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 AUSTRIA Opera
테아터 안 데어 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025.11.17~26
음악으로 설계한 꿈의 세계
새로운 연출로 선보인 오스트리아 초연 이후, 작곡가 진은숙에게 직접 듣는 이 음악의 구조와 매력

2007년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아힘 프라이어의 연출로 초연되었던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연출가 엘리자베트 슈퇴플러(1977~)의 새로운 해석으로 오스트리아 초연을 선보였다.
분열과 변형의 풍경 속의 앨리스
테아터 안 데어 빈 무대에 오른 이번 프로덕션은 루이스 캐럴의 원작을 선형적인 서사로 재현하기보다, 꿈결처럼 이어지는 장면과 상태의 연쇄로 구성된 작품 속 음악적·극적 구조를 충실히 따른다.
슈퇴플러는 ‘앨리스’를 동화 속 순수한 소녀가 아닌, 끊임없이 공간과 정체성을 넘나들며 자신을 탐색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사실주의적 재현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열린 상징의 이미지로 무대를 구축한다. 무대는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층위는 끊임없이 전환되며, 공간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한다. 등장인물들은 출현과 소멸을 거듭하며, 구체적인 장소라기보다 내면의 상태를 시각화한 풍경을 만들고, 장면 구성은 강한 신체성과 움직임, 그리고 정교하게 계산된 동선과 안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출은 공간·빛·움직임·음악의 긴밀한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춘다. 각각의 장면은 서사적으로 설명되기보다 악보의 구조를 따라 유기적으로 형성되고, 장면 사이의 전환 역시 명확한 단절 없이 부드럽게 이어진다. 인물들은 심리적으로 세밀하게 구축된 캐릭터라기보다는, 지각의 분열과 불안, 변형이라는 감각의 여러 층위를 투영하는 존재로 기능한다.
극의 중심에는 언제나 ‘앨리스’가 놓인다. 그녀는 연속되는 장면들을 통과하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명확한 성격 변화나 성장 서사는 부여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은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이내 다시 사라진다. 슈퇴플러는 이야기의 심리적 해석을 관객에게 강요하지 않고, 인식과 감각의 영역을 관객 스스로의 몫으로 남겨둔다.
진은숙의 음악적 구조는 이번 연출의 흐름을 결정짓는 핵심 축을 이룬다. 극단적인 음역, 복합적인 리듬의 층위, 전자음향, 그리고 세밀하게 분화된 음색들은 무대 위에서 시각적으로 정확히 대응된다. 움직임과 조명은 음악적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연출은 음악과 대립하기보다 그 내적 드라마투르기(극작법)에 자신을 철저히 종속시킨다.
이 작품은 서사의 최소화, 형식적 명료함, 그리고 음악과 장면의 밀착된 결합이라는 연출 미학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슈퇴플러는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꿈의 논리’를 무대 위에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진은숙의 음악적 사고가 놓여 있다. 작품의 출발점이자 중심에 선 작곡가 진은숙을 만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음악적 사고와 음향 언어의 근원, 그리고 현재의 작업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겉은 동화, 안은 철학인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유머와 심연, 초현실성이 공존하는 작품입니다. 이 오페라를 관통하는 음악적 성격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요?
모차르트의 음악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경쾌하고 쉬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매우 복합적인 구조가 들어 있지요. 어린이는 동화로, 어른은 철학으로, 수학자는 수학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래서 음악 역시 표면적으로는 친숙하게 들리되, 내부에는 깊은 구조를 지닌 음악으로 쓰고자 했습니다.
대본은 미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1957~)과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나요?
전체 구조와 방향은 제가 먼저 설계했고, 각 장면에 필요한 문장의 길이와 밀도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는 언어유희와 표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긴밀한 협업을 통해 대본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원작 특유의 빠른 시점 전환과 언어유희는 음악적으로 어떻게 번역되었나요?
텍스트의 구조와 의미가 음악의 구조에 직접 반영되는 방식이 이 오페라 전반에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쥐꼬리 노래’(The Tale-Tail of the Mouse) 장면에서는 반주 악기들이 실제 꼬리 모양처럼 위에서 아래로 꼬불꼬불 내려오는 음형을 연주합니다.
이 작품은 성악가와 오케스트라 모두에게 극도로 어려운 오페라로 알려져 있는데요.
최소 서너 역할은 성악가의 기량이 최고 수준이어야만 가능한 배역입니다. 오케스트라도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소리 자체로 극을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에 연주 난도가 매우 높습니다. 다행히 이번 공연의 출연진과 빈 ORF 방송교향악단은 모두 뛰어난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음향과 소리의 내부를 사고하는 방식
진은숙의 작품은 종종 정교하게 조율된 ‘음향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소리의 색채와 구조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도 ‘음악이란 어떤 구조와 음향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늘 상상해 왔던 것 같습니다. 이후 작곡을 공부하고 작품을 하나씩 써나가면서, 그런 감각이 점차 저만의 방식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전자음악 역시 음향 사고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요즘은 전자음악을 직접 작곡하고 있지는 않지만, 1980~90년대 전자음악을 통해 ‘음향의 내부 세계’를 깊이 연구했습니다. 당시의 목표는 전자음악 작품 자체보다, 그 연구를 통해 얻은 사운드에 대한 사고를 일반 악기를 위한 음악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만의 작곡 방식과 음향 세계가 형성되었고, 이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카나’ ‘스피라’ 등의 관현악 작품에서는 자연, 특히 ‘빛’이 구조적 원리처럼 작동합니다. 이런 관심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
저는 자연 현상, 특히 과학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물리학을 전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을 관찰하며 음악적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리게티(1923~2006)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이었고, 레슨 시간에도 관련 서적을 자주 추천해 주셨지요. 다만 이러한 성향은 결국 개인의 기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관심이 있어야 음악과 자연을 연결하려는 시도도 가능해지는 것이니까요.
‘구갈론’(2009)에는 ‘상상의 민속음악’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기억과 유머, 아이러니는 진은숙의 음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나요?
‘구갈론’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한국 전통음악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제 음악세계를 한국적 기억과 연결한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거리 악단과 연극의 기억이 유머와 아이러니의 형태로 음악 속에 스며들었고, 이 작품 이후로 한국적 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극음악 작업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오스트리아 초연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그리고 앞으로의 작업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 가운데에서도 음악적 전통이 특히 강한 문화권입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의 공연은 제게 매우 큰 기쁨이자 의미 있는 경험입니다. 현재는 두 번째 오페라 이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며, 뉴욕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런던 심포니와의 협업을 준비 중입니다. ‘구갈론’을 바탕으로 한 극음악 작업 역시 앞으로 중요한 방향이 될 것입니다.
글 이선옥(오스트리아 통신원·코리아 리 문화예술원 대표) 사진 테아터 안 데어 빈
진은숙(1961~) 서울대 작곡과에서 강석희를 사사, 독일 함부르크에서 리게티를 사사했다. 통영국제음악제 상임작곡가, 서울시향 상임작곡가를 지냈으며, 202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2024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을 비롯하여 십여 종에 달하는 국제적인 음악·작곡상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