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
국립오페라단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막 한국 제작 초연
지금, 여기! 우리를 찾아온 바그너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시리즈 두 번째.
얍 판 츠베덴/서울시향과 함께 국내 오페라 역사의 한 획을 그을 준비를 마쳤다
바그너의 ‘트리스탄 화음(파-시-레#-솔#)’이 처음 세상에 울려 퍼진 1865년. 전통적 조성 어법 위에 쓰여 온 클래식 음악 역사에 새 분기점이 생긴 날이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이 화음은, 그간 조연이었던 불협화음을 음악의 중심에 놓으며 20세기 무조성 작풍의 탄생을 이끌었다. 니체가 말한 ‘가치 전도’, 즉 이제껏 궁극적으로 믿어왔던 것의 가치가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이 거창한 음악사적 순간 위에, 오는 12월 또 하나의 역사가 겹친다. 바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막 한국 제작 초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50주년(2026년)을 앞두고, 시대의 신선한 문화 아이콘으로 떠오른 서울에서, 바그너의 사랑 오페라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까. 러닝 타임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약 6시간. 국내 제작으로 올리는 첫 전막 프로덕션이다. 19세기 음악사에서 ‘트리스탄 화음’이 가치 전도를 일으켰듯, 이번 무대가 한국 오페라계에도 또 다른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국내 오페라 제작 역량 총동원!
지난해 10월, 국립오페라단은 바그너 ‘탄호이저’로 바그너 시리즈의 신호탄을 쏘았다. 필립 오갱이 지휘를, 요나 김이 연출을 맡았고, 국립심포니·국립합창단이 합세하며 240여 분의 오페라를 일궈냈다. ‘탄호이저’를 성공한 국립오페라단이 다음 과제로 받아든 것이, 바로 12월에 공연될 ‘트리스탄과 이졸데’이다.
바그너만큼은, 아직도 우리 오페라계에 ‘과제’라는 표현을 붙일 수밖에 없다. 국내 제작으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공연한 적이 없기 때문. ‘전막 초연’의 타이틀이 아직도 남아있다. 국립오페라는 그간 바그너의 오페라 중 ‘파르지팔’(2013), ‘방황하는 네덜란드인’(2015), ‘로엔그린’(2016) 등을 선보여 왔다.
10여 년 만에 다시 시작된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시리즈는 마치 바그너를 이해하기 위한 커리큘럼처럼 한층 친절하다. 기존 오페라 형식과 유사한 ‘탄호이저’를 선보인 이후,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에 대한 개념이 담긴, 이른바 ‘바그너표 음악극’이라 할 수 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어지는 격이다. 한국바그너협회 유정우 회장은 “두 작품 모두 바그너 입문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 오페라의 진입 장벽인 정치·사상적 개념과 거리가 먼, 바그너 개인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담겼기에 보다 거부감 없이 감상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평면적으로 보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흡사 ‘로미오와 줄리엣’ 같기도 하다. 적국의 원수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사랑의 묘약’을 먹고 사랑에 빠지며,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한다. 결국 이 장대한 오페라는 극적 이야기 전개보다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두 사람의 감정을 따라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중요한 작품. 이에 서울시향과 그 예술감독 얍 판 츠베덴이 나섰다. 얍 판 츠베덴은 홍콩 필하모닉 음악감독 재직 당시, 3년(2015~2018)에 걸쳐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콘서트 버전 음반을 선보인 경험이 있다. 마티아스 괴르네·연광철 등의 노련한 바그너 가수가 참여했었고, 오케스트라는 꼼꼼한 해석으로 장면의 상황을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목·금관의 탄탄한 실력이 필요한 바그너 오페라에서 얍 판 츠베덴이 서울시향과 새롭게 달성할 음악적 성취를 기대해 볼만하다.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바그너용 가수’의 존재 여부다. ‘바그너 성악가는 바그너에게 선택받아야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그의 오페라에는 전문 바그너 성악가가 필요하다. 때문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데뷔는 이를 인정받는 시험대가 되기도 한다. 이번 프로덕션에서는 이졸데 역을 맡은 캐서린 포스터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바 있고, 올해 8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서 포그너 역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한 베이스 박종민이 마르케 왕 역을 맡았다.
