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테마가 있는 추천 음반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라벨: 피아노 독주 전곡집
조성진(피아노) DG 4866814
오랜 시간 프랑스 피아노 작품에 긴밀한 유대감을 유지해 온 조성진(1994~)이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벨을 기념해 라벨의 피아노 독주 작품 전곡과 피아노 협주곡 두 곡을 녹음했다. 이번 음반은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발매 예정 중인 두 장의 음반 중 피아노 독주 전곡이 담긴 첫 번째 음반이다.
파리고등음악원 재학 시절부터 라벨 연주에 깊은 애착을 보인 조성진은 “한 작곡가의 전곡을 연주하거나 녹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전보다 훨씬 깊이 라벨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의 음악이 가진 다양한 측면에 몰입하는 과정이 매우 즐거웠다”고 밝혔다. 특히 “‘거울’의 경우,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동시에 상상력과 색채가 풍부한 곡이라서 작곡가의 모든 지시를 적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발매될 안드리스 넬손스/보스턴 심포니와 녹음한 피아노 협주곡 음반(2월 21일 발매 예정)에 대해서는 피에르 몽퇴(1919~1924), 세르게이 쿠세비츠키(1924~1949), 샤를 뮌슈(1949~1962) 시대부터 명성을 이어온 보스턴 심포니의 프랑스 레퍼토리 전문성을 언급하며, “보스턴 심포니와 연주할 때면 마치 프랑스 정신이 그들의 피 속에 흐르는 것 같다”고 전했다.
조성진은 오는 1월 25일 빈 콘체르트하우스 독주회를 시작으로 2월과 3월에는 카네기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공연이 포함된 미국 투어를 갖고, 4월과 5월에는 런던 바비칸 센터,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 등에서 라벨 연주를 이어갈 계획이다. 홍예원
다채로운 문화를 덧입히다
리더(Lieder)
파트마 사이드(소프라노) Warner Classics 2173245977
반투 송가(Hymns Of Bantu)
아벨 셀라오코(첼로·퍼커션) 외 Warner Classics 2173245947
두 명의 젊은 아티스트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독특한 음악 세계를 보여주었다. 이들의 음악은 과거와 미래, 고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한 편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소프라노 파트마 사이드(1991~)가 슈베르트·멘델스존·슈만·브람스의 가곡 24곡을 담은 음반 ‘리더(Lieder)’를 발매했다. 이집트 출신인 그는 독일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과 이탈리아 라 스칼라 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자신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독일 가곡을 재해석했다. 피아니스트 말콤 마티뉴뿐 아니라,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1959~), 아로드 콰르텟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었다는 점도 특별하다. 하피스트 아넬린 레나르츠(1987~)와 함께한 브람스의 4개의 노래 Op.70 중 2번 ‘종달새의 노래’는 하프의 맑은 음색이 종달새의 지저귐을 떠올리게 해 인상적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첼리스트 아벨 셀라오코(1992~)는 고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우리가 모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관한 음반”이라고 표현한 그는, ‘반투 송가(Hymns Of Bantu)’에 아프리카 반투족의 노래와 클래식 음악의 유산, 현대적인 해석이 담긴 그의 창작곡 등 총 12곡을 담았다. 전통 타악기·첼로·일렉트릭 베이스 등을 사용한 ‘에마누엘’과 실내악 앙상블 맨체스터 컬렉터와 함께 연주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이 특히 흥미롭다. 김강민
화제의 신보
베르디 ‘에르나니’
엔리케 마촐라(지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프라하 필하모닉 합창단/
사이미르 피르구(에르나니), 위관군(엘비라), 프랑코 바살로(카를로 국왕), 고란 유리치(실바 공작) 외/
로테 데 베어(연출) C Major 768108(DVD), 768204(Blu-ray)
베르디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에르나니’(1944)는 빅토르 위고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엘비라와 그를 노리는 세 명의 남성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이다. 과거 귀족이었던 산적 에르나니와 스페인의 국왕인 카를로, 그리고 결혼이 약속됐던 늙은 숙부 실바 공작은 각자의 악연으로도 복잡하게 얽혀있다. 2023년 브레겐츠 실내 극장 실황으로, 현대적인 연출이 가미되어 있으며, 중국의 소프라노 위관군의 뛰어난 가창이 돋보인다.
