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0월 20일 9:00 오전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À bientôt(또 봅시다), Maestro!

다비트 라일란트/국립심포니 (협연 빅토리아 뮬로바)

9월 5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22년부터 국립심포니의 예술감독을 맡아온 다비트 라일란트가 3년의 임기를 마치는 고별 무대를 선보였다. 프로그램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과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라벨 편곡)으로, 바이올리니스트 빅토리아 뮬로바(19 59~)가 협연을 맡았다.
냉전 시대 소련을 떠나 서방으로 망명한 뒤 오랜 활동을 이어온 뮬로바는 이번 무대에서도 노련한 해석을 보여주었으나, 세월에 따른 기량의 변화가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1악장에서 거친 음색과 오케스트라와의 호흡 차이가 있었으나, 2악장에 들어서면서 절제된 선율 속에 서정성이 살아나 객석을 사로잡았다. 3악장은 보다 힘 있는 활력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전성기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2부에서는 무소륵스키의 피아노 모음곡을 라벨이 편곡한 ‘전람회의 그림’이 연주됐다. 라일란트는 이 작품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색채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프롬나드와 열 개의 악장은 각기 다른 성격을 뚜렷이 드러내며 대비를 이루었고, 특히 마지막 악장 ‘키이우의 대문’에서는 장중한 금관의 울림이 객석을 압도했다. 단원들은 지휘자를 향한 헌정처럼 전력을 다해 연주했고, 짜릿한 전율이 객석을 채웠다.

앙코르로 리아도프의 ‘바바 야가’가 연주된 뒤, 라일란트가 무대를 떠나자 악장 김민균의 리드로 ‘올드 랭 사인’이 울려 퍼졌다. 다시 무대에 선 라일란트는 눈시울을 붉히며 단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고, 감정이 북받친 그의 모습은 지난 시간과 성과를 되새기게 했다.

국립심포니는 이제 새 음악감독 로베르토 아바도(1954~)의 지휘봉을 맞이한다. 지휘 거장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의 조카인 그는 뮌헨 방송교향악단과 볼로냐 시립극장 필하모닉 등을 이끌며 원숙한 경륜을 쌓아온 인물이다. 라일란트가 남긴 진심 어린 마지막 무대는, 국립심포니의 다음 도약을 위한 출발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심포니

 

 

1인극의 강렬한 누락

연극 ‘프리마 파시’

~11.2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프리마 파시(Prima Facie)’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법률 용어다. 그 뜻을 풀어보면 어떤 주장이 그럴듯하고 입증된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뜻한다. 호주의 인권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1963~)는 이 용어를 빌려와 1인극 ‘프리마 파시’를 탄생시켰고, 작품은 2019년 초연 이후 런던 웨스트엔드·브로드웨이에서 재연을 거듭하며, 출연 배우 조디 코머에게는 토니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1인극이라는 특성상 배우 캐스팅이 작품 성공에 큰 비중을 차지할 터, 지난 8월 27일 국내 초연으로 무대를 올린 ‘프리마 파시’는 김신록·이자람·차지연을 트리플 캐스팅하며 기대를 모았다. 각 배우의 주요 무대가 연극, 전통예술, 뮤지컬인 만큼, 같은 작품을 두고도 다채로운 해석과 관객층이 공존하게 했다.(9월 18일 관람/차지연 출연)

무대에 오르는 이는 변호사 ‘테사’. 노동자 계층 출신으로, 성공을 위해 뜨겁게 걸어온 여성이다.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연이은 승소를 일궈낸 변호사 테사가, 후반부는 동료 변호사에게 강간을 당한 피고 테사가 법정에 선다. 극 중 초반부에는 1인극다운 방대한 대사는 물론, 주변 인물들의 말투나 행동을 짐짓 흉내내며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예술에 쉽게 동화된다. 전반부의 테사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명확한 법 제도 속에 ‘변호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테사가 재판을 하나의 스포츠처럼 즐기듯이, 관객도 ‘연극 속 차지연’을 누린다. 뮤지컬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차지연의 연극적 얼굴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중후반부는 다르다. 젠더 쟁점의 적나라한 문장들은 관객을 갑자기 극의 밖으로 쫓아낸다. “여성의 성폭행 경험은 남성이 정의한 법체계에 맞지 않는다”라는 식의 서술은, 무대 위 파격적인 대사가 되기도, 일찍이 젠더 이슈를 민감하게 고민해 왔던 연극 관객을 계몽하기에도 썩 효과적이지 못하다. ‘미투’ 운동에 대한 의미 있는 화답이라는 평을 얻은 이 극본이, 정말 그저 1차원적 계몽의 메시지만을 담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작품이 품은 다층적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선, 세 배우의 해석을 모두 합쳐야 할 듯하다. 차지연의 ‘테사’는 뜨겁게 매력적이었지만 그 눈물에 관객이 경험해 볼 수 있을 다양한 입장, 즉 테사의 어머니거나 배심원, 혹은 시스템 속 순응하는 변호사도, 피해자도, 생존자도 아닌 그저 나로서의 테사가 되어볼 기회가 씻겨 내려가고 말았다.

