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GRATULATION
제8회 성정예술인상 수상
작곡가 이영조

성정예술인상 선정위원회(위원장 서병기)가 제8회 성정예술인상 수상자로 작곡가 이영조를 선정했다. 이 상은 성정문화재단(이사장 김정자)이 한국을 빛내고 예술계 발전에 헌신한 인물의 공적을 기리고자 2018년에 제정한 상으로, 수상자에게는 삼구아이앤씨의 후원으로 상금 3,000만 원이 수여된다. 이영조는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다수의 작품으로 작곡계의 발전과 저변 확대에 힘썼으며, 부지런히 후학도 양성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이영조의 작품 세계를 작곡가와 평론가의 시선으로 돌아본다. 창작의 언어를 통해 서양과 한국의 소리를 ‘혼합’해나갔던 이영조 음악세계의 기둥은 무엇이었을까. 이제 그의 음악은 후학들이 지켜가야 할 한국의 ‘클래식 음악 문화재’와도 같다.
이영조(1943~) 연세대(나운영 사사), 독일 뮌헨 국립음대(칼 오르프·빌헬름 킬마이어 사사)에서 수학 후, 시카고 아메리칸음악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 아메리칸음악원 교수 및 작곡과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및 원장을 역임했다. 한국평론가협회(1998), 한국작곡가회 한국 작곡 대상(2003), 한국비평가협회 한국의 음악가상(2006),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2013), 난파음악상(2015)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문화예술교육지원 위원회장(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장, 시즈오카 오페라 콩쿠르 심사위원 등을 역임한 바 있다.
17세기 유럽에는 험준한 알프스를 경계로 이탈리아의 멜리스마와 협주곡, 독일의 코랄과 대위법, 프랑스의 서곡과 춤곡 등 지역별로 다양한 음악 양식이 분리되어 자리 잡았다. 그러다 18세기가 되어 교류가 잦아지고 타국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지자, 음악가들은 외국의 음악을 연주하고 낯선 양식을 도입 했다.
하지만 새로운 조류에는 반발도 있기 마련, 자국의 자존감이 더해져 갈등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프랑스의 서정 비극과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 대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부퐁 논쟁’이 그 대표적 예다. 반면에 독일은 거리낌 없이 외국의 양식을 수용하며 자국의 양식과 결합을 시도했는데, 그 대표적 작곡가가 바로 바흐였다. 그의 전유럽적 양식 통합은 매우 정교하고 학술적이어서, 통합 자체가 곧 예술이었다. 그래서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호는, 출처에 상관없이, 바흐를 알수록 더욱 공감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의 통합은 타자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환경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며,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 창작음악계를 돌아보며
한국음악도 서양음악이 유입된 이후, 서양의 음악 체계와 한국적 정서의 분리와 통합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의 과정을 거쳤다. 전통음악이 익숙한 초기 세대의 음악에는 민족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났고, 나운영(1922~1993)과 같이 이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런데 전쟁 후 국가 발전을 우선하는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유럽 음악계를 뜨겁게 달구던 현대음악적인 작품과 스타일이 한국에서도 음악의 발전을 위해 추구해야 할 방향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다 한국 사회가 1960년대의 정치적 혼란과 1970년대의 성장과 개발에 매몰되면서, 전통문화를 잃어가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이 켜졌다.
음악에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대에 태어난 당시 젊은 작곡가들은 서구의 음악을 좇기보다 ‘우리의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3세대’라고 칭하며 우리 음악을 고민하고 새로운 통합의 길을 모색했다.
여기서 ‘제3세대’는 전통 음악을 삶을 통해 경험한 마지막 세대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우리 소리를 듣는 경험은 빠르게 줄었고, 접할 기회는 국악 공연이나 학교로 급격히 좁아졌다. 진은숙(1961~)은 2010년 슈테판 드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더 이상 농촌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으며, 김신(1994~)은 필자와의 인터뷰(‘객석’ 2022년 3월호)에서 자신을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제3세대’ 작곡가들은 각자의 성장 환경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전통적 소리 경험과의 거리가 이들처럼 멀지 않았다.
