는 로스코 밑에서 2년 동안이나 고용인으로 일한다. 이런 어그러짐을 인식했는지, 최근에 읽은 니체 철학을 인용해 예술가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분류하려는 켄에게 로스코가 다그친다. 인간(예술)은 그렇게 칼을 긋듯 분류할 수 있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고.
막마다 로스코와 켄은 언쟁을 펼친다.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부터 숨 막힐 듯이 무거운 것까지, 로스코와 켄은 예술·예술가·소비자·대중·평론가 등의 가치를 매기고, 가치를 치운다. 연극 ‘레드’에 세 번째로 참여하고 있는 정보석(로스코 역)의 발성은 예민하고 원칙적인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향한 존경이 가득한 수도자 같아 대사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이를 받아내는 연준석(켄 역)은 무대 안팎 모두에서 기성세대의 압력에도 자기 뜻을 관철하는 젊은이였다. 둘을 바라보는 관객 머릿속엔 끊임없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저울 재기 바쁘다.
관객에게 특별히 말을 걸거나 참여를 요구하지 않는 작품임에도, 관객의 정신은 그 어떤 극보다도 바쁘게 무대에 참여한다. 두 인물이 나누는 대화로 정신없이 굴린 머리를 쥐어짤 때, 비로소 작품이 전하고 있는 힘을 발현한다. 그 무엇 하나 답을 내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치에 대한 사유, 그리고 2시간 동안 회전시킨 머릿속 에너지가 생동감 있게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전율. 극은 두 인물 각자가 기성세대와 신세대라는 서로 다른 위치를 이해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지만, 관객은 두 세대가 교차하는 순환의 고리를 바라보며 삶을 향해 끓어 넘치는 힘을 안고 극장 밖으로 나서게 된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신시컴퍼니
CLASSICAL MUSIC
사라 장 & 비르투오지
열렬한 환호 속의 사계
12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사라 장(1980~), 그녀는 언제나 스타였다. 20년 전 필자가 클래식 음악 잡지사 기자로 그녀를 인터뷰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스포트라이트 속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까지 쭉 빛을 내었고, 여전히 그녀의 오라는 강렬하다.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 사라 장은 누구나 관심을 두는 연주자이고, 티켓은 늘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간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밤, 공연장은 사라 장을 기다리는 팬들로 가득했고, 연말의 들뜬 기운까지 어우러져 관객들은 마치 사라 장이 초대한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설렌 얼굴로 객석에 앉았다. 사실 이날의 연주는 파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라 장 & 비르투오지’라는 이름으로 모인 연주자 18인의 면면은 바이올리니스트 장유진·심동영·김예원, 비올리스트 이한나, 첼리스트 심준호,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 하프시코디스트 박준호 등 그 자체로 반짝이는 이름들이었다. 관중은 그들이 준비한 파티에 참석해서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첫 곡은 비탈리(1663~ 1745)의 ‘샤콘’이었다. 사라 장이 인터뷰에서 “‘샤콘’은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열정과 아름다움, 드라마로 가득 차 있는 곳이다. 이번 연주를 위해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버전을 동료 작곡가에게 의뢰해 새롭게 만들었다”라고 말한 바로 그 곡이다. 그녀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가 쌓아 올린 서사가 곡의 3분의 1 지점에서 정확하게 정점을 보였고, 객석은 이 곡의 격한 마무리에 큰 환호를 보냈다. 두 번째 곡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WV1043은 특이하게 악장별로 장유진·심동영·김예원이 제2바이올린을 번갈아 연주했다. 사라 장을 위해 모인 ‘비르투오지’, 각각의 개성 또한 엿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장유진과의 연주는 모던한 느낌을 주었으며, 둘의 악기 음색도 궁합이 잘 맞았다. 심동영과의 2악장은 꽤 빠르게 진행되는 대화였다. 