허서현 기자 사진 쇼노트

 

 

사라지고 싶다, 아니 ‘나는 여기 있다’

연극 ‘마른 여자들’

9월 10~28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연극 ‘마른 여자들’ 원작 다이애나 클라크, 각색·연출 박주영/김별(로런), 김승환(필 외), 김유민(제나), 이세영(로즈), 임윤진·조어진(캣), 정제이(세라), 최정화(캐서린·그레이스), 황미영(릴리)

여자들은 왜 마르고 싶어 할까. 단순히 아름다움을 좇는 허영심일까. 연출가 박주영은 “마르고 싶다는 마음은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은 몸부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의 신작 ‘마른 여자들’은 몸을 둘러싼 욕망과 압박, 그리고 그 속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무대 위에 올린다.(9월 9일 관람)

원작은 뉴질랜드 작가 다이애나 클라크의 동명 소설(2021)이다. 거식증 환자를 위한 시설에 머무는 로즈는 거울이 없는 이곳에서 마른 여자들을 만난다. 그들은 나이도 얼굴도 다르지만,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비춘다. ‘더 마르고 싶다’는 강박적 몸짓은 점점 집단적인 움직임이 되고, 이 움직임은 극의 후반부에서 건강한 몸짓의 에어로빅으로 폭발하듯 이어진다. 고립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이들의 모습은, 파괴가 아닌 연대의 가능성을 비춘다.

무대는 원형으로 구성되어 중심에 가까울수록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세계’, 바깥으로 갈수록 ‘닿을 수 없는 세계’가 겹겹이 드러난다. 배우들은 그 원 안에서 모이고 흩어지고,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인물들의 내면이 확장되고 충돌하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영상이 무대를 가득 채워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고, 배우들의 움직임은 마른 여자들의 고립과 연대를 정밀하게 포착한다.

작품이 다루는 ‘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언어로 읽힌다. 찬성을 의미하는 프로(Pro)와 거식증을 의미하는 아나(Anorexia)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신조어 ‘프로아나(Pro-ana)’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커뮤니티 안에서 여성들은 더 마른 몸을 열망하고, 심지어 섭식장애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박주영은 이러한 현실을 무대 위에서 직접적으로 고발하기보다, 인물들의 몸짓과 관계 속에 은유적으로 담아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섭식장애는 ‘자기 파괴’가 아니라 ‘나는 여기 있다’라고 외치는 자기 증명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몸은 늘 평가와 규율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마른 여자들’은 그 폭력적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연대와 변화를 보여주며, 몸의 해방을 꿈꾸는 목소리를 극장 안에 울려 퍼지게 한다. 결국, 질문은 관객에게 향한다. 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 자유롭고,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가. 무대 위의 원은 닫힌 경계가 아니라, 바깥으로 확장되는 삶의 궤적으로 그려진다.

홍예원 기자 사진 두산아트센터

 


 

DANCE

 

서울시발레단 ‘유회웅 X 한스 판 마넨’

창단 1년, 독보적 궤적과 앞으로의 과제

8월 22~27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한스 판 마넨 ‘5 탱고스’

한국 발레는 세계적 수준으로의 성장과 대중적 확산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으나 ‘창작 역량’ ‘동시대성 확보’라는 오랜 과제가 남아 있었다. 국내 유일의 공공 컨템퍼러리 발레단인 서울시발레단은 이러한 숙원을 풀어줄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는 높은 기대감 속에서 일 년 전 출범했다.

