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
기억과 기록이 미래를 구원하는 시간
감독 레오 파비에
장르 다큐멘터리
출연 스즈키 토시오, 미야자키 고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미야자키 하야오
살기 위해 죽인다. 동물들의 세상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흔히 알고 있는 먹이사슬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도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죽이고 먹는다. 하지만 사람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더 많이 가지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며, 사람들은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한다. 심지어 전쟁을 일으켜 다른 사람의 것들도 뺏으려 한다. 살아야 하는데 자꾸 죽인다.
레오 파비에(1985~) 감독의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40주년,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1941~)의 50년을 차분하게 되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와 만든 하야오의 최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가 던졌던 질문, 하야오가 자신의 삶 속에서 왜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에 대해 질문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찬찬히 설명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야자키 감독에 대한 풀이서 같다.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역사
하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모르는 관객을 위한 입문서’라고 불러도 될 만큼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한 사람과 그가 만들어가는 예술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다큐멘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많은 작품을 다루고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고민했던 자연과 사람의 관계로 초점을 좁혀놓았기 때문에 전달하는 메시지가 정확하다. 일본인이 아닌 프랑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라서 시선과 정서가 조금 더 객관적이다.
파비에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족사, 그의 삶과 그 삶을 둘러싼 일본의 역사, 그리고 더 크게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폭넓게 들여다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혼이 어떻게 그의 작품에 새겨지는지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러면서도 회고담을 구성할 때 불균질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단점들을 매끈하게 걷어냈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품고 있는 세상과 자연에 대한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과거 기록 영상, 그가 만든 작품들, 그리고 현재의 인터뷰 영상을 이야기의 맥락에 맞춰 구성해,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과 하야오의 인생을 연대기 순으로 집대성한다. 도서 ‘미야자키 월드’(2018)의 저자 수잔 네이피어(1955~)와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1949~) 등의 전문가들은 자연과 환경의 관점에서 하야오 작품의 세계관을 탐구한다.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빠진 미야자키 하야오가 토에이 애니메이션에 입사하여 처음으로 만난 연출 스승인 타카하타 이사오(1935~2018), 스튜디오 지브리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1948~),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겨 있는 기록 영상도 볼 수 있다. ‘지브리의 전설’을 시작한 세 사람을 한 곳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른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에 담긴 것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미야자키 하야오는 꾀를 부리지 않는다. 투명한 플라스틱 시트에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 완성하는 셀 애니메이션은 아주 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해야 하지만, 그는 그 중심에서 어떤 작화도 허투루 내어주지 않는다. 어떤 순간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진실하고 우수에 찬 눈빛과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을 등에 짊어진 모습은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진심으로 이어진다.
파비에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삶과 그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 뒤, 우리에게 익숙한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보여준다.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 그와 그의 팀이 쏟는 시간과 열정이 경건하다. 제작 과정을 보며, 그의 작품이 지독한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수공예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느껴진다.
어느 시대에 빗대어 이야기해도, 어느 나이대의 사람과 이야기하더라도, 미야자키 하야오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정서는 ‘추억’이다. 작품 자체가 추억인 사람도, 작품에 담긴 정서가 추억이 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은 켜켜이 쌓인 나이테처럼,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관객에게 하나의 견고한 문화이자 역사로 남는다.
사실 최근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보았을 때, 미래의 아이들을 응원하면서도 희망적이지 않은 이야기의 정서에 괴리감을 느꼈다. 이렇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족사, 전쟁, 그리고 자연 파괴에 대한 인간의 모든 잘못을 기억한다. 파비에 감독은 하야오가 사람들이 만드는 전쟁과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세상을 비관했던 시절을 기록한다.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미래의 세대에게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충돌과 화해는 미래를 위한 구원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뚝 끊어진 다리를 잇듯, 그의 작품들 사이의 틈새를 채워준다. 관객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를 다시 발견하고, 그의 작품을 되짚는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에 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입문하고 싶어졌다. 간절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졌다.
예술의 시간, 그 가치를 존중하길 바라며
어쩌면 우리는 ‘미야자키 월드’를 진실이라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숲속에는 토토로가, 바다에는 포뇨가 살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모두 미야자키 월드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욕망이 드러난 것이 바로 최근 유행한, 챗GPT로 생성한 지브리 스타일의 프로필 사진이다. 재밌고 신난다. 누구의 악의도 없다.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정성이 필요한 셀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한 획 한 획 영혼을 다해 그렸을 시간을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이 몇 초 만에 쓱 그려낸 지브리 스타일의 그림은 그 영혼과 역사를 지우는 일은 아닐까? 인공지능이 미야자키 하야오를 손쉽게 흉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 보면 씁쓸하고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
인공 숲의 세상에 빠져 자동차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하는 시대 속에서, ‘진짜 숲’이 사라지고 있다. 그런 세상을 비판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오랜 그림들이 모조품과 뒤섞여서는 안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예술가의 책임과 그 발현을 이야기하고 있듯이 관객도 그와 스튜디오 지브리가 쌓아온 역사를 기억하고 아끼면 좋겠다. 손쉽게 얻었다면, 그것은 ‘미야자키 월드’가 아니다.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