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진실한 후원이 남긴 음악의 깊이
故 박성용 명예회장 20주기 추모 음악회
5월 23일 금호아트홀 연세
클래식 음악계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긴 기업인이자 문화재단 이사장의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박성용(1932~2005) 명예회장은 금호 현악4중주단 창단·금호영재 음악가 지원·세계 10대 오케스트라 초청 등 다양한 문화 토양을 위한 사업을 펼쳤다. 연주 시작 전 그를 기리는 짧은 영상이 스크린에 상영됐다.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무엇보다 그를 진실한 음악적 동반자로 기리는 젊은 음악가들의 회고가 인상적이었다. 음악회는 손열음의 피아노 독주로 꾸며졌다. “어린 시절 제 모든 연주회에 참석해 응원을 해주셨던 회장님이 떠오른다”며, “네가 좋아하는 곡이면 나도 다 좋다고 늘 지지해주셨다”라고 선곡의 이유를 설명했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으로 시작, 라벨 ‘라 발스’로 1부를 마쳤고, 2부에서는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를 뛰어난 연주로 소화해 냈다. 정열과 사색을 교차하던 ‘크라이슬레리아나’는, 마지막 여덟 번째 곡에서 홀연히 떠난 비범한 자의 뒷모습을 그려내며 여운을 남겼다. 훌륭한 기업가의 마인드가 남긴, 음악의 깊이를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금호문화재단
건반에 스민 풍경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
6월 1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올여름, 국내 도시의 공연장을 순회 중인 조성진은 라벨 프로그램과 더불어, 직접 선곡한 리스트의 ‘에스테장의 분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5번 ‘전원’, 버르토크의 ‘야외에서’,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으로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자연’이라는 큰 주제 아래, 분수를 지나 전원으로, 그리고 마침내 야외로 향하는 하나의 시청각적 서사를 완성했다.
첫 곡으로 연주한 ‘에스테장의 분수’는 물의 이미지를 클래식 음악에 처음 도입한 작품으로, 조성진은 특유의 섬세하고 투명한 터치로 물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어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5번에서는 목가적인 멜로디와 함께 한층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1부의 대미는 버르토크의 ‘야외에서’가 장식했다. 저음의 건반을 강하게 내리치며 시작한 작품은 다섯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각각 자연의 풍경을 묘사한다. 특히 4곡 ‘밤의 음악’에서는 풀벌레, 야생 동물, 개구리 소리를 연상케 하는 효과음이, 5곡 ‘사냥’에서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곡 전반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2부에서는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3번이 이어졌다. 약 40분에 걸친 이 대곡에서 조성진은, 때로 오케스트라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울림으로 무대를 압도했고, 때로는 섬세하고 우아한 터치로 다양한 면모를 보였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크레디아
쇼팽의 새로움을 발견하다
케빈 케너·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 리사이틀
5월 2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그간 독주자나 협연자로 한국을 찾았던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가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다. 쇼팽의 작품들을 현악 5중주 버전으로 직접 편곡, 폴란드의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과 함께 무대에 오른 것이다. 편곡자로서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과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의 첫 내한이라는 점이 이번 공연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주는 각각 공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즈’였다. 케빈 케너는 오케스트라처럼 현악 5중주의 화성을 보강하며 배경에 머물기도 하고, 확연히 다른 음색과 부피감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하며 유연하게 역할을 오갔다.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의 연주는 정교하면서도 정갈했다. 원곡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세밀한 부분들을 또렷하게 살려냈다. 무대에 함께 오른 더블베이시스트 조용우는 저음을 단단히 지탱하며 안정감을 더했다. 순간순간 작품 안에 숨겨진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2부에서는 아폴론 무사게테 콰르텟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벨리우스 ‘안단테 페스티보’에서는 애상적이고 부드러운 선율선을 들려주었고, 펜데레츠키의 현악 4중주 3번 ‘쓰이지 않은 일기의 낙엽들’에서는 날카로운 음색과 강한 스트로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앙코르로 들려준 쇼팽의 가곡 ‘봄(Wiosna)’ Op.74-2, 케너의 독주로 이어진 파데레프스키의 야상곡 Op.16-4가 은은한 감동을 남겼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뮤직앤아티스트
정체성 고민에 관한 날카로운 풍자
연극 ‘엔들링스’
5월 20일~6월 7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로 2024년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셀린 송이 쓴 작품이다. 연극에는 한국계라는 정체성에 대한 그의 자전적 시선이 담겼다. 전라남도 만재도의 세 해녀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캐릭터에 몰입하기 어렵다. 극의 중반에 다다르면 이 이야기가 뉴욕의 한 원룸에서 극작가 하영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초반에 등장한 해녀들은 ‘백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동양인 작가’ 쓴 이야기 속 인물들인 것. 백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해녀는 이토록 신기하고, 동시에 우습기도 하겠구나.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그런 식으로 소비하고 싶지만은 않았던 하영은, 그럼에도 이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의 욕망을 보고 또 본다. “난 연극을 위해 내 피부색을 팔고 싶어. 한 점 부동산을 위해 내 피부색을 팔고 싶어.”
