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에 담긴 이야기
RECORD COLUMN
우리 시대의 바흐, 스즈키 마사아키
20년에 걸친 칸타타 전곡 녹음으로 도달한 경지
스즈키 마사아키(1954~)는 지휘자이자 건반악기 연주자로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바흐 해석자 중 한 명이다. 따라서 그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에서 바흐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차르트나 베토벤, 더 나아가 스트라빈스키도 연주하고 녹음했지만, 바흐(1685~1750)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가 녹음한 북스테후데(1637~1707)나 브룬스(1637~1718), 쉬츠(1585~1672) 같은 독일 작곡가들의 작품도 크게 보면 바흐로 가는 여정을 밝히는 거대한 작업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만하다.
일본 음악가의 바흐 칸타타 시리즈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음반은 역시 1990년에 창단한 바흐 콜레기움 재팬과 함께 진행한 바흐의 칸타타 전곡 녹음이다. 1995년, 1집 녹음을 시작해서 마지막 교회 칸타타 녹음(55집)을 2013년에, 세속 칸타타 녹음은 2017년에 마무리했으니 2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이들의 바흐 칸타타 1집 음반❶ 내지에 적힌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을 시작하며’라는 제목을 보며,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받았던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일본에서 태어나 1970~1980년에 유럽에서 공부하고, 1980~1990년에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시대악기 연주자들의 성과가 그대로 담긴 음반이다. 향후 일본 고음악계의 주축이 되는 테라카도 료(바이올린), 스즈키 히데미(첼로) 등의 연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지금 들어보면 다소 소극적인 표현도 눈에 띄지만, 칸타타 150번에서 감정을 뒤흔드는 기악 연주 등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하지만 유럽 평단은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연주”라는 애매한 호평을 보냈다. 음악적 성취를 인정하면서도 아시아인, 특히 합창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이 강하지 않은 일본인이 과연 바흐 칸타타 전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엿보인다. 지금은 선택의 폭이 훨씬 더 넓어졌지만, 당시에는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은 오직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지휘)와 구스타프 레온하르트(하프시코드) 음반(Teldec, 녹음 기간 1970~1989) 하나만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듯하다. 사실 200곡이 넘는 바흐 칸타타를 모두 녹음한다는 건 한 음악가의 평생에 걸친 재능과 헌신을 요구하는 도전이다.
바흐 해석의 관점이 변하는 가운데
따라서 바흐의 칸타타 전곡 녹음은 단지 독창자와 합창단을 선발하고 작품을 함께 연습하는 과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악보 판본과 연주 양식을 비롯한 음고와 편성, 악기 선택 등 작품에 담긴 온갖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는 뜻이며, 녹음과 관련된 숱한 일도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바흐 음악을 둘러싼 역사주의 해석은 1980년대 이후 계속 새로운 담론이 등장하며 지금도 계속 변하는 중이다. 연주자는 적극적으로 응할지, 선택적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무시할지도 결정해야만 한다.
스즈키는 스웨덴 BIS 레이블의 적극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신중하지만 꼼꼼하게 녹음에 임했다. 비슷한 시기에 칸타타 전곡 녹음을 시작했던 그의 스승 톤 코프먼(1944~)과 암스테르담 바로크 오케스트라(Challenge Classics, 녹음 기간 1994~2005)나 존 엘리엇 가디너와 몬테베르디 합창단,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츠(SDG, 녹음 기간 1999~2000)에 비해서 훨씬 더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그만큼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재까지 만들어진 여섯 종류의 전집 녹음 가운데 가장 고르게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2000년에 녹음한 칸타타 15집❷은 불과 5년 만에 확고한 연주력과 정체성을 확보한 바흐 콜레기움 재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음반이다. 노노시타 유카리(소프라노)·로빈 블레이즈(카운터테너)·게르트 튀르크(테너)·페터 코이(베이스)로 이어지는 주축 독창진이 포진했으며, 11집부터 처음 시도한 콘체르티스트(성악 솔리스트)-리피에니스트(합창) 해석과 살짝 축소된 합창 규모로 다채로운 표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 초창기에 마르셀 퐁젤)·알프레도 베르나르디니 등 계속 바뀌었던 오보에 파트도 산노미야 마사미츠가 자리를 잡으면서 안정되었다. 스즈키와 연주자들은 매우 극적이고 묘사적인 칸타타 70번에서 극적인 기복을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꼼꼼한 앙상블과 수사적인 표현으로 긴장감을 전달한다.
