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1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
깊은 이해로 만든, 음의 2인극
카바코스와 양성원의 파트너로 잘 알려진 그의 실내악 연주 비결
무반주 작품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면 바이올리니스트나 첼리스트의 공연에는 자연스레 피아니스트가 함께한다. 우리는 이를 무의식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반주자’라 칭하는데, 때때로 이 용어가 퍽 맘에 안 든다. 부를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악보에서 동등한 지위를 부여받는 다른 악기를 ‘반주’라 칭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런 용어에 의문을 품게 해주는 순간은 다름 아닌 듀오 리사이틀에서 둘의 호흡과 역량이 완벽하게 일치하여 빛을 발하는 피아니스트를 만났을 때이다. 그 좋은 모범엔 엔리코 파체(1967~)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럽에서 독주 리사이틀을 가지거나, 협연자로 출연하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첼리스트 양성원(1967~)의 파트너로서 인지도가 높다. 그런 그의 연주를 듣다 보면 함께 하는 파트너와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절감하게 된다. 그저 무대에 함께 올라 악구 시작과 끝의 타이밍을 맞추거나, 적당히 듣기 좋은 수준으로 소리의 ‘블렌딩’을 이루는 정도가 아니다. 작품에 담긴 기승전결의 내용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파트너와 함께 모두 이해한 후 심오한 2인극을 연출하는 듯하다. 가사 하나 없는 실내악 리사이틀을 흥미진진하게,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감상하게 만든다. 엔리코 파체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그의 이러한 연주력은 꼼꼼한 작품 분석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한으로 연주할 작품을 하나씩 차분히 설명하는 말에선 그의 관록이 느껴졌다.
실내악은 다른 악기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실내악을 오랫동안 연주한 피아니스트로서 이에 대한 팁이 있을까?
악보 밖에 일어나는 부분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함께 무대에 오른 연주자와 정서적 유대를 강하게 형성하는 것이다. 악보로 들어가보면, 작곡가 대부분이 모든 악기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작품을 분석할 때 모든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 주제가 피아노의 왼손에서 등장하든, 첼로, 바이올린에서 등장하든, 반드시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
각 악기가 가지는 소리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겠다.
물론! 간단한 예로, 현악기나 관악기는 한 음을 끊지 않고 크레셴도를 할 수 있지만, 피아노는 불가하니 긴 음을 연주할 때 소리가 부족하게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생각보다 그 음을 크게 칠 필요가 있다. 무대에 함께 선 동료는 이것이 ‘지나치게 크다’라고 느낄 때가 있지만, 관객석과 다르게 들리기 때문에 나는 그 중심을 맞추기 위해 홀에서 직접 녹음을 해보는 편이다. 또한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경우는 중간 현이 가지는 힘이 비교적 약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음색을 잘 맞춰주는 게 필요하고, 플루트나 바순과 함께할 때면 음량에 잘 신경 써야 한다.
많은 실내악곡을 익히기 위해 연습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하루에 연습은 몇 시간 하는가?
그 부분은 정말 농담이 아니다.(웃음) 실내악 축제에 참여할 때면 현악 주자들은 본인들 파트를 그날 현장에서 볼 때도 있는데, 피아노는 미리 악보를 잘 숙지하고 와야 한다. 덕분에 연습 시간은 있어도 항상 부족하다. 가정도 있고, 레슨도 하다 보니, 연습 시간이 매일 일정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렇지만 악기와 함께하는 시간은 여전히 좋으니 가능한 최대의 시간을 투자한다.
대학 시절에 피아노 외 작곡과 지휘도 함께 공부했다. 이런 이력이 지금도 도움을 주는가?
항상 도움이 된다. 작곡 공부는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고, 화성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작곡가가 그 작품을 위해 선택한 주제와 작법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한다. 작품이 지닌 적절한 ‘감정의 온도’를 맞추는 데는 그러한 지식·감성·직관을 잘 종합해야 한다. 지휘에 관한 지식도 모차르트, 바흐와 같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건반 협주곡을 연주할 때 유용하다.
매년 다양한 연주자를 만나지만, 몇 명의 연주자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실내악 무대를 이어오고 있다. 그중 이번에 인천에서 함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1967~), 서울·여수·춘천에서 함께하는 첼리스트 양성원과의 인연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각자와의 첫 만남이 기억나는가?
카바코스와는 20년 전 노르웨이 리쇠르에서 열린 음악 축제에서 처음 만났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피아노·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2중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그때 음악적 견해가 잘 맞아서 즐거웠다. 양성원과는 언젠가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치머만(1965~)과 예술의전당에서 리사이틀을 했는데, 그가 공연에 왔었다. 얼마 뒤, 그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왔고, 그렇게 듀오가 됐다.
바이올린과 함께, 프랑스 정취를!
카바코스와 함께하는 공연(10.17/아트센터인천)에서는 오직 프랑스 작곡가(라벨·풀랑크·드뷔시·프랑크)로만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이 흥미롭다.
그와 나는 독일 낭만 레퍼토리를 꾸준히 연주해 왔으니, 이제 변화를 줄 때다. 프랑스풍의 마법적인 소리와 특별한 화성들이 이어지지만, 그 각자가 모두 다른 색채를 가지고 있으니, 메시앙이 경험했을 다채로운 공감각을 관객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레퍼토리를 하나씩 짚어보자. 우선 라벨의 ‘유작 소나타’로 시작을 연다.
파리 음악원 학생이던 라벨이 자신만의 음악적 언어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걸 들을 수 있는 작품이다. 천진난만한 음색이 오프닝에 잘 어울린다.
이어지는 풀랑크의 소나타는 상당히 격정적이다.
