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처음, 울림, 그리고 위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1월 24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2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오르가니스트 신동일

처음, 울림, 그리고 위로

 

 

신동일 연세대학교 졸업, 프랑스 리옹국립고등음악원과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했다. 제20회 그랑프리 드 샤르트르 콩쿠르 대상을 비롯해 다수의 콩쿠르에 입상했다. 여러 음반을 발매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이자 연세대학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재직 중이다.

 

오르간과의 첫 만남

#바흐 #파사칼리아 BWV582 #나를 오르간으로 이끈 연주

피에트 케(오르간)

감상 포인트 피에트 케의 섬세하고 따뜻한 원전연주

 

해외에서 활동하다 보면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파이프오르간이 드문 나라에서 어떻게 오르간을 전공하게 되었나요?” 저는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집안에 음악가가 없었기에 연습을 강요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즐겁게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을 사랑했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기회도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 아버지께서는 제가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까 염려하셔서 1년가량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히려 제가 ‘음악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수녀님께서 오르간 연주회에 함께 가보자고 하셨습니다. 연주회가 끝난 뒤 수녀님은 “오르간을 제대로 배워보라”고 권하셨고, 마침 집에서 눈치를 보느라 피아노를 칠 수 없던 터라 잠시 오르간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오르간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제가 심취해 있던 바흐의 음악을 오르간으로 배운다는 점, 그리고 혼자 연주하는 악기로서 오케스트라에 버금가는 음향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저를 완전히 매료시켰습니다. 그 시절 부산 국제시장에는 음반 도매상이 많았습니다. 저는 용돈을 모아 오르간 음반을 사 모으며 들었습니다. 헬무트 발햐(1907~1991), 칼 리히터(1926~1981), 피터 허포드(1930~2019), 사이먼 프레스턴(1938~2022) 등 거장들의 연주를 반복해서 들으며 오르간 음악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리히터의 강렬한 강약 대비가 돋보이는 바흐 연주와 발햐의 서정적인 바흐 연주, 그리고 피에트 케(1927~2018)의 섬세하고 따뜻한 원전연주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특히 케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제가 추구하는 바흐 해석의 표본으로 남아 있습니다.

 

 

차이콥스키, 마음의 현을 울리다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Op.35 #깊은 울림을 주는 연주

앙드레 프레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협연 정경화)

감상 포인트 강렬한 감정 속에서도 세련된 절제미가 살아 있는 정경화의 연주

 

저는 어린 시절부터 관현악곡을 좋아했습니다. 형님이 팝송을 들을 때 저는 제 방에서 관현악곡을 틀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부산시립교향악단의 정기연주회를 빠짐없이 찾아다녔습니다.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현악기의 생생함과 금관의 장중함은 언제나 마음을 뒤흔들었고, 그 시절 들었던 말러·브람스·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은 음악가로서의 저를 형성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음악이란 무엇인가, 감동이란 어디에서 오는가”를 스스로 묻게 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는 한때 지휘 전공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오케스트라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여러 생명체를 모아 하나의 큰 호흡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의 역할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파리국립고등음악원 재학 시절, 오르가니스트 다니엘 로트의 아들인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 선생님의 지휘 수업을 청강하며 지휘의 매력을 느꼈지만, 결국 제 마음은 다시 오르간으로 향했습니다. 오르간 앞에 앉아 손끝으로 공간을 울릴 때 느껴지는 그 장엄한 고요와 감동은 다른 어떤 악기에서도 얻을 수 없는 감동이기에, 지금까지도 오르간을 계속 연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관현악기 중에서도 저는 특히 바이올린을 사랑합니다. 오르간은 음악의 거의 모든 요소를 표현할 수 있는 악기이지만, 선율의 섬세한 굴곡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언제나 음악의 얼굴과도 같은 바이올린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특히 정경화 선생님의 젊은 시절 차이콥스키 협주곡 음반은 제게 명반 중의 명반으로, 음악을 전공하고 싶던 10대 시절 저는 이 음반을 수도 없이 들으며 음악으로 감동을 전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세월이 흘러 음악을 업으로 삼게 된 지금 다시 들어도, 그 연주는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전에는 미처 듣지 못했던 미묘한 루바토와 프레이징의 숨결, 그리고 음색의 변화가 새롭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세련된 절제 속에서 강렬한 감정이 살아 있는 그녀의 해석은, 제가 낭만음악을 대할 때 추구하는 방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제가 지금도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들을 때 이 음반의 해석을 일종의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연주가 그보다 느리면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처음 접한 음악을 누구의 연주로 듣느냐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사람의 음악적 인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처럼 남은 노래

#제시 노먼 #‘Spirituals’ #친구처럼 곁에 두는 음반

제시 노먼(소프라노)

감상 포인트 귀족적인 기품, 인간적인 따뜻함, 깊은 위로를 품고 있는 제시 노먼의 음성

 

전문 연주자가 된 이후에는 예전처럼 음반을 자주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르간 음반은 특정 작품의 해석이나 음향을 비교할 때만 참고할 뿐, 단순 감상용으로는 관현악곡이나 실내악, 예술가곡을 더 자주 듣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음악이 업이 된 뒤로는 듣는 행위조차 분석적이고 비판적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프레이징·템포·구조·음향의 균형 등을 무의식적으로 평가하게 되어, 감상이 더 이상 마음의 휴식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전혀 다른 장르인 대중음악이나 재즈를 듣거나(그마저도 분석적으로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만), 아무 음악도 틀지 않고 침묵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언제 들어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음반이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계 미국 소프라노 제시 노먼(1945~2019)이 부른 흑인영가집입니다. 그녀의 다소 어두운 색조의 드라마틱한 음성은 귀족적인 기품과 인간적인 따뜻함, 깊은 위로를 함께 품고 있습니다. 절제된 감정 속에서도 절실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노래는 종교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고백처럼 다가옵니다.

위로가 필요할 때, 혹은 모든 것이 지쳐버린 날에 이 음반을 들으면 단순한 선율과 진심 어린 가사에 의해 마음이 정화됩니다. 곡마다 조금씩 다른 편곡과 편성 또한 흥미로워, 영가라는 단순한 형식 안에 얼마나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담길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음반을 들을 때마다 음악이 인간의 삶과 믿음, 그리고 내면의 소리를 담은 ‘기도’일 수 있음을 다시금 느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여전히 이 음반을 제 삶의 귀한 벗처럼 곁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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