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정교한 호흡, 단단한 울림
키릴 페트렌코/베를린 필하모닉 (협연 김선욱)
11월 7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를린 필하모닉이 다시 한국 무대에 섰다. 2019년부터 악단을 이끌고 있는 키릴 페트렌코는 이번 투어에서도 밀도 높은 해석으로 베를린필의 현재를 선명하게 보여줬다. 객석을 가득 채운 공연은 바그너·슈만·브람스로 이어졌고, 특히 최근 발매된 페트렌코/베를린필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을 가장 최신의 실연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첫 곡은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목가’로, 페트렌코는 빠른 지시 없이 손끝으로 흐름을 가다듬으며 악단의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모았다. 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이 차례로 드러내는 선명하고 유려한 선율은 작품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를 차분히 이끌었고, 금관과 현악이 이를 부드럽게 감싸며 베를린필의 단단한 앙상블이 돋보였다.
이어지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에서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무대에 함께 올랐다. 1악장에서 김선욱의 해석은 점과 선을 분명히 나누는 듯한 뉘앙스를 보였고, 베를린필의 응집력 있는 사운드에 다소 눌린 듯한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카덴차에 이르러서 그의 연주가 비로소 자신만의 결을 드러냈다. 빠른 음형 사이에서도 구조와 흐름을 명확히 세워가는 장점이 살아났다.
2악장에서 김선욱은 강약 대비를 섬세하게 조절하며 선율의 결을 가볍게 다듬었고, 베를린필의 연주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페트렌코 역시 솔리스트의 공간을 세심하게 확보하며 호흡을 맞췄다. 3악장은 해석의 차이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악장이었다. 페트렌코와 베를린필이 빠르고 탄력적인 스타카토를 밀어붙일 때, 김선욱은 약간 더 느린 호흡으로 조율했다. 솔로와 오케스트라의 템포가 맞춰졌다가도 다시 쫓고 밀리는 순간들이 스치며, 작품의 생동감이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2부에서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이 연주됐다. 음반 발매로 화제를 모은 이 작품에서 베를린필은 자신들의 사운드를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증명했다. 1악장부터 악단 전체의 집중력과 개별 단원들의 뛰어난 기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에마뉘엘 파위(플루트),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슈테판 도어(호른) 등 스타급 관악 단원들의 음색은 작품 곳곳에 세련된 빛을 더했다. 특히 4악장에서 울려 퍼진 호른의 장대한 선율은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견고한 현악군의 화성 위로 금관이 자연스럽게 쌓이며, 작품의 정점을 안정감 있게 만들어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빈체로
오스트리아에서 온 모차르트 사운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협연 재닌 얀센)
11월 5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1952년 창단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는 오랫동안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사운드’라는 별칭으로 불려 왔다. 창립자 베른하르트 파움가르트너가 제시한 ‘각자의 개성을 유지하되 앙상블의 호흡으로 음악을 완성한다’는 실내악적 철학은 지금까지 악단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지난 11월 5일 내한 공연에서도 이 악단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연주자들이 자리를 잡고 리더 그레고리 아흐스가 입장하자 첫 곡인 모차르트 교향곡 10번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약 10분 남짓 이어지는 이 짧은 교향곡은 3악장 구성의 작품으로, 경쾌한 선율과 리듬으로 오페라 서곡을 연상시켰다. 카메라타 잘츠부르크는 밝고 가벼운 음색으로 초기 모차르트 작품 특유의 생동감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이어진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은 이날 공연의 중심이자 가장 큰 기대를 모은 연주였다. 협연자 재닌 얀센은 밝은색의 긴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1악장에서 오케스트라 서주가 끝난 뒤 짧은 정적을 두고 첫 음을 그어 넣으며 연주를 시작한 얀센은 가벼운 보잉으로 리듬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2악장에서는 섬세한 루바토가 돋보였다. 감정선을 넓게 펼치는 방식이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곡의 서정성이 충분히 살아났다. 3악장 론도에서는 특유의 비르투오소적 기량이 빛을 발했다. 연주가 끝난 뒤 얀센은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아다지오’와 파르티타 2번을 연이어 앙코르로 들려주며 여운을 남겼다.