대들보 같은 독창자와 숨은 연주자들
스즈키는 바흐 교회 음악에서 명상적이고 절제된 표현과 종교적인 고양감 사이에서 균형을 지향한다는 느낌인데, 흔히 ‘코랄 칸타타’라 불리는 바흐의 두 번째 라이프치히 사이클(22~28집)로 접어들어 점차 밀도 있고 다채로운 표현까지 갖추면서 찬사를 받기 시작했다. 칸타타 26집❸은 좋은 예로, 장엄한 칸타타 180번에서 스즈키와 연주자들은 우아한 합창과 단호한 베이스 선율이 어우러진 첫 합창과 담백한 테너 아리아 등 작품의 복합적인 측면을 두루 펼쳐내는 연주를 들려준다.
독창 소프라노는 스즈키의 칸타타 시리즈에서 가장 변화가 많았던 파트로, 전반기를 이끌었던 노노시타 유카리에 이어 후반에는 블라지코바 하나와 캐럴린 샘슨이 등장하면서 스즈키의 ‘드림팀’이 완성된 느낌이다. 칸타타 34집❹은 특히 아름다운 앨범으로, 칸타타 1번 연주에서 들을 수 있는 섬세하고 풍부한 표현과 다채로운 음색은 코프만의 열기나 가디너의 강렬한 드라마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캐럴린 샘슨이 부르는 칸타타 127번의 소프라노 아리아는 음반의 하이라이트다.
단 일곱 장을 제외한 모든 교회 칸타타 음반에 등장한 베이스 페터 코이는 바흐 칸타타 전곡 프로젝트의 대들보였다고 할 만하다. 과장된 표현 없이 가사의 상징적, 수사적 의미를 전달하는 코이의 노래는 스즈키와 잘 어울린다. 기억할 만한 순간이 많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유명한 칸타타 82번이 수록된 칸타타 38집❺을 꼽고 싶다. 이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 물리적인 소리를 원숙한 해석으로 극복한 독창자와 자연스럽게 고별의 정서를 표현한 지휘자가 조화를 이룬 수연이다. 각각 독창 칸타타를 하나씩 부른 캐럴린 샘슨과 게르트 튀르크도 훌륭하다.
스즈키의 꾸준한 노력과 탐구는 40집 이후 시리즈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풍성한 수확을 보였다. 어느 것이든 세련되고 온화한 프레이징과 종교적 감성, 성부의 균형에 좀 더 뚜렷하고 다채로운 표현을 가미한 훌륭한 연주를 담고 있는데,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룬 칸타타 48집❻이 좋은 예다. 로빈 블레이즈와 블라지코바다 하나가 감동적인 노래를 들려주며, 차분한 가운데 여러 표현이 담긴 칸타타 117번은 스즈키의 미덕이 빛을 발하는 설득력 넘치는 연주다.
스즈키는 2003년에 이른바 세속 칸타타를 처음 녹음했는데, 교회 칸타타 녹음이 거의 마무리되는 2011년부터 박차를 가하기 시작해서 2017년에 마무리했다. 교회 칸타타 시리즈 후반부의 높은 수준이 그대로 이어진 연주로, 어느 것이나 훌륭하지만 스즈키의 독특한 유머 감각과 상상력이 뜻밖의 즐거움을 주는 9집❼은 특히 인상적이다. 장-프랑수아 마되프가 연주하는 내추럴 트럼펫의 순수하고 독특한 음색도 잊을 수 없다.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
바흐 콜레기움 재팬은 칸타타를 녹음하면서 두 수난곡과 ‘b단조 미사’ 등 대규모 작품도 함께 녹음했다. 대개 두 번, 심지어 세 번도 녹음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중간 보고서’라는 느낌이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작품은 ‘요한 수난곡’으로, 1998년에 만든 두 번째 녹음❽은 세상에 그들의 이름을 널리 알린 음반이다. 1749년 판본을 선택하고 하프시코드 콘티누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이 눈에 띄며, 신중하면서도 은은하게 발산하는 열기를 느낄 수 있다.
