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악보에서 자라 나온 개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7일 9:00 오전

FOCUS ON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

악보에서 자라 나온 ‘개성’

 

지난 9월, 서울시향(지휘 한누 린투)과 협연한 그와 나눈 사전 인터뷰

 

 

크리스티안 테츨라프(1966~) 독일 함부르크 태생으로, 뤼베크 음악원과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웠다. 베를린필·드레스덴필·위그모어홀·런던 심포니·서울시향의 상주 음악가로 활동했고,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5년 독일 음반평론가상, 2018년 디아파종 황금상 등을 받았다. 솔리스트 외에 본인이 1994년에 창단한 테츨라프 콰르텟에서도 활동 중이다.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는 뤼베크 음악원과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했지만, 이를 바이올린을 전공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가 교육을 통해서 배운 것은 바이올린 연주법이 아닌, 음악을 해석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연주자가 흔히 가지고 있는 콩쿠르 입상 경력도 없다. 이미 14세에 독주자로 데뷔하고, 22세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뮌헨 필하모닉과 협연, 23세에 뉴욕에서 독주회를 열 정도로 실력과 인지도를 갖췄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기보단, 그가 기술을 겨루거나 표현력을 선보이는 것에 크게 흥미가 없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에 흥미가 있었을까. 테츨라프는 ‘독특한 해석’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는데, 이 말에서 그의 흥미에 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테츨라프는 이러한 평가에 오래도록 일관된 반응을 보여왔다.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했다”라고 말이다.

때마침 서울시향(한누 린투 지휘)과의 협연(9.5·6)과 실내악 공연(9.7/최해성(바이올린) 안톤 강·김선영(비올라), 반현정·이혜재(첼로))을 가진 그에게 ‘해석’이라는 키워드를 물으니, 그의 흥미를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악보’를 향한 그의 열정적인 호기심을 들여다보자.

 

©Giorgia Bertazzi

6살 때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던 계기가 기억나는가?

바이올린을 시작했을 때 전문 연주자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바이올린 이전에 피아노를 먼저 시작했고, 나의 형제들도 이런저런 악기를 어린 시절부터 연주했기 때문에 바이올린이 유일한 선택지도 아니었다. 결심은 유스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굳히게 되었다. 차이콥스키, 말러, 브람스를 접하면서 내가 연주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고, 이게 나의 세계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여동생 타냐 테츨라프(1973~)도 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데, 음악적인 가정에서 자랐나?

부모님이 클래식 음악 애호가셨다. 어릴 적부터 우리 가족은 공연도 자주 갔고, 나와 타냐가 연주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우리를 전적으로 지원해 주셨다. 유년기를 보낸 함부르크에서 나는 언제나 도심 내의 온갖 공연장에 있었고, 20세가 될 때까지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으니, 음악이 가득한 시절이었다.

이런 즐거움을 알게 해준 어린 시절의 특별한 스승이 있나?

내가 지금까지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스승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10세부터 20세까지는 매주 유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것이 나의 바이올린 생활의 전부였는데, 이 경험은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솔리스트로 성장하기 위해 연습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면 나는 내 소리를 잘 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저 재미로 연주하면 됐다. 음악은 재미로 연주하는 게 최고 아니겠나. 교육에 휘둘리지 않았던 경험들이 지금의 내 중심을 만들었다.

한편 교육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다. 20대가 된 후에는 독일 뤼베크 음악원에 입학했고, 이후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공부하기 위해 대양을 건너기도 했다.

당시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의 교수였던 발터 레빈(1924~)에게 가르침을 얻고 싶었다. 그는 ‘바이올린 잘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치진 않았고, 대신 실내악(현악 4중주)을 강의하며 음악 해석법을 알려주었다. 어떤 굵직한 스타 연주자에게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고자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신의 해석과 연주 방식이 ‘개성 있다’라고 평가받는 이유일까? 대다수 바이올리니스트와는 다른 행보를 걸어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여러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많은 연주자가 이따금 너무 편리하게 악구의 표현 방식을 정하기도 하고, 무조건 아름답게, 듣기 좋게만 연주하려고 한다. 작곡가의 요구를 전달하는 것은 아름답기만 한 연주와 거리가 멀며, 생각보다 훨씬 더 품이 많이 들어간다. 베토벤, 브람스, 베르크의 작품을 연주하려면 독주자는 마치 ‘배우’처럼 음악의 매 순간을 ‘연기’해야 한다. 연주자의 연약한 면모, 영혼의 모습은 단순히 좋은 활 놀림, 좋은 비브라토로 표현되지 않는다.

