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빈 국립발레 신임 감독 알렉산드라 페리
62세 현역 무용수, 다시 시작하는 행보
런던과 뉴욕, 밀라노를 거쳐 빈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전설의 프리마돈나와 만나다
런던 로열 발레의 최연소 수석무용수로 발탁된 19세의 순간부터, 22년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이하 ABT) 수석무용수로 무대를 장악하고, 라 스칼라 발레로부터 이례적 명예인 ‘프리마 발레리나 압솔루타(Prima Ballerina Assoluta)’를 부여받은 알렉산드라 페리(1963~).
영국의 발레 안무가 케네스 맥밀란(1929~1992)을 비롯해 미하일 바리시니코프(1948~), 웨인 맥그리거 등 세계 무용계의 거장들과 호흡하며 그녀는 춤의 경계를 넓혀왔다. 맥밀란이 그녀를 위해 창작한 ‘발리 오브 섀도즈(Vally of Shadows)’로 21세에 로런스 올리비에 상을 수상했으며, ‘맥밀란의 뮤즈’로도 불렸다.
2016년 한국 공연 당시, 검은 머리를 틀어올린 작고도 앙상한 몸으로 53세의 줄리엣을 생생하게 그려냈고, 작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는 61세의 나이에 ABT의 야심작 ‘울프 웍스’에서 버지니아 울프 역으로 여전한 기량을 증명했다.
이제 페리는 흰색 튜튜를 벗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유럽 고전 발레단으로 손꼽히는 빈 국립발레의 예술감독으로, 서툰 행정가로 다시 발돋움할 차례다. 여전히 넘치는 에너지를 아낌없이 젊은 무용수들에게 쏟으며, 그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열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첫 시즌을 앞두고 진행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페리는 전통과 혁신의 균형, 그녀가 생각하는 리더십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다음은 페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올 가을부터 빈 국립오페라 발레의 감독을 맡게 됩니다.
오로지 발레에 대한 책임감과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무용 분야에서 꽤 많은 경험을 쌓았고, 훌륭한 분들과 함께 일하며 정말 많은 걸 배웠거든요. 그래서 그 경험을 나누고, 젊은 무용수들에게 기회를 열어주고 싶었어요. 늘 그렇듯 저는 최선을 다할 테고 누군가는 제 방향을 따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죠. 사실 이곳은 제가 잘 아는 단체는 아니에요. 줄곧 로열 발레·ABT·라 스칼라·함부르크 발레처럼 익숙한 발레단들과 함께 일해왔기에, 그중 한 곳에서 일하는 것이 저에게 쉽고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곳은 제게 새로운 곳이고, 과거에 이 발레단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었죠. 그리고 빈이 오페라하우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이곳은 음악·오페라·연극·무용 등 문화와 전통이 풍부해요. 전통을 보존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고전 발레를 유지하는 일은 더더욱요. 일부 단체에서는 요즘 고전 발레가 사라지고 있는 현실이니까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반드시 고전 발레단으로서 나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게 제가 여기서 이루고 싶은 목표예요.
새로운 팀 안에서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인간성, 이해, 그리고 무용수와 팀의 구성원들에 대한 존중이 필수적입니다. 더불어 고전 발레와 그 요구 사항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죠. 그래서 전 무용수들에게 진솔하게 다가가고, 번뜩이는 영감을 주고 싶어요. 물론 저도 무용수들에게서 영감을 받고요. 무엇보다 전 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그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22년 세계 무대를 누빈 수석무용수의 변신
여러 도시를 경험하며, 성장을 크게 느낀 시기는 언제였나요?
모든 시기가 제 예술적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단 하나의 모습만 가지지 않듯, 예술가도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죠. 런던에서의 무용수 초기 시절은 특히 결정적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케네스 맥밀란과 긴밀히 작업할 수 있었던 것은, 저 자신도 몰랐던 잠재력을 깨우는 경험이었죠. 이후 뉴욕 ABT로 옮기면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함께 무대에 서는 경험은 또 다른 도전이자 성장의 계기였습니다. 그는 엄격했지만, 그 덕에 제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었어요. 뉴욕의 무대는 다양한 스타일과 공연이 뒤섞인 용광로와 같았고, 아그네스 드 밀, 안소니 튜더 같은 안무가들과 함께 작업하며 저는 또 다른 가능성과 넓은 영역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무대 위를 돌아봤을 때,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나 감정이 있나요?