보이토 ‘네로네’
프란체스코 칠루포(지휘)/ 테아트로 리리코 디 칼리아리 오케스트라·합창단/
마하일 셰샤베리제(네로네), 프랑코 바살로(시몬 마고) 외/ 파비오 체레사(연출)
Dynamic DYN38047(2DVD), 58047(Blu-ray)
아리고 보이토(1842~1918)는 베르디 ‘오텔로’ ‘팔스타프’의 대본가로 익숙하지만, 작곡가이기도 하다. ‘네로네’는 그의 두 번째 오페라이자 미완성작이다. 모친을 살해한 죄의식에 시달리는 네로네, 기독교인을 증오하는 사이비 교주 시몬 마고 등이 등장해 로마 신전과 기독교 사이의 복잡한 갈등을 다루며, 네로네를 사랑한 아스테리아가 로마 시내에 불을 지르는 전개로 이어진다. 바그너를 동경했던 보이토의 성향이 드러나는 작품.
푸치니 ‘토스카’
요제프 카일베르트(지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합창단/
소냐 욘체바(토스카), 비토리오 그리골로(카바라도시), 로만 부르덴코(스카르피아) 외/
우고 데 아나(연출) C Major 767708(DVD), 767804(Blu-ray)
2023년 베로나 페스티벌 실황 영상이다. 넓은 공간을 활용한 우고 데 아나(1949~)의 화려한 연출이 눈을 사로잡는다. 1막 피날레의 ‘테데움’ 장면이 특히 압도적이다. 메트 오페라에서 토스카 역으로 찬사를 받았던 소프라노 소냐 욘체바가 다시 한번 토스카로 무대에 올랐다. 비토리오 그리골로가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로, 로만 부르덴코가 권력욕에 찬 스카르피아로 분해 ‘토스카’에 담긴 사랑과 비극적인 운명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헨델 ‘브로케스 수난곡’
미하엘 호프슈테터(지휘)/할레 헨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할레 오페라 솔로이스츠 코러스/
로베르트 셀리어(복음사가), 미하엘 체에(예수), 호르헤 나바로 콜로라도(베드로) 외/
월터 섯클리프(연출) Naxos 2110755(DVD), NBD0167V(Blu-ray)
굳이 종교물 같은 텍스트가 아니어도 문학에서 ‘수난’이란 이름으로 예수의 수난을 탁월하게 서술했다면 그 가치를 인정해 왔다. 바르톨트 브로케스(1680~1747)의 ‘브로케스 수난곡’이 그 예로, 헨델·텔레만·슈톨츨 등 당대 작곡가가 그의 대본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중 헨델의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에 버금가는 규모 덕에 큰 사랑을 받았다. 2023년 섯클리프(1976~)가 연출한 할레 오페라 실황은 다채로운 무대·소품·의상·분장으로 눈길이 간다.
웨인라이트 ‘드림 레퀴엠’
미코 프랑크(지휘)/라디오 프랑스 오케스트라·합창단/
안나 프로하스카(소프라노)/메릴 스트립(내레이션)
Warner Classics 502173250060(CD), 502173250061(2LP)
대중음악과 클래식 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음악가 루퍼스 웨인라이트(1973~)가 ‘드림 레퀴엠’에 팬데믹 속에서 경험한 위기와 재앙에 대한 목소리를 담았다. 오페라에 관심이 많은 그는, 이번 음반에서도 바이런의 시 ‘암흑’과 레퀴엠 미사를 바탕으로 팝과 오페라를 접목한 새로운 시대의 레퀴엠을 선보였다. 지난 6월, 메종 드 라디오에서 열린 세계 초연 무대에서 배우 메릴 스트립이 바이런의 ‘암흑’을 낭송해 화제를 모았다.
