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삶 속에 스며든 아름다운 선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0월 20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1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메조소프라노 이아경

삶으로 스며든 아름다운 선율

 

 

이아경

경희대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베르첼리 고등음악원, 파르마 오르페오 아카데미아를 졸업했다. 벨리니 콩쿠르에 한국인 최초로 우승, 대한민국오페라대상 여자 주역상(2011) 등을 받았다. 한국 가곡 ‘그대 있음에’, 슈만 가곡집 ‘여인의 사랑과 생애’ 등 음반을 발매했다. 2010년 경희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 후, 2021년부터 음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오페라단 ‘화전가’

10월 25·2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최우정(작곡), 배삼식(대본), 정영두(연출 및 안무)/이아경(김씨), 김선정(고모), 최혜경(장림댁), 오예은(금실이), 이미영(박실이), 윤상아(봉아), 김수정(영주댁), 임은경(독골할매), 양제경(홍다리댁) 외

 


 

첫사랑처럼 찾아온 노래

#마스카니 #처음 만난 클래식 음악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라 스칼라 오케스트라·합창단

 

감상 포인트 이후 전개될 내용과 대조적으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비극적 결말을 극적으로 부각하는 합창곡

 

제가 자란 경남 마산(현재 창원)에는 당시 제대로 된 오페라 극장이 없어, 영화관에서 가끔 오페라 공연을 올릴 만큼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살 위 언니가 오페라를 보러 간다기에 어린 마음에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 “나도, 나도”하며 따라나섰는데, 그날이 제 인생 최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만난 날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마스카니의 단막 오페라로, 짧지만 강렬한 전개가 특징입니다. 무대는 19세기 말 시칠리아 작은 마을의 부활절 아침, 남녀 간의 어긋난 사랑과 치정, 질투가 결국 결투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아름답기보다는 사실주의 오페라(베리스모 오페라)가 주는 강렬함이 더 크게 다가왔고, 내용 또한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다소 난잡한 치정극이었지만, 제 머릿속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은 멜로디가 있었으니, 바로 서곡에 이어지는 합창곡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였습니다.

이 곡은 시칠리아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부활절 아침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을 노래하는 작품입니다. 마을 주민들이 부활절을 맞아 들뜬 분위기 속에 부르는 여성 합창과 남성 합창이 교대로 이어지며, 이후 전개될 비극적인 드라마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어, 오페라의 주된 주제인 치정과 비극적 결말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하는 명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6월부터 성악을 시작해, 대학 진학 후 처음 합창으로 출연한 작품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습니다. 당시 대학 새내기였던 저는 합창곡의 첫 부분을 여는 물 긷는 동네 여인 역을 맡았는데, 정해진 음악의 마디에 맞춰 지휘자의 큐 사인 없이 등장해야 했기에 첫 공연에서의 설레는 감정과 책임감, 그리고 자부심까지 더해져 제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된 운명의 곡이기도 합니다.

 

 

하루를 여는 ‘내일’의 선율

#R. 슈트라우스 #‘모르겐’ #일상에서 함께 하는 곡 제시 노먼(소프라노)

 

감상 포인트 1991년 솔즈베리 페스티벌 개막 공연에서 울려 퍼진 제시 노먼의 음성

 

저는 어려서부터 하교 후 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혼자 노래하는 걸 즐기곤 했는데, 성악을 전공한 이후로는 오히려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자주 누리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한 뒤 새로 사귄 전공 친구, 선배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오롯이 홀로 음악과 대화할 기회가 줄어든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 날부터 아침 8시면 학교에 도착해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피아노를 치며 하루를 여는 것을 저만의 루틴으로 삼았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며 1년 반 남짓 노래를 배우고 대학에 진학했기에, 다양한 성악곡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가곡집과 독일 가곡집을 섭렵하듯 여기저기 악보를 기웃거리던 중 접하게 된 곡이 바로 R. 슈트라우스의 가곡 ‘모르겐’이었습니다. 이 곡은 1894년 슈트라우스가 결혼 선물로 아내인 소프라노 파울리네 드 아나에게 헌정한 네 곡의 연가곡 Op.27 중 마지막 곡으로, 새로운 날의 아침을 맞이하는 연인의 행복과 영원한 사랑을 노래합니다. 곡 전체에 흐르는 평화롭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내일 아침 태양은 다시 빛날 거야”라는 가사는 담담하게 독백하듯 감정을 표현하며, 그 안에 담긴 순수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합니다. 이 곡은 피아노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반주로도 자주 연주되는데, 노래가 끝난 뒤에도 바이올린 선율이 이어지며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사랑의 감정을 깊은 여운으로 남기는 듯한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대학 시절, 아침마다 이 곡을 피아노로 연주하며 하루를 시작하던 ‘모르겐’에 대한 저의 짝사랑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을 때면, 슈트라우스가 그려낸 긴 지속음의 여백 속에 제 지친 호흡을 차분히 녹여내며 위로를 받곤 합니다. 예전처럼 자주 연주하지는 못하지만, 대신 훌륭한 연주자들의 노래를 감상하며 일상 속에서 이 곡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나를 불러낸 운명의 아리아

#생상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곡#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올가 보로디나(메조소프라노), 호세 쿠라(테너), 콜린 데이비스/런던 심포니

 

감상 포인트 델릴라가 삼손을 유혹하며 부르는 관능적인 아리아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는 구약성서 ‘사사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생상스의 섬세하면서도 풍부한 음악과 이국적인 색채가 특징이며,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는 델릴라의 세 아리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2막에서 델릴라가 삼손을 유혹하며 부르는 관능적인 아리아입니다.

사실 이 곡은 제가 성악을 전공하기 전, 등교 시간에 매일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 앞 레코드 가게에서 우연히 처음 들은 음악입니다. 매혹적인 선율에 단번에 마음을 빼앗겨, 저도 모르게 매장 안으로 들어가 “지금 나오는 이 노래가 뭐예요?”라고 묻고는, 곧장 제 용돈을 털어 구입한 첫 LP에 수록된 곡이기도 합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앞으로 이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심지어 이 곡이 오페라 아리아인지, 무슨 뜻인지, 어떤 가수가 불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아름다운 멜로디에 홀린 듯 접하게 된 것이었지요.

어려서 배웠던 피아노와 무용을 그만두고 공부만 하던 시절, 피아노보다 노래하기를 더 좋아하던 저를 지켜본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가곡 두세 곡을 배워 진해군항제에서 수상한 것을 계기로, 고2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성악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지만, 이 곡만큼은 제게 그저 감상의 대상일 뿐, 감히 불러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꿈의 곡’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곡은 선율은 물론, 노란색 표지 중앙에 그려진 보라색 아이리스 꽃의 색감 대비조차 마음에 들어, 시간이 날 때마다 턴테이블에 올려 감상하는 곡이 되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이 곡을 공부해 1995년 국립오페라단 무대에 데뷔하는 행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첫 작품 ‘영매’에 이어 ‘파우스트’ ‘리골레토’ 등에 출연했고, 데뷔 2년 뒤에는 예술의전당 주최 오페라 주역 선발 오디션에서 이 곡을 불러 윤이상의 ‘심청’(뺑덕어멈 역)과 베르디의 ‘리골레토’ 두 작품에 동시 출연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유학 중에는 6개의 국제 성악 콩쿠르에서 단독 1위의 영광을 안겨 준 대표적인 곡이기도 했으며, 2021년에는 국립오페라단 ‘삼손과 델릴라’에서 델릴라 역으로 출연하는 등 제게 이 곡은 추억의 곡이자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어 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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