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6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베이스 연광철
음악의 길 위에서 만난 인연들
베이스의 깊고 넓은 음색 속으로
#베르디 #오페라 ‘돈 카를로’ 중 ‘그녀는 날 사랑한 적이 없어’ #베이스의 매력에 사로잡힌 곡
니콜라이 기아우로프(베이스)
감상 포인트 니콜라이 기아우로프의 화려하고 유려한 음색을 느낄 수 있는 곡
제가 성악을 전공으로 삼았던 1984년에는 서양 성악가들의 음반을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나 제대로 된 음향기기를 통해 대가들의 음성을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기회가 있지 않고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요. 저는 처음부터 베이스 파트로 성악 공부를 시작했는데, 당시 베이스의 음반은 테너나 바리톤에 비해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가 접했던 음반은 대부분 테너 엄정행(1943~), 바리톤 오현명(1924~2009) 선생 등의 한국 가곡집이었습니다.
대학교 재학 시절, 한 선배의 집에서 니콜라이 기아우로프(1929~2004)의 음반을 들었습니다. 당시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서, 그날 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의 음반은 베이스가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 어떻게 음악을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녹음한 오페라 아리아는 그 당시 악보도 구하기 어려운 작품들로, 그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커다란 충격이었죠. 기아우로프의 화려한 목소리, 저음부터 고음까지 아우르는 테크닉은 이제 막 성악을 시작한 제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로 느껴졌습니다.
흔히 접하는 저음 성악가들의 음색은 무겁고 어두운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슬라브 계통 성악가들의 음반을 들어보면 마치 커다란 통나무를 두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죠. 그래서인지 저음 성악가들의 역량을 단지 저음의 빛깔로만 결정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기아우로프의 음성에서는 테너나 바리톤 못지않은 화려한 빛깔과 유려한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음반에 수록된 여러 오페라 아리아를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테크닉을 가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부르는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중 메피스토펠레스나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필립이 부르는 아리아를 듣고 있자면, 음색만으로도 그 캐릭터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표도르 샬리아핀(1873~1938) 이후 가장 주목할 만한 베이스로서, 성악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음반입니다.
다시 오페라 무대 위로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 중 ‘잠이 어떻게 내게 다가왔던가’ #늘 새로운 깨우침을 주는 곡
마리아 뮐러(소프라노)
감상 포인트 마리아 뮐러의 따듯하고 활기찬 음성으로 듣는 아가테의 기도
현대의 오페라는 거대해진 공연장과 대편성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연출가의 다양한 요구로 무대 위 성악가들의 입지가 마치 인형극 속 캐릭터처럼 변질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의 오페라 가수로서, 수많은 연출가를 만나 작업하는 과정에서 오페라 무대는 저의 부족함을 알아가고, 더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는 공간입니다.
소프라노 마리아 뮐러(1898~1958)는 성악가라는 저의 본분을 늘 기억하게 하며, 초보자처럼 음악을 대할 수 있게 해주는 성악가입니다. 체코계 오스트리아 성악가인 그녀는 메트 오페라에서 활약했는데, 그녀의 맑고 청아한 음성은 언제나 맨 처음 성악을 배웠던 자세로 돌아가게 합니다. 수많은 소프라노 중 제가 뮐러를 떠올리는 이유는 그녀의 음색뿐만 아니라, 곡에 대한 빈틈없는 해석과 작곡가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통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서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선명한 음성으로 아가테라는 캐릭터를 해석하고 있으며, 단지 그녀의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가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탱고 선율이 흐르는 어느 골목에서
#카를로스 가르델 #내 사랑 부에노스아이레스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추억
다니엘 바렌보임(피아노), 로돌포 메데로스(반도네온), 엑토르 콘솔레(베이스)
감상 포인트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 연주자가 선보이는 마법 같은 탱고의 선율
피아니스트, 혹은 지휘자로 익히 알고 있는 다니엘 바렌보임(1942~)은 음악계에 다방면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녹음한 음반이나, 반주자로서 남긴 수많은 가곡 반주, 그리고 지휘자로서 남긴 여러 교향곡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죠. 바렌보임은 전 세계를 다니며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였고, 그만의 해석으로 청중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와 함께 몇 차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도시는 바렌보임이 태어난 곳으로, 그의 음악적 커리어의 시작점이기도 합니다. 그곳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바렌보임은 청중 앞에서 음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음악이 다음 세대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이 얼마나 위대한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거리 곳곳에서는 어디에서든 탱고 음악이 흘렀습니다. 젊은이부터 나이 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탱고 음악이 자연스럽게 춤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일상에서 음악이 곧 삶이자 생활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느 한적한 골목에서 노부부가 탱고를 추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삶에 음악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 곡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연주자들과 바렌보임이 함께 연주한 곡으로, 지난날 부에노스아이레스 골목에 울려 퍼졌던 탱고 선율처럼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중요한 연주를 마치고 공연과 공연 사이에 심신의 안정이 필요할 때, 특히 바그너처럼 심오하고 무거운 주제를 연주한 뒤, 이 음반을 들으면 심신에 쌓여있던 피로가 마치 그 노부부의 탱고 스텝처럼 가볍고 발랄하게 떠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렌보임과 바그너 작품을 연주한 후, 그가 녹음한 다른 음악을 들으며 그와 함께했던 일종의 스트레스나 압박감에서 벗어나곤 했죠.
바렌보임의 음악에서 드러나는 다양하고 특별한 빛깔처럼, 그와의 대화는 늘 여러 장르와 다채로운 주제로 가득합니다. 그의 아름다운 해석과 여유 있는 호흡은 지금도 제게 감동을 줍니다.
글 연광철(1965~) 불가리아 소피아 음악원, 베를린 국립음대에서 수학 후 1993년 오페랄리아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1994년부터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활동했으며, 2018년에는 캄머쟁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서울대 음대 교수를 역임(2010~2016)했으며, 지난해 11월 첫 한국 가곡집 ‘고향의 봄’(풍월당)을 발매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예술의전당 ‘보컬 마스터 시리즈’ Ⅱ. 베이스 연광철
7월 26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 홍석원/경기필하모닉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더 이상 날지 못하리’, 베르디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 중 ‘찢어질 것처럼 아픈 영혼’, 바그너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중 ‘얘야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