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예술을 더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5월 1일 9:00 오전

SPECIAL ISSUE

 

[고전] 예술에

[현대] 예술을 더하다

총괄 이의정 기자

 

마법같은 창의성을 만날 시간

 

 

photograph DANCE 마르코스 모라우

classical music VIDEO ART 윌리엄 켄트리지

opera THEATRE 안헬리카 리델

baroque music DRAMATURGY 엘로이즈 가이야르

korean culture OPERA 메리 핀스터러

 


 

INTRODUCTION

좋은 인용이 좋은 창작을 만든다

 

창작의 첫 단계가 자료 조사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무(無)에서 유(有)라는 말은 이미 옛 천재들만 가능한, 또는 그 천재들만 가능하다고 ‘조작’해 낸 문구이니 말이다. 아주 예부터 창작은 사실 유(有)에서 또 다른 유(有)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역사 속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을 분석할 때면 ‘당대의 기법’ ‘동시대 작품 인용’부터 찾아 서술하는 걸 떠올려 보자.

다만 특집의 도입으로 꺼내는 주제가 ‘창작의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연역의 물음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귀납적으로, 창의적인 작품이 여럿 찾아오길래 이리저리 살펴보았더니, 창작자 모두가 기성품을 사용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그렇구나!’라고 납득하는 문장에 가깝다.

이들 모두가 자신의 장르를 넘어 다른 장르의 예술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같은 장르 속 양식을 흡수하는 능력도 대단하나, 장르와 시대를 불문하고 이를 흡수하여 본인의 영역에 현대의 언어로 꺼내놓는 능력이야말로 눈이 둥그레지는 힘이지 않은가. 마법 같은 창의력이다. 이 특집에는 서로 다른 다섯 창작자의 인터뷰를 담았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독자분들 역시 ‘그렇구나!’라는 가설 확인의 시간을 겪어보길 바란다.

다섯 창작자, 그리고 그들이 참여하는 5월의 여러 공연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붙인다. 우선 스페인 출신 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는 사진작가 루벤 아파나도르의 두 권의 사진집에서 영감을 얻어, 멈춰있는 사진을 움직이는 현대무용으로 바꾸었다. 공연에는 스페인 국립 플라멩코 발레단이 함께한다. 다음으론 애니메이션, 판화 등으로 이름을 알린 아티스트 윌리엄 켄트리지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라이브 연주에 영상을 더하는데, 그가 가진 경험이 쇼스타코비치 삶의 맥락과 결합되어 감상자에게 한걸음 더 나아간 감상을 쥐여준다.

연출가 안헬리카 리델은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실존 인물인 투우사 후안 벨몬테의 이야기를 더했다. 연극의 이름이 무척 긴데, 단어의 병치가 시적인 인상을 주어 “철학적 사색이 가득할 것”이라는 설명을 이해시킨다. 엘로이즈 가이야르는 앙상블 아마릴리스의 예술감독으로, 바로크 음악 작품을 엮어 새로운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마지막으로 메리 핀스터러는 오페라가 가진 다양한 층위를 한 꺼풀씩 이해하며 경력을 쌓아온 호주의 베테랑 작곡가로, 작품의 세계 초연을 앞두고 있다.

이의정

 


 

01. photograph DANCE

 

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

춤은 영감의 총합이다

정지된 사진에서, 동적인 춤을 길어 올리다

 

마르코스 모라우(1982~) 스페인 태생으로, 스페인 무용상, 프랑스 문화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2004년 무용컴퍼니 라 베로날을 창단했고, 2024년부터 베를린 국립 발레, 밀라노 트리엔날레 극장 협력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아파나도르’는 마르코스 모라우의 안무작이자, 콜롬비아 출신 사진가 루벤 아파나도르(1959~)의 이름이다. 모라우는 아파나도르의 사진집 ‘천 번의 키스’(2009)와 ‘집시 엔젤’(2014)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었다.

정지된 순간을 빚은 사진가

두 권의 사진집에는 플라멩코 무용수들의 모습이 담겼다. 진실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담는 리얼리즘이 사진예술만의 절대 미학이라 하지만, 무용수들의 모습에선 아파나도르만의 마술 같은 연출력이 돋보인다.

총천연색의 세상이라 해도 아파나도르의 렌즈는 사물과 사람으로 모든 색을 제거하거나 뽑아내어, 오직 흑백의 세상으로 빚어낸다. 검은 것은 더욱 검고, 밝은색은 대조되어 더욱 눈부시다. 흑백이 일구는 그만의 대조적 미학이다. 두 사진집 속의 플라멩코 무용수들은 검정색으로 강렬하고, 백색으로 치열하게 눈부시다.

적막한 역동성도 아파나도르의 사진 미학 중 하나다. 사진집 ‘천 번의 키스’나 ‘집시 엔젤’의 무용수뿐만 아니라, 아파나도르의 뷰파인더 앞에 선 모든 이들은 역동적인 포즈를 취한다. 설령 정지된 정적인 육체라도, 몸의 기운을 얼굴로 모아 역동적인 표정을 만든다. 눈썹은 심하게 뒤틀리고, 동공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흘러가는 움직임이 아닌, 정지의 순간을 담아낸 그의 사진은 이처럼 조용한 외침과 적막한 역동을 담고 있다.