인터미션 이후에는 카메라타 잘츠부르크의 단독 무대가 이어졌다. 슈베르트 교향곡 5번에서 아흐스는 때때로 자리에서 일어나 단원들과 눈짓과 몸짓으로 호흡을 맞추며 실내악적 리드에 가까운 방식으로 음악을 정돈해 나갔다. 단원 개개인의 소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면서도 전체의 흐름이 흔들리지 않는 균형은 카메라타가 지향하는 ‘자유와 신뢰’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여기에 재닌 얀센의 유려한 해석이 더해지며,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온 음악이 서울 무대에서 또 하나의 생생한 순간으로 완성되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롯데문화재단
다시 피어나리라는 약속
부퍼탈 탄츠테아터 ‘카네이션’
11월 6~9일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
2000년 한국 초연 이후, 사반세기를 지나 다시 만난 피나 바우슈의 ‘카네이션’. LG아트센터 역삼 시대를 9천 송이의 카네이션으로 열었던 무대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추억이고,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귀로만 들었던 이들에겐 확인의 시간이었다.
막은 공연 시작 전부터 이미 올라 있다. 카네이션밭이 있다는 걸 이미 모두가 알고 왔을 테니, 마음껏 즐기라는 듯 말이다. 공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 SNS에 올릴 사진을 찍는 관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 모습이었을 테다. 두 번째 ‘격세지감’은 확연히 늘어난 한국말 대사 분량이다. ‘탄츠테아터’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대사 비중이 꽤 높은데, 무용수들이 대부분을 한국어로 소화한다.
공연의 전개는 다소 파편적이다. 심장에 마이크를 대고 듣는 박동 소리, 객석으로 내려와 말을 거는 무용수, 드레스를 입고 천진난만하게 추는 춤…. 그러나 이내 꽃을 ‘짓밟는’ 장면도 이어진다. 딱딱한 양복 차림으로 “여권”을 요구하거나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철골 구조물에서 가차 없이 뛰어내리기도 한다. 쑥대밭이 되어버린 곳에서 무용수들은 정신없이 춤 같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춤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모든 장면이 마치 끊임없이 말을 건네듯 관객을 강하게 흔든다. 감각이 사뭇 날카로워 웃기지만 씁쓸하고, 순수하지만 아련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카네이션밭엔 공연의 자국이 가득하다.
마지막은 예상외로 다정하다. 무용수들의 요청에 의해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봄-여름-가을-겨울을 의미하는 율동 같은 손짓을 따라 한다. 꽃이 쓰러진 곳에도 언젠가 다시 봄이 올까. 유명한 작품을 봤다는 단순한 만족감으로 공연장을 떠난 당일과 달리, 다음날엔 작품 속 등장한 재즈곡 ‘The Man I Love’가 하루 종일 맴돌며 ‘피나 바우슈’라는 뭉근한 자국을 남겼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Studio AL/LG아트센터
전통 춤 맛보기
서울시무용단 ‘미메시스’
11월 6~9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서울시무용단이 올해 마지막 신작으로 ‘미메시스’를 선보였다. 전통 춤의 형식을 넘어 본질에 집중하겠다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학적 개념을 빌려와 제목을 붙였고, 그 아래 각양각색의 전통 춤이 8개가 나열됐다.(기자는 6일 프레스콜 전막 관람)
공연은 지루할 틈이 없다. 우선, 전통의 색감은 유지하되 팔꿈치와 손·발끝의 움직임을 드러낸 모양의 의상이 눈을 사로잡는다. 아름답게 등장한 무용수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음악이다. 궁중 음악부터 연희까지, 전통 음악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장르가 5~10분 단위로 변화하는데, 유인상 음악감독은 춤을 위해 새롭게 곡을 썼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피트 아래에서의 실황 연주는 ‘제대로 된 전통 공연을 보고 있다’는 만족감을 가득 채워준다.