그 후, 차년도의 시작을 알리는 공연으로 서울시발레단은 더블빌 ‘유회웅 X 한스 판 마넨’을 올렸다. 유회웅(1983~)의 ‘노 모어’는 서울시발레단 창단 사전 공연(2024)에서 초연되었고, 판 마넨의 ‘5 탱고스’는 1977년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에 의해 초연된 작품이다. 두 작품은 반세기의 시차만큼이나 많은 부분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노 모어’는 현대 도시인을 상징하는 검정 정장의 남녀 무용수의 폭발적 움직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콘크리트 벽 아래, 통제와 규격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 몸부림은 라이브 밴드의 강한 비트와 함께 솔로 남성 무용수와 그를 둘러싼 군무의 몸짓으로 은유 된다. 가슴을 부여잡고 답답함을 호소하는 현실 속 주인공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통제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면서 꿈에서 깨어나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나아간다.

주인공 역의 강경호는 무력감, 답답함과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온몸으로 분출하면서 풍부하게 표현했다. 안무가 특유의 직관적 표현 방식은 명쾌하나, 주제를 다루는 시선의 평이함과 발레 작품에서 흔히 활용되는 현실과 꿈 구조의 정형성은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보인다.

판 마넨(1932~)의 ‘5 탱고스’는 서사나 캐릭터의 재현 없이, 발레와 탱고라는 두 개의 춤 형식을 결합하여 새로운 움직임 미감을 만들어낸다. 누에보 탱고를 창시한 피아졸라의 음악에 맞춰 14명의 남녀 무용수는 발레 어휘와 문법에 남녀가 밀착된 탱고 특유의 포지션, 강약 조절, 카리스마와 관능미가 더해진 움직임을 수행한다. 무용수들이 탱고의 관능미와 발레의 절제미 양쪽을 모두 보여줘야 하는 안무를 다소 설익은 모습으로 실연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년 10월 ‘한스 판 마넨 X 차진엽’으로 시작된 서울시발레단의 더블 빌 기획은 오는 10월 ‘한스 판 마넨 X 허용순’으로 이어진다. 더블 빌 구성이 한스 판 마넨과 한국인 안무가라는 구성 외에는 주제·형식·맥락적 연계성이 부재해, 이 기획은 서울시발레단의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고전 발레에 익숙한 무용수들이 새로운 움직임 어법과 형식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기에 1년간의 이러한 시도는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이제 막 두 돌이 된 서울시발레단은 목표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는 점에서 기획에서의 전문성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시기임이 분명하다.

한석진(춤비평가) 사진 세종문화회관

※ 10월 30일~11월 2일에 서울시발레단의 ‘한스 판 마넨 x 허용순’이 세종 M씨어터에 오른다. 허용순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발레, 스위스 최리히 발레와 바젤 발레에서 솔리스트로 활동, 독일 뒤셀도르프 발레로 이적 후 2001년부터 안무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현재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리허설 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CLASSICAL MUSIC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키메라의 시대’