김예원과의 3악장은 소리의 윤기와 곡의 드라마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2부에서는 비발디 ‘사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차례로 연주되었다. ‘여름’의 3악장부터 사라 장이 첼리스트(특히 수석인 심준호)와 각별하게 주고받는 에너지가 인상적이었고, ‘겨울’의 3악장에서는 둘의 대화가 한층 더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비탈리 ‘샤콘’에서도 확실한 장점이 있었듯이, 사라 장과 이들의 연주는 비발디 ‘사계’에서도 ‘겨울’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아가 확실한 클라이맥스가 형성됐고,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끌어냈다. 그 증거는 바로 아주 오래 이어진 환호와 박수 세례였다. ‘우리는 그녀를 사랑해’라는 문장이 들리는 듯한 박수의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서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그녀의 인사 뒤에 이어진 앙코르,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와 비발디의 ‘사계’ ‘여름’ 중 3악장은 장영주를 위해 모인 무대 위와 아래의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그녀의 진하고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크레디아
‘앙상블블랭크의 White Christmas’
객석을 뒤덮은 차가운 현대 음악
12월 28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암전된 상태에서 음들의 결합과 함께 무대가 서서히 밝아진다. 마치 아이스 브레이킹처럼 피아노의 차가운 음색들이 눈 조각 같이 흩날린다. 지극히 차가우면서도 절제된, 그러나 미세하게 변형된 눈발이 날린다. 첫 곡은 최재혁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의 초연곡 ‘눈’. 이 곡은 ‘예술의전당 아티스트 라운지’ 시리즈의 일원으로 오른 이번 공연에서 단독 작품이라기보다 공연 제목에 어울리는 음악극의 서곡으로서 기능했다.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한윤지가 협연자로 나선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은 차갑고 메마르며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의도적으로 술 폰티첼로(활을 브리지에 닿을 정도로 연주하는 주법)에 가까운 금속성의 소리로 위태로운 빙판길을 연출했다. 어두움이 한없이 펼쳐지며 엄동설한이 따로 없다. 혼자 하얀색 상의를 입은 최하람(비올라)과 이호찬(첼로)이 짚고 그어대는 정확한 음정은 찬바람으로 살을 아리는 듯하다. 거기에 비발디가 연주되는 내내 현악기 주자들 뒤에 불 꺼진 상태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눈 덮인 산의 고목 같다. 하지만 아직 이르다. 오늘 공연 중 본격적인 겨울의 삭막함은 시작도 안 했다.
“작곡은 나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며, 그래서 귀를 괴롭히지 않겠다. 나는 작곡가일 뿐 현대음악이라는 단어는 탐탁지 않다.”
공연해설을 위해 마이크를 든 작곡가 최재혁(1994~)의 말은 경고였다. 덴마크 출신의 작곡가 한스 아브라함센(1952~)의 ‘눈’은 북유럽의 유령 같은 겨울 정경이다. 전체적으로 반복이 많으면서 굉장히 지루하고 진부한 작품이다. ‘어떻게 하면 견디기 어려운 극한의 겨울을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산물일까. 덴마크와 한국의 시간 속도 차이만 여실히 체감했고, 음악 대신 오직 무미건조한 공기의 숨결만이 답답한 홀에 남아 듣는 내내 온몸을 조였다. ‘눈’에서의 10개의 캐논들은 현악과 목관이라는 두 개의 그룹이 중간에 자리 잡은 3개의 짧은 간주곡들로 분리된다. 술 타스토(현악기 브리지에서 멀리, 지판 가까이에서 연주하는 주법) 위주의 현악기 고음, 딱딱한 지판 소리의 피아노 고음, 음 없이 바람만 집어넣어 소리 내는 목관 악기들, D를 중심으로 한 짧은 모티브들을 캐논 풍으로 돌리고 변형하기, 동음연타, 장(長)음지속, 마이크로톤, 미니멀 음악적인 요소…. 이게 1시간의 전부였다. 아브라함센의 ‘눈’은 청자를 한없이 고문하는 극사실주의적인 작품이다. 음악회의 주인은 공급자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란 정의 하에 가치판단의 기준은 청중에게 있으며 청중도 음악회 도중 견디기 힘들면 즐기지 않고 나올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다.
또래 음악가들이 규합한 음악 단체들이 있다. 작곡가 혹은 지휘자를 중심으로 단체가 시작되며, 문예 기금으로 운영된다. 그러다 교단에 서거나 취직을 하게 되면 유야무야가 된다. 이런 분위기의 틈바구니에서 앙상블블랭크가 오래 지속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글 성용원(작곡가) 사진 예술의전당
얍 판 츠베덴/서울시향
철갑의 외피와 부드러운 속살. 달라진 서울시향
1월 12·13일 롯데콘서트홀
현재 뉴욕 필 음악감독인 얍 판 츠베덴(1960~)은 2024년 1월부터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으로 5년 임기를 시작한다. 오스모 벤스케의 부상으로 올해 7월 예정됐던 서울시향 첫 데뷔도 1월로 앞당겼다. 12일과 13일 밤 롯데콘서트홀에서 츠베덴의 역사적인 서울시향 데뷔 연주회를 관람했다.