극 중 하영은 뉴욕에서 한 연극을 보러 간다. 하영의 ‘해녀 이야기’는 극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쇼 같은 구경거리로 소비되지만, “아아 나의 하얀 고민이 하얗게 불탄다”와 같은 대사를 고전극의 톤으로 읊어대는 ‘백인 연극’은 지나치게 신성시된 극장에 올라 있다. 극은 날카롭게 인종적 시선을 비웃지만, 정작 한국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시종일관 모든 문화예술을 ‘K-’라는 수식어로 한정 지어 수치화하고 이를 문학적 성과로 삼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우리의 문화예술은 언제쯤 ‘동양인 최초’라는 피부색을 팔지 않고도 위대해질 수 있을까.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두산아트센터
동화 같은 아름다움
광주시립발레단 ‘코펠리아’
5월 31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제15회 대한민국발레축제(5.9~6.22)의 일환으로, 광주시립발레단(예술감독 박경숙)이 서울을 찾았다. 19세기 희극 발레의 대표작인 ‘코펠리아’는 레오 들리브의 음악에 맞춘 3막의 전막 발레다. 괴짜 과학자 ‘코펠리우스’가 만든 인형 코펠리아를 두고 펼쳐지는 한 마을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이를 배경으로 스와닐다(강민지 분)와 프란츠(박범수 분)는 사랑하는 연인. 연극적 요소가 많아 누구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 극을 자연스럽게 이끄는 강민지의 표현력, 그리고 여성 무용수들의 군무가 인상 깊었다. 수도권을 제외하면, 국내 시립발레단이 있는 곳은 광주가 유일하다. 뛰어난 무용수들을 바탕으로, 완성도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광주시립발레단의 오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광주시립발레단
CLASSICAL MUSIC
클라우스 메켈레/파리 오케스트라 협연 임윤찬
정점에서 만난 젊음의 에너지
6월 11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최연소에서 최정상에 오른 두 영건의 무대가 서울의 여름밤을 뜨겁게 달궜다. 2022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임윤찬(2004~)은 어느덧 세계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주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1996~)는 오는 2027년부터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와 시카고 심포니를 동시에 맡으며 ‘차세대 거장’으로 떠올랐다. 메켈레는 지난 한 해 동안 113회 공연으로, ‘바흐트랙’이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 공연은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라벨의 ‘쿠프랭의 무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라벨 편곡)으로 구성됐다. 1967년 창단된 파리 오케스트라는 게오르그 솔티, 다니엘 바렌보임,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파보 예르비, 대니얼 하딩 등 거장들의 손길을 거치며 프랑스 음악의 정수를 이어온 악단이다. 2021년부터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메켈레는 이날 무대에서도 악단 특유의 섬세하고 우아한 사운드를 이끌어 냈다.