허나 동시에 춤 공연에서 누릴 수 있는 몰입감은 찾기 어렵다. ‘전통 춤’이라는 광범위한 대상 속에서 끌어올린 탓에 나열된 여덟 춤의 시대적 혹은 미학적 공통점이 없다. 한 번도 전통 춤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적합한 ‘전통 춤 메뉴판’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안무가는 각 전통 춤에 물(교방무), 바람(한량무)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를 연결해 냈으나, 직관적인 춤사위가 예상보다 많아 우리나라 역사 속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대로 담았다는 점에 더 무게가 실려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등장인물의 귀천이 없다는 점. 기생(교방무), 선비(한량무), 농민(소고춤), 화랑(장검무), 스님(승무), 무속인(무당춤), 임금(태평무)이 떠올랐고, 장검무와 승무 사이의 ‘맨손살풀이’는 직업으로서의 명칭은 없으나 삶의 애환을 진 어머니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번 공연엔 TV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에 출연하며 화제를 모은 기무간이 객원무용수로 참여했고 ‘장검무’에서는 독무를, ‘태평무’에서는 군무의 중심에 섰다. 올 한 해 서울시무용단은 ‘일무’(레퍼토리작), ‘스피드’(신작), 그리고 ‘미메시스’까지 모든 공연마다 매진에 가까운 기록을 세웠다. 열렬한 관객이 주는 동력으로 이들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무엇일지, 다가올 해의 행보를 유심히 관찰할 때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알렉상드르 타로 피아노 독주회
세련된 자유, 프랑스 음악의 확장
11월 1일 오후 5시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프랑스인들이 만들어 내는 예술의 향취는 그 여운이 오래 갈 뿐 아니라 접할 때마다 그 의미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듯 다가온다. 알렉상드르 타로(1968~)의 독주회를 듣고, 그 다채로운 변신이 끝없이 추구하는 자유로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프랑스 음악가들에게는 명실공히 ‘라벨의 해’ 였던 올해, 그야말로 ‘프랑스적’인 이 작곡가를 통해 프랑스 피아니스트들이 그리는 이상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라벨의 위대함이나 클래식 음악이 요구하는 엄격한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히 자유를 누리는 듯했다. 한 곡을 제외하고 모두 프랑스 음악으로 채워진 타로의 독주회 역시 그만의 독특한 스토리텔링과 사랑하는 음악을 자신만의 색으로 채워보겠다는 즐거운 욕구가 청중을 미소짓게 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 K331은 물 흐르듯 흘러나오는 타로의 즉흥연주 풍 패시지가 빛났다. 변주곡 형식의 1악장에서 반복 때마다 보여준 장식음과 변형된 음형은 의도된 것이 아닌 듯 명랑한 서프라이즈로 가득했다. 이어지는 2악장 미뉴에트와 ‘터키 행진곡’의 론도에서는 안정감을 전달하는 진행이 의외의 요소로 느껴졌는데, 발랄하고 가볍지만, 작곡가가 지닌 우아함의 선을 넘지 않는 혜안이 재치 있었다.
뒤이어 연주된 라모 ‘새로운 클라브생 모음곡’ a단조는 타로의 경력 초창기부터 그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중심 레퍼토리다. 사실적이면서도 악기의 고유한 질감을 섬세하게 살려주는 부천아트센터의 음향을 최대한 활용한 타로의 손끝은 고상한 발레리나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며, 가벼움과 상큼함을 우아하게 표현했다. 귀족적 정서가 스며 있는 ‘쿠랑트’와 ‘세 개의 손’에서는 내적인 율동감이 두드러졌고, 고도프스키를 비롯한 후대 작곡가들의 영감을 자극한 ‘사라반드’에서는 기존 음원보다 연약하고 예민한 터치를 들려주었다. 비르투오소적 접근을 기대하게 마련인 ‘가보트와 6개의 변주곡’에서는 예상과 달리 특유의 유창한 진행과 곡선에 가까운 다이내믹으로 개운한 클라이맥스를 연출해 냈다.