모라우가 ‘아파나도르’를 초연한 것은 2023년 12월 1일, 스페인 세비야의 마에스트란사 극장에서였다. 이후 2024년 스페인 공연예술의 성지로 통용되는 리세우 극장에서 스페인 국립 플라멩코 무용단과 함께 하며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랐다. 스페인 출신의 안무가는 콜롬비아 출신 사진가의 미장센을 무대 언어로 옮겼다. 정지된 시각적 언어(사진)가 동적인 시간적 언어(무용)로 변한 순간이었다. 사진집과 아파나도르의 사진미학을 결정짓는 흑백의 대비감은 모라우의 무대에서도 조명(빛)에 의한 강렬한 흑백감으로 작용했다.

정지된 순간을 춤추게 한 안무가

스페인 국립 플라멩코 발레단 ‘아파나도르’ ©Merche Burgos

아파나도르-모라우의 작업은 사진으로나 무용으로나 플라멩코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들을 느끼게 한다. 무용수들이 지닌 신체나 성정체성을 해체해 새로운 의미로 다가가는 플라멩코 안무가 사벨 바예스타(1969~)나 로시오 몰리나(1984~)와 달리, 아파나도르-모라우는 시각적인 의미에서 플라멩코를 해체하고 재구축한다. 하여 플라멩코라고 하면 떠오르는 붉은색이 아니라, 흑(그림자)과 백(빛)으로만 독보적인 순간을 주조하는 아파나도르의 시선과 모라우의 눈빛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모라우는 아파나도르가 “실제 인물에 사진적 연출을 불어넣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능력”과 “빛과 그림자의 아름다움에서 탄생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법”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무용으로 태어난 ‘아파나도르’는 단순히 사진집 속의 이미지들을 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포착한 안무가의 시선이 담겼고, 나아가 정지된 사진이 담아내지 못한 운동-흐름-움직임의 시간을 담아낸 작품이다.

2024년 스페인에서 ‘아파나도르’를 관람한 크리스티아 드 루카스(무용평론)는 ‘바흐트랙’에 이렇게 남겼다. “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사진 촬영을 공부했던 안무가가 만든 이 작품은 시각적인 요소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파나도르의 사진에서 직접 추출한 이미지들은 무대 위에서도 사진에서처럼 강렬한 힘을 유지하고, 여기에 모라우는 자신만의 예술적 세계를 더한다.”

다양한 영감이 하나로 뭉치다

영감을 준 사진집 ‘집시 엔젤’(2009)과 ‘천 번의 키스’(2014)

모라우는 2004년 무용단 ‘라 베로날’을 창단해 춤의 집을 본격적으로 지어가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그의 대표작은 이들과 만든 춤의 부력(浮力)으로 나아가고 있다. 꾸준한 내한의 시간도 가졌다. 라 베로날과 내한해 2013년 ‘숏컷-세 도시 이야기’와 2017년에는 ‘죽은 새들’을 선보였다. 2019년에는 단독 안무가로 국립현대무용단과 협업해 만든 ‘쌍쌍’을 올렸다.

모라우는 무용계에서 흥미로운 인물이다. 자신에 대해 “춤추는 사람도,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수년간 무용을 공부하고 안무의 영역으로 나간 이들과 다르다. 무용 공부는 아카데미 안무과정에서 1년간 수업을 들은 게 전부다. 무용과 안무에 대한 그의 시작점은 “스페인 리듬체조 챔피언이던 사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에 모라우는 미술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어릴 적부터 일러스트레이션과 드로잉, 그림을 매우 좋아했고, 그림과 드로잉을 통해 창작이나 걸 처음 해보았습니다. 드로잉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는 게 아니라 창작자의 해석을 보여주는 매체란 점에서, 제겐 무용과 유사하게 느껴집니다.”

그가 무용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의 반대는 심했지만, “바르셀로나의 공연장에서 5년간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진정한 무용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윌리엄 포사이드의 공연을 다섯 번이나 봤고, 로사스 무용단, 피나 바우슈의 공연도 봤어요. 그러면서 관객의 반응도 유심히 볼 수 있었죠. 그들이 소리를 지르고, 울고, 일어서고, 공연 중간에 이야기하는 모습까지 다 보죠. 저의 춤은 이런 이들과 반드시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모라우는 ‘아파나도르’처럼 사진은 물론 영화, 미술 등을 그러모으는 장르적 야금술과 이를 토대로 시대에 없는 춤을 빚어내는 연금술로 그만의 작품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하나의 춤이지만 여러 장르로부터 가져온 감각을 덧붙인다. “다루고자 하는 모든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춤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영감은 항상 영화, 문학,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얻어요.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부터 데이비드 린치, 스탠리 큐브릭 감독에 대한 향수도 갖고 있죠. 지금 시대의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한 세기가 이룬 예술의 역사를 이해하고 계승하면서도, 미래를 내다보고 새로운 시각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파나도르’는 이러한 영감의 총합이다. ‘바흐트랙’도 “이 공연을 위한 혼합의 전반적인 효과는 강렬하다”라며 다음과 같은 후기를 남겼다. “일련의 플라멩코 공연이라는 전형적인 형식을 모두 벗어난 미묘한 극적 기법으로 감싸져 있다. 오히려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스페인에 대한 잘 알려진 클리셰, 그리고 스페인의 뿌리 깊은 전통이 묘하게 교차한다. 이처럼 포착하기 어려우면서도 스페인 예술을 대변하는 상징주의는 아마도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매력적인 움직임의 표면에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영혼이 스며들어 있다.”

모라우 3부작을 만날 시간

사진은 ‘찰나’를 기억과 기록에 붙잡아두는 예술이다. 반면 무용을 포함한 공연은 흐르는 시간을 전제한 예술이다. 흘려야 선율도, 드라마도, 움직임도 무대에서 펼쳐진다. 결국 둘은 정반대의 습성을 지녔다.