메켈레는 오케스트라 단원들 사이로 조용히 등장해 악장과의 악수 타이밍을 살짝 놓치는 유쾌한 해프닝으로 관객의 미소를 자아낸 뒤, 첫 곡인 ‘쿠프랭의 무덤’을 시작했다. 라벨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동료들을 기리며 쓴 이 곡에서 메켈레는 무릎을 깊이 굽히며 온몸으로 사운드를 조율했고, 목관의 맑은 음색과 세밀한 다이내믹 조절을 통해 피아노 원곡의 섬세한 결을 관현악으로 한층 풍성하게 그려냈다.
이어 연주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은 그의 작품 중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미국 망명 이후 재즈와 현대음악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의 변화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극적인 강약 조절과 템포의 대비를 통해 섬세한 표현력을 발휘했고, 2악장의 피아노 도입부에서는 음량을 정교하게 조율하며 임윤찬과 호흡을 맞춰나갔다. 임윤찬은 거슈윈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도입부에서 재즈 특유의 리듬과 감성을 담아냈으며, 3악장의 오케스트라와 주고받는 긴밀한 호흡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견고한 앙상블을 만들었다. 앙코르곡으로 연주한 쇼팽의 왈츠 3번은 뜨거웠던 무대의 열기를 잠시 식히며, 짧은 독주회 같은 여운을 남겼다.
2부에서는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 연주되었다. 이 곡은 원래 무소륵스키가 피아노 모음곡으로 작곡한 작품이지만, 라벨이 이를 관현악으로 편곡하면서 새로운 색채의 곡으로 재탄생했다.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리는 데 있어 더욱 특별한 선곡이었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다채로운 음색을 선보이며 곡의 매력을 한껏 살렸다. 메켈레는 각 악기군의 질감을 유려하게 쌓아 올렸고, 마지막 악장 ‘키이우의 대문’에서는 깊이 있는 울림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연주가 끝나자 객석에서는 뜨거운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클라우스 메켈레는 오는 11월(5·6·8·9일) 서울에서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슈타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로자코비치와 함께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파트너’로서 공식적인 첫 내한 무대를 이어갈 예정이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빈체로
야쿠프 흐루샤/밤베르크 심포니 협연 김봄소리
중후한 독일 빛깔, 쌉싸래한 체코 맛
6월 1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금관과 목관의 앙상블은 단단했다. 중저역이 강조되며 풀리지 않는 묵직한 선율이 조화로웠다. 목관이 들려주는 선율은 따스하고 한 송이 꽃처럼 화사했다.
음악감독 야쿠프 흐루샤(1981~)와 밤베르크 심포니의 내한 공연은 좀처럼 연주되지 않는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 ‘요정들’ 서곡으로 시작했다. 따뜻하고 불투명한 총주를 악기들이 투명하게 뚫고 나갔다. 연주를 들으면서 바그너에게 남긴 베버의 영향이 떠오르기도 했다. 흐루샤의 절도 있는 지휘 동작은 단호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악단을 이끌었다. 현의 트레몰로도 확 가라앉아서 안정적인 앙상블을 들려줬고, 아기자기한 맛을 잘 살렸다. 미각으로 표현하자면 담백한 맛이었다. 조미료를 넣지 않은 순수함이 돋보였다.
이어서 김봄소리(1989~)가 등장했다.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도입부에서 김봄소리는 차갑고 투명했으며 민첩했다. 총주는 극적이었다. 전달하는 바이올린 음은 명료했다. 물기 어린 고음은 바람이 부는 듯했다. 2악장에서 밤베르크 심포니가 근사한 총주를 들려줄 때, 김봄소리는 다소곳이 인형처럼 서서 흐름을 유지하는 듯했다. 김봄소리는 위로하는 듯한 패시지를 연주하며 표정도 밝게 가져갔다. 분절하는 동작으로 확고하게 표현했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봄소리를 배려하면서 그녀 주변을 음으로 물들이는 듯했다. 크게 부풀어 오르는 총주를 들으면 이들이 정성을 다해 연주하고 있음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3악장은 밝고 민첩하면서 시원시원했다. 다소 가벼웠던 점이 걸렸지만, 활발한 움직임은 그 무게를 상쇄했다. 유화 같은 두터운 질감의 연주가 일품이었다.
