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5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1 지휘자·피아니스트 김대진 2 피아니스트 이경숙 3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4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5 베이스 연광철 6 비올리스트 최은식 7 작곡가 이영조 8 첼리스트 조영창 9 바리톤 박수길 10 메조소프라노 강화자 11 피아니스트 한옥수 12 바이올리니스트 이성주 13 소프라노 박정원 14 첼리스트 이강호 15 피아니스트 주희성
피아니스트 주희성
시간을 초월한 음악의 아름다움
글 주희성(1969~) 서울대 졸업 후, 도미하여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사 및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취득했으며, 일찍이 동아음악콩쿠르, 한국일보콩쿠르 등에 입상했다. 포아피아노연구회 이사장 및 예술감독, ‘민상렬홀 콘서트++’의 음악감독,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쇼팽의 선율 속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나를 음악적으로 성장시킨 곡
발터 벨러/핀란드 방송교향악단(협연 그리고리 소콜로프)
감상 포인트 특유의 감성과 서정미를 느낄 수 있는 곡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름답고 독창적인 매력을 지닌 곡입니다. 이 곡은 제가 예원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 인천시립교향악단 주최의 청소년 음악콩쿠르에서 입상한 기념으로 처음 무대에서 연주한 곡이기도 합니다.
당시 스승이신 한옥수 교수님의 추천으로 이 곡의 전 악장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어린 학생이 규모 있는 작품을 연주하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처음 건네주셨을 때, ‘과연 내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걱정부터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선생님께 혹독하게 교육받으며 힘들게 연습했던 곡인 만큼, 지금도 이 작품의 특정 부분을 들으면 레슨실에 흐르던 공기와 묵직한 피아노 소리가 떠오르곤 합니다.
덕분에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제 음악 인생에서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곡을 배우는 동안 쇼팽 특유의 감성과 서정미를 느낄 수 있었고, 피아노 솔로 파트의 강렬한 도입부 뒤에 이어지는 f단조의 음울하면서도 고독한 선율, 스며들 듯 퍼지는 화성 진행 등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제가 이 곡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연주했을지 의문스럽지만, 분명한 것은 이 곡이 제 음악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저를 깊은 향수에 젖게 만드는 매우 특별하고 소중한 작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없는 배움의 기쁨
#라벨 #라 발스 #꾸준히 연주하는 애정 어린 곡
신박듀오(피아노)
감상 포인트 다채로운 색채와 현란한 기교, 왈츠 특유의 품격까지 담아낸 작품
요즘은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 독주 혹은 듀오 버전으로 작곡된 라벨의 ‘라 발스’를 종종 연주하면서 비교적 자주 접할 수 있는 곡이 되었지만, 제가 유학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이 곡은 무척 생소한 작품이었습니다. 1993년, 보스턴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아티스트 디플로마 과정을 밟고 있던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연주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제 막 서툰 유학 생활을 시작한 저에게 그 연주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채로운 색채와 현란한 기교 속에 왈츠 특유의 품격까지 담아낸 작품을 처음 접하고 ‘이 곡을 꼭 배워야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변화경 교수님께서 ‘라 발스’를 과제곡으로 주셨는데, 지금도 그 순간의 설렘이 생생합니다. ‘라 발스’는 그동안 공부했던 곡들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처음엔 다소 생소했지만, 그만큼 배우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도 컸습니다. 저는 작품의 오케스트라 총보를 보며 ‘피아노에서 더 다양하게 소리를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하고 고민하곤 했습니다. 연필로 음표 하나하나를 적고, 연구하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이후 이 곡은 저의 콩쿠르 레퍼토리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독주회에서 꾸준히 연주하는 애정 어린 작품입니다.
젊었을 때 연주했던 ‘라 발스’와 나이가 들어 연주하는 지금의 ‘라 발스’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음악의 미묘한 아름다움이 새롭게 다가오고, 예전에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여유가 생기며 리듬과 흐름을 더 유연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시 음악은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케스트라 버전뿐 아니라, 피아노 연주로도 라벨의 가슴 벅찬 이 작품을 즐길 수 있음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듣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피어난 강렬한 예술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3악장 #제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
빌헬름 켐프(피아노)
감상 포인트 절망 속에서도 예술혼의 꽃을 피운 베토벤의 생명에 대한 갈망
살다 보면 특별히 마음에 꽂히는 곡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 곡에 푹 빠져 하루종일 반복해서 듣기도 하지요. 슈만의 환상소곡집 Op.12나 피아노 4중주 Op.47 3악장,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그리고 멘델스존의 ‘무언가’ 등이 그러했습니다. 요즘에는 베토벤 소나타 17번 ‘템페스트’의 3악장이 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습니다.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불리는 편지를 써서 동생들에게 보낼 만큼 절망적인 시기에 이 곡을 썼습니다. 청력을 잃어가며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의 편지에는 예술로 승화된 생명에 대한 갈망이 절실히 드러나 있는데, 음악을 향한 그의 위대한 의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템페스트’ 역시 고통과 죽음의 분위기를 지닌 어두운 d단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3악장에서는 오히려 끊임없는 생명에 대한 갈망이 느껴집니다. 극적인 전개로 인생의 고통을 상상하게 하는 1악장을 지나면, 초월한 듯한 2악장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고, 3악장에 이르면 파도치듯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통해 예술과 생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듯하여,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절실함이 느껴지곤 합니다. 마지막에 사그라지는 한 음까지 모두 듣고 난 뒤에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력에 숭고한 마음마저 갖게 되지요.
베토벤이 절망 속에서도 예술혼의 꽃을 피워 후대에 위대한 작품들을 선물로 남겨놓았듯이, 가치 있는 자기 발전을 위해 아름다운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제자들에게 이 곡을 선물로 들려주고 싶습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주희성·노유리 피아노 듀오 리사이틀
4월 13일 오후 2시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네 손을 위한 편곡) 3악장,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1·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