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Editor’s Note
의심과 진실 사이
연극 ‘붉은 낙엽’
1월 8일~3월 1일 국립극장 달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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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우(연출)/장한새(협력연출)/김강우·박완규·지현준(에릭 무어), 이유진·장석환·최정우(지미 무어), 김원정(바네사 무어) 외
구부정한 걸음걸이의 남자가 무대의 커튼을 걷어내자, 붉게 물든 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저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마당을 바라보며 회상한다. “처음 이 집을 살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단단한 집, 아주 단단하고 바위처럼 튼튼한 집을 짓는 것이었다.” ‘붉은 낙엽’은 토머스 H. 쿡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가정에서 피어오른 의심과 내면의 균열로 인한 파멸을 그린다.(2월 16일 관람)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김강우 분)은 교사인 아내 바네사(김원정 분), 아들 지미(장석환 분)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의 일상은 이웃집 소녀 에이미(장승연 분)의 실종과 함께 위기를 맞는다. 경찰은 사고 당일 에이미와 함께 있었던 지미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에이미의 행방이 밝혀지지 않으며 사건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무대 위에 붉은 낙엽이 쌓여가는 동안, 가족을 향한 에릭의 의심도 켜켜이 쌓여갔다. 아내와의 갈등, 형에 대한 오해, 아버지를 향한 원망. 한번 시작된 의심은 헤어나올 수 없는 늪처럼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이윽고 총성과 함께 붉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의심한 죗값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비극적인 결말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를 떠올리게 한다.
작품은 무대 연출을 통해 인물의 불안한 심리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모던한 분위기의 부엌과 거실은 견고한 집만큼이나 단단한 가정을 원했던 에릭의 내면을, 집안 곳곳에 세워진 단풍나무는 서서히 퍼지는 불안을, 어두운 조명과 창문 사이사이 비치는 그림자는 가족을 삼켜버린 의심을 보여준다. 다만, 미국이라는 작품의 배경에서 비롯된 각 인물의 다소 과장된 대사 톤이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됐다.
사진사 에릭은 진실을 찾기 위해 가족사진을 들여다봤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더욱 커진 의심과 불안이었다. 우리는 종종 보이는 대로 믿기보다, 믿고 싶은 대로 본다. 에릭이 믿고 싶었던 진실은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이 아닌, 그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진 속 가족이 아니었을까?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라이브러리컴퍼니
SNS 속 신기루
연극 ‘애나엑스’
1월 28일~3월 16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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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찰턴(원작)/이재은(프로듀서)/황석희(번역)/김지호(연출)/ 최연우·한지은·김도연(애나), 이상엽·이현우·원태민(아리엘) 외
사기 행각이 들통나 교도소에 수감된 애나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석탄은 석탄으로만 남고 싶지 않아. 다이아몬드가 되고 싶지. 그래서 나한테 기회가 한 번 더 오잖아? 그럼 난 똑같이 할 거야. 아니, 더 할 거야.” 말투에는 약간의 후련함과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듯한 아쉬움이 묻어있다. 애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는 걸까?(1월 31일 관람)
온라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쉽게 꾸며낼 수 있는 요즘. 우리는 SNS에 일상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내면의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연극 ‘애나엑스’는 바로 그런 우리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다. 뉴욕 사교계를 뒤흔든 ‘가짜 상속녀’ 애나 소로킨의 실화를 바탕으로 2021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2인극으로, 지난 1월 한국 초연의 막을 올렸다. 작품이 전하는 사회적 메시지에 스타 배우들의 캐스팅 소식까지 더해져 많은 관심이 모였다.