김봄소리는 두 곡의 앙코르곡을 준비했다. 먼저 바체비치의 ‘폴란드 기상곡’을 격정적으로 선보였다. 이어서 밤베르크 심포니의 제2바이올린 단원인 가브리엘레 캄파냐가 독주 바이올린용으로 편곡한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린’을 연주했다. 피치카토가 돋보였고, 정연함을 잃지 않았다.
휴식 시간 후 2부에서 연주된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은 총주 속에 차분하게 안정감이 깔렸다. 유연한 연주였다. 플루트와 오보에의 음색은 청아하면서도 단단했다. 일견 투명하게 속이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불투명하고 어두운 심연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듯 깊이가 풍성했다. 흐루샤는 껑충껑충 뛰며 단원들을 독려하면서도 확실히 절제했다.
현과 관이 어우러지며 짙고 깊은 음색을 들려주었다. 외향적이지 않고 내성적인 연주에 가까웠다. 2악장 도입부는 극도로 작게 내는 피아니시모가 돋보였다. 주선율이 드러나도록 길을 터준 것 같았다. 현의 미감이 특출났다. 3악장은 대조적으로 약동감과 생명력을 떠올렸다. 저류 같은 숨은 흐름이 도도했다. 자극이나 충격이 없는 순수한 악흥이 꿈틀댔다. 4악장은 훨씬 빠른 템포로 무리 없이 펼쳐냈는데 현과 관의 블렌딩이 마치 갈아서 녹아있는 듯했다.
밤베르크 심포니는 앙코르곡으로 드보르자크가 관현악으로 편곡한 브람스 헝가리 무곡 17·18·21번을 차례로 선사하며 독일과 체코의 성격을 모두 지닌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냈다. 필스너 맥주같이 쌉싸래하고 독특한 이들의 매력은 계속될 것이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빈체로
아마릴리스 앙상블 ‘마법사의 불꽃’
오래된 음악이 새롭게 타오르다
6월 6·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올해 ‘한화클래식 2025’는 소프라노 파트리샤 프티봉과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음악 단체 아마릴리스 앙상블이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정수를 선보였다. ‘마법사의 불꽃’이라는 주제 아래 펼쳐진 이번 공연은,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 특유의 극적 고상함에 현대적 감각을 더하며 고음악이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는 예술임을 증명해 보였다.
‘마법사의 불꽃’은 하나의 오페라를 콘서트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 아닌, 17~18세기 다양한 프랑스 오페라를 새로운 내러티브로 엮은 독창적인 시도였다. 이 프로그램을 구성한 예술감독 엘로이즈 가이야르(1972~)는 전통적인 5막 구조를 차용하는 동시에, 막마다 프랑스 오페라에서 빠질 수 없는 춤곡들을 배치함으로써,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자 했다. 특히 이 춤곡들은 단순한 삽입곡을 넘어 감정의 흐름을 이끌고, 리듬을 조형하는 극적 장치로 기능했다.
‘마법사의 불꽃’은 17~18세기 오페라 속에서 주로 문제를 일으키는 두 명의 마녀, 메데이아와 키르케가 중심을 이룬다. 이들은 단순한 악녀가 아니라, 사랑에 상처받고 배신당한 끝에 복수를 결심하는 인물들로, 이들의 복잡한 내면의 감정이 다루어진다.