‘배우의 연기처럼 연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연주자는 악보를 각자가 직접 해석하여 얻은 결과로 연주해야 한다. 요즘 학생들의 연주가 획일화된 이유는 ‘반세기 전, 대가 바이올리니스트의 명공연’ 또는 ‘불멸의 스타 연주자의 명음반’과 같은 말을 듣고 그 연주를 그대로 답습해서이다. 과거의 연주자는 본인의 테크닉이 얼마나 훌륭한지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지나치게 풍부하게 연주하거나, 작곡가가 지시한 빠르기보다 10분은 더 길게 또는 짧게 연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녹음을 먼저 듣는 것은 악보를 익히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주자는 작곡가의 악보를 직접 보고, 직접 해석해야 한다. 다른 배우의 연기법만 배우고, 대본을 분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좋은 작품 해석이 나오겠는가.

 

모방하지 말고, 악보를 직접 보아라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려면 남다른 전략이 필요할텐데, 작품에 접근하는 당신의 첫 단계는 무엇인가?

나는 형식이나 분석보다는 세밀한 것에 집중한다. 우선 작곡가가 남긴 악상 기호·다이내믹·선율의 움직임·프레이징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출발한다. 호기심으로 이러한 것들을 쫓으면, 작곡가의 의도가 보이기 시작한다.

20·21세기 음악에는 종종 선율을 전혀 찾을 수 없어 해석이 비교적 어렵다고들 말한다. 이러한 작품을 위한 전략도 있는가?

선율이 없는 음악은 거의 없다. 나는 현대음악을 연주할 때나, 300년 전의 작품을 연주할 때나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작곡가가 이 작품에서 무엇을 목표로 했을지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1순위이다. 현존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할 때도, 작곡가와 상의하기보다는 나의 해석을 우선순으로 두는데, 악보만 보아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생각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치고는 점점 더 복잡하게 느껴진다.

오, 이런!(웃음)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의 안단테 악장을 생각해 보자. 왈츠이고, 메트로놈이 지시하는 빠르기는 4분음표를 84의 속도로, 약음기를 끼고 연주하라고 쓰여있다. 사교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렇지만 많은 연주자가 이를 마치 아다지오 아리아처럼 빠르기를 20 정도는 느리게, 그것도 매우 큰 소리로 연주한다. 학생들이 이런 녹음을 접하면 왜 이렇게 연주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현실은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서 문제지만! 베토벤도 자신의 작품이 이상한 속도로 연주되는 것을 보고 “제 메트로놈 표기는 보셨나요?”라고 말했지 않나. 물론 메트로놈 빠르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120으로 쓰여 있으면, 110~130 정도로 연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발 80으로 연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신의 해석 능력은 작곡이나 지휘에도 적합할 것 같은데, 관심이 있는가?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의 지휘를 맡고 있고, 몇 주 뒤에도 이들과 슈만 교향곡 2번을 지휘할 예정이지만, 곧 그 자리를 떠난다. 교향곡은 좋아하지만, 지휘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작곡은 재능이 없어서 안 된다. 작곡이 하고 싶다고 누구나 작곡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음악적 파트너와의 녹음

테츨라프와 한누 린투/서울시향(2024)

여동생인 타냐를 비롯하여 바이올리니스트 엘리자베트 쿠페라트, 비올리스트 한나 바인마이스터와 함께 1994년부터 ‘테츨라프 콰르텟’으로 활동하고 있다. 솔리스트 활동을 하면서도 콰르텟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현악 4중주 작품을 향한 애정일까?