세종솔로이스츠,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

8월 27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사람은 누구나 일상이라는 울타리에 갇히기 마련이고, 익숙한 일상은 내게 가장 편안한 세계가 된다.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호기심을 참지 못해 금지된 열매를 먹었고, 일상의 동산에서 나오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가둔 알을 깨며 새로운 세계로의 원정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설렌다.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세계와의 콘택트! 세종솔로이스츠의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이하 ‘힉엣눙크’)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힉엣눙크’(8.22~9.5)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는 김택수의 모음곡 ‘키메라의 시대’였다. 동명의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작(공연 직전에 출간된 번역서의 이름은 ‘키메라의 땅’이다)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인간과 동물의 유전공학적 교배로 탄생한 신인류를 다룬 상상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기에 설렘을 더했다. 음악은 바로크 양식을 기반으로 하여 현악 앙상블에 하프시코드가 포함되었으며, 최나경의 플루트와 드니 성호의 기타가 독주 악기로 합류했다. 특히 베르베르는 이 작품을 위해 직접 텍스트를 작성하고 무대에 올라 낭독하여 문학이 구성한 새로운 세계를 더욱 가까이 전달했다.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문학, 이렇게 객석의 감상자는 중첩된 두 개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며 특별한 원정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모음곡 ‘키메라의 시대’는 창조된 세 종족 ‘디거’ ‘노틱’ ‘에어리얼’을 음악적으로 소개한다. ‘디거’는 저음 현악기, ‘노틱’은 기타, ‘에어리얼’은 플루트로 특정하여 음색으로도 구분함으로써 등장인물의 특징을 직관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이들의 창조와 갈등의 서사도 표현한다. 이야기 속 ‘메타모포시스 실험실’에서 있었던 창조 과정을 각 종족의 모티브 연주를 통해 전개하고, 세 종족의 갈등에서는 앙상블의 각 파트가 서로 다른 음형을 동시에 연주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등, 음악은 적극적으로 서사에 참여한다. 익숙한 ‘디에스 이레’ 선율도 사용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암시한다. 바로크의 인상을 고루 적용했으면서도 현대적인 제스처·화음·음향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점이었다. 마치 비발디가 현대의 음악 언어를 학습하고 작곡한 듯, 300년의 간극을 가진 두 음악적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베르나르의 낭독과 음악의 전개가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은 이 두 세계가 다소 어긋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작은 어긋남은 두 세계의 미학적 결합을 약화한다.

후반부는 실험실의 이름과 같은 R.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이 연주되었다. 23개의 현악기를 위한 이 곡은 각 연주자가 각 파트를 연주하는 거대한 작품으로, 세종솔로이스츠의 연주자들은 오르간처럼 하나의 악기로 융화되었다. 그리고 25분간 이어지는 밀도 있는 소리는 마치 유기체처럼 고귀한 탄생과 웅대한 성장, 그리고 차분한 소멸로 흐르며 위대한 한 인간의 고뇌하는 삶을 노래했다. 온전한 슈트라우스의 현현이었다.

올해도 세종솔로이스츠(예술감독 강효)는 ‘힉엣눙크’에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우리의 예술적 지평을 넓혀주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눙크(Nunc)’, 즉 ‘지금’의 예술을 전해주는 메신저이자 창조자의 역할을 기대하며, 앞으로 탄생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으로부터 얻을 희열을 고대한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세종솔로이스츠

 

 

오충근/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협연 신동일

‘부산’과 ‘오르간’, 두 주역이 빛났다

9월 2일 오후 7시 30분 부산콘서트홀

 

창단 32년을 맞은 민간교향악단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가 57회 정기연주회를 부산콘서트홀에서 개최했다. 무대 위는 현과 관에 더해 다양한 타악기들로 가득 차 있었고, 곧이어 부산 클래식 음악계의 아이콘인 예술감독 오충근이 뜨거운 환호 속에 등장했다.
부산콘서트홀 개관을 기념해 부산심포니가 위촉·초연한 하순봉(1960~)의 교향곡 1번 ‘부산(釜山)’이 서막을 열었다. 1악장이 가진 표제 ‘전설(Saga)’과 ‘바다(Meer)’처럼 작품은 도시의 기원을 품은 신화적 울림과 바다의 파동을 동시에 불러냈다.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 서두를 연상시키는 부유하는 관현악은 수면 아래 잠긴 듯한 음향의 심연을 열었고, 말러와 R. 슈트라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화성 언어는 곧 장대한 관현악의 결을 이루었다. 특히 금관의 포효가 몰아치는 총주 이후, 현과 관의 과잉이 무너져 내리며 만들어낸 파노라마적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이어지는 관현악의 육박 속에서 튜블러 벨이 울려 퍼지며, 음악은 일순간 영화적 서사로 변모했다.

2악장 ‘만가(Nanie)’와 ‘축제(Fest)’의 도입부에서는 창을 하는 듯 현악이 울부짖었고 심벌즈가 방점을 찍었다. 휘모리장단이 스쳐 지나가듯 등장했다가 소강상태로 가라앉고, 다시 어두운 빛깔의 금관이 깊이를 더했다. 하프와 플루트가 서정적인 연주를 펼쳤고, 축제적 질주가 국악적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마당놀이의 신명과도 같은 에너지가 장내를 가득 채우며, ‘부산’이라는 교향곡의 토속적 활력을 드러냈다.