1·2막에서는 샤르팡티에의 오페라를 통해 메데이아의 잔혹한 복수심과 사랑의 고통이 묘사되었고, 3·4막에서는 장바티스트 륄리·앙리 데마레·장마리 르클레르의 작품을 통해 키르케가 상처받고 마법으로 복수를 결심하는 모습이 극적으로 그려졌다. 프티봉은 때로는 부드럽고 내밀하게, 때로는 강렬하고 음울하게 표현하며, 마법사이자 상처 입은 여인의 복합적인 내면의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공연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마지막 5막이었다. 전적으로 라모(1683~1764)의 음악으로만 구성된 이 부분에서 왕세자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오페라 ‘플라테’ 중 광기의 아리아가 중심을 이뤘다. 이 곡은 ‘가장 찬란한 연주를 만들어보자’는 가사처럼, 사랑의 잔혹함을 유머로 승화시키며 공연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듯했다. 프티봉은 화려한 기교뿐 아니라, 선글라스와 모자를 착용하고 유쾌한 연기로 무대를 장악했으며, “싸이, 들리니?”와 같은 위트 넘치는 한국어 멘트로 객석의 웃음과 환호를 끌어냈다.
공연은 사랑의 고통과 잔혹한 복수의 서사를 웃음으로 마무리하며, ‘사랑’이라는 감정의 다층성과 역설을 되짚게 했다. 또한,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의 시작점인 륄리부터, 마지막 라모에 이르기까지 흐름을 따라가며, 레퍼토리의 단순한 나열이 아닌 서사적 배치를 통해 프랑스 바로크 오페라를 새로운 극음악으로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우아하고 세련된 ‘프랑스적 취향’을 온전히 맛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고음악이 그저 ‘옛 음악’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의 음악으로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그야말로, ‘바로크’했다.
글 유선옥(음악학자) 사진 한화클래식
OPERA
오페라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
폭넓은 음악적 팔레트
5월 25·29·31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대중음악이 유행에 따라 소비되는 반면, 클래식 음악은 반복 감상을 통해 축적된다. 신곡을 기다리는 대중음악 분야와 달리, 클래식 음악 분야는 낯섦보다 경험과 익숙함에 의존하는 감상 습관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클래식 음악의 초연작을 기대하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전당이 신작 오페라를 위촉하고, 세계초연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홍보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많은 이들이 호기심과 기대감을 안고 이 역사적인 현장을 찾았는데, 반복적인 노출과 경험이 호감을 형성한다는 심리적 효과가 검증된 셈이다. ‘The Rising World: 물의 정령’은 초연작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고, 클래식 음악 시장을 성장시킬 수 있는 예술의전당의 영향력과 잠재력을 일깨워 주었다.
이 작품은 한국적이면서도 세계화를 지향하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대본 작가 톰 라이트는 옛 동양을 배경으로, 물과 정령이라는 세계 보편적 소재에 착안해 귀신 들린 여인(공주)에 대한 퇴마 의식과 여인의 희생을 통한 구원(희생되는 물시계 장인이 여성으로 설정)이라는 익숙한 극적 구성을 통해 서사를 전개했다. 작품의 주 언어가 영어로 설정된 것 또한 그 일환이다. 익숙한 서사와 설정은 분명 세계적 수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한국에서 제작된 오페라라는 사실이 국내외 관객의 기대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두 막으로 구성된 전체 드라마는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동적인 무대장치와 비디오아트로 각 장면의 이미지를 강화하여 매우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장인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김정미는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극의 중심을 지탱했고, 공주 역의 소프라노 황수미는 뛰어난 전달력으로 귀신에 들린 공주와 어진 여왕이라는 대조적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물의 정령을 연기한 카운터테너 정민호는 2막에 짧게 등장했지만, 제3의 목소리로 신비롭고 이질적인 인상을 깊게 남겼다. 그러나 왕과 대신들의 회의 장면에서는 오랜 격론이 이어졌음에도 음악적 긴장감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 집중력이 떨어졌다.
작곡가 메리 핀스터러(1962~)의 음악은 다양한 시공간의 양식을 한데 투영한다. 국악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의 낭송, 중세 성가, 낭만 어법과 현대적 음향까지 아우르며, 아리아에서는 뮤지컬적 요소도 들렸다. 이렇게 폭넓은 음악적 팔레트는 각 장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고, 자연스럽게 혼합되고 연결되었다. 하지만 아리아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각 양식이 갖는 서정이 부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는 시나리오의 흐름에 따른 감상자의 정서적 몰입을 방해하기에 섬세한 주의가 요구된다.