슈베르트 현악 4중주 G장조보다 아름다운 작품이 있을까? 베토벤 현악 4중주 a단조는? 알반 베르크의 현악 4중주 ‘서정적 모음곡’보다도?(웃음) 현악 4중주는 ‘음악의 문학’이다. 보다 적은 관객을 위해 연주한다는 것은, 음악을 사랑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보여주려고 쓴 음악이란 뜻이다. 이 장르에 애정이 없는 바이올리니스트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1년에 두어 번은 꼭 테츨라프 콰르텟과 투어하며,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물론 협주곡 연주가 재미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은 엘가 협주곡을 연습 중이고, 곧 녹음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는 다음 음반이 엘가 협주곡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그리고 이미 녹음한 토마스 아데스(1971~)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묶어 ‘영국’이라는 주제로 함께 담길 것이다.

모든 음반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음반 작업은 거의 테츨라프 콰르텟, 그리고 피아니스트 라르스 포그트와 함께했다.

라르스 포그트(1970~2022)와는 정말 최고의 우정을 나눴다. 우리는 무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절친한 관계였고, 어떤 주제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의 많은 리사이틀과 실내악을 그와 함께했다. 그래서 그가 2년 전 세상을 떠난 것은 내 삶의 거대한 상실이다. 그와 함께 한 30년 동안의 시간은 놀라운 협업의 순간이었다. 함께 공연하는 독일 연주자들이 여전히 여럿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공백은 계속 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만난 그의 공연

서울에서 한누 린투(지휘)와 서울시향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정했다. 가장 좋아하는 협주곡을 꼽을 때면 이 작품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작품을 처음 접한 16세부터 200번이 넘게 연주한 것 같다. 바이올린에 관한 브람스의 완벽한 이해가 느껴지는 곡이다. 희극과 비극이 동시에 존재하는데, 이를 통해 연주자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다. 특히 1악장의 주제 전개 방식은 브람스 교향곡 2번의 주제와 유사하다. 다소 작은 셈여림이지만 다양한 화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등장하는 바이올린 독주의 첫 선율에 담긴 강한 분노의 감정은 아름다운 소리로 해결된다. 음악의 진행 속에 바이올린 독주의 갈망과 사랑이 교차하고…. 아, 남은 악장을 이야기하면 대화가 너무 길어질 것 같다.

이튿날 실내악 무대(9.7) 프로그램은 모차르트 현악 5중주와 브람스의 현악 6중주이었는데, 이 둘의 연결점은 무엇인가?

앞선 나의 의견들에 비하면 다소 우스운 이유인데,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 두 곡이다. 그리고 낯선 연주자와 합을 맞추기에 좋은 작품들이다. 현악 4중주는 무척 어려운 장르이지만, 5중주나 6중주는 비교적 맞추기도 수월하다.

마지막으로 2024/25 시즌의 일정을 전해달라.

엘가 협주곡 녹음이 현재로선 가장 큰 계획이다. 또 내년 6월에 열리는 함부르크의 슈판눙엔 페스티벌(das Festival Spannungen)의 감독을 맡게 되어서 이를 기획하는데 바쁘다. 시카고 심포니를 비롯하여 협연 일정이 쭉 있고, 내년 서울에 리사이틀 공연(5.1/예술의전당)이 또 있으니, 다시 만나길.

 

그는 인터뷰의 긴 시간 동안 ‘악보를 단순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를 다양한 작품과 언어로 설명했지만, 마지막에 “그렇지만 음악에 담긴 내용을 언어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건 소용없다. 음악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한국에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숙어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지난 9월, 한누 린투와 서울시향이 카이야 사리아호의 ‘겨울 하늘’ 연주를 마친 뒤, 테츨라프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기 위해 무대로 올랐다. 그의 연주는 대화의 설명과 일치했다. 맺고 끊음이 분명하고, 필요에 따라 아름답지 않은 소리도 과감하게 사용했다. 악보의 가장 기초부터 출발한다는 그의 해석은 실로 효과적이었고, 그의 연주는 악보에 적힌 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브람스가 악보에 어떤 대사를 적었기에, 그가 이토록 열정적이게, 때로는 너무나 슬프게 연기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의정 기자 사진 서울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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