GS아트센터는 개관 페스티벌을 통해 마르코스 모라우의 춤 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만날 수 없는 개념과 생각들이 모라우의 신체-언어를 교각 삼아 만나는 작품들로 라인업을 구성했다. “무용은 미묘하고 추상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텍스트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합니다.”

라 베로날 컴퍼니가 선보일 ‘파시오나리아’는 단어에 담긴 이중적 의미를 창작의 지렛대로 삼았다. 라틴어로 고통과 수난을 뜻하는 ‘파시오나리아’는 스페인어로 ‘열정의 꽃’을 뜻한다.

마지막 작품인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도 죽음의 이중성을 곱씹어보게 한다. 부자든 걸인이든 죽음이란 평등해지는 상황임에 주목해 모두 함께 마지막 날 죽음의 춤을 추는 상상을 펼쳐 보이는 작품이다. 마이크와 영상 등의 현대적인 도구가 전통적 제례에 사용되는 오브제나 몸짓과 만난다.

송현민 편집장 사진 GS문화재단

 

 

PERFORMANCE INFORMATION

 

스페인 국립 플라멩코 발레단 ‘아파나도르’

4월 30일·5월 1일 GS아트센터

 

라 베로날 컴퍼니 ‘죽음의 무도: 내일은 물음이다’

5월 17·18일 GS아트센터

 

라 베로날 컴퍼니 ‘파시오나리아’

5월 16~18일 GS아트센터

 


 

02. classical Music VIDEO ART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

음악의 뿌리를 되살리다

영상과 함께하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의 미학

 

윌리엄 켄트리지(1955~)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작품은 카셀 도큐멘타·뉴욕 현대미술간·빈 알베르티나 등에 전시 됐으며,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서도 역량을 선보였다. 모차르트 ‘마술피리’, 베르크 ‘보체크’ ‘룰루’, 쇼스타코비치 ‘코’ 등을 연출하며 화제를 모았고, 예술과 철학 분야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교토상을 받았으며, 런던대·예일대·케이프타운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아프리카 출신의 작가, 윌리엄 켄트리지는 ‘전방위 예술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목탄 드로잉과 사진 한 컷 한 컷을 이어 만든 듯한 아날로그적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기초적 단위긴 하지만, 그의 미학 세계는 조각, 음악, 연극, 오페라에까지 확장된다.

켄트리지의 어린 시절 일화는 흥미롭다. 초콜릿을 기대하며 열어본 아버지의 서랍에서, 1960년대 시위를 하다 잔인하게 죽은 사람들의 사진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그의 아버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의 인권 변호사로, 아파르트헤이트(1948년 법률로 공식화됐던 인종 분리 정책) 폐지를 위해 힘썼던 넬슨 만델라를 변호한 이였다. 켄트리지의 작품에는 자연스럽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와 상황이 주요 메시지로 자리 잡았고, 이를 철학과 미술, 음악과 영상으로 풀어내며 인정받았다.

억압의 역사에 대한 경험 때문일까, 구소련에 대한 켄트리지만의 그림은 선명하다. 이는 스탈린에 의해 혁명과 독재가 이어지던 시절, 작곡가로 활동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연관된다. 오는 5월, GS아트센터 ‘예술가들’ 시리즈의 일환으로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이 한국을 찾는다. 쇼스타코비치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여러 작품 중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이 무대에 오를 예정.

이 작품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 연주를 바탕으로 한다. 이번 공연은 로더릭 콕스가 지휘하고,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이들의 연주 뒤로 윌리엄 켄트리지가 만든 영상이 상영되는 형태다. 얼핏 봐서는 무대의 모습을 가늠하기 힘든 이 특별한 공연을 이해하고자 윌리엄 켄트리지에게 직접 공연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세계적인 명성으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머물고 있었다. 질문지를 보낸 지 약 2주 후, “서늘한 남아프리카공화국 켄트리지의 스튜디오에서” 그의 답변이 돌아왔다.

이미지가 떠오르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 ©Stella Olivie

“쇼스타코비치가 대학 시절, 무성 영화에 맞춰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아마,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함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쇼스타코비치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이처럼 그가 영화 음악과 깊이 연관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쇼스타코비치의 관현악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치 무언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2022년 초연된 ‘쇼스타코비치 10: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은 루체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위촉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뉴욕 필하모닉,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재연됐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활용한 그의 작업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초연된 쇼스타코비치의 ‘코’에서 연출을 맡으며 러시아의 독재 시대를 그려냈다.

그의 작품에는 독재자들의 얼굴이 콜라주의 형태로 등장한다. 레닌·스탈린 등의 얼굴과 사람이 직접 들어가 연기하는 실물 크기의 인형, 상상 속의 소련 박물관 모형을 보여주는 듯한 독특한 예술 양식이 영상에 결합하여 등장한다.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선 러시아 혁명 역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해 보인다.

“제일 많이 사용된 이미지는 정치적 중심인물, 레닌이죠.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트로츠키와 새로운 독재자로 유명한 스탈린 등입니다. 그 외에 소련 시절에 있었던 긍정적인 삶의 모습들도 영상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도 어쩌면, ‘혁명 이후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이 남아있는 시절의 모습들입니다.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던 때’이기도 하죠.”

작품에 담아낸 러시아 혁명의 역사

쇼스타코비치의 여러 작품 중, 교향곡 10번은 그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평생을 스탈린의 치하 아래서 불안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던 쇼스타코비치의 삶에, 1953년 들려온 스탈린의 사망 소식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 쇼스타코비치는 전에 작곡한 교향곡 9번이 스탈린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인민의 적’ 취급을 받던 때였다. 그는 스탈린이 사망한 바로 그해 12월, 기다렸다는 듯이 교향곡 10번을 발표했다.