이 작품은 스페인 내전 중 독재자에 맞서다가 암살당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를 깊은 마음으로 추모하고자 1943년에 완성됐다. 1악장은 박탈당한 자유를 향한 반발의 외침인데, 프랑스도 나치로 인한 침략을 당했기 때문에 그 감정이 함께 담겨 있다. 2악장은 ‘기타가 꿈을 울게 한다(La Guitare Fait Pleurer Les Songes)’라는 로르카의 시구에서 영감을 받아 우울한 기타의 색채를 입고 있다. 3악장이 가장 폭력적인 작품인데, 두 악기가 주제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듯이 진행하더니, 마지막에 당황스럽게 끝나는 d단조 화음은 이들을 자비 없이 처형하는 단두대 같다.
2부에 연주할 두 작품 역시 서로 대조된다. 드뷔시의 소나타는 다소 난해하지만, 프랑크의 소나타는 아름다운 선율로 큰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드뷔시의 소나타에는 그가 말년에 지은 모음곡 ‘백과 흑으로’만큼 의문스러운 부분이 존재하지만, 2악장에 담긴 마치 첼로 소나타 같은 유머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프랑크의 소나타는 그의 친구였던 이자이의 결혼식을 위해 쓴 작품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두 악기가 작품에서 완벽하게 공생하는데, 그 부드러움부터 장엄함까지 한 번에 연주했을 때 정말 보람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첼로와 함께, 감정의 탐구를!
양성원과는 국내외에서 오랜 시간 여러 번 호흡을 맞췄다. 늘 보면 두 사람이 함께 하고 싶은 작품과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것 같다.
그와는 다양한 작품을 처음 연주해보는 것도 좋고, 그 작품을 함께 탐구하며 서로 흥미로운 점을 찾아가는 것도 즐겁다. 첫 시작부터 작품을 느끼는 방식이 서로 비슷했고, 서로가 제시하는 의견을 항상 수긍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화로운 해석을 선보여 왔다. 또한 좋은 호흡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공연에서는 리허설도 여러 번 맞춰보고, 우리 둘 모두 그걸 즐긴다.
파트너로서 바라본 그의 음색을 표현하자면?
그는 타고난 ‘가수’이다. 양성원이 만들어내는 레가토는 정말 아름답다. 또한 타이밍에 대한 감각도 남다르고, 작품의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음색의 다양성은 진실로 으뜸이다.
그와 함께하는 공연(10.25/예술의전당 외)의 레퍼토리 분위기는 앞선 공연과 또 다르다. 슈만의 ‘5개의 민요풍 소품’은 어떤 작품인가?
서로 다른 분위기를 내는 하나의 모음곡 같다. 유쾌한 곡부터 애정 어린 곡, 열정이 넘쳤다가 고상하기도 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작품이다.
이어지는 작품은 멘델스존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이다. 멘델스존은 동시대 작곡가들보다 ‘고전적이다’라는 평을 받는데, 작품을 연주할 때도 그런 부분을 계산하여 연주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호로비츠가 음반 ‘호로비츠 앳 홈(Horowitz at home)’ 책자에 적은 말을 인용한다. “고전적, 낭만적, 모던과 같은 꼬리표들은 해석이나 작곡에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모든 음악은 감정의 표현이다. 양식과 형식은 변화하지만, 인간 감정이라는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작곡가는 자신의 방법으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고, 꼬리표는 그 뒤에 붙은 말들이다. 그렇기에 작품에 접근하기 전에 더 ‘고전적’이라고 ‘계산’할 필요가 없으며, 작품이 가진 어조에 맞추어서 표현하면 된다. 멘델스존의 첼로 소나타 2번을 들어보면 마치 코랄같은 3악장에서는 피아노가 침착하게 말하고, 첼로가 따뜻하면서도 절박하게 대답하는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굉장히 극적이다.
설명에서 작품에 관한 세심한 연구가 돋보인다. 그 뒤로 연주할 야나체크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동화’는 러시아 작가인 바실리 주콥스키(1783~1852)의 동화를 묘사한 작품인데, 어떻게 이미지를 음악으로 구현했는지 궁금하다.
야나체크의 음악은 사람의 심리가 가장 극단적이고 초조할 때를 관찰한 듯하다. 그래서 강박적으로 느껴지다가도 그것이 해결되면 그처럼 부드러울 수가 없다. 이런걸 표현하는 재능을 가졌던 작곡가이기에 장면을 전환하는 음악에 뛰어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세 개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괴로운 고뇌-목가적인 장면-유쾌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라벨의 작품처럼 10대 시절에 쓴 작품이다.
‘소년 슈트라우스’의 열정과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슈트라우스를 해석하다 보면 멘델스존·바그너·슈만·리스트와 같은 앞선 시대 작곡가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국내에서는 실내악 연주자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언젠가 독주회나 협연으로도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브람스와 베토벤 작품을 연주하는 독주회로 일정이 차 있다. 협주곡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한국에서도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지!
글 이의정 기자
엔리코 파체(1967~) 이탈리아 로시니 음악원에서 피아노·지휘·작곡을 공부했다. 1989년 제2회 리스트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고, 이후 로열 콘세트르허바우·뮌헨 필·로테르담 필하모닉 등과 협연하였다. 또한 다양한 연주자와 실내악 리사이틀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엔리코 파체 듀오 리사이틀
10월 17일 오후 7시 30분 아트센터인천
라벨·풀랑크·드뷔시·프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양성원·엔리코 파체 듀오 리사이틀
10월 21일 GS칼텍스 예울마루 소극장
10월 22일 춘천 강원대학교 백령아트센터
10월 25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슈만 ‘5개의 민요풍 소품’, 멘델스존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번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