휴식 이후 이어진 2부에서는 생상스 교향곡 3번, 일명 ‘오르간 교향곡’이 연주됐다. 오충근은 암보로 지휘했다. 중앙 상단의 오르간석에는 신동일이 자리하여, 관현악과의 균형 속에 장엄한 색채를 더했다. 1악장의 서두는 정갈하고 단단하게 울려 퍼졌고, 악기들의 여운이 잘 전달되는 부산콘서트홀의 음장감이 새삼 다가왔다. 다소 예각적으로 치닫는 연주 속에서 긴장감이 배어 있었고, 바람에 풀이 눕듯 저음 현에서 고음 현으로 이동하는 일사불란한 음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오르간의 찬란함을 예비하듯 금관악기들의 빛나는 활약이 두드러졌다. 악구를 반복할 때마다 이전보다 확신이 더 얹어진 연주였다.

1악장 2부. 드디어 오르간의 저음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바닥을 울리기 시작했다. 흔히 거칠고 음의 과잉이기 십상인 통상적인 오르간 소리와는 달리, 끝이 둥글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오케스트라와 오르간 음색이 이물감 없이 잘 어우러졌으며, 2악장 1부의 도입에서 현악은 격렬함 속에서도 차가운 치밀함을 품고 있었다. 묵직한 관현악의 양감과 높은 밀도는 오충근 지휘의 트레이드마크였다.

마지막 2악장 2부에서는 오르간 음향이 빛처럼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했다. 신동일이 연주하는 오르간 석 위에서부터 하늘의 소리 같은 찬란함이 쏟아졌고,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의 화합은 마치 축제처럼 어우러졌다. 플루트의 지저귐이 오묘함을 더해주었고, 트롬본이 포효하며 천상의 음악, 그리고 지상의 음악이 만나는 순간을 중재했다. 앙코르에서 오충근 예술감독은 “다음 공연의 예고편을 들려주겠다”라며 R.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도입부를 선택했다. 오르간 음향은 홍수를 이루듯 객석으로 밀려 들어왔고, 장엄한 물결 속 공연은 막을 내렸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데이비드 이/강남심포니 협연 조진주

쇼스타코비치, 음악에 집중하기

9월 10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세기 작곡가 중 쇼스타코비치(1906~1975)만큼 음악회 무대에 자주 오르는 이름은 드물지 않을까. 그의 음악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청취 습관에 어긋나지 않는 음악 언어이면서도 현대적이고 극적인 표현력, 소리로 담아낸 냉전의 역사적 비극과 인간적 고통, 그리고 숨기지 않은 내밀한 저항 등. 감상자는 감성적으로는 그의 음악이 전하는 부단한 삶의 고통에, 이성적으로는 그의 이야기가 전하는 고단한 삶의 행적에 집중한다. 그의 음악은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 그리고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로 확장된다.

그런데 이러한 확장이 그의 음악을 감상하는 올바른 길인지 종종 고민하곤 한다. 메시지가 있더라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처음에 생각했던 표제를 지우면서까지 자신의 교향곡이 절대음악으로 감상 되길 원했던 고전 음악 작곡가들의 이념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전승되어 있다. 실제로 오늘날 쇼스타코비치를 자주 연주하고 듣는 것은 음악 자체가 갖는 극적 매력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다각적 해석이, 작품이 갖는 생명력의 근원이다. 지난 9월, 데이비드 이/강남심포니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적 표현의 구현에 초점을 맞춘 이유다.

데이비드 이(1988~)는 지난 1월 강남심포니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는 이번 연주에서 철저한 악곡 분석과 구체적인 지휘를 바탕으로 철두철미하게 악단을 이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전반부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의 협연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연주되었다. 조진주의 바이올린은 과감한 표현과 남다른 음량 범위로 그 자체로 강인한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1악장 ‘녹턴’에서 관현악은 현악 앙상블의 섬세한 연주로 어둠의 스펙트럼을 만들고, 바이올린은 이를 배경으로 고독한 두려움부터 엄습하는 공포까지 폭넓게 들려주었다. 반면에 2악장 ‘스케르초’는 제스처와 리듬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여 유희적 특징을 드러냈으며, 3악장 ‘파사칼리아’에서 바이올린 독주는 밀도 있는 음색으로 열정을 내면화하고 억눌린 슬픔을 전달했다. ‘카덴차’를 통해 다시 에너지를 얻고, 4악장 ‘부를레스크’에서 바이올린 독주와 관현악은 서커스의 곡예사와 같이 기교적인 제스처를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주고받으며 복잡하고 긴 악곡에서도 거칠고 풍자적인 면모를 유지했다.