한편 2020년 3월, 창립 30주년을 축하하는 유럽 연주 여행 중 코로나로 독일 쾰른에서 발이 묶인 이들이 즉석에서 녹음한 세 번째 녹음❾은 시대의 기록이라고 할 만하다. 첫 합창곡부터 강렬한 긴장감과 극적인 감정 표현이 듣는 이를 압도하는 연주로, 스즈키와 바흐 콜레기움 재팬이 20여 년의 칸타타 녹음을 통해 도달한 높고 자유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20년의 세월을 두고 1999년과 2019년에 녹음한 ‘마태 수난곡’의 두 가지 녹음에서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해석의 변화가 더욱 두드러지는데, 두 번째 녹음❿은 모든 면에서 1980년대 이후 역사주의 바흐 해석이 도달한 드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스즈키의 뿌리,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스즈키 마사아키는 지휘자뿐만 아니라 건반악기 연주자로서의 활동도 꾸준히 병행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건반악기 앞에 앉았을 때 자신을 좀 더 과감하고 자신 있게 드러낸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현재 한창 녹음 중인 바흐 오르간 작품 시리즈에서 스즈키는 음반마다 유럽과 일본에 있는 다양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다. 어느 것이든 명상적인 면에서 ‘환상적 양식’의 영향을 드러내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뛰어난 연주를 들려주는데, 널리 알려진 역사적인 바로크 오르간인 그로닝엔의 슈니트거-힌츠 오르간의 음향과 매력적인 선곡이 어우러진 1집⓫을 예로 들고 싶다. 대작인 프렐류드와 푸가 E단조 BWV548는 특히 감동적이다. 그밖에 브룬스와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도 주목할 만한데, 스즈키는 이 북독일 대가들의 음악에서 상상력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하프시코드 연주도 빼놓을 수 없다. 스즈키가 연주하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영국 모음곡’ ‘파르티타’ 등은 모두 신중한 판본 선택과 섬세하고 품위 있는 표현, 자연스러운 템포가 돋보인다. 대체로 루바토나 장식음을 절제하는 해석이지만, 반면 대위법적인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춤곡의 리듬을 강조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 연주를 들려준다. 개인적으로는 기백이 넘치고 표현이 다채로운 토카타 작품집⓬을 첫손에 꼽고 싶다.
바로크를 넘은 다양한 레퍼토리
독일 바로크 음악이 워낙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스즈키의 음악적 관심은 고음악에만 머물지 않는다. 범위는 빈 고전파와 낭만주의를 거쳐 스트라빈스키에 이를 정도로 넓다. 가장 먼저 꼽고 싶은 음반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미사 앨범이다. 여유 있는 템포와 산뜻한 프레이징이 빛나는 모차르트의 c단조 대미사⓭는 시대악기 연주 중 첫손에 꼽을 만한 연주로, 캐럴린 샘슨이 독창자로 나선 ‘환호하라, 기뻐하라(Exsultate, Jubilate)’도 훌륭하다. 반면 독특하게도 아들인 스즈키 마사토가 편집한 악보를 연주한 ‘레퀴엠’은 연주의 완성도는 높지만 다소 흐릿한 녹음이 아쉽다. 한편 베토벤 ‘장엄 미사’⓮ 역시 훌륭한 음반으로, 투명한 텍스처를 드러내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서로 잘 어울리는 독창진, 테라카도 료의 인상적인 바이올린 독주가 어우러진 연주를 들려준다. 무겁고 깊이 있는 해석을 보완하는 ‘가벼운 해석’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글 이준형(음악 칼럼니스트)
PREVIEW | 서울바흐축제
바흐의 b단조 미사로 내한하는 스즈키 마사아키
바흐 음악의 권위자이자 바흐 콜레기움 재팬의 지휘자, 스즈키 마사아키가 오는 9월 11일, 한국을 찾는다. 국내의 대표적인 고음악 합창단,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포디엄에 그가 오를 예정. 바흐의 ‘b단조 미사’가 이날의 프로그램이다. 공연은 2024 서울바흐축제에 일환으로 진행된다.
‘서울바흐축제’는 2021년,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이 창단 15주년을 앞두고 바흐 전문 합창단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시작했다. 축제는 일종의 출사표다. 서울바흐축제를 통해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은 바흐 전곡 연주를 계획하고 있다. 합창은 물론, 실내악·오르간 등 다양한 음악을 선보인다. 고로 바흐 칸타타 전곡 녹음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스즈키 마사아키의 내한은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의 프로젝트에 힘을 싣는 행보다.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은 지난해 ‘마태 수난곡’ 연주로 제2회 서울예술상 음악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오는 9월 공연에는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과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성악가들이 독창자로 나선다. 소프라노 윤지, 카운터테너 정민호, 테너 김효종, 베이스 안대현이 바로 그들이다. 더불어 국내의 대표 고음악 전문 연주 단체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이 함께한다. 한국에서 고음악 파트너쉽을 오래 유지해 온 단체로서, 그간 이들이 쌓아온 고음악에 대한 철학과 호흡을 보는 것도 이 공연의 기대 포인트다.
한편, 올해의 서울바흐축제는 외에도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오르간 시리즈(9.5/경동교회), 실내악 시리즈(9.12/JCC 아트센터 콘서트홀)를 비롯, 9월 14일에는 바로크 오보에 마스터 클래스도 열릴 예정. 고음악 애호가라면 다가올 이들의 일정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추천한다.
허서현 기자
PERFORMANCE INFORMATION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 – 바흐 b단조 미사
9월 1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스즈키 마사아키/협연 윤지·정민호·김효종·안대현/ 콜레기움 보칼레 서울 &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