친근함·민족성·현대성이란 과제들
어린 시절 굴뚝청소부의 징 소리를 들었던 이영조는 강준일(1944~2015), 이만방(1945~), 이건용(1947~) 등과 함께 ‘제3세대’에 속한다. 그는 43세에 시카고 아메리칸음악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 줄곧 서양음악을 공부했지만, 카투사로 군복무하던 때에 전통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담당 사령관과 함께 국립국악원에 방문하여 운명과 같이 국악을 접하기도 했다. 그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젊은 시절에 정재국에게 피리를 배웠고, 대학 시절 일본 연주에서 향피리를 직접 연주하는 등 국악은 그에게 음악 활동의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열정적 경험에 스승인 나운영으로부터 배운 한국음악 이론과 자신의 독자적 분석 연구가 더해져, 전통 음악을 체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과 실전 양면으로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를 자연스럽게 ‘혼합주의’로 이끌었다. 여기서 혼합주의란, 음악학자 홍정수의 정리에 따르면, 친근성과 민족성, 현대성의 혼합을 이른다. 친근성이란 우리에 익숙한 조성음악을, 민족성이란 전통음악적 재료를, 현대성이란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무조성 이후의 음악을 의미한다. 사실 민족성 이외에 친근성과 현대성 모두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어서, 20세기 한국 음악에서 나타난 분리와 통합의 흐름은 곧 이들 간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친근성과 민족성의 통합이 부각되었다면, 중기에는 이들과 분리된 현대성이 급부상했고, ‘제3세대’는 이 세 요소의 균형을 맞추는 새로운 통합 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혼합주의라는 실험으로
이영조는 한국적 주제와 소재를 많이 사용한 만큼, 그의 작품 대부분에서 혼합주의를 경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조적 양식과 반음계적 선율, 비지향적 화음이 만드는 음향 효과 등 현대적 음악 언어에, 5음 음계와 새야화현, 전통적 꾸밈음과 리듬, 전통 색채를 가진 타악기 등 민족 음악을 응용한 요소들이 들리고, 친근한 조성으로 긴장을 해소한다. 이렇게 세 요소는 원리나 개념뿐만 아니라 실체적 존재로서 균형 있게 배치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적 기법과 전통적 기법의 조화를 강조했던 국립합창단 나영수 단장의 눈에 띄었고, 1981년 제16회 정기공연 인사말에서 “한국적 소재로 좋은 합창곡을 계속 내어놓고 있는 이영조씨”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반면에 오페라는 합창곡보다는 현대성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오히려 극의 내용과 시각적 장치로 전면에 강조되는 민족성과 균형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서양 악기를 위한 기악곡에서는 민족성을 더욱 실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균형을 성취한다.
이렇게 이영조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유럽에서 발전한 조성음악과 현대음악, 그리고 한반도에서 정립된 전통음악 등 양식의 통합이라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바흐의 통합 작업과 상응하는 시대적 의미가 있다. 바흐가 여러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발전한 양식을 통합하고 시대를 완성했듯이, 전통 음악을 경험한 마지막 세대로서 한 시대를 완성했다.
바흐를 경험하듯이
이후 세대는 더 이상 전통 음악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세계에서 통용되는 현대음악을 추구하며 해외로 나아갔다. 그런데 21세기에 활동을 시작한 세대는 고국을 다시 바라보았다. 서울 올림픽과 IMF의 극복, 한류의 확산을 경험한 그들에게 ‘한국’이라는 정체성에 자긍심이 더해졌다. 이 세대의 작곡가들이 생각하는 한국적 소리는 자신의 경험과 추억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제3세대’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전통적 소리가 아닌, 20세기 말부터 형성된 비교적 최근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낳았다.
그렇기에 이영조의 음악은 재현되기 어려운 독특한 시대성을 지닌다.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고 연주하며 한 시대의 예술을 경험하듯, 이영조의 음악 또한 연구하고 연주하여 통합된 한국음악의 한 시대를 경험하자. 악보가 널리 유통되고, 많은 연주자의 레퍼토리가 되며 감상자의 플레이리스트에 수록됨으로써, 바흐의 음악이 그렇듯이, 우리 시대의 음악으로 재탄생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는 ‘제3세대’, 그리고 그 이전도 다르지 않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요즘은 연주회에서 진지한 작곡가의 작품 발표 단절이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와버려 연주자의 리사이틀이나 관현악단의 레퍼토리에 한국 창작곡이 들어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있다손 하더라도 문예진흥기금 수급을 위한 방편이거나 박영희·진은숙·김택수처럼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사람 몇몇을 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한국 작곡가들이 쓴 음악은 제대로 된 청중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음악 청중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의 음악에 제일선으로 노출되지 못하는 역사상 최초의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처럼 어떤 곡과 어떤 연주자가 살아남아 3~4년 후에 레퍼토리화 되고 자리매김할지는 예측불허기 때문에 함께 키우고 만들어 가야 한다. 대부분 하라고 하니 하고, 치라고 하니 그 곡을 치고 무대에 오르는 것뿐이지 자발적으로 자기가 프로그램을 정해서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연주자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이영조의 작품들이 연주자들의 간택을 받아 간헐적으로 무대에 오른다. 도대체 어떤 연유로 수많은 한국 작곡가 사이에 이영조의 작품만이 ‘서바이벌’ 되었을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혼합’과 ‘절충’으로 한국-서양-삶을 잇다
첫째, 윤이상이 한국 전통음악 중에서 궁중음악을 취했다면 이영조는 민요·농악·풍류방 음악·판소리·범패·가야금·시조 등 방대한 한국 전통적 요소를 혼합하여 작곡의 바탕으로 삼았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였다. ‘처용’ ‘황진이’ 등의 오페라에서는 판소리와 오페라를 결합하였고, ‘정선 엮음 아리랑’은 전통적인 아리랑의 선율을 현대적으로 변형하였다. 그리고 ‘현악 오케스트라와 장고를 위한 협주곡’은 전통 타악기 장구와 서양 오케스트라를 결합하였으며, 일정한 중심음을 가지면서(악보 참조) 무조성과 전자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음재료를 사용하였다. 여기에 전통음악 중 정악에 나타나는 두 가지 계면조의 선율, 즉 완전4도와 장2도 간격의 3음으로 되어 있는 화음인 새야화현, 5음음계, 드뷔시 방식의 6음음계와 여타 자의적으로 구성한 음계가 활용되는데, ‘새것을 위해 옛것을 포기하는’ 유럽 아방가르드가 아닌 이런 ‘혼합과 절충’을 통해 친근성과 민족성 그리고 현대성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
둘째, 이영조의 작품에는 한국의 자연과 사계절, 삶의 감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 연주자와 청중에게 친근한 호응을 받는다. 향수 어린 선율과 서정성, 시적 아름다움이 주가 되어 양악 전통을 계승하고 국악의 요소를 혼합하였다. 전통적인 선율과 리듬을 쓰면서도 거기에 그 자신만의 독특한 현대감각의 화성을 입혔다. 이영조는 우리의 전통음악에 나타나는 장식음들이 단순히 장식이 아닌 숲속의 주된 넝쿨이라고 표현하였다. 전통 관악기에 나타나는 모든 장식을 숲과 숲을 연결하는 칡넝쿨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악보로 옮겨 놓았다.