무대에 설치된 7개의 거대한 LED 패널은 또 하나의 주인공처럼 큰 역할을 했다. 스마트폰 화면을 재현하며 애나와 아리엘이 주고받는 메시지 화면이 되었다가, SNS의 피드가 되었다가, 아리엘이 만든 데이팅 앱 제네시스가 되었다. 애나의 정체가 탄로 났을 땐 깨진 액정처럼 표현되기도 했다. 애나와 아리엘이 패널 앞에서 문자를 주고받을 때 바닥에 스마트폰 모양의 흰색 조명이 켜졌는데, 이는 스마트폰 속 세계에 갇힌 현대인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강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애나는 감옥에서도 패션을 포기하지 않는다. 실제로 애나 소로킨의 패션은 재판마다 화제가 되었는데, 극 중 애나도 반짝이는 목걸이를 착용하고 은빛 구두를 신은 채 등장했다.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차림새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인간의 다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극 중 애나와 아리엘은 서로 한 단어씩 주고받으며 문장을 완성하는 게임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애나가 ‘나를’이라는 단어로 문장을 시작해, “나를, 짓누르는, 눈송이 같은, 꿈”이라는 문장을 만든다. 꿈에 짓눌린 사람이 어떤 행동까지 할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글림컴퍼니
CLASSICAL MUSIC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베토벤 교향곡 전곡 시리즈 Ⅱ’
창단 60주년이라는 시간을 기억하며
2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공연에 앞서 창단 60주년 기념 영상이 콘서트홀 스크린에 떴다. 1965년 창단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훌훌 지나갔다. 악장석에는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이하 KCO)의 음악감독 김민이 앉아 있었다. 83세 현역 악장이 오늘도 악단을 이끌었다.
지휘자 최수열이 등장하고 기념 위촉 작품인 김택수의 ‘Ongoing’이 연주됐다(세계 초연).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영웅)’ 첫 부분과 유사한 단편이 환영처럼 오가며 중첩됐다. 국악적인 가락이 끼어들기도 하면서 러시아 작곡가 시닛케를 연상시키는 힘이 느껴졌다. ‘느닷없는 강렬함’은 인상적이었다. ‘에로이카’ 교향곡의 호른 중주 부분도 지나갔다. 맑은 종소리 같은 연주에 이어 어둑어둑한 악구가 대조를 이뤘다. 현의 하모닉스와 무거운 관악군의 소리가 조화로웠으며, 스네어 드럼이 띄우는 축제 분위기로 곡이 끝났다. 프로그램 노트에는 ‘Ongoing’이 ‘온고지신’의 ‘온고-ing’을 의도했다는 김택수의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온고지신’을 중시했던 모차르트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어 무대 중앙에 하프시코드가 놓이고 미우라 후미아키(바이올린), 마체이 스크세츠코브스키(하프시코드), 김세현(플루트, KCO 수석)이 입장했다.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5번은 현악 합주로 시작했다. 템포는 적당히 빨랐고 진행은 쾌적했다. 스크세츠코브스키의 하프시코드는 긴 독주에서도 주제의 움직임이 또렷했다. 2악장에서 요제프 요아힘 콩쿠르 최연소 우승자인 미우라의 바이올린은 원전연주에 비해 다소 탁하고 어둡게 다가왔다. 김세현의 플루트는 안정감 있는 해석을 들려줬다. 3악장의 약동감은 생생하게 살아났고 바이올린의 기민함도 인상적이었다.
‘쾅, 쾅.’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는 두 번의 총주로 힘차게 시작했다. 적절하게 밀고 나가는 템포에 최수열의 손과 현악기의 활이 일체를 이루며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기계적인 박자 감각이 아닌, 완급을 조절하는 인간적인 해석이었다. 우르릉대는 팀파니는 음악에 자유로움을 공급했다. 오래달리기 선수 같은 규칙적인 움직임 속에서도 갑자기 뜨거워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특히 바이올린 군이 뚜렷하게 들리는 음악을 만들어 나갔다. 더블베이스의 피치카토도 잘 들렸다. 오와 열이 착착 맞는 막판이 압권이었다.
2악장은 요즘 스타일과 다르게 진지하며, 감성적이었다. 충분히 느린 템포에 애달픈 음률을 연주하는 첼로의 진동이 느껴졌다. 있는 그대로의 부드러운 추모였다. 사토키 아오야마의 오보에 선율이 선명하게 플루트와 겹쳐졌다. 말러 교향곡 5번 1악장이 떠올랐다. 총주는 크게 부풀어 올랐고 관과 현이 합류하는 부분에서 관악기가 조금 늦게 들어오는 어긋남이 있었다.