후반부 타로가 보여준 프랑스 근대 음악의 향연은 피아노가 보여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샹송 축제’였다고 할 만하다. 풀랑크, 사티 등 친숙한 작곡가들의 선율은 전설적인 샹송 가수들의 노래와 자연스레 겹쳐졌다. 샹송과 재즈의 경계를 무너뜨린 샤를 트르네(1913~2001)의 명곡들은 프랑스 6인조와 장 비너,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의 자유로운 편곡으로 다시 태어났고, 타로의 감각적인 터치와 극도의 세련미는 듣는 이들을 떠들썩한 20세기 중반 파리의 카페로 데려갔다.
피날레에서는 노래와 춤을 아우르는 메들리를 자신의 즉흥연주로 마무리하며 절정을 이뤘다. 에디트 피아프, 바르바라 등 샹송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익숙할 아티스트들의 선율이 차례로 등장했고, 타로가 교묘히 배열한 멜로디와 테마의 대위법적 처리는 피아노 음향과 엮이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
올해 10월 발매된 ‘피아노송’(Erato)에 수록된 작품들이 어떤 이유로 선곡되었고 어떤 순서로 배열되었는지, 그 해답을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는 무대였다. 지적이면서도 정돈된 감성을 지닌 타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피아노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 매력적인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연출력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 준 자리이기도 했다.
글 김주영(서울사이버대 피아노과 교수) 사진 부천아트센터
나탈리 드세이 고별 무대 지중배/KBS교향악단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11월 13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1965~)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나이팅게일’이었다. 고난도의 멜리스마를 유려하게 휘돌리는 특유의 보칼리제는, ‘콜로라투라 디바’라는 칭호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을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2013년, 그녀는 돌연 오페라 무대에서 물러났고, 그후 오히려 활동 반경을 넓히며 재즈·뮤지컬·샹송까지 넘나들었다. 그리고 예순의 나이에 “이제는 클래식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KBS교향악단의 ‘마스터즈 시리즈’는 그녀가 클래식 음악 레퍼토리로 선보이는 사실상의 ‘고별 연주회’였다.
1부는 성악가로의 시작을 이끈 모차르트의 아리아, 2부는 그녀에게 신선한 영감을 준 미국 음악으로 채웠다. 드세이는 직접 영어로 곡의 배경을 설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관객들은 이에 호응하며 어느새 살롱 콘서트처럼 친밀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지중배가 이끄는 KBS교향악단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서곡을 경쾌하게 연주하며 연주의 시작을 알렸다. 현의 극적 표현과 목관 음색의 어우러짐이 인상적이었다. 큰 갈채 속에 등장한 드세이가 아리아 ‘그대를 잊으라니요?’ K.505를 들려주자 충분한 성량의 목소리는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으며, 맑은 음색의 멜리스마에는 흠을 찾기 어려웠다. 다만 중저음에서 힘이 실린 비브라토가 극적 표현을 방해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이어 드세이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온 피아니스트 필립 카사르는 ‘론도 K382’ 협연 무대를 들려주었다. 관현악과 피아노가 재치있는 제스처를 여유롭게 주고받으며 음악적 유머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드세이가 등장하여 ‘피가로의 결혼’ 중 수잔나와 백작부인의 아리아 세 곡을 노래했다. 그녀에게 기대하는 완벽한 음정과 맑은 음색은 여전했으며, 객석에서는 박수 소리와 함께 은퇴를 아쉬워하는 탄식이 들려오기도 했다. 청아한 고음은 여전했지만,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상체를 사용해 소리를 밀어 올리는 모습은 시간이 남긴 흔적처럼 보였다.