공연을 앞두고, 이 모든 그림을 종합해 그려가고 있는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 바이로이트의 히로인 캐서린 포스터와 이메일로 인터뷰를 주고받았다.
INTERVIEW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
‘바그너’라는 우주를 무대로 구현
스위스 출신의 슈테판 메르키(1955~)는 한스 오토 극장장으로 시작, 독일 바이마르 극장장을 역임했다. 스위스 베른 시립 극장 예술감독 재직 당시 ‘로엔그린’(2015/16)을 연출했으며, 2023년 독일 콧부스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유럽·미국·한국 등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이번 바그너 프로덕션이 ‘젊고 뛰어난’ 한국 오페라계 발전에 작게나마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전했다.
2023년 선보인 독일 콧부스 극장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우주를 배경으로 한 연출을 선보인 바 있다. 우주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하나의 은유로서, ‘우주’를 적용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살아가는 세계를 우주라고 본 것인데, 사실 바그너의 언어 자체에 이런 표현이 이미 내재해 있다. 후기 낭만주의자인 바그너는 ‘무한함’ ‘초월’ ‘영원성’에 대한 은유를 고수했고, 특히 ‘진정한 사랑은 죽음을 넘어선다’고 강조했다. 이런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우주 아닌가? 또한 우주는 우리의 삶이 존재하고, 다른 세계와 영향받으며, 더 나아가 존재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성의 공간이다. 이를 가장 강렬하게 시각화한 무대였다.
작곡 당시 바그너는 이 오페라가 미래에 ‘진짜 우주’를 배경으로 할지는 상상 못 하지 않았겠나. 바그너 오페라는 유독 다양한 연출 방식으로 재해석되어 왔다. ‘바그너 오페라’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세계가 우주로 설정된다는 발상은 바그너가 매우 좋아했을 것 같다. 은유 자체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작품 안에 이미 존재한다. 다만 오늘날의 기술을 이용해 그것을 무대 위에 구현할 수 있게 된 것일 뿐이다. 변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이미지화하느냐’이고, 그 이미지는 작품을 받아들이는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
다가올 서울에서의 연출은 기존의 버전과 무엇이 다른가?
여러 방면에서 새롭다. 우선, 무대·조명 디자이너 마라 마들렌 피엘러와 의상 디자이너 필립 바제너와 처음 작업하게 됐다. 마라가 만든 무대를 통해 두 인물의 감정이 명확해졌고, 이들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콧부스 무대에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시공간을 이동해도 동일한 존재였다면, 이번엔 서로 다른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들의 세계를 진정으로 초월하도록 그렸다. 의상에서 이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서로의 세계에 스며들고 겹치면서, 그 세계를 잇는 의미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게 부여했다.
바그너의 음악에서는 어떤 영감을 받는가?
바그너는 삶과 연결되는, 즉 인간 존재의 본질과 닿는 이야기를 탐구한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음악은 살아 있음, 고통, 욕망과 닿아있고,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가끔은 이유가 있어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끌어올린다.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그 방면으로 완성형이며, 가장 완벽한 오페라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전막이 아직 제작 초연 된 적 없어, 이를 하나의 이정표처럼 여긴다. 그러나 오페라 극장 상주 합창단·오케스트라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노력의 성과가 제대로 축적되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한국적 색채를 담은 창작 오페라에 대한 공격적 투자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페라의 정체성을 위해서는 한쪽을 선택하기보다 양쪽 끝에서 모두 출발해 가운데서 만나는 것이 중요할 듯하다. 전통적 기원에 얽매인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만드는 이의 ‘영혼’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큰 의미가 없다. 현재 세계 음악계를 풍부하게 하는 한국 성악가들의 존재는 정말 놀랍다. 한국의 현대 예술 문화가 담긴 서울이라는 도시도 우리 작업에 큰 영감을 주었다. 유럽은 ‘앙상블 극장’ 전통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오페라 작품에 필요한 거의 모든 종류의 음색에 해당하는 성악가들이 상근으로 고용되어 있다는 의미다. 예술적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환경이다. 반면 서울에선 전혀 다른 상황과 배경의 동료들이 작업한다. 각기 다른 문화적 관점을 배우고, 협업하며, 이를 하나로 섞어낼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장점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평생을 극장과 함께 해오며 본인이 정의 내린 무대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대란,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인공적 세계.