바로 이 교향곡에, 켄트리지는 러시아 혁명 40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1917년 혁명 이후, 켄트리지는 각각의 악장에 흐름을 구성했다. 1악장에선 레닌이 죽고, 2악장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시인 마야콥스키. 3악장은 1940년대에 낯선 땅에서 죽은 트로츠키가, 마지막엔 스탈린의 죽음까지…. “그리고, 쇼스타코비치는 이들 중 최후의 생존자죠.” 켄트리지는 말한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그가 살아남은 이후 이 음악이 지금까지도 연주되고 있다는 겁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수록, 우리는 이 작품을 단지 음악으로서만 감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음악이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 보고 싶었어요. 물론, 이 작품이 특정 사건을 묘사하기 위한 표제 음악은 아니었지만, 작곡 당시 작품이 뿌리내리고 있던 현실과의 맥락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그렇다면 작품에 담긴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작품명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을 두고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이라는 문장을 덧붙인 형태다. 작품의 영문명은 ‘Oh To Believe in Another World’다.

“후회에서 비롯된 말이랄까요. 영어에서 ‘Oh’는 일종의 ‘If only(만약에)’라는 의미를 가지죠.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또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처럼 유토피아가 올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희망을 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담긴 거죠. 하지만 이젠 우리는 그 결과를 알고 있어 더 이상 꿈꿀 수 없습니다. 그 후로 20세기 일어난 일들을 되돌아보면 알죠. 그 위대한 이상들이 어떻게 파괴되고, 또 어떻게 이용당했는지를 말이죠.”

작품은 출처를 모두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의 다양한 이미지와 질감이 모인 콜라주 형태다. 그의 콜라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가 필요하다면, 그가 직접 소개한 아프리카 속담을 참고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콜라주에 대한 그의 방식은 철학적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삶 또한 마치 콜라주처럼 파편적인 것들로 이루어져있다는 것. 그래서 콜라주로 다시 그린 형태의 역사는, 오히려 새롭게 해석된 역사에 다다르게 한다.

“콜라주는 오히려 많은 것을 드러냅니다. 조각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형상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주는 즐거움이 있죠. 물론 스튜디오 안에서만 명확하게 드러나는 방식이지만, 이걸 스튜디오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도 적용해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자면, 우리 자신의 존재 또한 그렇습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인상적인 문장 하나, 대화에서 나온 말들, 어쩌면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꿈의 이미지들… 이런 여러 조각이 끊임없이 ‘나’를 만들어내죠. 이 과정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면서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느끼는 것이고요.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서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래서 만약 새로운 정보나 간과되었던 인물이 드러나게 되면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가 쓰일 수 있고요.”

음악과 영상이 함께 하는 방식

여기서 잠깐, 단순한 궁금증을 잠시 해소하고 넘어가 보자. 촬영된 영상을 상영한다면, 실황으로 연주 중인 오케스트라의 연주 속도와 어떻게 타이밍을 맞출 수 있을까? 해석에 따른 템포의 변화가 많은 클래식 음악 연주에서, 지휘자가 영상 속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면 해석에 큰 제약을 받는 셈이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해석하는 음악의 속도를 영상이 따라가야죠. 영상이 음악을 방해하는 일은 없습니다. 같은 지휘자라고 하더라도 공연마다 속도가 다른 걸요.”

이를 위해 공연에는 영상 오퍼레이터가 함께한다. 지휘자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며, 악보에 맞춰 특정 마디에서 영상의 시작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그전까지는 영상이 계속 반복되거나 멈춤 상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60~70개 정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포인트가 영상에 있을 수도 있어요. 지휘자의 지시에 맞춰 시작점을 조절할 수 있는 지점들이죠. 이렇게 만들기 위해 정말 다양한 버전으로 편집 테스트를 했습니다.”

이번 공연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포디엄에 오르는 아프리카계 지휘자 로더릭 콕스(1988~)다. 최근 떠오르는 신예 지휘자로, 켄트리지가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를 연출했을 당시 다수의 아프리카계 성악가들이 무대에 출연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제가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작업하며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함께 일하는 많은 협업가가 이곳 출신이고, 대부분 아프리카계이기도 하고요. 실황 연주에선 당연히 그들 각자가 가진 고유의 방식이 드러납니다. 로더릭 콕스라는 지휘자의 커리어를 생각해 본다면, 이번 공연이 매우 생동감 넘치는 무대가 될 거라는 기대가 되는군요.”

덜 좋은 아이디어라도, 해라!

‘시빌’ 중 ‘시빌을 기다리며’ ©Stella Olivie

5월, 한국에서 선보이는 공연은 한 가지 더 있으니, ‘시빌’이다. 작품은 ‘그 순간 이미 흩어져 버렸다’와 ‘시빌을 기다리며’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태다. 시빌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사제로, 사람들의 운명을 나뭇잎에 적어 동굴 밖에 내어놓는 이다. 자신의 운명이 적힌 잎사귀를 집으려는 순간, 바람이 불어오고 이들은 무엇이 자기의 운명인지 알 수 없어 망연자실한다. 이 모티브를 활용, 불확실성에 당면한 우리의 삶과 미래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미지들이 다양한 형태로 제시된다. 영상과 연기, 무용과 노래까지 한데 어우러진, 오페라에 가까운 종합예술이다.

“만드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작품을 통해 이미 그 안에 존재해 온 마음들,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각들이 발견되는 경험을 하는 것이죠.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는 순간, 그 일종의 긍정을 확인하는 작품이 되길 바랍니다.”