3악장은 슬픔을 지우려는 듯 사뭇 다른 접근으로 민첩하고 발랄한 연주를 들려줬다. 호른 중주가 매끄럽지 않았지만 잘 넘어갔다. 4악장은 당당하게 밀고 나가며 시작했다. 말달리듯 격렬한 부분에서는 당당한 표현으로 과부족이 없었다. 후반부 오보에 연주에 이어 현이 맞춰갈 때 KCO의 관록이 보였다. 앙코르는 글린카의 ‘루슬란과 류드밀라’ 서곡. 큰 산의 정상에서 ‘야호’를 외치는 듯한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
최송하 바이올린 리사이틀
사랑 가득한 제 노래 들어보실래요?
2월 14일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2023년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바이올린 부문 2등·세미파이널 최고 소나타상·캐나다 작품 최고 공연상 등을 수상한 바이올리니스트 최송하(2000~). 지난해에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본선에 올라 유다윤과 함께 최종 12인 수상자에 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준비한 이번 공연은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과 꽤 묵직한 소품 다섯 곡으로 이루어졌다.
첫 곡은 드뷔시 ‘목신의 오후 전주곡’ L86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흔들림 없는 보잉, 활의 쓰임이었다. 굳은 심지가 느껴졌고, 개성이 뚜렷했다. 하이페츠 편곡 버전에서 필수적인 카리스마와 힘도 갖추어 첫 곡부터 관객의 주의를 확실하게 붙잡았다.
이어진 드뷔시 바이올린 소나타 g단조 L140 1악장에서는 객석에 말을 거는 듯한 도입부가 인상적이었다. 악기 자체의 캐러멜같이 녹진한 톤이 연주자의 실력으로 잘 살아났다. 2악장에서는 확신에 찬 강한 어조와 야무진 톤으로 신뢰감을 주었고, 3악장에서 내적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늘 사랑받는 프로그램, 세자르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FWV8에서는 표정을 바꾸어 음 하나하나를 더 세심하게 보살폈다. 활은 현에 밀착되어 단단하고 매끈한 소리를 냈다. 좋은 배우가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발음과 뉘앙스를 정확하게 짚어가는 것처럼 철저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큰 음량이 시원시원했다.
중간 휴식 후 첫 곡으로는 드뷔시의 ‘아마빛 머리의 소녀’ ‘렌토보다 느리게’를 연주했다. 하이페츠 편곡다운, 약간은 옛 느낌이 나는 음색으로 시작하여, 드뷔시 특유의 부유하는 선율을 잘 표현했다. 선율이 자유로이 흐르는 와중에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청중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풀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FP119는 최송하와 가장 잘 맞는 느낌이었다. 강력하게 밀고 나가며 마치 오케스트라 음색을 표현하는 듯한 장면도 있었고, 현을 뜯는 피치카토도 선명하고 효과적이었다. 몸의 힘이 악기로 잘 전달되어 소리가 전반적으로 편안하게 울렸다. 피아니스트 박영성 역시 최송하와 호흡을 같이하며 곡의 흐름을 잘 살렸다. 강하고 폭발력 있는 바이올린에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발 물러나서 곡 전체의 균형이 잡힌 느낌이었다.
앙리 비외탕의 ‘몽상’ Op.22, 그리고 ‘아메리카의 추억’ Op.17은 연주자가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몽상’에는 열정이 가득했고, ‘아메리카의 추억’으로 미처 보여주지 못한 기교를 맘껏 발휘해 관객의 감탄을 자아냈다. 마치 ‘카르멘 환상곡’의 마지막 부분처럼, 연주하는 모습 자체가 보는 이를 흥분시키는 작품이었다.
