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올해는 산타에게 음반 선물을 달라고 하자!
12월 성탄의 시간, 내 곁에 놓을 음반 하나를 고른다면?
추위에 쫓겨 종종걸음을 옮기는 연인들 머리 위로, 큰길가 오래된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는 캐럴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한때 도심을 채우던 레코드 가게들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크리스마스가 세상에서 가장 길고 따뜻한 하루이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캐럴 없는 크리스마스는 눈먼 자들의 도시나 다름없으니까. 여기 2025년을 잠시나마 붙들어 매기에 충분한, 겨울의 문턱에서 만나는 클래식 음반을 소개한다.
슈톨렌과 글뤼바인을 곁들여야 할 목소리
크리스마스에는 노래를 들어야 한다.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의 노래라면 누구라도 반길 만하다. 카우프만은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여러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기쁨과 빛으로 가득한 축제의 장면들이 따라온다”고 말한다. 카우프만의 아버지는 연말이면 음반장 깊숙한 곳에서 LP를 꺼내 빙 크로스비, 프랭크 시나트라, 엘라 피츠제럴드 등 재즈 레코드를 틀었다고 하니 고로 그는 ‘분위기를 아는’ 집안에서 자란 셈이다.
어린 시절 잊히지 않는 가족과의 크리스마스 온기를 녹여낸 음반 ‘It’s Christmas!’(Sony)❶는 그래서 특별하다. 분명 크리스마스 트리 둘레에 둘러앉아 불렀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당의 ‘오 홀리 나잇’, ‘징글 벨’ ‘렛 잇 스노우’ ‘윈터 원더랜드’ 등 캐럴 명곡들이 빼곡히 담겼다.
2024년에 카우프만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탄생지인 잘츠부르크 근교의 오베른도르프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프란츠 그루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도 했다. 음반에서는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성 플로리안 소년 합창단·잘츠부르크 바흐 합창단·플로리안 페달니히의 티롤 지방 하프 연주, 틸 브레너의 트럼펫과 플뤼겔호른이 함께하며 요나스 카우프만의 카카오 100%처럼 깊고 쌉싸래한 목소리와 어우러진다.
바리톤 헤르만 프라이(1929~1998)가 1971년 발매했던 크리스마스 음반(DG)❷은 해마다 꺼내 듣기 좋은 겨울의 정석 같은 음반이다. 페터 코르넬리우스(1824~1874)의 크리스마스 작품과 아기 예수를 소재로 한 후고 볼프의 가곡 두 작품이 담겼다. 발매 당시 평론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범적인 해석’이라 호평했다. 프라이에게 최고의 파트너로 손꼽혀 온 레너드 호칸슨의 반주도 더없이 훌륭하다. 크리스마스 밤하늘에 기도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헤르만 프라이의 음성은 잊히지 않는다.
헝가리계 스위스 소프라노 마리아 슈타더(1911~1999)의 음반(DG)❸ 역시 크리스마스를 따스하게 데우는 목소리와 연주로 가득하다. 바흐의 ‘감미로운 기쁨으로’(In Dulci Jubilo)를 타이틀로 삼은 이 음반에서, 슈타더는 1950~60년대 도이치 그라모폰을 대표했던 아티스트 명성 그대로 순도 높은 음성을 들려준다. 독일·프랑스·영국의 크리스마스 캐럴 18곡을 음반에 담은 그녀는, 종소리와 같은 순수한 음성, 젊음이 느껴지는 신선함으로 노래하며 뮌헨 소년합창단과 완벽한 합을 이룬다. 헤트비히 빌그람의 오르간은 눈 쌓인 새벽 골목처럼 조용한 미장센을 조성하며 음악에 깊이를 더한다. 후반부의 수록곡들은 클래식 음악팬들에게도 가치를 일깨운다. 페렌츠 프리차이가 지휘한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의 모차르트 ‘환호하라, 기뻐하라’와 헬무트 헬러의 바이올린과 볼프강 슈톡마이어의 오르간이 함께한 ‘주를 찬양하라’(Laudate Dominum)에서 슈타더는 동곡의 다른 음반들을 능가하는 뛰어난 성악을 보여주고 있다.