후반부는 교향곡 10번으로, 선명한 ‘D-S-C-H’ 동기로 유명한 작품이다(자신의 이름의 독일어 철자(DSCH)를 음이름으로 옮긴 것). 1악장은 전반부에서도 들려주었던 섬세하고 밀도 있는 음산함을 무게감 있게 그려냈으며, 2악장은 큰 음량으로 돌진하는 악장으로서 소란스럽고 다급할 수 있으나 정밀하게 계산된 데이비드 이의 지휘 덕분에 매우 정돈되고 치밀하게 진행했다. 3악장은 각 악기군 앙상블의 고른 활약이 돋보였으며, 4악장은 피날레를 안정적이면서도 구조적으로 들려주었다. 각 악기군 음질의 조화와 춤곡 리듬의 정성적 표현 등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관현악단은 데이비드 이의 지휘에 집중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쇼스타코비치 음악의 화성적 및 구조적 특징을 선명하게 들려주었다. 앞으로 이들의 도전과 발전이 매우 기대된다.

※ 데이비드 이/강남심포니(11월 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엘가 첼로 협주곡(김두민),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외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강남심포니

 

 

아리스토 샴 피아노 독주회

지적인 해석과 세련된 손길

9월 11일 오후 7시 30분 거암아트홀

 

명민한 두뇌와 스마트한 기교를 지닌 아리스토 샴(1996~)의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2025)은 단순한 ‘타이틀 정복’이라기보다는, 그가 앞으로 펼쳐갈 눈부신 행보를 예고하는 긍정적인 신호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거암아트홀에서 열린 그의 독주회는 콩쿠르에서 연주한 레퍼토리 위주로 채워졌다. 작곡가와 편곡자를 고려한 콘셉트가 돋보였고, 만석이었던 청중의 호응을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2022년 우승자 임윤찬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감성의 끝자락까지 낱낱이 그려내는 열정으로 청중을 ‘함락’시켰다면, 아리스토 샴은 특유의 지적인 해석을 통해 작품의 윤곽을 자신만의 의견으로 그려내고, 성실히 연마한 테크닉을 타고난 운동 신경에 결합해 듣는 이들의 폭넓은 취향을 ‘만족’시켰다.

라흐마니노프의 숨결이 담겨 있지만, 바흐 특유의 단정함과 절대음악적 엄격함을 함께 표현해야 하는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 중 세 개의 악장은 테크닉적인 면만 보아도 난곡이다. 샴은 가볍고 유창한 터치로 무대를 열며, 후기 낭만적 농염함이나 짙은 표정 변화 없이, 깔끔하고 명확한 음상과 간결한 뉘앙스를 나타냈다. 이후 바흐의 원곡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부소니 편곡의 파르티타 2번 ‘샤콘’에서는 섬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설정된 연주자의 빌드업이 호감을 자아냈다.

완성도가 돋보인 무대는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였다. 대부분의 피아니스트가 이 곡에서 기교와 내용이 분리되는 연주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샴은 놀랍도록 정교한 기교를 바탕으로 라벨이 전달하고자 하는 시상을 청중의 뇌리에 심어주었다. 하이라이트는 제1곡 ‘물의 요정’(옹딘)으로, 작고 가냘픈 물줄기처럼 시작된 물의 요정이 웃고, 화내고, 마침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 압도적인 에너지로 듣는 이들을 사로잡는 과정을 생생하게 표현해냈다.

무표정처럼 느껴지지만 교묘한 다이내믹 배열로 제시되는 장면들을 알기 쉽게 그려낸 ‘교수대’를 거쳐 돌입한 ‘스카르보’(요괴)에서는 연주자의 뚜렷한 주관이 마디마다 묻어나왔다. 약 9개의 부분으로 나뉜 변덕스러운 악상의 캐릭터 피스에서, 샴은 오히려 그 명암을 더 굴곡 있게 부각하는 동시에 장난꾸러기 스카르보의 달콤함과 추함을 여과 없이 들춰내는 흥미로운 내레이션을 선보였다.