2부의 문은 조지 앤타일의 관현악곡 ‘장미 정령의 왈츠’가 열었다. KBS교향악단은 3박자 왈츠의 쾌활함과 변칙적 조성의 불안함 사이 간극을 에너지원으로 삼고 2부를 축제 분위기로 시작했다.
이어진 메노티의 오페라 ‘영매’ 중 ‘모니카의 왈츠’에서 드세이는 노래에 내재한 1인 2역을 타고난 연기 감각으로 소화하며 생생히 전달했다. 마지막 곡은 프레빈의 오페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중 ‘난 마법을 원해요’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섬세함과 청자에게 호소하는 강렬함 사이를 오가며 뛰어난 극적 표현에 불안한 심리 표현까지 들려줬다. 앙코르곡으로 들리브 ‘라크메’ 3막 중 ‘당신은 내게 달콤한 꿈을 더 많이 베풀어 주었어요’를 부르며 아름다운 모국 프랑스 발성을 뽐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20세기의 리듬과 선율에서 한층 활력을 얻는 듯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자유롭게 반영할 수 있는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그녀의 목소리는 여러 장르와 다양한 공간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길 기대한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KBS교향악단
로렌스 르네스/국립심포니 협연 마틸다 로이드
브루크너식 미로 탈출의 낭만적 여정
11월 1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좋은 리더’란, 어떤 사람일까? 목소리가 크거나 카리스마가 있는 모습이 떠오르진 않는다. 중요한 건, 정확한 지도력이다. 바그너, 하이든, 브루크너를 지휘한 로렌스 르네스(1970~)는 정교하고 세밀한 브루크너 교향곡 지도로 단원과 관객을 모두 사로잡았다.
첫 곡은,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이었다. 도입부가 다소 소극적으로 들리는가 싶었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더블베이스와 팀파니가 지휘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바그너의 웅대함을 살렸다.
이어진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Hob. VIIe:1)은 여러모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실연으로 자주 듣기 힘든 ‘트럼펫 협주곡’이라는 장르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좋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혹은 옛 TV 프로그램 ‘장학퀴즈’로 친숙한 멜로디는 3악장 도입에서 작은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관객에게 반가움을 안겼다. 영국의 트럼피터 마틸다 로이드(1995~)는 2023년 영국의 클래식FM이 ‘30세 이하 30인의 라이징스타’로 선정하기도 한 실력파로, 따뜻한 음색의 하이든 음악을 들려주었다. 국립심포니의 바이올린 파트도 순수하고 담백한 음색으로 이 따스한 솔로를 감쌌다. 오케스트라와 트럼펫이 서로 공감하며 함께 호흡한, 2악장 연주도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로는 마리안나 마르티네스(1744 ~1812)의 ‘라 템페스타’ 중 ‘마침내 폭풍우 속에서’가 연주되었다.
인터미션 후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낭만적’(1878/ 80 버전)이 시작됐다. ‘앞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들이 펼쳐지겠다’는 기대감을 주는 데에 성공한 1악장이었다. 이에는 역동적인 비올라의 활약이 중요했다. 소리와 자세를 가다듬고 신중하게 시작한 2악장은 율동적 박자 아래 노래가 잘 흘러나왔다. 국립심포니의 장점, 정제된 현악 파트와 역사 있는 파트별 일치성이 드러났는데, 이 지점부터 지휘자 로렌스 르네스와 국립심포니가 좋은 화학 작용을 일으켰다는 확신이 왔다. 지휘자의 박자에 단원들이 만족하여 춤추었으며, 과시적이지 않으면서 분명한 지휘에 단원들의 고개가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회심의 3악장 스케르초에서 트럼펫을 포함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설 듯한 적극성으로 브루크너식 활기를 표현했다. 르네스는 스웨덴 왕립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좋은 평판을 쌓은 지휘자답게 곡의 드라마를 잘 이끌어 관객을 몰입시켰다. 다행히 그는 올바른 지도를 지녀, 어둑할 정도로 우거진 숲을 지나고 세차게 흐르는 물을 건너야 하는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미로를 아름답게 빠져나갔다. 브루크너의 낭만이 색채를 바꿀 때마다 지휘자의 비트에 현과 관을 정렬시킨 팀파니의 타이밍이 곡에 내재한 불꽃에 제때 산소를 공급했다.