‘물의 정령’은 동양적 이미지와 보편적인 드라마를 결합하고, 극적 몰입도와 메시지를 지닌 작품이다. 양식적으로도 혼합되어 수용의 폭이 넓다. 그러나 익숙한 공통적 특성에 무게가 실려있어, 낯선 산뜻함이 적을 수 있다는 점은 검토되어야 한다. 이런 점들은 우리 시대 오페라의 의미를 고민하고, 꾸준히 세계초연을 기획하며 개선될 것이다. 앞으로 예술의전당이 인류 문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서기를 기대한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글로리아오페라단 ‘카르멘’
불꽃처럼 타오른 사랑과 저항
6월 6~8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이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시야는 세계 무대를 향하고 있다. SNS를 통해 해외 무대의 개인 비평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의 무대는 더 이상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 도쿄 신국립극장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오페라 역시 인기가 높은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정교한 제작 시스템이 눈에 띈다. 반드시 세계적인 스타가 아니라도 최상의 적역을 주역으로 초빙한다. 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은 지휘자와 연출가를 선택하는데, 이 역시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본질에 충실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보다 나은 오페라를 제작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 또한 꾸준하다. 16회 동안 이어져 오는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6.6~7.13)의 노력은 가뭄의 단비다.
특히 올해 축제의 개막작(6.6~8)이었던 글로리아오페라단(단장 양수화)의 ‘카르멘’은 신국립극장의 시스템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기획력이 돋보였다. 높은 예술적 수준과 성악적 요구에 부응하는 주역 가수를 캐스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널리 알려진 아리아와 곡목이 즐비함에도, 만족스러운 ‘카르멘’은 접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번 무대는 예술총감독 양수화의 남다른 심미안으로 훌륭한 가수를 주역으로 기용해 뛰어난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탄탄한 조역진이 조화를 이뤄 앙상블을 이뤄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무대 디자인과 극적인 연출도 풍부한 시각적 효과를 거뒀다(6월 8일 관람).
이날의 빼어난 음악적 성취 가운데, 김재형의 돈 호세는 어떤 찬사로도 현장의 감격을 전하기 어려울 듯하다. 특히 카르멘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호소한 2막의 ‘꽃노래’는 폭넓은 감정의 격변과 폭발적인 고음의 포효, 그리고 객석에 전달되는 정서적인 공감이 그 어떤 연주와도 비할 데 없었다. 드라마의 정점이자 비제 성악 예술의 정수가 드러나는 4막의 카르멘과 돈 호세의 마지막 이중창 역시 좌중을 압도했다.
두 성악가가 쏟아내는 감정의 분출이 놀라웠고, ‘압도’라는 단어 외엔 적절한 단어가 없을 정도로 무대와 객석을 장악했다. 김재형이 만들어낸 거대한 노래의 파노라마와 달리 백재은은 카르멘 내면을 공들여 그려주었다. 화려하고 강렬한 맛이 덜해 주역으로서의 호소력이 덜하긴 했으나, 저항하고 고뇌하는 카르멘이었다. 캐릭터에 투사된 두 가수의 상반된 접근이 흥미로웠다. 에스카미요로 출연한 양준모는 그 누구보다 많은 무대에 오르고 있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배역을 섬세하고 학구적으로 탐구했다. 카르멘을 향한 진실된 애증과 사색으로 가득한 투우사였다. 투명하고 섬세한 미카엘라를 그려낸 강혜정의 수준 높은 연주에도 갈채가 이어졌다.