2부에서 연주한 라흐마니노프의 회화적 연습곡 Op.39에서 샴은 비르투오소적 색채를 듬뿍 가미해 한 곡 한 곡 정성을 쏟았다. 특유의 정교한 손동작은 완벽에 가깝도록 조절돼 움직였으며, 이는 4번 b단조와 6번 a단조 등 속도감과 고른 터치가 요구되는 작품에서 빛을 발했다.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스케일과 세련된 피아니즘이 요구되는 1번 c단조와 5번 e플랫 단조에서는 절제되었으나, 적재적소에 사용된 페달링이 돋보였다. 큰 손을 요구하는 화음이나 거대한 사운드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마지막 9번 D장조에서는 여유로운 흐름과 노련한 연출이 흥미로웠다. 아홉 곡의 개성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고려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7번 c단조였다. 장송 행진곡풍의 이 곡은 자칫하면 악상의 지나친 확대로 이어질 수 있으나, 연주자의 혜안은 적절한 어둠과 위안의 정서를 현명하게 만들어내며 전곡의 통일성을 이루는 ‘그림’을 완성했다.

김주영(서울사이버대 피아노과 교수) 사진 에스비유(SBU)

 

 


 

TRADITIONAL

 

광둥 오페라 ‘죽림애전기’

중국 고사(古事)에 담긴, 오늘을 향한 메시지

9월 12·13일 국립극장 달오름

 

순 킴롱(연출), 레이먼드 토 콕 와이(극작), 제이슨 콩(음악감독)/람 틴우(시앙총), 청 아키(지단) 외

국립극장 2025/26 레퍼토리시즌 ‘창극 중심 세계 음악극 축제’(9.3~28)에 광둥 오페라 ‘죽림애전기(竹林愛傳奇)’가 올랐다. ‘광둥 오페라(Cantonese Opera)’는 중국 남부 광둥성·광시성·홍콩·마카오 등에서 공연되는 전통극으로, 월극(粤劇) 또는 광둥대희(廣東大戱)라고도 불리며 광둥어로 공연된다. 항저우가 위치한 저장성 지역에서 발달한 일종의 여성국극인 월극(越劇)과는 다른 장르다. ‘베이징 오페라(Beijing Opera)’로 불리는 경극(京劇)이 북경어를 사용하며 중국 북부를 중심으로 발달했다면, 광둥 오페라는 광둥 지역의 언어와 민요, 음악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죽림애전기’는 2023년 홍콩 아츠 페스티벌 초연 후, 광저우 등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도 공연되었으며, 올해 9월 서울 공연에 이어 중국 선전 공연도 예정돼 있다. 홍콩영화계의 유명 작가 레이먼드 토 콕 와이가 극작을, 광둥 오페라계의 원로 순 킴롱이 연출을 맡았다. 광둥 오페라의 스타 람 틴우(시앙총 역)와 청 아키(지단 역)가 출연해 대중적인 인기도 얻고 있다.

작품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자녀들 이야기를 다룬다. 죽림칠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고통스런 시기 중 하나인 3세기경 위진 교체기를 배경으로,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자연에 은거하며 거문고와 술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현자를 말한다. 공연은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혜강(嵆康)이 반역죄로 사형당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죽림칠현의 자식들이 다시 죽림에 모이면서 시작된다. 혜강의 딸 지단(嵇旦)은 은둔 거사들의 지도자인 각주(閣主)로 성장하고, 상수(向秀)의 아들 시앙총(向沖)은 10년 동안 무예를 익히고 다시 죽림으로 돌아온다. 시앙총은 어릴 적 부모님들이 맺어준 약혼녀 지단을 찾고 있다.