책을 쓰는 사람의 첫 독자는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음악의 중심에서 단원들부터 지휘자의 드라마에 매혹되어 연주한 ‘낭만적’은 관객들의 심장도 두근거리게 했다. 곡이 끝난 후 르네스는 열띤 환호와 박수를 단원에게 일일이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단원들에게 자신의 손 키스를 전했다. 뜨거운 분위기 속에 바그너 ‘로엔그린’ 3막의 서곡이 앙코르로 연주되었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국립심포니
파벨 하스 콰르텟 리사이틀
네 줄의 파동, 4중주의 대담함이 빛나다
11월 11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베로니카 야루슈코바(제1바이올린), 마레크 즈비에벨(제2바이올린). 시몬 트루스카(비올라), 페테르 야루셰크(첼로)
마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트레몰로에 가슴 졸이고, 불협화음이 터질까 조마조마해하며, 위태롭게 이어지는 춤곡 리듬에 긴장이 고조된다. 이토록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현악사중주 연주는 처음이었다.
체코 작곡가 파벨 하스(1899~1944)의 이름을 따서 2002년 프라하에서 창단한 파벨 하스 콰르텟은 드보르자크와 야나체크 등 자국 음악가들의 작품을 특히 잘 연주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10년 전 내한 공연에서 들었던 야나체크 ‘비밀편지’의 찌르는 듯 강렬한 E음이 아직도 귓가에 스치는 듯했다.
그런데 이번 내한에서 그들은 슈베르트와 베토벤을 골랐다. 매우 유명한 정통 현악 4중주 레퍼토리를 들고 온 탓에, 파벨 하스 콰르텟만의 개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그들의 연주는 흡사 즉흥연주처럼 들렸고, 잘 알려진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4중주가 낯설고 새롭게 들렸다.
첫 곡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2번 ‘단악장’에선 약간의 실수가 있었고 전체적인 음량도 작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지나치게 넓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곡으로 연주된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 연주가 시작되자 제 페이스를 찾았고,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음악에 깊이 몰입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인 이 작품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도 다뤄질 만큼 유명한 곡이지만 파벨 하스 콰르텟의 연주는 매우 참신해서 마치 21세기에 새롭게 작곡된 곡처럼 들렸다. 특히 매우 대담한 스케르초 악장인 2악장에서 파벨 하스 콰르텟의 개성이 잘 부각되었다. 마치 여러 가지 형태의 점과 선을 불규칙적으로 그려놓은 듯 다채로운 악센트를 살려 연주한 스케르초는 참신했고, 그 덕분에 느린 3악장의 서정적인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였다. 베토벤이 ‘힘들게 내린 결심’이라 적어놓은 4악장에서 “그래야만 하는가?”에 해당하는 주제와 “그래야만 한다!”의 주제가 여러 가지 성격으로 변모하는데, 파벨 하스 콰르텟은 이 주제들이 변형되고 섞이는 과정을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표현해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는 이번 공연에서 단연 돋보였다. 첼로의 강렬한 리듬을 기반으로 제1바이올린의 긴박감 넘치는 연주가 전개되었고, 가곡 선율이 인용된 2악장에선 비올라의 소리가 두드러지면서 주선율과 반주의 구조가 뒤바뀐 듯 새로운 음악이 들려왔다.