성스러움과 은은한 겨울 공기를 담아
레온타인 프라이스(1927~)의 크리스마스 음반(Decca)❹은 1960년대 발매된 이후,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전무후무한 크리스마스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해온 명반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가장 빼어난 여성 성악가로 손꼽히는 레온타인 프라이스의 음성 위에, 헤르베르트 카라얀과 빈 필하모닉이라는 엄청난 서포트가 함께한다. 카라얀과 프라이스는 ‘카르멘’ ‘토스카’, 베르디 ‘레퀴엠’ ‘일 트로바토레’ 등 숱한 작품들에서 호흡을 맞췄고, 세계 오페라계의 흑진주로 불렸던 34살의 프라이스가 우아하고 청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눈 덮인 성당으로 우리를 안내하기에 충분하다. 성스러우면서 매혹적인 크리스마스로 만들어 줄 음반이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서 안네 소피 폰 오터(1955~)의 ‘노엘’(DG)❺을 듣는 커플이라면, 서로에게 한층 더 솔직해지고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게 되지 않을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만큼의 힘이 있다. 음반에는 바흐·시벨리우스·레거 외에도 스웨덴, 노르웨이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이 담겼다. 타이틀 ‘노엘’은 큰 기쁨을 전하는 좋은 소식을 뜻하는 구노의 작품으로 수록돼 있다. 노래와 피아노 독주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다. 레거의 ‘마리아 자장가’, 피아니스트 벵트 포르스베리가 편곡한 ‘예수는 인류의 소망 기쁨 되시니’처럼 귀에 익은 트랙은 물론, 다소 생소한 북유럽 작곡가들의 곡들도 은은한 겨울 공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또 다른 ‘노엘’ 한 장. 고음악 레이블 도이치 하모니아 문디(DHM)❻에서 발매된 이 음반은 생상스·프랑크·구노·포레 등 프랑스 낭만파 작곡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크리스마스의 경건함과 온기를 전한다. 테너 한스 외르크 맘멜이 부르는 프랑크 ‘생명의 양식’, 알토 안케 폰둥이 부르는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 등 귀에 익은 곡들에서도 경건함이 남다르다. 마인츠 바흐합창단과 당대연주 앙상블인 라르파 페스탄테를 랄프 오토가 지휘했고, 녹음은 비스바덴의 성 킬리안 성당에서 진행됐다.
함께라서 더욱 따스한, 크리스마스의 뮤직 프렌즈
호방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사랑받는 바리톤 브린 터펠의 ‘Carols & Christmas Songs’(DG)❼에서는 빙 크로스비와의 사후 듀엣곡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빛난다. 크로스비의 원곡 보컬에 터펠의 목소리와 새로운 오케스트라 연주를 더한 버전으로, 냇 킹 콜과 나탈리 콜의 ‘Unforgettable’을 떠올리게 하는, 빙 크로스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루어진 협업이었다.
프로듀서들은 카디프의 한 콘서트홀에서 크로스비의 오리지널 트랙에 터펠의 목소리와 새로운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정교하게 혼합해 곡을 완성했다. 터펠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가수 중 한 명과 트랙을 공유하는 것은 영광”이었으며, “빙 크로스비는 언제나 완벽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한 테너 롤란도 비야손과 함께한 듀엣 ‘탄생’, 그리고 웨일스 출신답게 고국 웨일스의 캐럴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이 음반의 매력이다. 웨일스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맡았고 하피스트 카트린 핀치도 다수의 수록곡에 참여했다.
얼마 전 NDR 엘프필하모니와 협연하며 한국을 다녀간 바이올리니스트 조슈아 벨의 ‘조슈아 벨과 친구들이 주는 음악 선물’(Sony)❽은 이름 그대로 엄선한 뮤지션들과 함께 만든 크리스마스 협업 앨범이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익숙한 크리스마스 음악들이 다양한 편곡으로 수록됐다.
참여진은 화려하다. 르네 플레밍, 플라시도 도밍고와 같은 오페라의 거장들부터 글로리아 에스테판 등 인기 가수·브로드웨이 가수, 그리고 칙 코리아와 브랜포드 마르살리스 등의 명성높은 재즈 레전드까지. 장르를 가로지르는 아티스트들과의 협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보에와 하프에 담긴 온기
11월 서울 무대에도 올랐던 베를린필의 오보에 수석 알브레히트 마이어와 킹스싱어즈가 함께한 ‘Let It Snow’(DG)❾는 ‘노래하는 오보에’와 ‘즐거움 넘치는 남성 아카펠라’가 만나는 겨울의 향연이다. 킹스싱어즈는 눈, 얼음, 벽난로, 썰매, 크리스마스, 새해 등 겨울의 풍경을 주제로 삼았다. 계절이 차가워질수록 신선한 코러스와 유연한 오보에의 울림은 그 위에서 밝고 따스하게 어우러진다. 타이틀곡은 물론, ‘징글벨’과 ‘북 치는 소년’ 등은 흥겨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딱 맞아떨어진다. 긍정의 온기를 머금은 털실 양말처럼, 끝까지 따스한 감정이 지속되는 앨범이다.
끝으로 하프의 감미로운 선율이 담긴 캐럴 음반 한 장을 더 소개한다.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의 ‘크리스마스 하프’(Sony)❿가 그것. 하프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로, 크리스마스의 오랜 전통과 유난히 잘 어울린다.
빈필의 하피스트 출신으로 전무후무한 하프 솔로이스트로 세계를 누비는 드 메스트르는 크리스마스 캐럴뿐 아니라 관련 있는 관현악 작품들을 하프 독주용으로 편곡해 연주한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를 볼다체프 편곡으로 연주하고 ‘사탕요정의 춤’은 본인이 직접 편곡한 해석으로 선보이고 있다. 하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카를로스 살제이도의 캐럴 변주곡이나 패러프레이즈도 들을 만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 곡을 듣는 모든 이들의 소원도 조용히 이루어지기를!
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