INTERVIEW 소프라노 캐서린 포스터
바그너가 선택한 ‘그녀’
캐서린 포스터(1975~)의 전문성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입증한다. 2013년 ‘발퀴레’의 브륀힐데 역으로 데뷔한 이래, 거의 매년 ‘반지’의 브륀힐데 역으로 무대에 올랐고, 2022년 이졸데 역으로도 무대에 오르며 막강한 바그너 관현악을 견디는 드라마틱한 음성으로 사랑받아 왔다. 그는 “전문 바그너 성악가가 되기 위해선 불타는 열정이 필요하다. 인생을 바꾸고, 가족이 있다면 그들의 삶까지 바꾸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은 첫 방문인가?
처음이다. 한국의 문화를 경험하길 정말 기대해 왔다. 2017년부터 내게도 주요 작품이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한국에서 확장하고, 새롭게 만들어가게 되어 기쁘다.
연출가 슈테판 메르키와는 2023년 콧부스 국립극장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도 함께 했다.
슈테판 메르키는 2001년, 내게 독일에서의 첫 배역을 준 사람이다. 이후 그의 첫 오페라 연출작인 ‘토스카’, 바이마르에서의 ‘엘렉트라’ 등에서도 함께 했다. 무엇보다 그는 연극 연출가의 미학에서 오페라에 접근한다. 단순한 동선을 지시하는 대신 텍스트를 진지하게 읽으며 각 인물에 대해 시간을 들여 논의한다. “이 장면에선 이런 감정을 느끼라”고 강요하지 않고 함께 인물의 방향을 찾도록 이끈다. 이는 성악가가 인물의 내면, 그 아래층을 스스로 찾아 움직일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에서 오페라는 단순히 계획된 동작을 넘어, 살아 있는 진짜 ‘극’이 된다.
여러 해에 걸쳐 바그너의 오페라 속 여성 중 ‘브륀힐데’와 ‘이졸데’를 노래해 왔다. 두 여성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있나?
오페라 속 모든 여성, 그러니까 엘렉트라나 투란도트, 레오노라(‘피델리오’), 젠타(‘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아비가일(‘나부코’) 등은 모두 각기 다르면서도 닮은 점이 있다. 바로 압도적인 목적의식. 그 목적이 그들을 움직인다. 브륀힐데는 보탄에게서 사랑의 힘을 배웠지만, 그녀는 지글린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자신을 깨우는 존재가 지그프리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최종적으론 인류를 위해 그를 배신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여정 속에서 압도적인 사랑과 보호 본능을 보여준다. 이졸데의 목적은 어떤 일에서도 트리스탄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의 곁에 머물고, 구하며, 마침내는 그와 함께 어둠 속으로 초월해 들어간다. 바그너의 진짜 영웅들이 언제나 ‘여성’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늘 구하는 존재는 여인이며, 마치 바그너는 이러한 궁극의 희생, 혹은 의무가 오직 여성에게만 가능하다고 느낀 듯하다.
혹자는 ‘바그너 성악가는 바그너에 의해 선택된다’고 말한다. 이에 동의하는가?
적어도 내 경우엔, 확실히 맞는 말이라고 느낀다. 바그너 성악가가 되기 위해선 육체적, 정신적 체력이 필요하다. 만약 바그너의 작품에서 노래하고 싶다면, 불타는 열정이 필요할 거다. 이 일이 곧 삶이 되고, 만약 가족이 있다면 그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다. 동시에 바그너 작품은 확실한 기술적 이해 없이는 절대 시작해서는 안 된다. 목소리가 한순간에 망가질 수 있다. 만약 바그너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음악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언어를 이해해야만 한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국립오페라단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오페라단·서울시향 ‘트리스탄과 이졸데’
12월 4~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프로덕션 | 얍 판 츠베덴(지휘)/서울시향·노이오페라코러스/슈테판 메르키(연출), 마라 마들렌 피엘러(무대·조명), 필립 바제너(의상), 바하디르 함데미르(영상), 크리스티나 콤테세(협력연출 및 안무), 소피 클리아이젠(드라마투르기)
출연 | 스튜어트 스켈톤·브라이언 레지스터(트리스탄), 캐서린 포스터·엘리슈카 바이소바(이졸데), 톤 쿰메르볼드·김효나(브랑게네), 레오나르도 이·노동용(쿠르베날), 박종민(마르케 왕), 이재명(멜로트), 김재열(목동·젊은 선원), 김영훈(타수) 외
INFORMATION
바그너 오페라, 어떻게 들어야 할까?