앙코르로 두 곡을 연주했다. 스테판 그라펠리의 재즈 ‘Tea for two’, 그리고 풀랑크의 ‘사랑의 길(Les Chemins d’Amour)’이었다. 연주자는 직접 “공연일인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를 위해 골랐다”라는 설명을 곁들였다. ‘Tea for two’의 재즈스러운 표현이 아주 훌륭해서, 언제인가 프로그램의 일부를 그라펠리풍의 곡에 할애한다면 또다시 방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최송하는 3월 27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KBS교향악단과 협연 무대를, 4월 3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최하영과 함께 듀오 리사이틀를 준비 중이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더브릿지컴퍼니
DANCE
발레 ‘피아노 파 드 되’
인생의 나날을 그린 음악과 안무
2월 9일 유니버설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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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걸(대본·안무·연출)/오은철(작곡·피아노)/전민철(피에로), 김민진(전 여자친구) 외
주말 낮 공연, 유니버설아트센터의 관객석은 마린스키 발레 입단을 앞둔 무용수 전민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채워진 듯했다. 공연 며칠 전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tvN)에 그가 출연하면서 이 무대의 주목도가 더욱 올라가기도 했다. 다만 이 공연은 오직 그에게만 방점을 찍기에는 아쉽다. 그를 포함하여 눈길을 줄 요소가 많다. 공연은 앙상블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1부와 발레를 중심으로 하는 2부로 나뉜다. 막이 오르자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오은철의 작품 ‘러브레터’를 8명 구성의 앙상블이 연주하며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의 제목에 피아노가 들어가는 이유는 피아니스트인 오은철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기 때문. 두 시간 정도 이어지는 공연의 17곡은 모두 그가 작곡한 작품이며, 2부까지 모든 곡의 연주를 라이브로 소화했다. 그가 드라마·영화·크로스오버 장르의 음악을 주로 작곡하는 만큼, 앙상블이 연주하는 곡만으로도 앞으로 펼쳐질 발레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1부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계절. 첫 두 곡으로는 봄날의 분위기를, 그리고 파드되(이은수·최주미)와 함께한 ‘사랑의 바다’는 여름을 표현했다. 이어지는 네 곡은 쓸쓸한 가을과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겨울이 그려졌다. 앙상블 연주 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끌어낸 곡은 ‘조커’로 다이내믹과 음역을 넓게 사용하여 음산한 분위기를 주는 음악이었다. 1부의 마지막 작품인 오필리아의 독무(안우재)는 웅장하고 힘 있는 음악과 비통하고 역동적인 안무가 특히 잘 어울렸다.
2부는 발레가 중심인 단막 드라마가 펼쳐졌다. 심각한 두통을 수반하는 지병을 가진 불운한 발레 무용수의 삶을 전민철이 연기했다. 극중 무용 전공생 사이에서 가장 특출났던 이 무용수는 수준 높은 유명 발레단의 입단 오디션 기회를 얻지만, 오디션 중 느낀 두통으로 실수를 반복하고, 결국 발레단의 활동도 포기하게 된다. 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무용수는 행사장의 피에로로 발레를 이어가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삶에 슬픔을 느낀다.
좌절을 전환해 주는 것은 버려진 곰인형(최주미)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자신을 투영하는 두 가지 사물을 통해 무용수는 극복할 수 없는 불가능을 추구하는 대신, 주어진 현실에서 어떻게 자아를 찾을지 결심하는 듯하다.
이상을 추구하지 못하고 현실에 수긍하는 비극적인 내용이라 여겨질 수 있으나, 비유가 아닌 그 자체를 바라보면, 이는 현실의 여러 발레 전공생의 삶과 맞닿아 있다. 입단이 좌절된 무용수의 삶은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딘가로 이어지기에,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일은 꼭 응원받아야 하는 길이다. 연출·안무를 포함해 대본도 맡은 안무가 김용걸은 공연을 통해 학생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다만 앞으로 더 큰 무대에 오르게 될 전민철이 이를 연기한다는 점은 인지의 작은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당사자와 관계가 없는 새로운 인물이 되는 것이 ‘연기’이지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쏟아지고 있는 지금, 이 내용이 그에게 잘 맞는 옷인지는 의문이 든다. 내용과 별개로 전민철의 무대는 관객의 환호를 받았으며, 완벽에 가까운 피루엣은 피에로의 삶이 전환되는 내용과 잘 어울렸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과도 잘 맞아, 음악과 안무가 충돌하는 지점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아트앤아티스트
TRADITIONAL
아정컴퍼니 ‘님이 침묵한 까닭?’