그의 영감은 여전히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탄생한다. 하나의 작업이, 또 다음 작업을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질문은 넘쳐나는데, 그 모든 것을 다룰 시간은 늘 부족하다”는 것이 도구를 가리지 않는 장인의 답변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거의 300년간 인종 차별과 억압을 겪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룬 지 30년 만에, 모든 걸 되돌리긴 한참 부족하죠. 여전히 빈부의 격차와 불균형 같은 문제가 남아있고, 제가 하는 모든 작업의 안팎에서 이 질문들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가 머무는 도시에는 ‘덜 좋은 아이디어 센터(Center for the Less Good Idea)’가 있다. ‘훌륭한 의사가 당신을 고칠 수 없다면, 덜 훌륭한 의사를 찾아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에서 유래된 것. 일종의 예술 인큐베이팅 공간으로, 이곳에선 제일 좋은 아이디어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고안된, ‘덜 좋은 아이디어’들을 구체화하고 따라간다. 마지막으로, 기자의 요청으로 켄트리지가 남긴 ‘종합 예술가를 꿈꾸는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남기는 한마디’.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어떤 작업을 해야 할까’ 같은 조급함에 휩싸이지 마세요.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것을 한다면 사람들이 존중할 겁니다. 무슨 주제인지도 너무 고민하지 말고요. 그게 무엇에 관한 얘기든, 결국 자화상이 되어줄 거예요. 마지막으로, 제가 늘 하는 조언이 있습니다. 당신 안에 일어나는 충동에 의심보다는 기회를 먼저 주라는 것! 먼저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고, 작업이 시작되면 그 작품과 함께 진지하고 비평적인 대화를 계속해 나가길 바라요. 이상 스튜디오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서늘한 가을 아침에 보내는 답변입니다.”

허서현 기자 사진 GS문화재단

 

 

PERFORMANCE INFORMATION

 

윌리엄 켄트리지 ‘시빌’

5월 9·10일 GS아트센터

 

윌리엄 켄트리지 ‘쇼스타코비치 10 :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었더라면’

5월 30일 오후 7시 30분 GS아트센터

로더릭 콕스(지휘), 서울시립교향악단

 


 

03. Opera THEATRE

 

연출가 안헬리카 리델

사랑과 죽음의 경계에서

바그너 오페라와 투우를 접목한 새로운 비극

 

안헬리카 리델(1966~) 스페인 출신의 작가이자 연출가, 배우로 활동하는 공연 예술가.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했으며, 2017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슈발리에 드 로드르 데 자르 에 데 레트르 훈장을 받았다. 1993년 아트라 빌리스 컴퍼니(Atra Bilis)를 창설해 30년 넘게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막이 오르고, 노란빛이 감도는 무대 위에 투우사로 분한 안헬리카 리델이 서 있다.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다리를 그어 피를 흘리고, 피로 얼룩진 붉은 천을 흔들며 현실의 잔혹함과 신성함을 그려낸다.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이하 ‘사랑의 죽음’)는 벨기에 엔티겐트(NTGent) 극장의 ‘연극의 역사’ 시리즈 세 번째 작품으로, 2021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했다. 작품은 바그너의 오페라와 투우사 후안 벨몬테(1892~1962)의 서사를 병치해, 영성과 초월성을 상실한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

이번 공연의 극본, 연출, 의상 디자인, 무대 디자인을 모두 맡은 안헬리카 리델은 작품에 대해 “사랑에 빠진 불멸의 여인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라고 설명했다. 파격적인 작품으로 첫 내한을 앞둔 안헬리카 리델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봤다.

작품 제목이 매우 강렬하고 상징적이다.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아리아의 제목이다. ‘피비린내가 눈을 떠나지 않아’라는 문구는 프랜시스 베이컨이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 아이스킬로스의 시행을 변형해 자주 인용했던 표현이다. 그는 열렬한 투우 애호가로, 작품에 등장하는 소들은 그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투우를 연결한 지점이 흥미롭다. 두 세계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투우에 대해 “가장 눈부신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의 죽음’에서 검고 아름다운 황소는 죽음을 상징하며, 이는 사랑, 그리고 투우사 후안 벨몬테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황소와 투우사의 비극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기독교적 상징과 투우의 요소들—검, 독, 고통, 무한에 대한 갈망—이 모두 오페라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페라 속 이졸데가 죽는 장면의 대사를 직접 인용하기도 했다. 황소와 투우사처럼, 연인들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마주한다. 사랑, 아름다움, 죽음은 바그너와 투우라는 두 세계 안에서 하나로 얽힌다.

특히, 스페인의 전설적인 투우사 후안 벨몬테의 서사를 접목했다.

후안 벨몬테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투우하고, 사랑하는 방식으로 투우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욕망을 투우라는 예술로 승화했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나 역시 내면의 감정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벨몬테의 삶에 깊이 공감했다.

‘사랑의 죽음’은 기존의 연극 형식과 달리 언어, 이미지, 신체 표현 등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관객과의 소통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작업 초기에는 사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무(無)에서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지가 더 중요해졌다. 언어로 풀어낸 철학적 개념이 담긴 이미지로 ‘나’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종종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신체를 한계까지 밀어붙이기도 한다. 다만, 관객에게 작품을 이해하도록 요구하지는 않는다. 감정과 감각, 그리고 원초적인 상태에 직접 호소하고자 한다.

 

죽음의 충동에서 시작된 예술

1993년 아트라 빌리스 컴퍼니(Atra Bilis) 창설했다. 극단만의 독특한 접근 방식이나 철학은 무엇인가?