한국바그너협회 유정우 회장이 알려주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감상 가이드
바그너 대장정에 나서기로 작심한 당신, Welcome to the Wagner World! 복잡하고 긴 초행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바그너 오페라의 특징부터 주요 감상 포인트, 예습을 위한 추천 음반까지 모두 준비했다. 40년 차 ‘프로 가이드’ 유정우(한국바그너협회 회장)의 설명을 따라 걷다 보면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Q. 바그너 오페라, 낯선데요?
사실, 겁부터 나죠. 긴 시간을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 싶고요. 하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입문작으로 좋은 작품입니다. 다른 바그너 작품은 반유대주의의 사상적 특징이 있어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비록 불륜이 소재이긴 하지만, 마틸데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녹여 넣은 작품이라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 보세요.
Q. 음악이 너무 난해하지 않을까요?
초연 당시의 관객에겐 충격적이었겠지만, 말러 교향곡을 수시로 듣는 현대의 한국 관객에겐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말러가 바그너 작품의 위대한 지휘자였고, 그의 음악에서 영감받기도 했으니까요. 말러 교향곡을 들을 줄 안다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멋진 관현악 부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Q. 바그너 오페라는 왜 이렇게 긴가요?
바그너의 오페라는 ‘음악극’, 즉 연극의 흐름을 따르는 작품이에요. 이탈리아 오페라는 축약의 미학이죠. 만난 지 10분 만에 사랑의 2중창을 부르는! 반면 바그너는 극의 기승전결을 중요시했어요. 관객이 공감하기 위해선 극적 긴장을 응축해서 각 막의 절정에서 터뜨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대본도 산문이고, 후렴구 반복도 없어요.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Q. 다른 오페라처럼 성악가가 돋보이지 않아서 아쉬워요.
앞선 이유들로, 성악가들의 발성은 아름다운 노래보다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연극배우들이 감정이 고조될 때 쇳소리가 나면 그것까지도 감정의 일부로 받아들이듯, 바그너 성악가들의 노래도 ‘감정의 표현’이라는 측면에서 감상해 보세요. 더군다나 바그너 오페라는 오케스트라가 성악가의 노래를 ‘반주’한다는 개념이 없어요. 오케스트라가 표현해야 하는 극적 이야기와 역할이 따로 있거든요. 때문에 성악가의 소리는 관현악의 풀 사운드를 뚫고 나와야 하고, 마치 오케스트라의 한 악기처럼 극 안에서 역할로서 기능하는 것이랍니다.
Q. 가장 중요한 장면은 뭔가요?
2막에 등장하는 사랑의 2중창은 후대에도 오마주 될 만큼 명장면이죠. 우리의 사랑을 속살일 수 있는 ‘밤이 진실이다’라는 개념은 당시 19세기 후기 낭만의 유행이기도 했습니다. 이 고조된 2중창은 마르케 왕과 멜로트가 들이닥치며 마무리되지 못하고 갑자기 뚝 끊깁니다. 3막 끝, 트리스탄이 죽고 나서 이졸데는 이 2중창이 끊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요. 사랑의 2중창이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중간에 사랑의 2중창을 못 들으면 결말이 가진 유기성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꼭 놓치지 마세요.
Q. 또 어떤 점에 주목해서 감상하면 좋을까요?
관현악의 특수 악기에 주목해 보는 것도 좋겠어요. 장대한 목·금관 솔로가 많이 나오거든요. 2막 후반부 두 사람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마르케 왕의 독백에선 베이스 성악가가 노래하는 동안 베이스 클라리넷이 홀로 등장합니다. 많은 바그네리안(바그너 애호가)들이 명장면으로 꼽죠. 3막에선 비극적 전주곡 이후 ‘목동의 피리’ 소리가 들립니다. 바그너는 이를 ‘홀츠트롬페테’라는 나무 트럼펫으로 연주해 고대의 소리가 나길 바랐어요. 모든 오케스트라가 이 악기를 가지고 있진 않아서 잉글리시 호른이 이 소리를 대체하곤 하죠. 긴 여정에서 ‘저 건물이 보이면 10분 정도 남았구나’라는 이정표가 있으면 힘이 나듯이 이런 몇몇 악기 소리를 이정표 삼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Q. 공연 전, 어떤 음반을 들어보는 게 좋나요?