첫 곡 브람스 교향곡 1번이 빠른 템포로 굵직하게 시작됐다. 외피를 이루는 거대한 총주는 박자의 뼈대가 튼튼했고, 내면의 속살 같은 목관악기는 충분히 노래했다. 2악장에서는 현악기 합주의 미묘한 뉘앙스를 잘 살렸다. 오보에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목관악기를 노래하는 데 효과적으로 썼다. 당일 악장이었던 웨인 린은 지금까지 그의 솔로 연주 중 최대치를 뽑아낸 연주를 들려줬다. 3악장에서 현악기군 사이에 목관악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때로는 총주의 빠른 템포를 따라가기 버거워 보이기도 했다. 현악기군의 밀도가 예전의 서울시향과 다르게 느껴졌다. 극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소리를 견지했다. 피치카토 연주 후 약간의 여유를 되찾았다.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연주였다. 4악장에서 독특한 현악기의 소리와 노래하는 목관악기는 확실히 달라진 서울시향을 말해주고 있었다. 긴 호흡을 소화하는 호른과 플루트도 좋았다. 코랄풍의 뭉근한 트롬본과 대조적으로 총주는 날카롭고 단단했다.
2부의 시작은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이었다. 웅장한 가운데 음향 풍경이 넓게 펼쳐졌다. 시계 초침같이 정밀한 현악기의 앙상블 속에 목·금관악기가 녹아들어 가는 모습이었는데, 처음에는 섞인 소리가 불투명하게 다가왔다. 복잡한 혼돈 속에서 츠베덴의 지휘봉을 따라 성부 하나하나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바그너의 음악성에 감탄하게 됐다.
이어진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에서는 한결 여유를 찾았다.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만드는 저음역이 그윽했고, 파도처럼 수위를 높이는 현악기군 위에 금관악기가 당당하게 포효했다. 약음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부드러움도 부각됐다.
껑충 뛰며 시작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 ‘박쥐’ 서곡은 마치 앙코르의 느낌이었다. 우아하고 익살맞은 밝은 현악군은 팽팽한 줄을 늘였다 당기듯 여유로웠다. 빈 특유의 왈츠 리듬을 제대로 살렸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목질이라기보다는 금속질에 가까웠다. 끝이 확실한 총주는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운처럼 남았다.
앙코르도 예전의 서울시향 공연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모습이다. 드보르자크 슬라브 무곡 Op.46-8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슬라브적인 흙냄새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함께 맞추는 무보처럼 일사불란하고 예민한 연주 역량에 방점이 찍혔다.
동일한 프로그램의 두 차례 공연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겠지만, 2024년 1월부터 5년간의 츠베덴 시대는 그동안 ‘어두웠던 등잔 밑’이라고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독일 레퍼토리 연주력을 키우고, 기본을 다지기에 좋은 때다. 외형적으로 철갑을 두른 강렬함과 내면적으로 긴 호흡을 가져가는 부드러움으로. 서울시향을 찾는 관객을 늘려 파이를 키울 좋은 기회다. 지휘자가 끄집어내는 악단의 잠재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지켜보는 건 흥미롭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서울시향
MUSICAL
뮤지컬 ‘물랑루즈!’
화려함만으로는 부족하다
~3월 5일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물랑루즈!’를 본 관객은 극장에 들어갈 때 무대의 화려함에 한 번, 공연을 보고 나오며 작품의 예스러움에 두 번 놀란다. 2019년에 막을 올렸지만, 팬데믹으로 2021년이 되어서야 다시 공연을 시작했으니 말 그대로 ‘따끈따끈한 신작’임에도 작품은 모든 면에서 고전 뮤지컬을 연상시킨다.
운명적 만남·금기의 사랑·불치병으로 인한 죽음까지. 뮤지컬 멜로의 전형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이야기가 그렇고, 흔한 영상 하나 없이 윙과 그림막을 활용해 공간을 만들어내는 무대가 그렇다. 여기에 배우의 시각적 화려함이 더해지며 휘황찬란하고 낭만적인 쇼의 모습으로 한 편의 고전이 완성된다.