육자배기와 테이크 식스! 시를 읊다
2월 7~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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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학(연출)/김준수·정보권·유태평양·이성현·김수인·서의철·정윤형(소리꾼)/김명준(소리북), 오은수(가야금), 소윤선(해금), 남정훈(피리), 김동인(대금), 남성훈(아쟁)
아정컴퍼니의 ‘님이 침묵한 까닭?’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이다.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동시대 관객과 호흡하는 새로운 공연을 만나는 기회이다.
음악은 ‘서의철가단’이 맡았다. 소개에 의하면, ‘가단(歌壇)’이란 음악 전문가 집단으로 문학과 풍류를 이끌며 시대를 반영하는 음악을 만들었던 일종의 밴드였다고 한다. 이번 공연은 남도 선소리, 곧 육자배기를 바탕으로 젊은 소리꾼 7명과 연주자 6명이 함께 한다. 육자배기는 여섯 박 장단으로 이루어진 가락으로, 여럿이 돌아가며 즉흥으로 노래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박자를 가지고 자유롭게 노는 음악이라 하면 재즈 밴드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Take Five(테이크 파이브)’가 생각난다. 그렇다면 ‘육자’배기의 ‘여섯’ 박자를 가지고 노는 즉흥 밴드 연주 공연은 ‘테이크 식스’라고나 할까?
이번에 이들이 들려준 노래는 근현대 시인들의 시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수영의 ‘폭포’,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언덕에 바로 누워’, 정지용의 ‘향수’, 윤동주의 ‘별 헤는 밤’, 김소월의 ‘초혼’ ‘엄마야 누나야’ ‘못 잊어’ ‘진달래꽃’, 오상순의 ‘꿈’이 그것이다. 7인의 소리꾼은 각각의 시인들 시를 맡아 부른다. 그리고 국악기들이 소리꾼의 뒤를 따라 후주 연주를 한다. “꿈이로-구나 헤”, “산이로-구나 헤”의 후렴구로 다음 시를 연결한다. 육자배기, 자진육자배기, 삼산 반락, 개고리 타령으로 넘어가면서 빠르기의 완급도 조절한다. 현대어 시를 육자배기 가락으로 새롭게 해석한 공연이다.
현대시와 육자배기, 잘 어울릴까? 전라도 옛말이 아니라, 현대어의 시로 구성된 사설을 따라가며 들었던 의문이다. 그러나 장단에 따라 네다섯 번씩 시가 반복되고, 차츰 시가 창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향수’는 가곡으로도 이미 유명한 시이지만 판소리 사설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사철 발 벗은 아내, 졸음에 겨운 늙은 아버지 등 형용사와 동사로 묘사되는 이미지들이 소리의 결을 따라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적벽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군사들의 설움 타령이 겹쳐 떠올랐다. 이번 공연은 소리의 기교뿐만 아니라 언어를 실험한다는 측면에서의 의의도 컸다.
공연의 후반부는 빠른 장단으로 넘어가고, 개고리 타령으로 넘어가서는 소리꾼들이 모두 덩실덩실 춤을 춘다. “님은 갔습니다”(한용운) “영변약산 진달래꽃”(김소월)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오상순). 사설은 슬프지만 노래는 빠르고 힘차다. 슬픔의 고개를 다 넘은 듯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님을 정말 다 떠나보내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이윽고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 뒤야 누가 알리 어질더질!” 판소리의 결구로 공연을 끝낸다. 화선지 한 장 깐 듯 정갈한 무대, 가죽신 벗어놓고 무대에 오른 젊은 소리꾼들, 소박하게 통일한 의상, 그리고 소리꾼들과 연주자들을 물 흐르듯 채우고 비우는 무대 구성력을 통해 차분하게 시에 집중하게 했다.
흰 두루마기와 갓 쓴 ‘풍류남아’ 젊은 소리꾼들의 모습이, 1930년대 프록코트와 실크해트 차림의 모던보이들처럼 댄디하게 느껴졌다. 남성 시인들의 시와 젊은 남성 소리꾼들의 노래, 절묘하다.
글 김옥란(연극 평론가)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