첫 장면은 시앙총과 지단의 재회다. 지단은 외부 군대의 침입에 대비해 귀신으로 분장해 보초를 서고 있고, 시앙총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에 뒤늦게 나타난 완적(阮籍)의 딸 루안 위에칭(케이티 분)과 아들인 루안 푸(소 프리미엄 지니 분)가 시앙총을 놀린다. 억울한 죽음의 원혼이 깃들어 있는 죽림의 어두운 이미지를 날려버리는 경쾌하고 발랄한 장면이다. ‘죽림애전기’는 죽림칠현의 자식들인 지단과 시앙총, 그리고 루안 위에칭과 루안 푸 남매를 중심으로 아버지 세대에 대한 복수의 의무와 자식들 세대의 새로운 삶의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자신들만의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지켜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단은 “아버지는 용기만 있고 계책은 없었죠” “무기를 들지 않고도 스스로 구할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두 번 다시 당파를 일으켜 옛일 반복해선 안 돼요”라며 아버지 세대에 쌓인 원한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복수하길 거부한다. 그는 마지막 장면에서 불타는 죽림을 배경으로,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거문고를 되찾고 시앙총과 함께 떠난다. 두 사람은 “무릎 꿇지 않으리, 간섭받지 않으리”라 노래하며 금슬 좋은 거문고와 검 한 쌍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한다. 거문고와 검은 곧 스스로를 지키는 신념과 힘을 상징한다.

죽림칠현의 이야기는 현재 젊은 세대를 향한 메시지 같았다. 촘촘한 서사와 현대적으로 해석된 인물들, 화려한 무예와 전투 장면들이 어우러져 3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매 순간이 흥미로웠다.

김옥란(연극평론가) 사진 국립극장

순 킴롱(연출), 레이먼드 토 콕 와이(극작), 제이슨 콩(음악감독)/람 틴우(시앙총), 청 아키(지단) 외

 

 

CHOIR

 

국립합창단 ‘스타바트 마테르’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 신앙과 위로의 음악

9월 16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수많은 음악은 슬픔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부모의 탄식보다 깊은 슬픔이 또 있을까. 국립합창단(단장 겸 예술감독 민인기)의 ‘낭만주의 거장의 합창음악’ 시리즈 세 번째 무대는 바로 그 슬픔을 그려낸 드보르자크(1841~1904)의 ‘스타바트 마테르’(1877년 완성)였다.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는 “예수 달리신 십자가 곁에 비통하게 우시며 성모님이 서 계시네”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라틴어 시로, 죽은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절절한 슬픔이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이 시는 중세 이래 수많은 작곡가에게 사랑받아 왔다. 그 가운데 드보르자크의 작품은 특히 깊은 울림을 지닌다.

드보르자크는 1870년대 중반, 연이어 세 아이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 경험이 작품 작곡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단순한 비가가 아니다.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그의 신앙 고백에 가깝다. 이번 공연은 바로 그 ‘절제된 슬픔’의 성격을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지휘자 민인기가 이끄는 국립합창단은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석을 들려주었다.

10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처음 두 개의 악장(‘슬퍼하는 성모’ ‘누가 견디랴’)에서는 어머니의 깊은 슬픔이 드러났다. 하지만 3악장(‘오, 성모여’)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3악장 중반부에 합창이 외치는 “Fac!(하소서!)”은 우리를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함께 슬퍼하는 참여자’로 만들었다. 또한, 7악장(‘동정녀 중 가장 빛나는 동정녀시여’)과 마지막 악장(‘이 몸이 죽을 때에’)에서 들려온 아카펠라 합창은 종교적 경건함을 한층 더 강조했다.

연주의 절정은 단연코 마지막 악장이었다. 1악장의 선율이 다시 등장하며 작품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한편, 음악은 슬픔을 넘어 희망으로 나아갔다. 이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천국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종교적 확신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더욱이 길게 이어지는 모방적 아멘은 숭고함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관현악은 장중하면서도 감정을 과도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오히려 절제된 톤은 작품의 본질을 명확히 부각시켰다. ‘심판의 날’을 묘사하는 9악장(‘불 타오르는’)조차 위압적이고 무섭게 그려내기보다는 굳건하고 담담하게 표현했다. 그럼에도 곳곳에 효과적으로 사용된 표현적인 관악기는 이 작품이 낭만주의 거장의 작품임을 알려주었다.

국립합창단의 이번 공연은 드보르자크의 종교적 신념과 예술적 절제가 잘 결합된 해석을 보여주었다. 연주는 슬픔을 진정성 있게 담아내면서도, 그 슬픔이 절망으로 끝맺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앙 속에서 희망과 평화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했다. 종교적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위로의 무대였다.

유선옥(음악학자) 사진 국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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