돈을 많이 들인 향수상품처럼 보였던 ‘물랑루즈!’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대한 오마주가 될 수 있었던 건 팬데믹 덕분이다. 화려한 쇼·순수한 사랑 이야기·입가를 맴도는 음악. 지금껏 극장에서 당연하게 봐왔던 뮤지컬이 이런 것이었음을 추억하기에 작품이 환기하는 바가 분명히 있었으니 말이다. 2021년 토니상이 최우수 작품상 등 10개 부문에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 그 증거다. 무엇보다 작품은 스트리밍으로 결코 재현할 수 없는 생생한 즐거움이야말로 우리가 극장에 가야 할 이유임을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맥락이 지극히 미국적이라는 데에 있다. 브로드웨이에서 이 작품의 의미는 선명하겠지만, 한국에서는 다르다. 그 맥락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영역은 바로 매시업한 음악이다. 기존에 유행했던 여러 곡의 팝 음악을 섞어 한 곡으로 만드는 음악적 아이디어는 분명 재미난 것이다. 우리는 매시업한 곡들을 주로 개그콘서트에서 들었다. 재치 있게 편집되어 감쪽같이 새로운 곡인 척하는 노래를 알아챌 때, 듣는 재미는 찾는 재미와 함께 배가 되기 마련이다. 단, 조건이 있다. 편집에 사용된 음악을 다 아는 것. 70여 곡의 팝 음악이 등장하는 작품은 미국 관객에게 최적화된 재미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 간극이 국내 관객을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랑루즈!’의 구성은 명료하다. 1막은 장면 단위의 쇼, 2막은 본격적인 멜로드라마로 이루어진다. 작품은 뻔한 러브스토리보다 그 위에 흐르는 음악을 세밀하게 즐길 때 더 재미있어진다. 하지만 대다수 관객에게 음악은 익숙한 팝 음악이 아닌 새로운 넘버이고, 넘버로 보기에 뜬금없는 노래인 경우가 많다. 생각해보면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의 클럽 물랑루즈를 재현한 무대에서 레이디 가가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등 팝 가수들의 음악이 흐르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설정이기는 하다. ‘물랑루즈!’가 창작 뮤지컬 ‘젊음의 행진’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뮤지컬은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을 잡아끄는 장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게 따지면 이 작품은 시종일관 시선을 붙잡아놓을 만한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단,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여기 관객의 맥락과 맞닿지 않을 때, 흥행은 막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창의성은 맥락을 읽는 눈일지도 모른다.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사진 CJ ENM
THEATER
ACC 국제공동 창·제작 공연사업 쇼케이스 ‘로제타’
국가·성별·나이와 상관없는 가치
1월 13·1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극장 극장2
으레 위인의 일대기를 다루는 극은 인물이 살아온 배경과 난관 속에 그가 일궈낸 성공을 그려 교훈을 전달한다. 하지만 더 이상 ‘위인’을 기대하지도, 그 시대에만 가능했던 교훈이 와 닿지도 않는 우리 시대 현대인들에게, 이와 같은 극이 얼마나 큰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래서 연극 ‘로제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위인을 다뤘다. 이번 공연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의 ‘국제공동 창·제작 공연사업 쇼케이스’로 미국 리빙 시어터, 한국의 극공장속 마방진, ㈜옐로밤의 협력창작으로 선보인 시간이었다.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은 25세의 나이에 조선으로 건너온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로, 43년간 조선에 머물며 최초의 여성병원을 설립하고 한글점자를 개발했다. 타이틀 롤이자 실존 인물인 로제타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투영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그의 삶과 관객 사이에 분명한 교집합이 있어야 할 터이다. 연극 ‘로제타’는 이를 찾아내라며 그가 살아온 모든 삶을 마냥 풀어내는 불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대신 단 하나의 교집합인 ‘선(善)한 의지’만을 보여준다.
로제타의 선한 의지에 그의 배경은 필요하지만 중요하진 않다. 굳이 미국인일 필요도, 여자일 필요도, 젊은 사람일 필요도 없다. 그래서 무대 위 국적·성별·나이가 모두 다른 8명의 배우가 ‘모두’ 로제타 역을 맡았다. 로제타는 미국 노인이 영어로 연기하기도 하며, 한국 여자가 한국어로 연기하기도 했다. 언어가 혼재돼 있지만 극의 진행과 이해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사의 내용보다 장면 속 배우들의 감정이 극의 진행을 이끌었다.
로제타가 이뤄낸 업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대사가 아닌 내레이션으로 설명됐다. 대사는 사건 전개를 위해서가 아닌 오직 로제타의 감정을 위해 존재했다. 따라서 극의 내용은 그가 이뤄낸 업적이 얼마나 훌륭하고 대단하여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고, 후대가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지가 아니다. 로제타가 처한 상황에서 그가 매우 고통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선을 놓지 않았다는 점, 그 선은 특별한 25세의 미국 지식인만의 것이 아닌 다양한 사람이 모두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한 가지. 여러 극에서 분명한 선을 표하기 위해 그에 반대되는 ‘악(惡)’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있다. 서로 대비되는 양극단이 표현하는 바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극 ‘로제타’에는 이러한 악의 역할이 배제돼 있었다. 로제타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는 그 누구의 악의도 아닌, 병마와 언어적·시대적 한계이며, 이는 구체적 상황과 대사보다 조명·음악·연출을 통해 느껴질 뿐이었다. 감상에 따라서 이 악의 부재는 강렬한 ‘선’을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의 한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무대 위 모든 배우가 시작과 마지막에 “제 이름은 ○○○입니다. 저는 로제타 역을 맡았습니다!”라고 외치는 행위는 악의 부재가 의도된 것이며, 악을 통해서가 아닌 오직 선을 통해 선한 마음을 드러내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뜻했다. 극은 로제타라는 인물을 알려주는 위인전이 아니었으며, 선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로제타의 삶을 가져왔고, 무대를 등지고 나갈 관객 역시 로제타 역을 맡길 바라고 있었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옐로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