극단은 ‘죽음의 충동’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아트라 빌리스’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에서 말하는 체액 중 하나로, 멜랑콜리의 근원인 ‘검은 담즙’을 의미한다. 작업은 주로 죽음에 대한 욕망과 깊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욕망은 나를 종교적이고, 사드(Sade)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스페인의 분노’ ‘마드리드에서 온 괴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충격과 불편함을 유발하는 연출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한다. 당신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내가 추구하는 예술은 ‘반사회적 예술’이다.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예술은 오히려 빈곤하게 느껴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적 체험 그 자체이며, 미적인 것의 우위성이다. 우리는 거짓된 행복을 강요당하며, 영혼 없는 모범 시민이 되기를 요구받는다. 그래서 나는 초월적인 예술을 제안한다. 죽음을 인간 삶의 중심으로 되돌려놓고자 한다. 인간 정신의 복잡성과 연약함, 찬란한 어둠과 감정의 폭력성을 되돌리고 싶다.

‘사랑의 죽음’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대 속에서 영성과 자유를 담은 예술의 가치를 지키고자 한다. 예술은 영적인 수행이며, 미학은 신비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다.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름다움의 법칙은 국가의 법칙과 다르며, 때로는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작품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싶다.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장

 

PERFORMANCE INFORMATION

‘사랑의 죽음. 피비린내가 떠나지 않아. 후안 벨몬테’

5월 2~4일 국립극장 달오름

 


 

04. Baroque Music DRAMATURGY

 

앙상블 아마릴리스 예술감독 엘로이즈 가이야르

현대적인 바로크 음악

연출이라는 실로 완성된 바로크 드라마

 

엘로이즈 가이야르(1972~) 플루티스트, 오보이스트이자 리코디스트로 1994년 아마릴리스 앙상블을 결성하여 이끌고 있다. 프랑스 음악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국가 공로 훈장과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현재까지 아마릴리스 앙상블과 본인의 솔리스트 연주를 포함하여 24장의 음반을 발매하였다.

 

“아마릴리, 내 사랑.” 이는 서양음악사 바로크 시대 시험에 단골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초기 오페라의 창시자로 알려진 이탈리아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1551~1618)의 대표곡이다. 바로크 성악곡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이 여인을 악단의 이름으로 삼은 자가 있으니, 이번 ‘2025 한화클래식’으로 내한하는 앙상블 아마릴리스가 바로 그들이다. 악단의 예술감독인 엘로이즈 가이야르는 악단의 이름을 소개하며, “아마릴리스 꽃이 한 줄기에서 여러 송이 피어나듯, 우리 악단은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실내악에서 어우러진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서양 고대 시에 등장하는 목동 ‘아마릴리스’는 여러 바로크 시대 작곡가에게 영감을 심어 주옥같은 작품을 피어나게 했으니, 바로크 악단에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또한 이 악단이 만들어내는 프로그램 역시 붉고 커다란 아마릴리스 꽃처럼 화려하다. 바로크 시대연주 악단이라 하면, 고색창연한 분위기로 목가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떠올리기 쉬우나, 이들은 여러 바로크 작곡가(샤르팡티에·마레·데마레·륄리·르클레르·라모)가 쓴 작품을 모아 하나의 드라마로 엮어내니, 마치 하나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듯하다. 가이야르는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드라마투르기(희곡이나 연극의 극작법)를 고민하여, 공연에 유기성을 더하려고 노력한다고.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1994년 아마릴리스 앙상블을 창단하여, 30년 넘게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악단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우리는 시대악기를 사용하고 바로크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악단이지만, 티에리 에스카이쉬(1965~), 제라르 페송(1958~)과 같은 현대 작곡가와도 협업하며 개성을 다져왔다. 대부분의 연주자가 초창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솔리스트로도 활동 중이다.

시대악기와 현대적이라는 표현을 모두 사용해 소개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바로크 음악은 분명 오래전 창작된 음악이지만 지금처럼 촘촘하게 악보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무한하다. 장식음을 자유롭게 넣고 통주저음의 선율을 공연마다 즉흥적으로 만들어낸다. 정신적으로는 거의 재즈에 가까운 즉흥 음악이니, 매우 현대적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바로크 시대와 현대는 시간의 거리가 무척 먼데, 작품 해석에 어려움은 없는가?

당대 연주자들이 남긴 여러 이론서가 큰 도움이 된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는 연주, 악기 개발, 교육 등 다방면에 활동하여 음악에 관한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크 음악을 해석할 때 중요한 사항을 꼽자면 첫째,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를 모방하고 있다는 것, 둘째, 다양한 춤이 중요한 힌트가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마릴리스 앙상블은 연극·무용 등과 협업한 바 있다.

다른 예술 장르와 협업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바로크 음악이 가진 큰 힘이다. 다양한 예술을 총망라하는 오페라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탄생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여러 바로크 음악은 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나는 아마릴리스 앙상블의 프로그램을 구성할 때 항상 이와 같은 드라마투르기를 염두에 둔다.

 

신화 속 두 마법사가 가진 뜨거운 감정

아마릴리스 앙상블 ©Pauline Rhul

예술의전당에서 선보이는 ‘마법사의 불꽃’은 앞서 설명한 아마릴리스 앙상블의 개성이 느껴지는 공연이다. 바로크 시대의 서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엮어 두 마녀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이 이 마녀들을 연기한다.