비발디: 사계 외
테오팀 랑글로와 드 스와르테(바이올린·지휘), 즬리 로세(소프라노)/
오케스트르 르 콩소르 Harmonia Mundi HMM90275758(2CD)
지난 2월, 다수의 비발디 협주곡을 담은 음반으로 호평을 받은 테오팀 랑글로와 드 스와르테(1995~)는 프랑스 바로크 바이올린계의 떠오르는 차세대 주자다. 이번 음반은 비발디의 ‘사계’를 포함하고 있는데, 외에도 바이올린 협주곡 RV.264나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등이 함께 수록되어 순환되는 계절의 영속성을 느끼게 해준다. 드 스와르테가 쥐스탱 테일러와 함께 창단한 오케스트르 르 콩소르가 이번 음반에도 함께했다.
블랙스트링 3집 ‘로드 오브 오아시스’
소리의 유랑, 오아시스와 신기루 사이에서
전통 현악기 거문고는 ‘검다’는 뜻의 한자어 ‘현(玄)’에, 악기를 뜻하는 ‘금(琴)’자를 써서 현금(玄琴)이라고 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푼 게 거문고다. 이 어원을 따라 이름 붙인 블랙스트링은 허윤정(거문고)과 이아람(대금·단소), 황민왕(소리·장구), 오정수(일렉트릭 기타)가 함께 하는 4인조 앙상블이다.
2016년 10월호 본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허윤정은 당시 자신의 음악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예전의 저의 음악에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질서하게 나열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정리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자신이 정리된 것이겠지요. 그러니 음악의 화질과 선명도가 명확해졌어요. 그리고 믿음! 예전에는 저를 확실히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대중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 말이죠.”
이러한 음악적 믿음으로 이끌어 온 블랙스트링은 2016년 1집 음반 ‘마스크 댄스’를 발매했고, 2019년 2집 음반 ‘카르마’를, 그리고 2021년 10주년 콘서트를 가졌다.
이번에 발매된 3집 음반 ‘로드 오브 오아시스’는 블랙스트링이 만나온 세계 각국의 음악을 한국의 전통음악에 녹여내고, 장르의 경계를 넘어 또다시 시작될 새 길을 향한 도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수록곡은 총 7곡. 1집과 2집에서 허윤정이 강력하게 중심을 잡았다면, 이번 음반에서는 그 무게를 살짝 내려놓음으로써 이아람(대금), 오정수(기타), 황민왕(소리·타악)의 장기가 돋보이는 곡들도 포진했다.
유랑자들의 떠남과 소리적 증표
첫 번째 수록곡 ‘로드 오브 오아시스’에서 블랙스트링은 음악의 여정으로 떠날 채비를 점검한다. 거문고 챙기고, 대금도 넣었고, 일렉트릭 기타도 잘 정비했다. 이들의 남다른 출발을 프랑스의 음악가 뱅상 페라니가 아코디언으로 축복하고 흥을 돋우기도 한다. 무가(巫歌)와 타악기(황민왕)가 시작을 끊는다.
음반의 제목이 ‘오아시스로 향하는 길’이다. 오아시스란 사막의 샘물이다. 수분이 없는 시공간(사막)에 놓인 물의 시공간(오아시스). 어떻게 보면 모순의 존재이기도 하지만, 오아시스로 대변되는 이러한 ‘모순성’은 블랙스트링이 상정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들의 음악은 물과 불, 세속과 피안, 삶과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의 존재를 만나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트랙 ‘발현’은 블랙스트링의 음악적 정체성과 증표를 보여준다. ‘발현’은 드러내다라는 뜻인데, 잔잔하게 시작하는 거문고 소리는 이 곡의 제목을 ‘발현(發玄)’, 즉 거문고를 드러내 보이거나, ‘발현’, 즉 현(絃)의 울림을 드러내게 하는 것으로 재해석하게 한다.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 기원을 보여주는 곡이다.
분위기가 급격히 전환되는 세 번째 곡 ‘동해’는 동해안별신굿 장단을 모티프로 했다. 악기마다 내재된 리듬의 습성을 거침없이 꺼내어 블랙스트링을 하나의 타악기로 만들어 버린다. 드럼을 치는 듯한 기타의 강한 스트로크, 취구를 찢어버릴 듯한 대금의 비트박스, 대점(代點)으로 악기를 뚫을 듯한 거문고의 울림. 여기에 구음 연행과 장구가 합일을 이룬다.