‘카르멘 모음곡’이 누리고 있는 대중적인 인기가 말해 주듯, ‘카르멘’은 그 어떤 오페라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필요한 작품이다. 이번 연주를 이끈 카를로 팔레스키는 오페라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자로, 한국 무대에서 접한 그의 연주는 언제나 만족스러웠다. 카를로 팔레스키는 이번에도 프랑스 음악 특유의 화사한 색채와 미묘한 리듬보다는 드라마의 역동적인 재현과 일렁이는 감정의 폭발적인 재현에 주력했다. 남다른 규모의 성벽처럼 견고하고, 장성처럼 거대한 관현악의 축제였다.
글 김준형(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글로리아오페라단
THEATER
연극 ‘카르타고’
보호의 명분 아래, 보호받지 못한 존재들
5월 23일~6월 1일 대학로극장
쿼드 연극계의 큰 축제 중 하나인 제46회 서울연극제(5.10~6.28)가 열렸다. 총 8편의 공식참가작 라인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극제에 처음 참가하는 젊은 단체, 젊은 연출가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는 점이다. 연극 ‘카르타고’의 극단 비밀기지와 신진호 연출가 역시 서울연극제에 처음 입성했다. 젊다고 서툰 것이 절대 아니다. 세 번의 심사를 거쳐 선정되는 공식참가작에 이름을 올렸고, 그것과는 별도로 작품의 완성도도 꽤 높다.
연극 ‘카르타고’는 질문을 하는 작품이다. 애니와 토미 모자를 통해 ‘보호’라는 것의 사회적 명분과 의미,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사회적 시스템의 모순을 폭로하면서 문제점을 차근차근 캐묻고 있다.
보호청소년인 애니는 감옥에서 출산을 한다. 사회복지사 수의 도움으로 토미의 양육을 함께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애니는 토미의 제대로 된 양육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다 토미가 범죄를 저질러 소년 감옥에 수감되는데, 토미의 생일날 폭주하는 그를 제재하는 과정에서 토미가 숨진다.
담당 교정관 마커스는 원칙대로 대처했다며 무죄로 확정된다. 토미는 죽었는데, 살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원칙에 입각해 손을 놓고 있었고, 그래서 무죄가 되었다. 피해자가 발생했는데 가해자가 없는 상황. 토미의 죽음은 사회복지와 감옥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보호할 사람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카르타고’의 압권은 빈 무대를 둘러싼 객석의 배치다. 신진호 연출가의 철저한 의도다. 인물의 모든 면이 노출되는 무대는 마치 사각의 링처럼 무대 위 상황을 고스란히 눈에 담게 만든다. 이처럼 둥근 무대의 활용이 낯선 것은 아니다. 무대와 객석의 친연성을 만들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데, ‘카르타고’는 그 일반적 속성을 뒤집는다.
무대에서 목도하는 사건은 마치 맨살의 벌건 생채기를 직접 보는 듯 섬찟하고 잔인하다. 철제로 만든 책상과 의자의 서늘함은 뜨거운 내용에 반비례해 관객들이 차가워지기를 의도했다. 낮게 내려오는 형광등의 창백한 조명도 건조함을 강조한다. 신진호의 연출은 토미의 죽음이라는 뜨거운 사건을 가능하면 차갑게 바라보게, 다양한 장치들을 무대 위에 배치했다. 그 덕분에 관객들은 사건에 대한 분노보다는 옅은 한숨이 배어 나온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차가운 판단은 차가운 무대와 조명을 통해 도출되었다.
그에 반해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뜨겁다. 특히 토미 역의 최호영 배우는 무질서하면서도 애정을 바라는 청소년의 복합적인 행동을 구체적으로 잘 구현했다.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공감하기는 어려운 캐릭터가 배우를 통해 실체를 얻었다. 엄마 애니를 연기한 조수연은 상실의 슬픔과 공허함을 잘 전달했다. 차가운 무대 위에서 펼쳐진 뜨거운 연기는 작품의 균형을 잡으며 관객의 몰입을 증폭시켰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 연극이 낯설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 역시 복지와 보호 시스템에 구멍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르타고’는 신진호 연출가의 과감한 선택과 결정이 작품의 깊이를 더하며 완성도를 높였고, 이는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에 대한 기대도 한껏 끌어올렸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서울연극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