필자는 이영조가 이와 같은 작품세계를 이룬 이유로 그의 성장배경과 가정환경을 꼽는다. 그의 부친은 가곡 ‘바위고개’와 ‘섬집아기’, 한국인들에게 군가라고 하면 일 순위로 떠오르는 ‘진짜 사나이’의 작곡가인 이흥렬(1909~1980)이다.
남다른 길을 걷고, 남다른 길을 내며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이영조는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울 수 있었고 어린 시절 들었던 곡들이 그의 삶의 기초 영양분이 되었다.
선친에게 직접 피아노와 화성학을 배웠고, 아버지의 친구인 작곡가 김동진에게 선율법과 화성학을 배웠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정재국에게 향피리를 사사하였다. 연세대학교 졸업 후 독일 뮌헨 국립음대에 진학한 이영조의 스승은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이룬 음렬주의의 신봉자인 피에르 불레즈(1925~2016)나 슈톡하우젠(1928~2007)이 아닌, 오스트리아-독일 계열의 낭만성을 계승한 칼 오르프(1895~1982)와 빌헬름 킬마이어(1927~2017)였다. 1980년 귀국 후 그는 모교인 연세대 작곡과 교수가 되었으나, 곧 교수직을 사임하고 시카고로 다시 유학을 떠나 아메리칸음악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전반까지 대한민국의 창작(현대)음악이라고 하면 서울대학교를 위시한 국내의 음악대학에서 만들어낸 작품들이 주가 되었다. ‘그들’이 원하는 바가 창작이었고 현대음악이었다. 물론 간혹 거기서 벗어난 돌연변이들이 끼어 있긴 하였지만 이영조의 악풍은 20세기 서구에서 쇼스타코비치(1906~1975)나 히나스테라(1916~1983) 또는 카푸스틴(1937~2020) 같은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한 작곡가들이 받은 푸대접과 같았다.
하지만 이영조의 음악을 들으면, 관객이 더 이상 쉽게 기피할 수 있는 입에 쓴 알약도 아니요, 학계에 국한된 난해한 활동도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정작 학계에서 권력을 구축했던 이들이 정년퇴임하면서 활동의 영역이 확 줄어들고 고립된 것과 비교하면 이영조의 음악은 꾸준히 음악의 진정한 향유층과 만나고 있다. 이영조는 강석희(1934~2020), 백병동(1936~)과 다르고, 이만방(1945~) 같은 작곡가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한국 작곡가들이 끊임없이 시도하고 공부해도 성공하기 힘든 것은 유럽 음악의 ‘타자’에서 ‘주체’로 변화하여 자신의 동질성을 획득하는 작업일 것이다. 이는 서양인과 같은 수준으로, 또 같은 맥락에서 서양음악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을 의미한다. 더욱이 서양음악 전통의 정수를 이해하면서 유럽인들보다 더 뛰어난 면모를 보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든 어려움이 동반된다. 설령 그런 고통의 과정을 거쳐 그 수준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정작 그들의 모국에서 작품이 수용되지 않거나, 음악감상 시장의 부재, 작곡가의 작품을 학문적으로 연구할 교육기관의 몰락으로 자신의 문화, 환경과는 다른 서구 음악문화의 타자로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음악은 생활의 현실을 진실하게 파악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한 작곡가 김순남의 말처럼, 이영조는 전통문화의 창조와 합리적인 융합, 창조적 계승을 자신이 처한 시대와 사회, 환경, 국민과 동행하고 있다.
글 성용원(작곡가)
PERFORMANCE INFORMATION
성정예술인상 시상식 & 성정콘서트
11월 27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소프라노 이혜정, 테너 손지훈, 바리톤 김기훈
(특별출연 바리톤 박상민·바이올리니스트 이서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