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 GAME&MUSIC_17
게임을 듣다
산나비
사이버펑크와 만난 조선의 가족 이야기
게임을 듣다 01 슈퍼 마리오 오디세이 02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 03 호그와트 레거시 04 모여봐요 동물의 숲 05 암네시아: 더 다크 디센트 06 음악게임 모음집 07 리그 오브 레전드 08 메이플스토리 09 마블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 10 포켓몬스터소드·실드 11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12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13 파이널 판타지 XVI 14 테트리스 15 더 라스트 오브 어스 16 더 라스트 오브 어스 PartⅡ 17 산나비
어느 한적한 산속, 오른쪽 팔이 전부 기계로 이루어진 아버지와 천진난만한 어린 딸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잔뜩 신이 난 소녀는 무전기 놀이를 하자며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소녀가 집에 돌아와 보니 그곳에는 ‘산나비’라고 적힌 폭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급하게 집으로 따라왔지만, 그 순간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며 딸과 집이 잿더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 사고를 계기로, 주인공은 작품의 이름이기도 한 ‘산나비’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한국적 소리와 사이버펑크의 만남
게임 ‘산나비’는 대한민국이 아닌 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풍 사이버펑크로, 개발 때부터 많은 이들에게 주목받은 작품입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사각형 간판, 네온사인, 버스 정류장, 자판기 등 여러 한국의 도시풍경을 미래적인 모습으로 재해석한 배경 그래픽이 큰 호평을 받았죠. 도트로 찍어낸 이미지들은 화려하면서도 어딘가 칙칙하고 그로테스크합니다. 그리고 이 분위기를 완성하는 것은 역시나 ‘음악’이죠.
작품의 음악 작업은 카자흐스탄의 작곡가 ‘인베이더303(Invader303)’이 담당했습니다. 그는 게임의 데모 버전을 플레이한 후, 이 작품의 음악 작업을 맡고 싶다며 국내 게임 개발자들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죠. 작곡가는 미디 소프트웨어 ‘FL 스튜디오’를 시작으로 2005년부터 음악을 독학했고, 오로지 신시사이저만을 사용해서 여러 콘셉트의 전자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작풍은 ‘한국풍 사이버펑크’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습니다. 예를 들어 게임의 사운드트랙 중 하나인 ‘구름을 뚫고’를 살펴보죠. 가야금이 경쾌한 주선율을 연주하고, 묵직한 비트, 긴 음으로 지속되는 신시사이저의 음향이 더해집니다. 기와집과 한국화가 어우러진 전통적인 풍경에 네온사인 등 기계적인 불빛이 섞인 배경 그래픽을 그대로 음악으로 쓴 듯합니다.
거대한 도시를 삼켜버린 기업
눈앞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 주인공은 전설적인 군인으로 위용을 떨친 과거가 있습니다. 강력한 사슬을 쏠 수 있는 기계 오른팔은 역모를 꾸미는 반정부 세력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죠. 딸의 죽음 이후, 주인공은 산나비와 관련된 조직들을 추적하며 과거 자신의 후임이었던 백 대령을 만나 수상쩍은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조선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초거대 기업 ‘마고 그룹’이 쌓은 도시, ‘마고특별시’에서 산나비의 짓으로 추정되는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죠. 서슬 퍼런 복수의 칼날을 갈며 주인공은 곧장 마고특별시로 향합니다.
도시를 샅샅이 수사하던 주인공은 ‘금마리’라는 의문의 젊은 여성을 발견합니다. 여성은 마고 그룹의 철저한 보안을 모조리 뚫을 정도로 유능한 해커였는데, 마고 그룹이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며 주인공의 여정에 동참하여 함께 마고특별시를 탐색하게 됩니다. 얼마 후, 그들은 특별시 전체가 거대한 음모에 잠식되어 있다는 걸 발견하죠. 마고 그룹은 반역을 꾀해 과거에 도시 안에서 강력한 전투 병기를 만들고 있었지만, 이 기밀정보는 유출되고 말았고, 현재는 역모죄를 도시에 은폐하기 위해 임직원들에게 자살을 권하고, 도시 전체를 핵분열로 파괴하려고 계획 중이었습니다.
조정을 향한 마고 그룹의 역모와 그 좌절은 이 게임 안에서 음악으로도 나타납니다. 마고특별시 안, 엄청난 규모의 공장에 도착한 주인공과 금나비 일행은 ‘감독관’이라 불리는 슈퍼컴퓨터를 마주하게 됩니다. 슈퍼컴퓨터는 돌연 모든 생명체와 기계를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품위 있는 최후를 맞이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대사를 뱉는데, 이때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이 함께 흘러나옵니다. 베토벤은 이 음악 속에 16세기 스페인의 폭정 아래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사형당한 에그몬트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를 고려하면 ‘에그몬트 서곡’은 조선을 전복시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자멸을 선택한 마고 그룹의 모습과 절묘하게 일치합니다.
연속되는 반전과 산나비의 정체
테러단체 산나비를 쫓아 마고특별시의 최상층에 도착한 주인공이 맞이하는 충격적인 반전은 그가 인간이 아닌 기계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인공의 진짜 육체는 이미 죽은 지 10년이 지났고, 마고 그룹은 전설적인 군인이었던 주인공의 인격을 디지털 데이터로 복사하여 역모에 동원할 강력한 로봇 군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마고 그룹의 계획은 어느 한 단어로 인해 계속해서 난항에 빠집니다. 그 단어가 바로 “산나비”였습니다.
산나비는 전투 기계로 변한 주인공의 데이터 인격이 살인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지 못하도록 막는 일종의 악성코드처럼 작용했습니다. 마고 그룹은 도무지 이 산나비라는 개념을 데이터에서 지울 수 없었고, 대신 이를 교묘하게 수정하려고 했습니다. 산나비를 딸을 죽인 테러단체로 조작하여 강한 복수심을 일으켜 살해 명령을 따르게 한 것이죠. 그러면 최초의 데이터 속에 존재하던 산나비는 도대체 누가 심어둔 단어이고, 이 산나비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를 심어둔 것은 바로 게임의 마지막까지 주인공과 동행한 금마리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죽었다고 여겨진 주인공의 살아있는 딸이었죠. 그가 심어둔 산나비는 생전 주인공의 아내가 딸(금마리)에게 가르쳐 주었던 노래의 제목, 즉, 음악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아빠가 힘들거나 좌절할 때마다 금마리는 그의 곁에서 하모니카로 산나비 선율을 불어주었죠. 산나비는 아빠와 딸을 연결하는 강력한 추억이었고, 이로 인해 주인공은 복수에만 몰두했던 전투 기계에서 자아를 가진 다정한 아빠의 인격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한 가지 더, 이 작품의 가장 큰 반전은 이 게임을 실행하자마자 듣게 되는 음악이 바로 ‘산나비’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첫 주제곡인 ‘산나비(Sanabi)’는 가슴을 뛰게 하는 강렬한 신시사이저의 음악으로 나타났다가, 게임의 마지막에 하모니카의 구슬픈 선율로 인용됩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의 마지막까지 산나비가 어떤 테러단체인지 의문을 품고 진행하다가, 알고 보니 게임의 가장 처음에 나왔던 ‘음악’이 그 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죠. 제작진의 치밀한 설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기계가 되어 딸과 재회한 주인공에게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 뒤의 이야기는 직접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글 이창성 서울대학교 작곡과 이론 전공을 졸업 후 동대학원 석사과정에서 게임과 음악의 관계에 관심을 두어 게임음악학 연구를 진행 중이다. KBS 1FM의 작가 및 PD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