프티봉이 연기하는 두 마녀는 메데이아와 키르케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17~18세기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데, 큰 감정의 폭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여성들이기에 선택했다. 자신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에게 복수하기 위해 둘 사이의 자식들을 죽이는 메데이아는 사랑에 배신당한 여성의 내면을 아리아로 보여줄 것이다. 키르케는 자신이 사랑했던 인물을 다른 이에게 뺏기자, 이에 아파했다가 후에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그렇다면 프로그램에 담긴 음악은 대부분 무거운 분위기인가?

그렇지 않다. 가보트·미뉴에트·지그 등의 춤곡이 있고, 2부에 펼쳐지는 라모의 아리아는 사랑의 기쁨에 대해 경쾌하게 들려주기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2016년에 처음 구상했고, 이후 여러 지역에서 공연했지만, 아시아에서 공연하는 것은 이번 한국 공연이 처음이다.

파트리샤 프티봉과는 오래도록 함께 작업하고 있다. 둘의 인연은 어떻게 닿았나?

우리는 파리 고등 음악원 재학 시절에 서로를 알게 됐고,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프티봉은 음역이 매우 넓어 극적인 음색과 코믹한 표현에 무척 능하다. 그의 목소리에 여러 영감을 얻으며, 이에 맞춰 프로그램을 구성하게 됐다.

신화 속 ‘여성’의 서사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신화는 바로크 시대에 매우 중요한 소재이다. 나아가 이 여성들을 바라보는 바로크 시대의 시선은 비범한 운명을 지닌 영웅에 가까웠다. 메데이아로 예를 들면, 오히려 상대적으로 최근인 19세기에는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 파렴치한 여성으로 묘사하지만, 17세기에 쓰인 샤르팡티에의 작품에서는 사랑에 배신당하고 명예를 실추당한 인물로 그려낸다.

마지막으로 이 공연을 접하게 될 한국 관객에게 인사를 전한다면?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프랑스 연주자와 함께 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설렌다. 이번 프로그램으로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의 작곡가인 샤르팡티에, 마레, 륄리를 만나 베르사유 궁전의 정교한 감각을 느껴볼 수 있기를.

이의정 기자 사진 제이에스바흐

 

PERFORMANCE INFORMATION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아마릴리스 앙상블 ‘마법사의 불꽃’

6월 6·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05. Korean Culture OPERA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

고정되지 않는 물처럼

한국적 요소와 창작 오페라가 만나다

 

메리 핀스터러(1962~) 호주 출신의 작곡가로 시드니 심포니 상주작곡가(1992), 멜버른 심포니 상주작곡가(2023) 로 활동했다. 호주 현대 음악상인 APRA 어워즈에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총 8회 수상했다. 유럽과 북미에서도 국제적으로 활동하여 앙상블 모던,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 누벨 앙상블 모던과도 협업했다.

 

지난 2년간 영국 로열 오페라 프로덕션의 ‘노르마’(2023)와 ‘오텔로’(2024)를 성공적으로 선보인 예술의전당이 올해는 ‘제작’이라는 수를 빼 들었다. 오페라는 음악·극·미술 등 다양한 예술의 총체라고 불리는 만큼, 공연 소식이 알려진 이른 봄부터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이하 ‘물의 정령’)을 향한 관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쏟아졌다.

2,000석 이상의 대규모 극장에서 상영하는 국내 ‘창작 오페라’가 무척 귀한 만큼 이에 대한 바람과 요구는 거의 무한한 가운데, ‘물의 정령’이 충족해 줄 예술적 욕구는 무엇일까? 두 가지를 꼽아 보았다.

우선 한국적 요소를 사용한 오페라라는 점. 국내에서 제작·초연되는 만큼 우리의 소재 사용은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기본 언어가 영어이고, 해외 제작진이 주를 이룬다는 한계가 있으나,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반대로 내수만을 노리고 우리만의 축제를 여는 것보단, 국제적인 형식에 맞추어 더 넓은 관객을 향한 가능성을 두는 게 이점이 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오페라의 안팎에 여성을 포진했다는 점. 극을 이끌어가는 두 주연은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 여성 2인조이며, 오페라 작곡에는 호주의 여성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가 참여했다. 이러한 특징을 더 자세히 보는 창으로,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와 대화를 가졌다.

 

대본 톰 라이트

이달 한국에서 세계 초연하는 오페라는 ‘바이오그래피카’(2017) ‘남극’(2022)에 이은 당신의 세 번째 오페라이다. 한국이 당신의 오페라를 상영하는 건 처음인데, 예술의전당과는 어떤 과정으로 협업하게 됐나?

2022년 초에 예술의전당으로부터 한국 요소와 현대극을 결합한 대규모 오페라 제작을 제안받았다. 한국에 오페라를 선보이는 기회는 처음이라,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작업은 약 2년 정도 걸렸는데, 나의 앞선 두 오페라를 함께 완성했던 대본가 톰 라이트와 이번에도 몰입도 높은 교류를 경험할 수 있었다.

대본가 톰 라이트와는 항상 콤비로 활동했다. 작업 방식이 잘 맞는 편인가?

톰은 상호 존중을 기본으로, 뛰어난 미적 감수성을 가진 귀한 파트너이다. 나아가 그의 대본은 시적인 언어로 철학·역사·심리를 두루 살피는데, 그 깊이는 정말이지 무한한 영감을 선사한다. 덕분에 대본이 음악에 또는 음악이 대본에 주는 영향에 맞춰 유연하게 수정하며 작업할 수 있다.

대본 수정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는가?

작곡 과정 내내 톰과 대화하면서 음악적으로 대사가 더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더하고, 잘라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덜어냈다. 내러티브는 단순한 내용을 넘어 음악적 구조라고 생각한다. 오페라 대본의 윤곽을 잘 잡는 일은 작곡 과정에서 필요 불가결하다.

