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나의 음악 인생을 만든 세 곡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6년 2월 23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25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호르니스트 이석준

나의 음악 인생을 만든 세 곡

 

 

이석준(1971~) 서울대 음대 졸업 후, 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대에서 디플롬과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와 KBS교향악단 수석, 부천필하모닉 부수석, 독일 뒤셀도르프 캄머 오케스트라 객원 수석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솔루스 브라스 퀸텟 및 (사)한국페스티발앙상블 단원, (사)TIMF앙상블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목관 앙상블 나루 리사이틀

2월 24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이석준 호른 리사이틀

3월 5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1008, 파가니니 카프리스 18번, 베른하르트 크롤 ‘찬양(Laudatio)’ 외

 

 

# 01

‘합창’으로 시작된 음악의 길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나를 음악으로 이끈 곡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협연 자넷 페리·아그네스 발차·빈슨 콜·호세 반 담)

감상 포인트 더블베이스와 베이스트롬본, 그리고 남성 합창이 시작되는 웅장한 순간

 

초등학교 입학 첫날 조회 시간, 지휘에 맞춰 연주하던 형과 누나들의 모습을 보며 함께 연주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되었습니다. 3학년이 되어 찾은 관악부에서 처음 트럼펫을 쥔 순간, 음악이 제 안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습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는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섰고, 선생님의 권유로 유포니움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3년 반 동안 유포니움을 연주하며 콩쿠르에도 참가했고, 초등학교 6학년 여름, 고(故) 신홍균 선생님의 권유로 호른으로 전향해 석 달 만에 예원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가정 형편 상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고, 악기 역시 중고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께서는 레슨비 한 번 받지 않으신 채 저를 지도해 주셨고, 그 배려와 믿음은 지금까지도 제 음악 인생의 근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무렵, 어머니께서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불구하고 LP를 들을 수 있는 오디오 한 대를 마련해 주셨고, 저는 매일 밤 헤드폰을 끼고 음반을 하나씩 들으며 잠에 들곤 했습니다. 클래식 음악이, 오케스트라가 무엇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하던 나이였기에, 곧 잠에 빠져들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LP에서 갑자기 오케스트라와 남성 합창의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왔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소리 내어 울었고, 한참 동안 그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 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이었습니다. 다시 그 부분을 들으며 저는 더블베이스와 베이스트롬본, 그리고 남성 합창이 시작되는 웅장한 순간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음악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감동의 깊이를 깨달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한 해에 네댓 번 ‘합창’ 교향곡을 연주합니다. 연주자에게 결코 쉽지 않은 곡이고, 부담스러운 솔로도 많지만, 연주할 때마다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됩니다. 어쩌면 이 곡이 없었다면, 저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 02

호른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가다

#R. 슈트라우스 #호른 협주곡 1번 #연주자로서 새로운 꿈을 품게한 곡

볼프강 자발리슈/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협연 데니스 브레인)

감상 포인트 이전까지 알고 있던 호른의 세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기교와 음악성이 집약된 작품

 

대학에 진학한 뒤, 호른이라는 악기를 더욱 깊이 이해해 가던 시기에 신홍균 선생님께서 KBS교향악단과 협연하신 무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연주곡은 R. 슈트라우스의 호른 협주곡 1번이었고, 장소는 예술의전당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무대는 대학 입시를 막 마치고 합격자 발표가 끝난 직후에 보게 된 공연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이 작품을 실연으로 들어본 적이 없던 저는 말 그대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전까지 제가 알고 있던 호른의 세계를 완전히 넘어서는, 기교와 음악성이 집약된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무대에서, 이 곡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겠다.’

그로부터 4년 뒤, 제1회 KBS신인음악콩쿠르(현 KBS한전음악콩쿠르) 관악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KBS교향악단과 협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은사께서 협연했던 바로 그 오케스트라와 함께, 평생의 꿈이었던 R. 슈트라우스 호른 협주곡 1번을 무대에 올리던 그 순간은 지금까지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곡은 호른 연주자들에게 가장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로, 저 역시 수십 차례 무대에서 연주했지만 처음 협연했던 그날의 감동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합니다.

 

 

# 03

눈 내리던 날의 첫 솔로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2악장 #음악적 감성이 처음 깨어난 순간

예브게니 므라빈스키/레닌그라드 필하모닉

감상 포인트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연주하는 듯한 길고 인상적인 호른 솔로 파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저는 선생님의 권유로 서울시소년소녀교향악단(현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에서 본격적인 오케스트라 훈련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 나이에 호른을 전공하는 학생이 많지 않아 운 좋게 기회를 얻었지만,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야 제가 오케스트라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중요한 파트는 모두 선배들이 맡았고, 저는 그저 따라다니는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오케스트라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던 무렵,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다음 연주곡으로 정해졌습니다. 2악장에 등장하는 긴 호른 솔로는 호르니스트에게 있어 오디션의 단골 레퍼토리이자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할 필수 과제와도 같은 부분입니다. 어느 날, 호른 파트만 따로 오디션을 본다는 공지가 내려왔고, 전원 의무 참가라는 말에 저는 별다른 준비 없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수석으로 선발된 저는 솔로 파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무렵 떠난 합숙 캠프에서, 제 음악적 감성이 처음으로 깨어났다고 느낍니다. 삼면이 유리로 된 강당에서 2악장 연습이 시작되던 순간, 밖에서는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세상이 순식간에 온통 하얗게 변해갔습니다. 솔로가 나오기 전, 약 일곱 마디의 준비 구간을 지나며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함과 쓸쓸함, 그리고 묘한 벅참이 뒤섞인 감정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무아지경에 가까운 상태로 리허설을 마쳤고, 그날 처음으로 지휘자 박은성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 곡에는 또 하나 잊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2000년 무렵, 귀국해 KBS교향악단 객원 수석으로 무대에 섰을 때의 일입니다. 드미트리 키타옌코의 지휘로, 2악장 솔로를 시작하려던 찰나, 한 취객이 객석에서 “차 빼!”라고 외치는 바람에 순간 공연장의 공기가 깨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긴장이 풀려, 오히려 가장 편안한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시작해 연주자의 길을 걸어온 지도 어느덧 45년이 흘렀습니다. 수없이 많은 작품을 연주했지만, 이 세 곡만큼은 제 음악 인생에서 떼어낼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시간 속에서도 이 곡들은 여전히 저를 무대 위로 이끌고, 연주해야 할 이유를 다시 묻게 합니다. 이 곡들에 담긴 저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영감을 관객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제 삶의 목적이자, 평생 지켜가고 싶은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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