강약구조를 해체해 재조립하고 특정 리듬형이 강조한 이들의 ‘죽음과 소녀’는 기존에 듣던 곡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연주가 진행될수록 고정관념이 무너지면서 연주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춤곡이나 다름없는 3악장과 4악장에선 원초적인 리듬의 힘에 완전히 압도당했고, 예상치 못한 템포 루바토(자유로운 속도로 연주)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일찍이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현악 4중주를 가리켜 “네 명의 지식인이 나누는 대화와 같다”는 말을 남겼지만, 파벨 하스 콰르텟의 연주를 듣고 나니 현악 4중주란 “네 명의 자유인이 벌이는 게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글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국립현대무용단 ‘더블빌: 김성용 & 윌리엄 포사이스’
선과 속도, 흐림과 느림의 대조적 미학
11월 8·9일 국립극장 해오름
어두운 무대 뒤에서부터 장대하고 압도적인 소리와 이미지가 몰아닥친다. 동시대 가장 혁신적인 안무가 윌리엄 포사이스(1949~)의 대표작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2000)의 첫 장면이다.
14명의 무용수가 20개의 책상을 끌며 등장하고 20분간 움직임을 쉼 없이 이어 나간다. 무용수들은 4행 5열로 배치한 금속 소재 책상의 위아래를 오르내리고 좌우로 미끄러지면서, 날카로운 직선과 완만한 곡선을 정확히 그리며 완벽히 통제된 움직임을 보여준다. 한 명의 움직임은 두 명으로 이어지고 그 움직임이 멀리 떨어진 다른 무용수들에게 파장을 일으키는 관계망이 끊임없이 생산된다. 관객은 숨을 멎은 채 모든 감각을 동원해 에너지, 선과 리듬, 파동을 지각한다.
한밤의 태풍처럼 몰아치고 나면, 어둠과 정적 속에 남아있는 몸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에 이어지는, 김성용(국립현대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의 신작 ‘크롤’(2025) 첫 장면이다. 검정 의상을 입은 13명의 무용수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채 희뿌연 연기 속에서 조각상처럼 멈춰 있다. 느리고 미세하게, 변화하고 진동하는 이들의 몸은 수직이 아닌 수평적 이동을 전개해 나간다. 50분 공연 내내 무용수들은 기표 또는 정서를 표출하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정해진 가시적 형태 없이 엉켜 있다가 흩어짐을 반복하는 객체로 현현된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위의 두 작품을 시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선보였다.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이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선, 속도, 기하학적인 구조에 집중한다면, ‘크롤’은 느린 움직임이 발생시키는 힘의 유동적 흐름이 핵심이라는 점에서 고도로 훈련된 무용수가 보여주는 대조적 춤 미학을 즐길 기회였다.
하지만 이번 더블빌 공연은 국립현대무용단이 추구하는 동시대 춤의 비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겼다. 무려 25년 전 초연되었고, 이번에 한국 초연된 ‘하나의 편평한 것, 복제된’은 비교적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고, 수반된 안무적 지식에 대한 담론도 상당 수준으로 진행된 바 있다. 한국 현대무용계의 국제적 수준을 고려할 때 한국 무용수들이 이 작품을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를 보는 것이 과연 중요한가에 대한 질문과 함께, 현재 한국 춤계에 이 작품이 무엇을 환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또한 ‘크롤’이 보여주는 느림, 정지, 정동의 미학은 이미 동시대 춤에서 주요 안무적 전략이자 정치적 제스처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미학을 발생시키는 안무적 장치의 고유성, 또는 이를 둘러싼 철학적, 사회문화적, 정치적 함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질문과 탐구가 동반되어야만 국립현대무용단이 추구하는 동시대 춤의 독자적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사진은 국립현대무용단 ‘크롤’. 김성용(안무), 강성룡·김민아·김윤미·김윤현·양지연·유다정·이경엽·이지수·정재우·천영돈·최연진·하지혜·홍지현(프로세서, 출연)
글 한석진(춤비평가) 사진 황승택/국립현대무용단
영남국악리부트: 풍류동인 담소 ‘태평으로 가는 길’
풍류로 만난, 20세기 예인과 21세기 청년들
2025년 11월 12일 국립부산국악원 예지당

김참이(정가), 강동언(대금), 김수빈(해금), 김현주(대해금), 최정욱(타악기), 동다운(신디사이저·작곡)
“어지러운 세상이 지나가고, 이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람이 하나 되는 길, 이말량의 숨결과 함께 이제 ‘태평의 길’이 열립니다.”
