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심연을 마주하는 서늘한 시선,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의 배우 차유경

악의 심연을 마주하는 서늘한 시선,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의 배우 차유경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3년 8월 7일 9:00 오전

FOCUS ON

배우 차유경
악의 심연을 마주하는 서늘한 시선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과 마주한 한나 아렌트를 연기한
그에게 듣는 악의 평범성과 극의 매력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관련된 전쟁 범죄자의 재판은 공소시효가 없다. 실제로 유대인 학살 실무를 담당했던 나치 공무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은 전쟁이 끝나고, 15년이 지난 1960년에 체포되어 사형됐다.
아이히만의 사례는 전범에 대한 재판과 처벌에 대한 본보기이기도 하지만, 더욱 주목되는 점은 재판 과정을 통해 중요한 철학적 개념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목적과 의도 없이 행한 평범한 일이 지독한 악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악은 선과 구분되어 기괴하거나 특별할 것이라고 여겼던 관습을 뒤집고, 악의 공포를 더욱 강조한 개념이다. 이를 정립한 한나 아렌트(1906~1975)가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며 정리한 책이 바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되는 곳에서’(작 스테파노 마시니, 연출 이은준)는 한나 아렌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을 직접 대면시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관객이 ‘악의 평범성’을 자발적으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한나 아렌트 역을 맡은 차유경 배우를 직접 만나 인물과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우로서 대면한 악의 평범성은 무엇인지, 그것을 드러내기까지 한나 아렌트는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그와 나눈 대화 속에서 역사와 연극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화제들이 펼쳐졌다.
어떤 점 때문에 작품 속 한나 아렌트 역을 수락했나요?
거대 담론을 다루는 작품의 대본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게다가 그것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바로 한나 아렌트라는 여성이었죠. 정치철학자 역할을 연기하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전까지 전쟁과 학살 등 대부분의 역사가 남성 위주로 다뤄졌잖아요. 여성이 주체적으로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악의 기원이란 무엇인가?

한나 아렌트는 실존 인물입니다. 그를 연기하며 파악한 아렌트는 어떤 사람인가요.
정치학자이자 철학자, 작가 등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무엇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가장 컸다고 생각해요. 홀로코스트를 겪고 살아남은 유대인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마음 한편에 깔려 있어요. 그 안에 냉철하고 집요한 성격이 혼재된 여성이라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특별하게 연기하기보다 매력적이면서도 순수한 지성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적당히 감정을 숨기기도 하고 들키기도 하는 그런 인물로요.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는 재공연되는 작품입니다. 한나 아렌트를 연기하며 달라진 점이 있나요?
재공연을 준비할 때 염려하는 점은 극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른다는 거예요. 초연 때 느꼈던 뜨거운 열정과 재공연의 능숙함을 어떻게 조화시켜 연기할지 늘 고민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는 차갑고 냉철한 한나 아렌트의 모습에 집중했다면, 아렌트에 더 많은 애정이 생긴 올해는 역할에 조금 더 다양한 감정을 담아보려고 합니다.
극작가 스테파노 마시니는 극 전체를 한나 아렌트와 아돌프 아이히만의 대화로만 구성했습니다. 아렌트는 왜 아이히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을까요?
재판 과정에서 끝없이 자기 변론을 하는 아이히만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겼을 것 같아요. 비유하자면 ‘인간의 삶 속에서 암흑의 무지를 인지할 때, 영혼의 기저에 서서히 빛의 촉수가 늘어나고, 그 빛을 쬐는 느낌으로 함께 늘어난 충동의 발로’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를 작가의 극적 상상력을 통해 두 사람의 대화로 구성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유와 깨달음을 의도했다고 생각해요.
작품은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라는 부제로 악의 기원에 대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통해 발견한 악의 기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산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잖아요. 여기서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거죠. 내 속에서 꺼내지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꺼내는 주체는 나 자신인지, 신인지, 어떤 절대적인 것인지 그리고 예정된 것인지, 순간순간 만들어지는 것인지.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다 문득, 악의 기원은 어쩌면 인간에게 부여된 질문하는 능력을 실천하지 않아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히만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죠. “모든 영광은 절대적인 복종뿐”이라는 아이히만의 대사처럼 그의 이러한 신념이 악의 기원이 되지 않았을까요.

 

악으로부터 나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출합니다. 이를 발견한 아렌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암흑의 시작은 여명이라고 생각해요. 눈은 서서히 어두워지는 석양을 보고 있지만, 상상력의 인지 속에는 암흑 이후의 여명이 꿈틀대고 있죠. 수백만 명이 학살당해도 지구는 여전히 같은 기울기로 돌고 있어요. 그러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여명을 느끼며 깨어 있으라고, 눈을 뜨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악이 평범하듯, 평범한 천사가 되라는 생각이요.
마지막으로 작품의 매력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요.
작품은 스스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은 특이하거나 이상한 사람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수 있다. 나 자신도 그 대상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성찰을 하게 합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잘 풀어낸 연극인만큼, 극에 대한 흥미와 함께 풍성한 지적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이렇게 정리한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또한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동떨어져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 391쪽)
배우 차유경이 마주한 아이히만 역시 그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생각하기를 멈춘 것,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암흑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차유경의 대답은 ‘악의 평범성’만큼이나 평범하면서도 큰 깨달음을 주었다. 철학 용어를 굳이 적용하지 않아도, 삶의 곳곳에서 평범한 악마와 평범한 천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극단 파수꾼

차유경(1962~) 1982년 연극 ‘에쿠우스’로 데뷔해 연극 ‘낙원상가’ ‘산포면 내기리’ ‘늙은 부부이야기’ ‘궁전의 여인들’ 등에 출연했다. 1985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신인상에 이어 한국여성연극협회 올빛상, 포항바다국제연극제 여자 연기대상, 서울연극인대상 연기상, 대학로 연극인 광장 올해의 연극인상을 받은 바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연극 ‘아이히만, 암흑이 시작하는 곳에서’
7월 22일~8월 6일 두산아트센터 Space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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