우선은 바그너 ‘베젠동크 가곡’을 곁들여 감상해 보시길.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대본 낭독을 듣고, 마틸데가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이거든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위한 습작이라고 바그너가 직접 부제도 붙였고, 세 번째 곡 ‘온실에서’의 선율은 3막에, 다섯 번째 곡 ‘꿈’의 선율은 2막 사랑의 2중창에 사용되었답니다. 음반으론 1966년 칼 뵘 지휘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DG)을 추천합니다. 템포가 빠르기 때문에 명상적 측면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명연주입니다. 영상물은 워낙 구하기가 어렵지만, 그나마 가능한 것을 꼽아본다면 현존 최고의 바그너 지휘자로 여겨지는 틸레만 지휘의 2015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실황입니다. 바그너의 직계 후손인 카타리나가 연출하고 영상물로서도 훌륭합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이 1995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영상물도 추천합니다. 독일 전후 가장 중요한 작곡가인 하이너 뮐러 연출이고, 형이상학적인 무대가 아름답습니다. 비교적 한국 물량이 많아 구하기 쉬울 수도 있겠군요.
정리 허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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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칼 뵘 지휘)
2015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틸레만 지휘)
SYNOPSIS | ‘트리스탄과 이졸데’ 속 등장인물 관계도
트리스탄(Ten.) 콘월의 충성스러운 기사. 사랑의 묘약으로 이졸데를 호송하다 운명적 사랑에 빠지고 결국 사랑과 죽음의 경계로 흘러 들어간다
이졸데(Sop.) 약혼을 강요당한 아일랜드의 공주. 트리스탄과 모든 규범을 거스르는 사랑으로 치달아, 마지막엔 ‘사랑의 죽음’으로 초월을 맞는다
마르케 왕(Bass) 콘월의 왕. 트리스탄을 깊이 신뢰하나 두 사람의 사랑으로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되지만 비극은 이미 벌어진 뒤!
쿠르베날(Bar.) 끝까지 트리스탄을 보호한다. 멜로트와 주인을 위해 싸우며, 트리스탄의 마지막에도 함께한다
브랑게네(M.Sop.) 이졸데와 함께 콘월로 왔다. 독약 대신 사랑의 묘약을 건네 이들의 운명을 촉발하고, 두 연인을 보호하려 애쓴다
멜로트(Ten.) 트리스탄을 질투하여 그의 몰락을 노려 함정을 판다. 결국 비극의 직접적인 방아쇠를 당기는 인물
주요 줄거리
콘월 왕 마르케의 조카 트리스탄이, 아일랜드 공주 이졸데를 마르케 왕의 신부로 데려간다. 트리스탄은 앞서 전쟁에서 이졸데의 약혼자를 죽였지만, 이름을 ‘탄트리스’로 속이고 이졸데에게 치료받으며 두 사람은 사랑을 느낀다. 이졸데는 트리스탄과 함께 죽으려 결심하지만, 시녀 브랑게네가 독약을 ‘사랑의 묘약’으로 바꾸고 약을 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심취하게 된다. 마르케 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밀회한 두 사람은 영원한 밤을 예찬하는 사랑의 2중창을 부른다. 트리스탄의 부하 쿠르베날이 함정임을 알리지만 들이닥친 마르케 왕과 신하 멜로트. 마르케 왕은 두 사람의 배신에 비참해하고, 멜로트가 트리스탄을 찌른다. 상처 입은 트리스탄은 고향 브르타뉴에서 자신을 치료해 줄 이졸데를 기다린다. 하지만 목동의 피리 소리와 함께 이졸데가 도착한 순간, 트리스탄은 숨을 거둔다. 뒤따라온 마르케 왕과 멜로트. 쿠르베날은 멜로트를 죽이고, 이졸데는 마지막으로 ‘사랑의 죽음’을 부르며 트리스탄을 따라 죽음을 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