동굴 같은 어둠 속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말간 꽃잎처럼 피어났다. 저음의 대금에 이어 맹맹한 해금이 나지막이 소리를 이어 나간다. 극장 내 어둠은 시야를 차단하지만, 또 다른 감각이 묘하게 열리는 듯하다. 이제 소리들과 함께 걸을 일만 남았다. 그들이 안내하는 ‘태평의 길’로.
풍류동인 담소의 신작 ‘태평으로 가는 길’은 두 개의 길을 냈다. 하나는 이말량의 숨결로 향하는 길이다. 이말량(1908~2001)은 경주에서 태어나 10대에 권번에서 교육받고, 40대 초반에 귀향해 경주를 기반으로 영남풍류의 기반을 다진 예인이다. 전통예술의 3요소인 음악(樂)-노래(歌)-춤(舞)에 능했지만, 예인들이 무형유산 제도에 자신의 기예를 기입하고 후계의 맥을 이어갈 때, 이말량은 소심했다. 하여, 그녀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남긴 풍류와 계보는 희미하다. 기록과 기억 사이, 그 어딘가에 이말량의 풍류가 놓여 있다.
영남의 전통예술 자원을 발굴하고, 이를 컨설팅과 육성을 통해 청년예술가들과 접속시키고자 마련된 국립부산국악원(원장 이정엽)의 ‘영남국악리부트’ 프로젝트를 타고 풍류동인 담소는 이말량의 희미한 기록과 기억으로 향했다. 가객과 타악·대금·해금·대해금·신디사이저로 구성된 담소가 직접 구성한 성악곡들 사이에 이말량이 남긴 ‘염불’ ‘타령’ ‘군악’을 재해석해 배치했다. 담소의 음악이 흐르다가 이말량의 물꼬에 물길이 바뀌고, 이말량의 풍류가 흐르다가 담소에 의해 바람결이 바뀌는 구조였다. 20세기를 살아낸 예인과 21세기를 살아갈 청년들이 각자의 음악을 섞어가며 나누는 대화 같았다.
또 다른 길은 ‘느림의 시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오늘날 국악계의 젊은 앙상블은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한 창작그룹이 대부분이다. 반면 담소는 풍류방에 흐르던 여유와 느림의 음악을 모티프로 하여 그들만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 따라서 전자가 화려한 ‘뮤지션’을 표방한다면, 담소의 동인들은 전통적인 ‘율객’을 표방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보여주는 음악의 속도다. 흥을 돋움대 삼아 쾌락의 엑셀레이터를 밟게 하는 것이 민속음악이라면, 율객들이 즐긴 풍류는 일상의 시간에 멈춤과 휴식을 제공하는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밟게 하는 음악이다. 후자의 음악적 성격을 이어가고 있는 담소는, 그렇기에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느림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들은 ‘태평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래서였을까? ‘영남국악리부트’의 이름을 빌린다면 이말량의 영남풍류를 새롭게 발견한 ‘영남-리부트’이자, 음악으로 잠시 숨을 돌리게 하는 ‘휴식-리부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내내 눈앞에는 6명의 청년이 보였고, 상상의 눈을 떠보니 이들의 음악에 맞춰 이말량이 춤추는 듯했다. ‘영남국악리부트’를 통해 한층 성장한 풍류동인 담소의 다음 무대는 매년 영남의 춤맥을 한자리에 모으는 ‘영남춤축제’(국립부산국악원)가 되면 어떨까?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국립부산국악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