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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듣다
마블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
이웃집 히어로의 성장통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크리스마스의 뉴욕. 빽빽한 건물 숲속 분주한 사람들의 머리 위를 두 인물이 가로지릅니다. 바로 1대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와 오늘의 주인공, 2대 스파이더맨인 ‘마일즈 모랄레스’죠. 게임 ‘마일즈 모랄레스’(2020)는 두 스파이더맨이 감옥을 탈출한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막을 올립니다. 그렇게 사건을 해결한 후, 피터는 믿음직한 마일즈에게 홀로 뉴욕을 맡기고 해외 출장을 떠납니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마일즈에게 최첨단의 스파이더맨 슈트를 깜짝 선물하죠. 일시적이지만 마일즈는 이제 뉴욕의 유일무이한 스파이더맨이 됐습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거대한 에너지 기업 ‘록손’과 이들을 방해하는 범죄자 집단 ‘언더그라운드’ 사이에 분쟁이 발생합니다. 마일즈가 단독으로 맡게 되는 첫 사건이죠.
정체성 확립하기
마일즈는 인종, 세대, 능력 측면에서 아주 복잡한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먼저 인종적으로 마일즈는 흑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를 둔 흑인-히스패닉 혼혈로 뉴욕 할렘에 거주하고 있죠. 그는 아직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10대 청소년의 연령으로 새로운 첨단 문물을 좋아하는 신세대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미줄을 쏘거나 벽을 타는 이른바 ‘거미인간’의 소양을 가진 것은 물론, 생체 전기를 사용하여 적들에게 강력한 전류를 흐르게 하거나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전기를 조절하여 몸을 투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마일즈를 구성하는 키워드는 흑인-히스패닉 혼혈, 10대 청소년, 그리고 전기 능력입니다.
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음악 장르는 대체 무엇일까요? 바로 ‘힙합’입니다. 힙합은 1970년대 뉴욕에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브롱스(Bronx)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흑인과 히스패닉계 주민 사이에서 유행했던 문화에서 기원합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아주 좋아하는 음악이기도 하고요. 힙합에는 강렬한 리듬과 신시사이저의 소리와 같은 혼합된 전자 음향이 대거 포진되어 있습니다. 마일즈라는 인물에게 힙합만큼 제격인 장르는 없다는 의미죠.
여기서 더 나아가 이 게임의 음악은 한 가지의 정체성을 더 부여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마일즈의 핵심적인 정체성, 바로 ‘2대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정체성입니다. 이 게임에서 마일즈가 도시를 활보할 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명백하게 힙합 리듬과 힙합 음향을 표방하고 있으나, 한편으론 이를 포장하는 금관악기와 현악기의 맹렬한 오케스트라 소리와 히어로 영화에 전형적으로 사용되는 음악의 클리셰가 섞입니다. 또한 ‘마블 스파이더맨’(2018)의 피터 파커 주제곡과 조성·화음이 비슷한 모티브를 사용하죠. 이는 마일즈가 피터 파커의 의지를 물려받은 제2대 스파이더맨이라는 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심 소음으로 더욱 생생한 뉴욕을 묘사
게임에서 특정한 지역을 묘사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바로 그 지역의 특색을 담고 있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입니다(슈퍼 마리오 오디세이 편 참고). ‘마일즈 모랄레스’에서 플레이어는 뉴욕 전체를 시원하게 움직이며 뉴욕 시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받을 수 있는데요. 이 게임은 뉴욕을 음악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작은 단위인 ‘소리’를 이용하여 그려냅니다.
범죄자 집단 언더그라운드와 거대 기업 록손의 분쟁을 조사하던 중, 마일즈는 지금은 자기 가족과 관계가 소원해진 삼촌 ‘애런’을 만납니다. 애런과 함께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사운드 샘플을 수집하는 미션을 받습니다. 보통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시각 정보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간다면 평소 모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건물이나 풍경 등 시각적인 부분에 관심을 두곤 하죠. 그런데 주의를 기울인다면 한국의 지하철 소리와 일본의 지하철 소리가 다르듯이 각 지역마다의 청각 정보 역시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소리 역시 그 지역의 특정한 사회, 문화적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죠.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어들은 센트럴 파크에서 날갯짓하는 비둘기의 소리나 맨해튼의 지지직거리는 네온사인 소리 등을 모으며 뉴욕의 ‘소리풍경(soundscape)’을 제대로 즐길 수 있습니다.
큰 힘에는 큰 비극이 따른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범인(凡人)이 아닌 초인의 힘을 가진 영웅은 더욱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되며, 능력을 미숙하게 활용하면 도리어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파이더맨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무게는 영웅조차도 견디기 힘든 가혹한 비극입니다. 더군다나 10대 청소년인 마일즈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한 것이죠. 마일즈는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 폭탄 테러에 휘말려 경찰관인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이번 이야기에서 마일즈는 기업 록손에게 테러 행각을 벌이는 언더그라운드의 수장이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단짝 친구 ‘핀’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군다나 우연한 계기로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삼촌 애런이 사실은 록손에 고용된 인물이었고, 자신의 조카인 마일즈의 위치를 록손에게 밀고하고 맙니다. 록손에게 스파이더맨은 언더그라운드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방해 요인이었거든요. 마일즈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또 다른 아버지와 같았던 삼촌에게 배신당한 것이죠.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마일즈의 단짝 핀은 복수에 눈이 멀어 록손 건물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건물을 파괴하면 할렘 전체도 무너지게 조작한 록손의 또 다른 음모가 있었죠. 이를 알게 된 마일즈는 핀의 복수를 저지하려 시도하지만, 핀은 마일즈가 록손의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마일즈를 죽이려고 합니다. 마일즈는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친구와 서로를 해하는 싸움을 합니다. 이후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할렘 주민들이 모두 폭발에 휘말릴 위기에 처하자, 핀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여 사람들을 구합니다.
마일즈의 인생은 사람들을 구하는 숭고한 영웅의 삶이면서도, 커다란 비극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없는 개인의 삶입니다. 이를 반영하듯 마일즈를 상징하는 테마음악은 신시사이저의 아주 쓸쓸한 독백으로 시작하고 g단조의 우울한 단3화음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좌절할 틈도 잠시. 마일즈는 비극을 마음에 묻고 다시 뉴욕을 지키는 영웅으로 일상을 살아야만 하듯이, 음악 역시 웅장해지고 화려해지죠. 그런데 이내 음악은 소멸하듯이 잠잠해집니다. 이제 막 성장하는 영웅이 겪는 성장통과 상실감을 표현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범인은 영웅의 삶을 갈망하고, 반대로 영웅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범인으로 사는 삶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웅의 어깨는 무거운 법이니까요.
글 이창성
서울대 작곡과에서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해 관심을 두고 있으며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현재 KBS 1FM의 PD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