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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 가득 담아 든, 서른두 개의 베토벤
20년간 준비해 온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 발매에 담긴 열정
피아니스트 최희연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5년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상식장.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를 막 완수한 30대의 최희연이 ‘올해의 예술상’ 수상한 뒤 소감을 말할 차례였다. “당시 저는 베토벤으로 받은 상이니, 베토벤에게 돌려드려야겠다고 말했었죠. 소나타 전곡(32곡) 녹음을 다짐한 것은 그때부터였어요.”
그 이후 존경하는 음악가들과 함께 베토벤 바이올린·첼로 소나타 전곡, 피아노 3중주 전곡 등 실내악 연주에도 힘썼다. 물론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도 틈틈이 준비해 나갔다. 10년이 흘러 2015년이 되고, 40대 후반에 접어든 최희연은 “육아를 벗어날 수 있게 된 지금이 기회”라는 생각으로, 서울대에 연구년을 신청했다.
그렇게 향한 곳이 베를린이었고, 명반 탄생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텔덱스 스튜디오가 있었다. 처음부터 전곡 녹음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2018년 발매된 첫 음반이 기대하지 않았던 호평을 받아 전곡 녹음이 확정됐다. 이 기나긴 여정을 거쳐 드디어 2025년. 최희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 ‘Testament(유산)’(9CDs)가 세상과 만난다.
눈빛만으로도 통하는 녹음 현장
최희연은 현재 미국에서 교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999년부터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했던 그는 재작년, 피바디 음악원 교수직을 수락하며 또 한 번 새로운 음악적 영감을 받는 중이다.
“학교의 운영은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지만, 추구하는 음악 자체는 매우 보수적입니다. 전통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강하게 느껴지는데, 어쩌면 유럽에서 넘어온 클래식 문화를 더 올곧게 고수하려는 향수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는 교수진은 러시아·유대계 분들이 많은데, 이들의 음악적 내공과 헌신적 자세를 보며 감탄하게 됩니다.”
물론 직함이 주는 권위가 한 음악가의 역량을 설명하는 빠른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최희연의 전곡 음반은 그 완성도가 주는 높은 만족도에 주목할 만하다. 베토벤의 어법에 완벽히 자리를 잡고, 음 사이를 불같은 열정으로 오가는 이 피아니스트의 손끝은 서늘하리만큼 날카롭다. 이 정도의 역동적 감각을 전곡에 담아낼 수 있는 국내 중견 연주자를 꼽자면 한 손을 넘기 어렵다.
텔덱스 스튜디오에서의 작업도 음반 완성도를 높였다. 관록 넘치는 프로듀서 마틴 자우어,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니의 전속 조율사 토마스 휩시가 음반 제작에 함께 했다. “마틴 자우어는 칭찬에 인색한 프로듀서였어요. 오히려 그래서 더 편안했고,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적 흐름을 중요하게 여겼고, 편집을 최소화하는 것이 프로듀서로서의 ‘도덕’이라고 말하더군요.”
음반에는 뛰어난 연주자만큼이나, 좋은 프로듀서가 필요하다. 프로듀서는 연주자에게 거울 같아서, 어떤 피드백을 하느냐에 따라 심리적인 부분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번은 제가 한 부분이 해결되지 않아 폭발할 지경에 이른 적이 있어요. 화난 마음을 꾹꾹 참으며 연주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를 알아채곤 ‘화가 났나 봐요. 자신을 조금 너그럽게 대해주세요. 생각하는 것만큼 나쁘지 않아요’라고 말하더군요. 음악에 깊이 공감하며 피드백을 주기 때문에, 거의 같이 연주를 하는 것 같이 느껴졌어요.” 이번 음반에선 특별히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녹음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감상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빈의 음색을 품고 있는 이 피아노는 피아니스트의 손끝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토마스 휩시가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사용되는 뵈젠도르퍼를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황금같이 고상하고도 찬란한 음색에 목소리처럼 지속되는 울림, 웅장함 등 빈 고전 음악에서 요구되는 것을 다 갖추고 있었죠. 녹음하면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똑같은 소리에도 트집을 잡게 될 만큼 민감해지는데, 토마스 휩시처럼 경험 많은 조율사들은 연주자의 그런 심리까지 모두 알아줍니다. 연주자의 심리까지도 튜닝하는 거죠.”
평생의 필연, 나와 베토벤
“베토벤은 서른두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남겼지만, 사실 소나타 형식을 매우 답답해했죠. 그는 전생에 걸쳐 형식을 뒤흔들어 소나타가 가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증명했습니다.”
작곡가가 한평생 동안 여러 피아노 소나타를 써 내려갔듯, 연주자도 해당 곡과 평생의 필연을 맺는다. 최희연에게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힘든 가족에게 힘을 주는 음악이었고, 독일 유학을 통해서 수없이 연구하며 해체한 끝에 달콤함을 맛본 음악이었다. 전곡 연주에 도전하면서는 ‘베토벤 언어’를 이해하고자 머리맡에 늘 베토벤의 편지를 두고 살았다.
“편지를 읽으며 한 인간으로서 연민의 정도 많이 느꼈어요. 악보 분석과 인간적 교감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며 10여 년을 지냈습니다. 처음 전곡 연주를 할 때 제 뱃속에 생겼던 아이가, 이번 녹음 기간에는 청소년기를 거쳐 갔어요. 청소년의 불안과 방황을 피부로 느끼면서 베토벤 음악이 담은 치유의 메시지에도 주목하게 됐죠. 세계적으로 국가 간의 갈등이 심화하는 오늘날, 이 음악의 인류 화합 메시지가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많이 사랑했고, 뿌듯한 적도 있었지만, 반성과 후회도 없지 않다. 그래도 세상에 내보낼 수 있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음반을 선보인다. “자녀를 출가시킬 때 이런 소감이 아닐까 싶다”며 “음반이 오래 사랑받길 바란다”는 마음을 전한 최희연은, 오는 4월 음반 발매 기념 독주회로 관객을 찾을 예정이다.
“21번 ‘발트슈타인’으로 시작해 세 개의 마지막 소나타를 연주합니다. ‘발트슈타인’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가는 긴 여정을 마음에 두고 선택했고, 베토벤이 빈으로 유학을 떠나며 쓴 작품이라 그의 ‘시작’을 회고하는 의미도 담았습니다. 후기 소나타 세 곡(30~32번)은 베토벤의 유언과 같은 곡들이죠. 지금의 제게 가장 친근한 곡을 골랐습니다. 무대에서 연주할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과 함께요.”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스테이지원
최희연(1968~) 6세에 인천시향과 협연하며 데뷔, 고중원 교수를 사사했고, 18세에 도독하여 베를린 음대·인디애나 음대를 졸업했다. 2002년부터 4년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로 전석 매진을 기록한 바 있다. 1999년부터 서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2023년부터 피바디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최희연 피아노 독주회(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 발매 기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30·31·32번
4월 2일 오후 7시 30분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4월 1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