오페라 공연은 연출도 중요한데, 작곡 과정에서도 이를 고려하며 음악을 만드는가?

물론이다. 오페라를 작업할 때면 공간과 시간 흐름을 모두 의식하며 곡을 쓴다. 이를 위해 초연 프로덕션 연출을 맡은 스티븐 카르와 분위기·상징 등 보이는 부분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수면에 비치는 현대의 상(像)

‘물의 정령’은 왕과 공주, 물시계 장인, 정령 등이 등장하는 시대물이다. 이 배경과 내용이 현대를 살아가는 청중과 어떤 점을 공유할 수 있을까?

분명 이 작품은 신화와 역사를 그려내지만, 내면의 주제는 체계의 허점, 지혜의 요구, 불균형의 대가 등 현대 사회의 여러 모습을 거울처럼 담아냈다. 오페라 속 물이 보여주는 ‘붕괴와 재생’이라는 두 측면의 순환 고리를 청중이 고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은 이 오페라의 핵심 소재이다. 물의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일은 작곡에서 중요한 과제였을 것이다.

한 가지 악기 소리로 소재를 납작하게 만들기보다는 물이 가진 입체적인 모습마다 각각 다른 목소리를 주었다. 물결이 넘실거리는 모습은 고른 음계와 글리산도로,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대양의 숨결 같은 물은 촘촘한 화성 진행으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불안정성은 전자 음향과 현악기 특수 주법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반짝이는 윤슬, 고요한 수면, 모든 걸 파괴하는 홍수, 유기체를 치유하는 생명수까지 물은 다양한 모습으로 악보 전체에 흐르고 있다.

작품의 절정은 2막에서 물의 정령, 장인의 목소리, 물방울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순간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어떻게 구성했는가?

이 부분은 제례의 분위기를 띄도록 접근했다. 정령의 존재와 물 그 자체는 자연의 섬세한 몰입감을 가지도록 만들었고, 장인과 정령이 대립하는 소리는 그 위에 태곳적인 날 것의 대위를 얹어 강렬한 인상을 주도록 엮었다.

‘바이오그래피카’와 ‘남극’을 살펴보면, 음악이 흐르는 와중에 성악가가 대사를 읊는 독특한 양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 작품에도 이 양식을 활용했나?

2막에 2회 사용했다. 음악이 여전히 진행하는 동시에 언어의 힘이 강조되는 이 방식은 극의 시간을 잠시 멈춰 놓고 인물의 심리적 깊이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물시계 장인과 물의 정령은 한국의 위인인 장영실과 물귀신 설화를 떠오르게 한다. 한국적 요소가 오페라 내용에 녹아있는데, 귀로도 이를 감상할 수 있을까?

한국의 문화는 이 작품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 음악에도 물론 반영하기 위해 오케스트라에 거문고를 배치했고, 한 장면에서 중요한 소리로 사용했다. 이를 그저 겉치레로 활용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거문고 연주자 이정석과 함께 작업하며 악기의 연주 기법을 탐구한 후 작업했다. 한국 전통 악기를 접한 것은 처음인데, 무척 유익한 시간이었다.

각 인물의 음악은 극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가? 몇 가지 예를 들어준다면?

인물의 심리 변화가 음악에 드러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예를 들어, 공주는 초반에 엉뚱하고 꾸며진 제스처를 많이 쓰다가 점차 감성적이고 풍부한 표현으로 옮겨간다. 장인의 제자도 단순하고 기초적인 모티프에서 점차 이야기 속 자신의 여정을 반영하여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음악 언어로 나아간다.

 

필요에 답하는 예술가

1990년 무렵부터 작곡을 시작한 오랜 경력을 생각했을 때, 첫 오페라 도전은 2017년으로 비교적 최근이다.

수십 년간 기악곡과 관현악 작품을 쓰면서, 드라마투르기의 가능성에 점차 매료되어 오페라에 이르게 됐다. 소리로 스토리텔링을 하는 오페라는 음악을 매우 복잡하게 탐구할 수 있는 멋진 장르이다. 극 예술 중 가장 몰입감 있고, 다차원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첫 오페라인 ‘바이오그래피카’를 완성한 이후부터 오페라 작곡을 시작했다는 것에 여러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아리아 선율이고, 어떤 작품은 굉장히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본인의 작곡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시대가 요구하는 소리에 맞춰 작곡 양식은 점차 변할 수밖에 없다. 정의하자면, 하나의 ‘미학에 갇히지 않는 것’이 정체성이 아닐까? 나는 때로는 엄격한 구조에 끌리다가도 즉각적인 정서에 매료되고, 정확한 대위법을 계산하다가 돌연 무질서한 본능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중시하는 게 있다면, 과거의 언어와 현대의 주제가 공명하여 원하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곡을 쓰는 것. 내게 작곡은 시간을 가로지르는 여정으로, 역사에 귀를 기울이면서 현대가 요구하는 표현에 응하는 일이다.

작곡가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

문화, 역사, 매체를 넘나들며 이를 연결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 끊임없이 창작하고, 협업하면서 말이다. 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의정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PERFORMANCE INFORMATION

예술의전당 오페라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

5월 25·29·3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황수미(공주), 장인(김정미), 제자(로빈 트리츌러), 애슐리 리치(왕), 정민호(물의 정령) 외/스티븐 오즈굿(지휘), 국립심포니·노이 오페라 코러스/메리 핀스터러(작곡), 톰 라이트(대본), 스티븐 카르(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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