안무가·파트너와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순간들이요. 예를 들면, 22년간 함께 무대를 만들어온 파트너 훌리오 보카(1967~)와 함께 춤추면서 마음을 나눴던 순간들이 있죠. 이런 순간들은 단순한 공연의 일이 아니라, 제 인생 속 특별한 경험이에요. 최근 몇 년 동안 ‘울프 웍스’(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그린 작품)에서의 경험도 정말 놀라웠습니다. 19살의 나이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마농’으로 데뷔했던 순간도 잊을 수 없고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줄리엣을 연기했을 때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느낀 것도 특별했어요. 저에게 성공이란, 네 살 때 품었던 꿈인 ‘매일 춤추며 사는 것’을 살았다는 특권입니다. 저는 여전히 극장에 가는 것이 설레고, 무대 문을 들어설 때마다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가장 큰 선물이며, 곧 성공이죠.
페리가 오르는 새로운 사령탑의 기대와 포부
당신이 만들고 싶은 빈 국립발레는 어떤 모습인가요?
훌륭한 발레마스터들과 함께 일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첫 달 동안은 훌리오 보카가, 이후 주 발레마스터로는 마르셀로 고메스(1979~)가 무용수들을 이끌 예정입니다. 이들은 제 비전을 이해하며, 예술적·기술적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바탕으로 무용수들을 성장시키는 분들이죠. 또한 빈 국립오페라 발레 학교의 새 원장으로 샌프란시스코 발레에서 오랫동안 디렉터를 지낸 패트릭 아르망도 합류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만드는 새 팀은 반드시 높은 기준을 세워야 하며, 이 단체는 충분히 그 수준에 도달할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시즌, 어떤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나요?
다음 시즌은 고전 발레의 여정을 따라가며, 발레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장들의 작품을 선보입니다. 먼저 ‘지젤’로 시작합니다. 빈 국립발레가 보유한 버전은 저의 스승 엘레나 체르니코바(1939~)의 것이죠. 그녀가 제게 가르친 ‘지젤’이 기억에 남습니다. 미하일 바리시니코프와 저를 함께 지도하셨죠. 또한 알렉세이 라트만스키의 ‘칼리로에’ 초연과 롤랑 프티의 ‘박쥐’를 공연합니다. 줄거리와 음악 모두 완벽히 ‘빈’다운 발레죠. 발란신의 ‘주얼스’, 케네스 맥밀란의 ‘마농’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현대 안무가들의 작품도 포함됩니다. 저스틴 펙·웨인 맥그리거·트와일라 사프의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시즌 마지막은 프레더릭 애슈턴 (1904~1988, 영국의 무용수 겸 안무가)에게 헌정되는 갈라로 마무리됩니다. 여기에는 크리스토퍼 휠든 의 ‘위딘 더 골든 아워’ 초연이 포함되어, 영국 안무가 계보를 이어갑니다.
빈에서 활동하는 동안, 빈 국립발레에 무엇을 남기고 싶으신가요?
빈 사람들은 이미 발레를 사랑하죠. 객석은 늘 가득 차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새로운 관객들도 발레에 빠져들게 하고 싶습니다. 단원들이 자신의 예술성을 마음껏 펼치며, 새로운 무용수를 길러내고, 예술적 비전을 깊이 있게 발전시키는 단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글 이선옥(오스트리아 통신원)
알렉산드라 페리(1963~) 밀라노 태생으로 라 스칼라 발레 학교와 영국 로열 발레 학교에서 수학했고, 1980년 로잔상을 수상했다. 로열 발레(1980~1984)에서 케네스 맥밀란의 ‘로미오와 줄리엣’ ‘마농’ ‘마이얼링’의 주역으로 19세에 로열 발레 수석무용수가 되었다. ABT(1985~2007)와 라 스칼라 발레(1992~2007)에서 수석 무용수로 활동했다. 2025년 9월부터 빈 국립발레 감독을 맡는다.
PERFORMANCE INFORMATION
빈 국립발레 2025 하반기 시즌 일정
9.18~23 지젤 | 2025.10.12~11.10/2026.1.4~12 칼리로에
2025.11.18~12.13 박쥐 | 2026.1.30~2.15 주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