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4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첼리스트 이강호
음악이 주는 위안과 감동
글 이강호(1971~) 예일대·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펜데레츠키 콩쿠르·포퍼 콩쿠르에서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2012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2021년 9월부터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신도시의 즐거운 농부
#슈만 #즐거운 농부 #악기와의 첫 만남
쓰쓰미 쓰요시(첼로)
감상 포인트 스즈키 교본 스타일로 연주한 쓰쓰미 쓰요시의 녹음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했습니다. 신축 아파트에서 첫 밤을 보내고, 7층 창문을 통해 보았던 아침 풍경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어머니와 함께 아래층에 인사하러 간 날, 저보다 한 살 많은 여학생이 첼로를 배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주를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요청에 그 학생은 마지못해 사토 첼로 교본(스즈키 첼로 교본의 전신)의 ‘즐거운 농부’를 연주했습니다. 악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맑은 소리로 힘차게 연주를 이어나갔습니다. 지금도 그 흥겹고 즐거운 멜로디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첼로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제게 아랫집 첼로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농부’로 저와 첼로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스즈키 교본 및 많은 어린이 음악 교재에 등장하는 ‘즐거운 농부’는 슈만의 피아노 독주곡집 ‘어린이를 위한 앨범’ Op.68 중 10번으로, 제가 처음 접한 곡은 현악기를 위해 편곡된 버전입니다. 첼로를 알게 해준 아랫집 학생은 이후 저의 예원학교 1년 선배가 되었고, 파리고등음악원을 거쳐 국내에서 첼리스트로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다시 해외로 나가기 전까지 저와 함께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첼로를 처음 만난 그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재건축이 곧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 말이죠.(웃음)
흙에서 흙으로
#블로흐 #‘셀로모-히브리 랩소디’ #첼로는 나의 운명
레너드 번스타인/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 (협연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감상 포인트 거칠고 격정적이지만, 감정에 충실한 로스트로포비치의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연주
예원학교 2학년 때,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크로스로드 예술과학학교에 조기 유학을 갔습니다. 첼로를 전공했지만, 부모님께서는 제가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하고 미래를 결정하길 바라셨고, 크로스로드에는 뛰어난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서 음악과 학업의 이중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중생활은 대학에서도 계속되어 학기 중에는 경제학도로 학업에 매진했으며, 방학 때는 알도 파리소, 야노스 슈타커, 쓰쓰미 쓰요시 등 대가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해 첼리스트로서의 역량을 키워 나갔습니다. 진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공부는 더 늦은 나이에도 가능하지만, 악기를 다루는 능력은 20대 중반을 넘으면 키우기 힘들다”는 알도 파리소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선생님이 계신 예일대 대학원에 첼로 전공으로 진학했습니다.
예일에서 배운 곡 중 하나가 바로 에르네스트 블로흐(1880~1959)의 ‘셀로모-히브리 랩소디’입니다. 블로흐는 스위스 태생이지만, 벨기에·독일·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이주해 후학을 양성하며 작곡가로 활동한 유대인 음악가입니다. ‘셀로모’는 그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 첼로와 1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통해 구약 전도서에 등장하는 솔로몬을 묘사합니다.
저는 이 곡을 이해하기 위해 전도서를 묵상했습니다. 전도서의 솔로몬은 누구보다 지혜롭고, 큰 부와 명예를 누렸음에도 ‘해 아래 아무런 새것이 없으며, 이 모든 것이 다 헛되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이야기합니다. 이 헛된 모든 것 가운데 ‘그러므로 내 소견에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이는 그의 분복이라’(전도서 3장 22절) 이 구절을 읽으며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게 사회적, 경제적인 책임이나 제약이 없다면 무엇이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가?” 결국, 첼로가 저의 분복(分福)이었습니다. 선배들은 피에르 푸르니에의 귀족적이며 품격 있는 연주를 추천하지만, 제게는 거칠고 격정적이지만 감정에 충실한 로스트로포비치의 ‘인간적인 셀로모’가 가장 와닿습니다. 솔로몬도 우리도, 결국 모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이니까요.
영원한 백조의 노래
#R. 슈트라우스 #네 개의 마지막 노래 중 ‘잠자리에 들 때’ #음악이 주는 감동
쿠르트 마주어/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협연 제시 노먼)
감상 포인트 젊은 제시 노먼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 인생의 마지막을 읊는 노장의 연주
R.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대학원 시절 처음 접한 이후로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은 곡입니다. 작품은 슈트라우스가 마지막으로 쓴 곡으로, 아이헨도르프와 헤세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가사를 붙였습니다.
대학원 시절, 저는 소프라노 제시 노먼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함께 녹음한 음반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제시 노먼의 음성은 아름답고, 웅장했으며 마치 스위스 밀크초콜릿을 귀로 먹는 듯 부드러웠지만, 늘 세 번째 곡의 바이올린 솔로 파트가 아름다운 리코딩과 어울리지 않는 옥에 티로 느껴졌습니다. 매끈하고 완벽한 노먼의 목소리와 달리 음정도 불안하고, 비브라토도 필요 이상으로 빠르며 소리도 정제되지 않은 올드 스쿨의 느낌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제시 노먼의 인터뷰 영상
십여 년이 지난 후, 제시 노먼의 인터뷰 영상으로 이 음반의 바이올린 솔로에 관한 에피소드를 알게 되었습니다. 녹음 전, 악장인 게르하르트 보스는 제시 노먼을 찾아가 3악장을 들어봐 달라고 했습니다. 40년 이상 악단을 이끌어 온 악장으로서 마지막 녹음이었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고, 그래서 한참 후배인 노먼에게까지 조언을 구했던 것이었죠. 노장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작곡가에 대한 존경, 예술가로서의 겸손함은 노먼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그 감동이 이 명반을 탄생시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이 음악을 다시 들으며 젊었을 때 듣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곤 합니다. 젊은 제시 노먼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음악 인생의 마지막을 읊는 노장의 연주가 어우러져 슈트라우스의 ‘백조의 노래’(예술가의 마지막 작품을 의미)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음을, 이들의 육체는 흙에서 흙으로 돌아갔지만, 예술은 무한의 유산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있음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