이번 앨범에서 돋보이는 것은 강·약의 흐름이다. 거문고의 두꺼운 대현(大絃)이 호령하고, 얇은 유현(遊絃)이 속삭이는 것처럼, 트랙 배치에도 강약과 대소의 흐름이 살아 있다.
강·약의 흐름과 물과 불의 만남
‘동해’에서 소리의 파도를 일으킨 블랙스트링은 ‘심연’에서 내면의 고요함으로 향한다. 심연(深淵)은 깊은 못을 뜻하거나 은유적으론 그와 같은 인간의 마음을 일컫는다. 이 곡을 듣고 있자니 제목인 ‘심연’을, 마음(‘심’)으로 향하는 ‘연’주라 읽고 싶어진다. 선비들이 마음 수양을 위해 연주했을 법한 가락을 단소가 연주한다. 그 연주는 우리가 잊고 있던 마음자리 한구석으로 안내하는 소리의 내비게이션 같고, 거문고와 기타는 그 길(마음)로 향하는 발걸음을 부드럽게 재촉한다. ‘동해’에서 일출의 광경을 본 이가 마음을 다잡고자 자신의 서재에서 올리는 마음의 기도 같은 곡이다.
이어지는, 다섯 번째 곡 ‘불의 파도’는 틈새가 없는 곡이다. 블랙스트링의 기원이 닿아 있는 한국 전통음악에는 ‘편’(編)이라는 기법이 있다. 기존 곡의 소리와 음률의 간격을 촘촘히 ‘엮어’, 흐름이 빨라지게 만드는 방식이다. ‘불의 파도’는 ‘심연’에서 보여준 소리를 다시 빠르게 엮는다. 음악가들이 지닌 속주의 기법이 ‘불’을 지르고, 한데 모인 소리를 ‘불’로 녹이는 용광술을 보여준다. 북쪽의 함경도부터 강원도, 남쪽의 경상도의 지기를 닮은 메나리토리를 촘촘히 엮고 그 위에 반음진행의 융단폭격을 넣어 밀도를 높였다. 여기에 타악기가 부스터를 붙여 몰아간다. 촘촘하면서도 오와 열이 흐트러지지 않는, 블랙스트링만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현실과 환영, 이별과 만남의 연결
온도는 ‘침잠’에서 급격히 식어버린다. 트랙 배치의 흐름상 (‘로드 오브 오아시스’와 이어진 ‘발현’이나, ‘동해’와 이어진 ‘심연’처럼 서정성이 흘러야 하는 순서인데, ‘침잠’은 그렇지 않다. 앞의 곡 ‘불의 파도’에서 태워버린 음악적 폐허에서, 흔적과 잔재의 얼개를 맞춰 만든 음악 같다. 폐허를 보는 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전자음향이 펼치는 묘한 분위기에서 악기들은 ‘불의 파도’에서 태워버리고 남은 최소의 소리와 에너지로 연주한다. 헐겁고, 폐허 같은 공포감.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침잠’은 다음 이어질 마지막 곡 ‘이별’의 전주곡 같다.
‘이별’에서 구음은 음악의 화자가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준다. 저 먼 피안의 세계.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음악이 그 길을 깔아준다. 경기민요로 태어난 노래는 현대의 엠비언트 사운드(오정수)가 뽑아내는 씨줄과, 굿 음악의 날줄 속에서 묘하게 흘러간다.
이러한 ‘이별’은 트랙 배치상 마지막 곡이다. 하지만 흐름이 첫 곡 ‘로드 오브 오아시스’로 다시 이어진다면, 이는 마치 ‘이별’한 자가 부활해서 눈앞에 온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사막의 오아시스를 잘못 본 신기루처럼… 이처럼 블랙스트링의 이번 음반은 전통음악과 오늘날의 음악에도 없는 소리의 지도를 상상하게 하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신기루의 사운드와 만나게 한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왼쪽부터 이아람(대금), 허윤정(거문고), 황민왕(타악·구음), 오정수(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